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25.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27.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함으로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더니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28.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
설날을 이틀 앞두고 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올해는 우리 교회의 표어와 실천목표대로 ‘시간’과 ‘마음’과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 맡겨드림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복된 해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많은 경우, 신앙의 연수가 쌓이고 성경 지식이 많아지면 신앙이 성숙해지고 하나님의 뜻을 잘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 사이에는 측량할 수 없을 만큼의 큰 간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으로만 따지자면 사탄만큼 하나님을 잘 아는 존재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었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아직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삶으로써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중보자’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중보자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에 ‘예수님’이라는 중보자가 계십니까? 예수님의 가르침과 언약의 말씀을 가르치는 ‘성령’께서 여러분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까?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에 그치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믿음의 자리에 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지식의 신앙’을 넘어 ‘성령의 역사’가 흐르는 믿음의 자리에 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먼저 24절 함께 읽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본문은 아볼로를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대인이며, 학문과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아볼로에 대하여 이렇게 소개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를 소개하는 이 짧은 몇 마디 속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더대왕이 자신을 기념하여 세운 도시로서 로마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특히, 알렉산드리아는 학문연구가 매우 활발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당시 세계적인 학자의 대부분은 이곳 알렉산드리아 출신이었습니다. 아볼로 역시 이곳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높은 학문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유대인으로서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움으로 성경에 대한 지식도 탁월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최고의 도시에서 태어나 교육받아 종교와 철학, 수사학 등의 지식을 쌓고, 게다가 성경에도 능통했던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25절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구원에 있어 이론적으로는 깨달음이 있었으나 성령세례, 곧 예수님의 영적인 인도하심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볼로는 복음을 ‘이론’과 ‘회개의 도리’로만 이해했을 뿐, 성령께서 내주하셔서 삶을 이끌어 가는 역동적인 능력은 체험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에도 예수를 믿는데 학문적으로, 종교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만으로는 정확하게 예수를 믿는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중보자로 하여 ‘성령께서 내 삶의 인도자’이심을 확신하며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사는 것을 성도의 삶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그는 다른 종교들을 믿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다른 종교, 불교, 유교, 천도교 등의 종교를 믿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그러한 종교들은 사상을 믿지만, 우리 성도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수님을 중보자로 하여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갑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단호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2장).
그러므로 여러분의 신앙이 이러하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신앙인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를 통해, 말씀이 살아 움직여 역사하는 복된 삶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26절 함께 읽습니다.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부부입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던 아볼로의 설교를 듣고 그에게 부족한 점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같은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설교를 들으며 마음속으로 “성령의 임재도 모르면서 무슨 설교를 하지?”라며 무시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손을 들고 질문하며 망신을 주시겠습니까?
그런데 브리스길라 부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공개적으로 아볼로의 부족함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설교를 마치자 조용히 따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아볼로에게 예수님과 성령의 임재에 대한 더 완전한 지식에 대하여 가르쳐 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영적인 원리를 발견합니다. 성경 지식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잣대가 아니라,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사랑의 도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옳고 그름’을 따져서 진리를 지켜내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으로 ‘부족함’을 메워줌으로써 진리를 지켜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이처럼 아볼로의 부족한 점을 발견하고 그의 자존심을 지켜주며 진리의 말씀을 가르친 브리스길라 부부를 훌륭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들의 가르침을 거부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인 아볼로의 겸손 또한 우리가 본받아야 할 훌륭한 모범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아볼로는 세계적인 학문의 중심지에서 교육받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회당에서 가르쳤고, 이후에도 고린도 교회에 파송되어 성도들을 지도하던 전문 사역자였습니다. 반면, 브리스길라 부부의 본업은 천막 제조업입니다. 말하자면 평신도입니다. 그러니 최고의 지성인이자 전문 사역자였던 아볼로가 평신도의 가르침을 받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당신들이 뭘 안다고 나를 가르치려 합니까?”하며 자존심을 세웠을 법합니다.
하지만 그는 겸손하게 브리스길라 부부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볼로가 ‘위대한 사역자’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 가르침에 힘입어 27절과 28절에,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자리에서, 은혜를 끼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아볼로가 자존심을 내세우며 브리스길라 부부의 가르침을 받기를 거절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는 여전히 요한의 세례에만 머무는, 그래서 구원의 문턱만을 서성이는 불완전한 믿음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구원에 대하여 말을 하지만, 구원을 정확하게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주변을 보면, 이처럼 아볼로와 같이 겸손하게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받으려는 사람이 참으로 적습니다. 일반적으로 초신자일 때는 그래도 자기보다 신앙의 연륜이 깊은 성도들의 가르침을 열심히 듣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연륜이 쌓이고 직분이 높아지면 그 사람을 가르치기가 어려워집니다.
또한, 혹여 그러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직분을 맡기라도 하면 자기보다 직분이 낮거나 어린 사람의 말은 아예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마치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아는 양 행세합니다. 자기보다 직분이 낮거나 어린 사람 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자존심 상해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빌립보서 2:3에서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가르칩니다. 여기에서의 남은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묻고 배우는 것은 결코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기보다 직분이 낮거나 어린 사람이라고 하여 묻고 배우려 하지 않는 것이 더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가르치고 배움에 있어서는 위아래를 가리지 않은 아볼로와 같은 겸손함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여러분보다 더 어린 사람의 입을 통해 진리를 말씀을 교훈하실 수도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서 1:9의 교훈대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27절 함께 읽습니다.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함으로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더니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여기에서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라는 말씀은 이미 예수를 믿고 있는 성도들을 가르쳤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지 않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바울과는 대조가 되는 모습입니다. 바울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친 반면, 아볼로는 믿은 성도들에게 복음을 가르친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기존의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일에 힘쓰지 않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바울 역시 기존의 성도들에게 복음을 가르칠만한 충분한 재능과 실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기존의 성도들을 가르치는 일보다는 단 한 영혼이라도 믿지 않는 이들을 회심시켜 믿게 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과 열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바울과 아볼로가 서로 다른 부분에 관심과 열정이 있다 보니 어떤 결과가 왔습니까? 각각 그 방향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을 생각하며 고린도전서 3:6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전도에 열정이 있어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들이는 일을 감당했다면, 아볼로는 전도된 성도들을 양육하는 일을 감당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렇게 하니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교회에는 심는 이가 있어야 하고, 물주는 이도 있어야 합니다. 심기만 하고 가꾸지 않는다면 심은 것이 어떻게 바르게 성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심는 자인지, 아니면 양육하는 자인지 스스로의 달란트를 잘 구별해서 성장시켜나가야 합니다. 그러할 때 예수님의 몸의 지체로서 각각 믿음의 분량들을 채워가며 합력하여 아름다운 교회로 세워갈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아볼로는 성경 지식에 성령의 뜨거움이 더해졌을 때 비로소 유대인들의 반박을 이기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힘있게 증언하는 권능의 사역자가 되었습니다(28절). 신앙의 연수가 쌓일수록 고집이 세지는 것이 아니라, 아볼로처럼 배우기에 힘쓰고, 브리스길라 부부처럼 사랑으로 권면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성경지식에 실제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더해질 때, 여러분의 삶은 누군가에게 유익을 주는 복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이번 한 주, 내 지식을 내려놓고 성령님의 세밀한 음성에 순종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아굴라 부부는 아볼로의 설교를 듣자 그의 부족함을 알아차리고 핀잔을 주는 대신 친절하게 온전한 복음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또한, 아볼로 역시 지식인이요 교역자였음에도 평신도인 브리스길라 부부의 가르침을 겸손하게 받았습니다. 우리도 이들과 같이 서로의 약점과 부족을 사랑으로 채워주고 진리의 가르침을 겸손하게 배움으로써 교회와 세상에 큰 유익을 끼치는 성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지식에 머무는 신앙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복음의 일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참된 스승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25.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27.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함으로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더니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28.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
설날을 이틀 앞두고 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올해는 우리 교회의 표어와 실천목표대로 ‘시간’과 ‘마음’과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 맡겨드림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복된 해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많은 경우, 신앙의 연수가 쌓이고 성경 지식이 많아지면 신앙이 성숙해지고 하나님의 뜻을 잘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 사이에는 측량할 수 없을 만큼의 큰 간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으로만 따지자면 사탄만큼 하나님을 잘 아는 존재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었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아직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삶으로써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중보자’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중보자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에 ‘예수님’이라는 중보자가 계십니까? 예수님의 가르침과 언약의 말씀을 가르치는 ‘성령’께서 여러분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까?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에 그치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믿음의 자리에 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지식의 신앙’을 넘어 ‘성령의 역사’가 흐르는 믿음의 자리에 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먼저 24절 함께 읽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본문은 아볼로를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대인이며, 학문과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아볼로에 대하여 이렇게 소개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를 소개하는 이 짧은 몇 마디 속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더대왕이 자신을 기념하여 세운 도시로서 로마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특히, 알렉산드리아는 학문연구가 매우 활발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당시 세계적인 학자의 대부분은 이곳 알렉산드리아 출신이었습니다. 아볼로 역시 이곳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높은 학문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유대인으로서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움으로 성경에 대한 지식도 탁월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최고의 도시에서 태어나 교육받아 종교와 철학, 수사학 등의 지식을 쌓고, 게다가 성경에도 능통했던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25절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구원에 있어 이론적으로는 깨달음이 있었으나 성령세례, 곧 예수님의 영적인 인도하심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볼로는 복음을 ‘이론’과 ‘회개의 도리’로만 이해했을 뿐, 성령께서 내주하셔서 삶을 이끌어 가는 역동적인 능력은 체험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에도 예수를 믿는데 학문적으로, 종교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만으로는 정확하게 예수를 믿는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중보자로 하여 ‘성령께서 내 삶의 인도자’이심을 확신하며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사는 것을 성도의 삶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그는 다른 종교들을 믿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다른 종교, 불교, 유교, 천도교 등의 종교를 믿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그러한 종교들은 사상을 믿지만, 우리 성도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수님을 중보자로 하여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갑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단호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2장).
그러므로 여러분의 신앙이 이러하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신앙인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를 통해, 말씀이 살아 움직여 역사하는 복된 삶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26절 함께 읽습니다.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부부입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던 아볼로의 설교를 듣고 그에게 부족한 점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같은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설교를 들으며 마음속으로 “성령의 임재도 모르면서 무슨 설교를 하지?”라며 무시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손을 들고 질문하며 망신을 주시겠습니까?
그런데 브리스길라 부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공개적으로 아볼로의 부족함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설교를 마치자 조용히 따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아볼로에게 예수님과 성령의 임재에 대한 더 완전한 지식에 대하여 가르쳐 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영적인 원리를 발견합니다. 성경 지식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잣대가 아니라,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사랑의 도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옳고 그름’을 따져서 진리를 지켜내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으로 ‘부족함’을 메워줌으로써 진리를 지켜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이처럼 아볼로의 부족한 점을 발견하고 그의 자존심을 지켜주며 진리의 말씀을 가르친 브리스길라 부부를 훌륭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들의 가르침을 거부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인 아볼로의 겸손 또한 우리가 본받아야 할 훌륭한 모범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아볼로는 세계적인 학문의 중심지에서 교육받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회당에서 가르쳤고, 이후에도 고린도 교회에 파송되어 성도들을 지도하던 전문 사역자였습니다. 반면, 브리스길라 부부의 본업은 천막 제조업입니다. 말하자면 평신도입니다. 그러니 최고의 지성인이자 전문 사역자였던 아볼로가 평신도의 가르침을 받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당신들이 뭘 안다고 나를 가르치려 합니까?”하며 자존심을 세웠을 법합니다.
하지만 그는 겸손하게 브리스길라 부부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볼로가 ‘위대한 사역자’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 가르침에 힘입어 27절과 28절에,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자리에서, 은혜를 끼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아볼로가 자존심을 내세우며 브리스길라 부부의 가르침을 받기를 거절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는 여전히 요한의 세례에만 머무는, 그래서 구원의 문턱만을 서성이는 불완전한 믿음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구원에 대하여 말을 하지만, 구원을 정확하게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주변을 보면, 이처럼 아볼로와 같이 겸손하게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받으려는 사람이 참으로 적습니다. 일반적으로 초신자일 때는 그래도 자기보다 신앙의 연륜이 깊은 성도들의 가르침을 열심히 듣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연륜이 쌓이고 직분이 높아지면 그 사람을 가르치기가 어려워집니다.
또한, 혹여 그러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직분을 맡기라도 하면 자기보다 직분이 낮거나 어린 사람의 말은 아예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마치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아는 양 행세합니다. 자기보다 직분이 낮거나 어린 사람 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자존심 상해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빌립보서 2:3에서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가르칩니다. 여기에서의 남은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묻고 배우는 것은 결코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기보다 직분이 낮거나 어린 사람이라고 하여 묻고 배우려 하지 않는 것이 더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가르치고 배움에 있어서는 위아래를 가리지 않은 아볼로와 같은 겸손함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여러분보다 더 어린 사람의 입을 통해 진리를 말씀을 교훈하실 수도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서 1:9의 교훈대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27절 함께 읽습니다.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함으로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더니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여기에서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라는 말씀은 이미 예수를 믿고 있는 성도들을 가르쳤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지 않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바울과는 대조가 되는 모습입니다. 바울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친 반면, 아볼로는 믿은 성도들에게 복음을 가르친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기존의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일에 힘쓰지 않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바울 역시 기존의 성도들에게 복음을 가르칠만한 충분한 재능과 실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기존의 성도들을 가르치는 일보다는 단 한 영혼이라도 믿지 않는 이들을 회심시켜 믿게 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과 열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바울과 아볼로가 서로 다른 부분에 관심과 열정이 있다 보니 어떤 결과가 왔습니까? 각각 그 방향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을 생각하며 고린도전서 3:6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전도에 열정이 있어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들이는 일을 감당했다면, 아볼로는 전도된 성도들을 양육하는 일을 감당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렇게 하니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교회에는 심는 이가 있어야 하고, 물주는 이도 있어야 합니다. 심기만 하고 가꾸지 않는다면 심은 것이 어떻게 바르게 성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심는 자인지, 아니면 양육하는 자인지 스스로의 달란트를 잘 구별해서 성장시켜나가야 합니다. 그러할 때 예수님의 몸의 지체로서 각각 믿음의 분량들을 채워가며 합력하여 아름다운 교회로 세워갈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아볼로는 성경 지식에 성령의 뜨거움이 더해졌을 때 비로소 유대인들의 반박을 이기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힘있게 증언하는 권능의 사역자가 되었습니다(28절). 신앙의 연수가 쌓일수록 고집이 세지는 것이 아니라, 아볼로처럼 배우기에 힘쓰고, 브리스길라 부부처럼 사랑으로 권면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성경지식에 실제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더해질 때, 여러분의 삶은 누군가에게 유익을 주는 복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이번 한 주, 내 지식을 내려놓고 성령님의 세밀한 음성에 순종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아굴라 부부는 아볼로의 설교를 듣자 그의 부족함을 알아차리고 핀잔을 주는 대신 친절하게 온전한 복음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또한, 아볼로 역시 지식인이요 교역자였음에도 평신도인 브리스길라 부부의 가르침을 겸손하게 받았습니다. 우리도 이들과 같이 서로의 약점과 부족을 사랑으로 채워주고 진리의 가르침을 겸손하게 배움으로써 교회와 세상에 큰 유익을 끼치는 성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지식에 머무는 신앙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복음의 일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참된 스승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