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요가 그치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2. 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3. 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
4.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5.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6.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사도행전은 단순히 초대교회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 아닙니다. 복음이 어떻게 세상 속으로 퍼져 나갔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교회를 사용하셨는지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19장에서 에베소에서 일어난 큰 소동을 보았습니다. 복음이 들어가자 우상 산업이 흔들렸고, 도시 전체가 소란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소동이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소동이 끝난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겉으로 보면 아주 평범한 여행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바울이 여러 지역을 동역자들과 함께 이동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이 짧은 기록 속에는 초대교회의 중요한 영적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삶의 소동을 잠재우시고 다시 믿음의 길을 걷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먼저 1절 함께 읽습니다.
“소요가 그치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여기에서 ‘소요’란 은장색 데메드리오의 선동으로 일어난 에베소에서의 소동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소요가 그치자 제자들을 불러 격려한 후에 마게도냐를 향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마게도냐로 가기로 한 것은 19:21에 기록되어 있는 것 같이 에베소에서의 소요가 있기 전에 이미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소요가 일어났을 때 자신의 계획을 핑계로 서둘러 에베소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19:30에 오히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동역자들을 구하기 위해 소동의 중심부로 뛰어들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소요가 완전히 그친 후에는 제자들을 불러 격려하고, 비로소 이미 세워 둔 계획대로 마게도냐로 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요는 에베소 교회의 입장에서는 위기의 순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바울이 교회와 제자들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는 참 목자요, 진정한 지도자임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1절과 2절에 반복해서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권하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곁으로 부르다’, ‘위로하다’, ‘격려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데메드리오가 소동을 일으킨 직접적인 이유는 바울에게 해를 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했기에 상식적으로 볼 때 지금 가장 위로받아야 할 사람은 바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를 챙기기보다 먼저 제자들을 곁으로 불러 격려하고 위로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진짜 위로는 위로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위로가 필요한 사람을 찾아가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바울이 겪은 것과 같은 여러 모양의 위기와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교훈하기를, 이 모든 고난의 일들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오히려 우리의 신앙을 다지고 증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에게 시험과 고난이 닥쳐올 때 불평하거나 피하려 하지 마시고, 오히려 스스로를 돌아보고, 믿음이 연약한 지체들을 돕는 좋은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를 통해 바울과 같이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2절 함께 읽습니다.
“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바울이 ‘헬라’에 이르렀다고 말씀하는데, 지역 이름으로 ‘헬라’라고 기록된 것은 신약성경에서 이곳뿐입니다. 여기서의 헬라는 ‘아가야 지방 고린도’입니다.
그런데 지금 굳이 이곳에 ‘헬라’라는 표현을 쓴 것은 나름대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 못지않은 문화적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던 헬라인들은 유대인들에 대하여 적개심에 가까운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헬라인들은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 어리석고 미련한 자로 치부하며 조롱했습니다. 더욱이 바울에 대한 반감이 고린도 교회에서도 은근히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고린도 교회가 어떻게 세워진 교회입니까? 바울의 피와 땀으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그 교회를 얼마나 어렵게 세웠는지 고린도전서 4:15에 ‘고린도 성도들을 자기가 아버지가 되어서 낳았다’라고 까지 말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며 괴롭혔습니다. 당시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 교회를 바라보며 얼마나 괴로웠던지 고후 2:4에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지금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이 지역을 가리켜 헬라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당시의 복합적인 상황을 반영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러한 헬라를 방문하여 다른 곳과는 달리 그 바쁜 와중에 무려 석 달 동안 머물렀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분쟁을 바로 잡았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행적을 보면서, 아무리 자신을 반대하는 자라 할지라도 그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같이 미워하고 외면한다면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과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과연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성도를 무시하고 조롱하는 그를 변함없이 찾아갑니다. 관심을 갖습니다. 사랑을 베풉니다. 섬겨 줍니다. 열린 마음을 갖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악한 마음의 소유자라도 언젠가는 감동되어 그 악함을 버리지 않겠습니까?
사람의 악한 마음이 저절로 녹아내리는 법은 없습니다. 뜨거운 사랑과 관심을 쏟아야만 비로소 녹아내립니다. 복음을 거절하는 그들에게 성도의 뜨거운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믿음으로 이 교훈을 받아들이심으로 용광로보다 더 뜨거운 사랑으로 중무장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3절 함께 읽습니다.
“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
바울을 해치려는 유대인들의 음모와 흉계는 멈출 줄을 몰랐습니다. 바울이 가는 곳이면 어김없이 유대인들의 방해와 음모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바울을 박해한 것은 바울에게 어떤 불의나 잘못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그들의 관습을 배척하는 행동을 한 적이 전혀 없었습니다(행 25:8, 28:17). 사실, 바울만큼 동족을 사랑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는 로마서 9:3에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라고 고백할 만큼 동족을 사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바울이 이렇게까지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의 배후에 사탄이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박해는 표면적으로는 유대인들의 박해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유대인들을 통한 사탄의 역사였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사탄은 성도가 무얼 잘못해서 박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탄은 의로운 성도를 더욱 박해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탄의 박해는 성도가 이 세상에 살 동안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요한계시록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는 사탄이 하나님의 최종 심판을 받고 영원한 불 못에 던져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과 교회를 대적하는 존재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의롭게 행한다고 해서, 잠시 사탄의 시험을 이겼다고 해서 더이상 사탄의 방해와 음모가 없으리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내가 선하게 살고 있음에도 주변에서 끊임없는 시험과 방해가 일어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농사를 지을 때 밭에 약을 뿌려도 잡초와 해충이 끊임없어 생겨나는 것처럼, 사탄의 방해와 음모 역시 우리의 삶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세상 끝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그 순간까지 사탄과의 영적 싸움은 계속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말씀에 순종하고 기도를 쉬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주변에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이 끝없이 일어나더라도 결코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약성경 사무엘상에서 까닭 없이 자신을 박해하던 사울 왕을 다윗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이겨냈듯이, 여러분도 모든 사탄의 시험과 방해를 믿음과 순종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통해 큰 영광을 받으시고, 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이어지는 4절에 바울의 동역자들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께 읽습니다.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그들은 모두 일곱 명입니다. 특히, 바로 앞 3절에서 바울을 해치려고 유대인들이 공모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바로 다음절에 이와 반대로 바울과 동행했던 믿음의 동역자들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은 바울이 선교사역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동역자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임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어보면 바울이 복음을 전할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참으로 열악했고, 세상 사람들은 복음에 대해서 매우 적대적이었습니다. 문화적으로는 로마와 헬라, 종교적으로는 유대인들의 집요한 방해와 박해가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고린도후서 12:7에 의하면 바울은 건강도 좋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바울에게는 다른 사도들과는 달리 함께 동고동락해 줄 배우자도 없었습니다(고전 9:5). 그러니 아무리 바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다고 한들 인간적인 고뇌와 외로움이 없었겠습니까?
그러한데도 바울이 흔들림 없이 왕성하게 선교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곳곳에서 보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주요한 원동력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바울의 옆에는 가족보다 더한 신앙적 사랑으로 늘 함께하며 힘이 되어 주었던 신실한 ‘동역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그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힘과 위로와 용기를 얻고 험난하기 그지없는 선교사역을 능력 있게 수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날 우리 역시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신실한 동역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마음 깊이 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그러한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나는 어떠한 동역자인가?’ 자신을 돌아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에베소에서의 소동이 그친 후에도 바울은 쉬지 않고 제자들을 위로하며 사명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러한 바울을 본받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바울 곁에 신실한 동역자들을 붙여주셨던 것처럼, 저희에게도 믿음의 동역자를 붙여주옵소서. 저희가 섬기는 교회가 복음을 위해 힘쓰는 공동체가 되게 하시고, 모든 성도가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쓰임 받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 소요가 그치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2. 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3. 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
4.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5.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6.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사도행전은 단순히 초대교회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 아닙니다. 복음이 어떻게 세상 속으로 퍼져 나갔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교회를 사용하셨는지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19장에서 에베소에서 일어난 큰 소동을 보았습니다. 복음이 들어가자 우상 산업이 흔들렸고, 도시 전체가 소란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소동이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소동이 끝난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겉으로 보면 아주 평범한 여행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바울이 여러 지역을 동역자들과 함께 이동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이 짧은 기록 속에는 초대교회의 중요한 영적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삶의 소동을 잠재우시고 다시 믿음의 길을 걷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먼저 1절 함께 읽습니다.
“소요가 그치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여기에서 ‘소요’란 은장색 데메드리오의 선동으로 일어난 에베소에서의 소동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소요가 그치자 제자들을 불러 격려한 후에 마게도냐를 향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마게도냐로 가기로 한 것은 19:21에 기록되어 있는 것 같이 에베소에서의 소요가 있기 전에 이미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소요가 일어났을 때 자신의 계획을 핑계로 서둘러 에베소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19:30에 오히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동역자들을 구하기 위해 소동의 중심부로 뛰어들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소요가 완전히 그친 후에는 제자들을 불러 격려하고, 비로소 이미 세워 둔 계획대로 마게도냐로 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요는 에베소 교회의 입장에서는 위기의 순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바울이 교회와 제자들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는 참 목자요, 진정한 지도자임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1절과 2절에 반복해서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권하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곁으로 부르다’, ‘위로하다’, ‘격려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데메드리오가 소동을 일으킨 직접적인 이유는 바울에게 해를 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했기에 상식적으로 볼 때 지금 가장 위로받아야 할 사람은 바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를 챙기기보다 먼저 제자들을 곁으로 불러 격려하고 위로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진짜 위로는 위로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위로가 필요한 사람을 찾아가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바울이 겪은 것과 같은 여러 모양의 위기와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교훈하기를, 이 모든 고난의 일들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오히려 우리의 신앙을 다지고 증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에게 시험과 고난이 닥쳐올 때 불평하거나 피하려 하지 마시고, 오히려 스스로를 돌아보고, 믿음이 연약한 지체들을 돕는 좋은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를 통해 바울과 같이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2절 함께 읽습니다.
“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바울이 ‘헬라’에 이르렀다고 말씀하는데, 지역 이름으로 ‘헬라’라고 기록된 것은 신약성경에서 이곳뿐입니다. 여기서의 헬라는 ‘아가야 지방 고린도’입니다.
그런데 지금 굳이 이곳에 ‘헬라’라는 표현을 쓴 것은 나름대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 못지않은 문화적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던 헬라인들은 유대인들에 대하여 적개심에 가까운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헬라인들은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 어리석고 미련한 자로 치부하며 조롱했습니다. 더욱이 바울에 대한 반감이 고린도 교회에서도 은근히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고린도 교회가 어떻게 세워진 교회입니까? 바울의 피와 땀으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그 교회를 얼마나 어렵게 세웠는지 고린도전서 4:15에 ‘고린도 성도들을 자기가 아버지가 되어서 낳았다’라고 까지 말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며 괴롭혔습니다. 당시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 교회를 바라보며 얼마나 괴로웠던지 고후 2:4에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지금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이 지역을 가리켜 헬라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당시의 복합적인 상황을 반영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러한 헬라를 방문하여 다른 곳과는 달리 그 바쁜 와중에 무려 석 달 동안 머물렀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분쟁을 바로 잡았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행적을 보면서, 아무리 자신을 반대하는 자라 할지라도 그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같이 미워하고 외면한다면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과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과연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성도를 무시하고 조롱하는 그를 변함없이 찾아갑니다. 관심을 갖습니다. 사랑을 베풉니다. 섬겨 줍니다. 열린 마음을 갖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악한 마음의 소유자라도 언젠가는 감동되어 그 악함을 버리지 않겠습니까?
사람의 악한 마음이 저절로 녹아내리는 법은 없습니다. 뜨거운 사랑과 관심을 쏟아야만 비로소 녹아내립니다. 복음을 거절하는 그들에게 성도의 뜨거운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믿음으로 이 교훈을 받아들이심으로 용광로보다 더 뜨거운 사랑으로 중무장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3절 함께 읽습니다.
“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
바울을 해치려는 유대인들의 음모와 흉계는 멈출 줄을 몰랐습니다. 바울이 가는 곳이면 어김없이 유대인들의 방해와 음모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바울을 박해한 것은 바울에게 어떤 불의나 잘못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그들의 관습을 배척하는 행동을 한 적이 전혀 없었습니다(행 25:8, 28:17). 사실, 바울만큼 동족을 사랑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는 로마서 9:3에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라고 고백할 만큼 동족을 사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바울이 이렇게까지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의 배후에 사탄이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박해는 표면적으로는 유대인들의 박해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유대인들을 통한 사탄의 역사였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사탄은 성도가 무얼 잘못해서 박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탄은 의로운 성도를 더욱 박해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탄의 박해는 성도가 이 세상에 살 동안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요한계시록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는 사탄이 하나님의 최종 심판을 받고 영원한 불 못에 던져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과 교회를 대적하는 존재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의롭게 행한다고 해서, 잠시 사탄의 시험을 이겼다고 해서 더이상 사탄의 방해와 음모가 없으리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내가 선하게 살고 있음에도 주변에서 끊임없는 시험과 방해가 일어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농사를 지을 때 밭에 약을 뿌려도 잡초와 해충이 끊임없어 생겨나는 것처럼, 사탄의 방해와 음모 역시 우리의 삶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세상 끝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그 순간까지 사탄과의 영적 싸움은 계속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말씀에 순종하고 기도를 쉬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주변에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이 끝없이 일어나더라도 결코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약성경 사무엘상에서 까닭 없이 자신을 박해하던 사울 왕을 다윗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이겨냈듯이, 여러분도 모든 사탄의 시험과 방해를 믿음과 순종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통해 큰 영광을 받으시고, 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이어지는 4절에 바울의 동역자들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께 읽습니다.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그들은 모두 일곱 명입니다. 특히, 바로 앞 3절에서 바울을 해치려고 유대인들이 공모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바로 다음절에 이와 반대로 바울과 동행했던 믿음의 동역자들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은 바울이 선교사역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동역자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임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어보면 바울이 복음을 전할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참으로 열악했고, 세상 사람들은 복음에 대해서 매우 적대적이었습니다. 문화적으로는 로마와 헬라, 종교적으로는 유대인들의 집요한 방해와 박해가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고린도후서 12:7에 의하면 바울은 건강도 좋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바울에게는 다른 사도들과는 달리 함께 동고동락해 줄 배우자도 없었습니다(고전 9:5). 그러니 아무리 바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다고 한들 인간적인 고뇌와 외로움이 없었겠습니까?
그러한데도 바울이 흔들림 없이 왕성하게 선교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곳곳에서 보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주요한 원동력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바울의 옆에는 가족보다 더한 신앙적 사랑으로 늘 함께하며 힘이 되어 주었던 신실한 ‘동역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그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힘과 위로와 용기를 얻고 험난하기 그지없는 선교사역을 능력 있게 수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날 우리 역시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신실한 동역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마음 깊이 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그러한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나는 어떠한 동역자인가?’ 자신을 돌아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에베소에서의 소동이 그친 후에도 바울은 쉬지 않고 제자들을 위로하며 사명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러한 바울을 본받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바울 곁에 신실한 동역자들을 붙여주셨던 것처럼, 저희에게도 믿음의 동역자를 붙여주옵소서. 저희가 섬기는 교회가 복음을 위해 힘쓰는 공동체가 되게 하시고, 모든 성도가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쓰임 받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