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5.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26.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복된 부활의 아침입니다. 옆에 계신 분들과 인사 나누겠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부활합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의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부활주일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부활의 기쁨이 아니라 바울의 결단을 마주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부활은 2천 년 전에 일어난 ‘기적’에 대한 소식이 아닙니다. 부활은 ‘삶의 방식’에 대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가 다 삶의 방식이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울도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삶이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가장 적절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예루살렘 행로와 예수님의 예루살렘 행로에는 놀라운 공통점이 있습니다. 오늘 바울의 고백을 통해 그 너머에 계신 예수님의 부활 능력을 깊이 체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먼저, 22절 함께 읽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바울은 지금, 자신이 가고자 하는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는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을 당할지 한가지는 분명하게 알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23절 함께 읽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성령께서 결박과 환난이 그를 기다리고 있음을 이미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억지로 마지못해 가는 것이 아니라, 16절에 보시면 오히려 서둘러서 급히 가고 있습니다. 그는 되도록이면 빨리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자신이 진정으로 가고 싶은 에베소 교회도 들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밀레도에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불러 그들에게 고별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그 이유를 성령에 매임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매임이란 ‘묶다, 속박하다’라는 뜻으로 육체적인 매임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사로잡혀 있는 것을 뜻합니다. 성령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있을 바울의 환난을 예고하면서 동시에 바울이 그 길을 당당히 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성령의 이끌림에 억지로 끌려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바울이 성령의 강권하심에 따르기는 했지만, 그 자신도 그 길을 가고자 열망했습니다. 오히려 자기 스스로 성령의 매임 가운데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바울의 모습은 예수님을 많이 닮아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본능이었습니다. 고통을 피하고 싶고, 죽음을 거부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에 매여 곧이어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무려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스스로를 묶으셨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자기를 포기하고 성령의 뜻에 완전히 매일 때 비로소 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면 환난이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난 본문에서 상고했던 것처럼 하나님과의 독대의 시간을 통해 자기 뜻을 성령의 뜻에 굴복시켰습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자신의 안락함에 매이지 않고 성령님 뜻에 스스로 매이려고 온 힘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은 요즘 무엇에 매여 사십니까? 돈에 매여 사십니까? 자녀의 성공에 매여 사십니까? 아니면 세상의 평판에 매여 사십니까? 무언가에 매여 산다는 것은 그것이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부활의 첫 단추는 ‘성령에 매이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 노릇을 하던 '욕망과 탐욕의 줄'을 끊어내고, '성령의 줄'에 나를 묶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가겠습니다” 이 고백이 있을 때, 우리 삶에 부활의 새 생명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오늘 부활의 날에 바울이 느꼈던 그 거룩한 매임이 여러분의 심령에도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24절 함께 읽습니다. 이 고백은 많은 사람들이 외울 만큼 귀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여러분, 바울이 특별히 용감한 사람이라서 자기의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고난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매 맞으면 아프고, 감옥에 갇히는 것이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그 답은 오직 하나, ‘부활’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덤 문을 열고 나오셨듯이, 자신도 그 영광에 참여할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말씀하실 때, 세상 사람들은 실패라고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부활은 그 실패를 승리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바울은 지금 예루살렘이라는 ‘자기만의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면서, 그 너머에 있을 세계선교라는 부활의 승리를 미리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성령에 매여 있던 바울의 최고의 삶의 목적은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면서까지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이 지체함으로써 죽어갈 수도 있을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쉬지 않고 사명의 길을 달렸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지금 이 와중에도 예루살렘을 넘어 로마, 그리고 ‘서바나’, 곧 오늘날의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원대한 비전이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사명이었습니다. 그가 복음에 대하여 이러한 헌신을 가졌었기에 오늘날 우리에게까지도 복음이 전해지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도 구원받는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 사명자들을 부르실 때 항상 그들이 가야 할 목적지와 사명을 분명하게 말씀하셨고, 이를 위해 부단히 싸울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선민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군대’라고 칭합니다(민 1:3).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영적인 가나안 땅인 천국을 향해 진군하는 영적인 군대요 또한 복음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군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자가 진정한 군사입니까?
자신이 군사임을 분명히 자각하며 평소에도 엄격한 규율 속에서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또한, 일단 전쟁에 임하면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동시에 받은 책임과 사명의 완수를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군사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단지 나 자신의 구원만을 위해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군사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쾌락을 따르거나, 자신의 안일한 삶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항상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고 선포해야 할 결정적인 순간에 사탄의 시험이 찾아왔을 때, 겁쟁이처럼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늠름한 하나님의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악한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칭찬과 상급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이를 위해 스스로의 삶을 늘 점검하고 경건에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드립니다.
3. 이어지는 26절 함께 읽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다”라는 고백은 구약의 에스겔서에 기록된 말씀에 근거한 것으로, 하나님께 받은 복음전파의 사명을 이루기에 최선을 다했다는 뜻입니다.
구약성경 에스겔 3장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에스겔을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세우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그들이 자신이 지은 죄를 깨우치고 회개하도록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이 죄악 가운데 죽는다면 에스겔은 무죄하겠지만, 만일 에스겔이 백성들이 두려워 말씀을 전하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이 죄 가운데 죽는다면 그 책임을 말씀을 받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묻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에스겔 선지자가 아무리 개인적으로 깨끗하고 의롭게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게을리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죄 가운데 죽게 된다면 에스겔은 이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말씀은 에스겔에게 매우 두렵고 떨리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했습니다.
26절의 바울의 이 고백은 자신이 복음전파의 사명을 받은 자로서 바로 이러한 에스겔의 심정으로 최선을 다해 전했음을 밝힌 것입니다. 그는 여기에서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9:6에서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 또, 그는 이렇게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복음을 위해서라면 생명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실례로 고린도후서 11:23-27에는 바울이 복음증거를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와 고통을 당했는지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와 같은 전도자로서의 사명은 에스겔이나 바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똑같이 주어진 사명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바울과 동일한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다른 사람들보다 우리를 먼저 자녀 삼으신 것은 우리를 통해 많은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공통적인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백들을 통해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성도들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너무나도 개인적인 차원으로 축소시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복음을 믿고 나 한 사람 깨끗하게 살면 무사히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하여 의롭다 인정받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남들은 어찌하든 나는 잘 믿어야지…….”
하지만 여러분, 성경을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 이처럼 복음을 개인적인 차원으로 국한시킨 경우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말씀과 축복을 주신 후에는 이를 전파하여 모든 이들도 함께 구원과 축복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러한 축복을 받고도 받은 책임을 게을리한 자에게는 더 무서운 심판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열방의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할 이스라엘 백성이 그 소임을 다하지 못함으로써 무서운 심판을 받은 것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단지 나 한 사람만 죄짓지 않고 깨끗하게 산다고 해서 만족하지 말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함으로써 내가 받은 구원과 축복을 모든 사람들이 함께 누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사명을 다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대에서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음'으로 영원한 멸망에 이른 영혼들의 죗값을 우리에게서 찾으실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바울의 비장한 각오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고백은 바울만의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셨던 예수님의 각오였으며, 오늘을 사는 우리 성도들의 각오가 되어야 합니다. 부활주일 아침, 무덤은 비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습니다. 그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바울처럼 성령에 매여 사명의 길을 걸으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부활은 ‘다시 사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다시 사는 것입니다. 절망에 대해 죽고 소망에 대해 다시 사는 것입니다. 내 욕심에 대해 죽고 주님의 사명에 대해 다시 사는 것입니다. 오늘 성전을 나서는 여러분의 발걸음이 바울의 발걸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죽었던 소망이 살아나고, 메말랐던 사랑이 부활하기를 축복합니다. 사명을 마치기까지 우리를 지키시고, 마침내 부활의 영광으로 인도하실 그 예수님과 함께, 담대하게 여러분의 예루살렘으로 나아가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부활의 기쁜 소식을 듣게 하시니 감사하옵나이다. 우리도 바울처럼 성령에 매여 살게 하여 주옵소서. 내 생명보다 귀한 사명을 깨닫게 하시고, 세상의 어떤 환난 속에서도 부활의 소망으로 넉넉히 이기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5.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26.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복된 부활의 아침입니다. 옆에 계신 분들과 인사 나누겠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부활합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의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부활주일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부활의 기쁨이 아니라 바울의 결단을 마주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부활은 2천 년 전에 일어난 ‘기적’에 대한 소식이 아닙니다. 부활은 ‘삶의 방식’에 대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가 다 삶의 방식이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울도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삶이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가장 적절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예루살렘 행로와 예수님의 예루살렘 행로에는 놀라운 공통점이 있습니다. 오늘 바울의 고백을 통해 그 너머에 계신 예수님의 부활 능력을 깊이 체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먼저, 22절 함께 읽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바울은 지금, 자신이 가고자 하는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는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을 당할지 한가지는 분명하게 알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23절 함께 읽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성령께서 결박과 환난이 그를 기다리고 있음을 이미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억지로 마지못해 가는 것이 아니라, 16절에 보시면 오히려 서둘러서 급히 가고 있습니다. 그는 되도록이면 빨리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자신이 진정으로 가고 싶은 에베소 교회도 들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밀레도에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불러 그들에게 고별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그 이유를 성령에 매임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매임이란 ‘묶다, 속박하다’라는 뜻으로 육체적인 매임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사로잡혀 있는 것을 뜻합니다. 성령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있을 바울의 환난을 예고하면서 동시에 바울이 그 길을 당당히 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성령의 이끌림에 억지로 끌려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바울이 성령의 강권하심에 따르기는 했지만, 그 자신도 그 길을 가고자 열망했습니다. 오히려 자기 스스로 성령의 매임 가운데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바울의 모습은 예수님을 많이 닮아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본능이었습니다. 고통을 피하고 싶고, 죽음을 거부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에 매여 곧이어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무려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스스로를 묶으셨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자기를 포기하고 성령의 뜻에 완전히 매일 때 비로소 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면 환난이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난 본문에서 상고했던 것처럼 하나님과의 독대의 시간을 통해 자기 뜻을 성령의 뜻에 굴복시켰습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자신의 안락함에 매이지 않고 성령님 뜻에 스스로 매이려고 온 힘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은 요즘 무엇에 매여 사십니까? 돈에 매여 사십니까? 자녀의 성공에 매여 사십니까? 아니면 세상의 평판에 매여 사십니까? 무언가에 매여 산다는 것은 그것이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부활의 첫 단추는 ‘성령에 매이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 노릇을 하던 '욕망과 탐욕의 줄'을 끊어내고, '성령의 줄'에 나를 묶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가겠습니다” 이 고백이 있을 때, 우리 삶에 부활의 새 생명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오늘 부활의 날에 바울이 느꼈던 그 거룩한 매임이 여러분의 심령에도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24절 함께 읽습니다. 이 고백은 많은 사람들이 외울 만큼 귀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여러분, 바울이 특별히 용감한 사람이라서 자기의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고난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매 맞으면 아프고, 감옥에 갇히는 것이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그 답은 오직 하나, ‘부활’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덤 문을 열고 나오셨듯이, 자신도 그 영광에 참여할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말씀하실 때, 세상 사람들은 실패라고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부활은 그 실패를 승리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바울은 지금 예루살렘이라는 ‘자기만의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면서, 그 너머에 있을 세계선교라는 부활의 승리를 미리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성령에 매여 있던 바울의 최고의 삶의 목적은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면서까지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이 지체함으로써 죽어갈 수도 있을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쉬지 않고 사명의 길을 달렸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지금 이 와중에도 예루살렘을 넘어 로마, 그리고 ‘서바나’, 곧 오늘날의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원대한 비전이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사명이었습니다. 그가 복음에 대하여 이러한 헌신을 가졌었기에 오늘날 우리에게까지도 복음이 전해지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도 구원받는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 사명자들을 부르실 때 항상 그들이 가야 할 목적지와 사명을 분명하게 말씀하셨고, 이를 위해 부단히 싸울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선민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군대’라고 칭합니다(민 1:3).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영적인 가나안 땅인 천국을 향해 진군하는 영적인 군대요 또한 복음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군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자가 진정한 군사입니까?
자신이 군사임을 분명히 자각하며 평소에도 엄격한 규율 속에서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또한, 일단 전쟁에 임하면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동시에 받은 책임과 사명의 완수를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군사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단지 나 자신의 구원만을 위해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군사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쾌락을 따르거나, 자신의 안일한 삶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항상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고 선포해야 할 결정적인 순간에 사탄의 시험이 찾아왔을 때, 겁쟁이처럼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늠름한 하나님의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악한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칭찬과 상급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이를 위해 스스로의 삶을 늘 점검하고 경건에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드립니다.
3. 이어지는 26절 함께 읽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다”라는 고백은 구약의 에스겔서에 기록된 말씀에 근거한 것으로, 하나님께 받은 복음전파의 사명을 이루기에 최선을 다했다는 뜻입니다.
구약성경 에스겔 3장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에스겔을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세우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그들이 자신이 지은 죄를 깨우치고 회개하도록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이 죄악 가운데 죽는다면 에스겔은 무죄하겠지만, 만일 에스겔이 백성들이 두려워 말씀을 전하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이 죄 가운데 죽는다면 그 책임을 말씀을 받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묻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에스겔 선지자가 아무리 개인적으로 깨끗하고 의롭게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게을리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죄 가운데 죽게 된다면 에스겔은 이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말씀은 에스겔에게 매우 두렵고 떨리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했습니다.
26절의 바울의 이 고백은 자신이 복음전파의 사명을 받은 자로서 바로 이러한 에스겔의 심정으로 최선을 다해 전했음을 밝힌 것입니다. 그는 여기에서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9:6에서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 또, 그는 이렇게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복음을 위해서라면 생명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실례로 고린도후서 11:23-27에는 바울이 복음증거를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와 고통을 당했는지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와 같은 전도자로서의 사명은 에스겔이나 바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똑같이 주어진 사명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바울과 동일한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다른 사람들보다 우리를 먼저 자녀 삼으신 것은 우리를 통해 많은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공통적인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백들을 통해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성도들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너무나도 개인적인 차원으로 축소시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복음을 믿고 나 한 사람 깨끗하게 살면 무사히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하여 의롭다 인정받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남들은 어찌하든 나는 잘 믿어야지…….”
하지만 여러분, 성경을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 이처럼 복음을 개인적인 차원으로 국한시킨 경우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말씀과 축복을 주신 후에는 이를 전파하여 모든 이들도 함께 구원과 축복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러한 축복을 받고도 받은 책임을 게을리한 자에게는 더 무서운 심판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열방의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할 이스라엘 백성이 그 소임을 다하지 못함으로써 무서운 심판을 받은 것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단지 나 한 사람만 죄짓지 않고 깨끗하게 산다고 해서 만족하지 말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함으로써 내가 받은 구원과 축복을 모든 사람들이 함께 누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사명을 다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대에서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음'으로 영원한 멸망에 이른 영혼들의 죗값을 우리에게서 찾으실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바울의 비장한 각오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고백은 바울만의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셨던 예수님의 각오였으며, 오늘을 사는 우리 성도들의 각오가 되어야 합니다. 부활주일 아침, 무덤은 비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습니다. 그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바울처럼 성령에 매여 사명의 길을 걸으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부활은 ‘다시 사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다시 사는 것입니다. 절망에 대해 죽고 소망에 대해 다시 사는 것입니다. 내 욕심에 대해 죽고 주님의 사명에 대해 다시 사는 것입니다. 오늘 성전을 나서는 여러분의 발걸음이 바울의 발걸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죽었던 소망이 살아나고, 메말랐던 사랑이 부활하기를 축복합니다. 사명을 마치기까지 우리를 지키시고, 마침내 부활의 영광으로 인도하실 그 예수님과 함께, 담대하게 여러분의 예루살렘으로 나아가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부활의 기쁜 소식을 듣게 하시니 감사하옵나이다. 우리도 바울처럼 성령에 매여 살게 하여 주옵소서. 내 생명보다 귀한 사명을 깨닫게 하시고, 세상의 어떤 환난 속에서도 부활의 소망으로 넉넉히 이기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