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87. 유두고가 졸더니 죽었는지라 (행 20:7-12)

우인택 목사
2026-03-22
조회수 215

7.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8.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11.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12.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오늘 본문은 바울이 2차 선교여행 때 환상을 보고 소아시아 선교를 중단하고 마게도냐으로 건너가는 중대한 결단을 한 드로아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귀향하던 중 바울은 드로아에서 7일간 머물렀는데, 내일이면 떠나야 하는 바쁜 일정 속에서, 헤어짐이 아쉬운 나머지 한밤중까지 오랜 시간 동안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당혹스러우면서도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설교를 듣다가 졸아서 3층 난간에서 떨어져 죽은 청년 ‘유두고’가 다시 살아난 사건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본문을 보며 “설교 시간에 졸면 큰일난다”라는 농담 섞인 말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 사건에는 단순히 조는 문제보다 더 깊은 ‘예배의 간절함’, ‘생명의 회복’, 그리고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안의 영적인 잠이 깨어나는 역사가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1. 먼저, 7절 함께 읽습니다.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여기에서 ‘그 주간의 첫날’이란 안식일 후 첫날, 곧 오늘날 ‘주일’을 뜻합니다. 주일을 고린도전서 16:2에는 ‘매주 첫날’이라고 말씀하고, 요한계시록 1:10에는 ‘주의 날’이라고 말씀합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안식일이 아닌 주일에 예배드리기 위해 모였음을 언급하고 있는 최초의 구절이기도 합니다. 

  전통적으로 안식일을 지키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난 후부터 주일을 지키게 된 것은 바로 이날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요 20:1-18).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날 모인 이유에 대하여 ‘떡을 떼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떡을 뗀다’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찬식’을 의미합니다. 이 성찬식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친히 명령하신 거룩한 예식이었습니다(고전 11:23-26). 

  그러므로 성도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에 함께 모여 말씀을 상고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과 부활을 기념한 이 사건이야말로 우리 기독교의 핵심이자 생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지금 이 시대의 예배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의미나 부활의 기쁨보다는 인간적인 교제와 처세술적인 교훈과 세상적인 축복이 예배의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주일의 의미를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단지 주일이기 때문에 모이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성도들도 적지 않게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주일마다 가슴 깊이 새기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과 부활이야말로 이 세상 그 어느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 교회만이 지니는 최고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 죽으신 유일한 사건이며, 부활 역시 인간이 살아나 승천하신 최초의 사건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와 부활의 감격이 우리에게 없다면 복음도, 교회도, 우리의 구원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도 우리의 삶 속에서 희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로 모일 때에 그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기쁨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를 통해, 진정한 복음의 의미와 천국의 생명력을 체험하고 복음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부터 예배의 참된 목적을 마음에 새기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날마다 체험하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8절 함께 읽습니다.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당시 노예와 일꾼들은 낮에는 일을 해야 했기에, 밤에만 예배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6절에 의하면, 이때는 무교절 직후였기에 드로아의 일몰 시각은 오후 7시경이었습니다. 그들은 일과를 마치고 오후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모여서 바울의 강론을 들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11절에 의하면, 바울의 강론은 다음 날이 새기까지 계속되었는데, 당시의 일출 시각이 오전 5시였기에 바울은 저녁 7시부터 아침 5시까지, 약 10시간동안 강론한 것이 됩니다. 

  특히, 7절의 ‘강론할새’라는 말은 ‘대화할새’, ‘논의할 새’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바울이 일방적으로 설교를 했다가 보다는 성도들의 질문도 받아가며 가르쳤음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약 10시간 동안이나 성도들의 질문에 답하면서 복음에 대하여 가르쳤던 것입니다.

  바울이 이같이 긴 강행군을 하게 된 것은 이제 드로아를 떠나면 또다시 올 수 있다는 기약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성도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고자 했습니다. 또, 드로아 성도들도 이날이 지나면 다시 바울과 같은 위대한 사도의 설교를 듣지 못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래도록 자리를 뜨지 않고 바울의 강론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당시 드로아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이는 설교가 시작되고 30분만 지나도 설교가 너무 길다고 불평하는 현대 성도들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오늘날 예배 중에 선포되는 설교의 시간은 대략 20~40분 정도입니다. 길어도 한 시간을 넘지 않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설교 시간이 매우 길었습니다. 설교의 황제라고 불리는 스펄젼 목사는 한번 설교하면 두세 시간은 보통이었고, 어떤 때는 온종일 계속될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선교 초기에는 10시간씩 성경 말씀을 배우는 것이 보통이었고, 성도들은 먹지도 않고 설교를 들었으며 잠시 자리를 뜨는 것조차 아까워했다고 합니다. 

  물론, 당시에는 교통이 발달하지 않아 사람들이 대규모로 모이기가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능력 있는 사역자의 설교를 듣는 일이 쉽지 않아서, 한 번 모였을 때 어떻게든 많이 전하고 많이 들으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성도들의 마음이 그만큼 간절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성경 말씀을 배우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었기에 한국교회가 지금과 같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시간의 중요성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사람들은 이 귀한 시간을 어떻게든 가치 있게 활용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시테크’라는 신조어도 생겼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정말 가치 있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오락하는 일, 잡담하는 일, TV 시청, 스마트폰에는 많은 시간을 투자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배우는 일에 힘쓰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기도할 때 ‘잠깐 기도합시다’라고 말합니다.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어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구원이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참된 지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 말씀을 듣고 배우는 일보다 더 귀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생명의 말씀, 구원의 말씀을 듣는 일에 인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마지막 강론을 듣는 드로아 성도들처럼 성경을 배우는 일에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늘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생명이 넘치는 삶을 살고, 바른 인생길을 걷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9절 함께 읽습니다.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유두고’라는 이름의 뜻은 ‘행운아’입니다. 하지만 그날 밤 그는 가장 불행한 사고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유두고라는 청년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다만 학자들은 유두고라는 이름이 당시 하층민의 이름에서 흔히 발견되는 점으로 미루어 이 청년 역시 그러한 계층의 사람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아마도, 낮에 고된 노동을 한 후 밤에 이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그래서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보다 자신을 구원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너무 크게 다가와서 그 예배에 참석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설교가 수 시간으로 길어지자 낮의 고된 노동과 많은 등불과 사람들로 인해 탁해진 공기 탓에 점차 졸게 되었고, 그러던 중 그만 그가 앉아 있던 3층 난간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랬기에 그가 예배 중에 졸았던 것은 크게 비난받을 일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또, 그가 3층 창가에 앉은 것도 바울의 강론을 기대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은 젊은 청년이라 좋은 마음으로 노약자들에게 좋은 자리를 양보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양보하다 보니 그는 3층까지 올라가게 되었고 창틀 난간에 앉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창가는 방관의 자리가 아니라 ‘양보와 희생의 자리’였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죽은 그를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12절에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가 비록 육체적으로 피곤했다 할지라도 긴장감을 가지고 바울의 설교에 귀를 기울였다면 졸지 않았을 것이고 결국 떨어져 죽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두고가 예배 중에 떨어져 죽은 사실에서 우리는 큰 교훈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신앙인이라도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하면 예배를 드리면서도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척박한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육체적으로 애쓰고 수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성경의 가르침대로 사는 일에 나태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삶이 아무리 힘들다 해도 성도는 결코 성경의 가르침 대로 사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이를 위해 성경 말씀을 들을 때는 사모하는 마음으로 듣고, 기도해야 할 때는 깨어 기도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육신의 피곤함을 핑계로 깨어있어야 할 때 졸거나 기도해야 할 때 잠들어 버린다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마침내는 멸망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그 누구보다도 믿음이 있는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와 제자들마저도 깨어 기도해야 할 때 그렇게 하지 못함으로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가는 실수를 범했음을 복음서 전체에 강조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마 26:40-75).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고되고 바쁠수록 더욱더 믿음으로 깨어있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육신의 탐욕이나 세상에서의 바쁜 삶이 여러분의 영적인 생명을 빼앗지 못하도록 더욱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지난번에도 한 번 소개해 드렸지만, 마틴 루터는 종교 개혁할 때 “나는 평소에는 한 시간씩 기도하지만, 요즘은 매우 바쁘므로 세 시간씩 기도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여러분도 이 땅에서의 삶이 힘들고 바쁠수록 더욱 기도와 성경의 가르침대로 사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를 통해, 세상의 모든 문제와 시험을 이겨 내고 성도다운 멋진 삶을 사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성경의 가르침을 사모하여 한밤중까지 바울의 강론을 듣던 드로아 성도 중의 유두고처럼, 육신의 연약함을 이기지 못하고 졸음에 취해 은혜를 놓친 적은 없는지 돌아봅니다. 연약한 저희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바닥에 쓰러진 유두고를 안아주셨던 것처럼, 상처 입고 쓰러진 우리 영혼을 주의 품에 안아주옵소서. 다시 살아난 유두고가 온 교회의 위로가 되었듯, 우리의 회복이 이 땅의 많은 이들에게 소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살리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온라인 헌금 계좌 : 9002-1941-6987-1 

   (새마을금고 / 동탄영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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