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81. 멈추지 않는 열정과 겸손을 겸비합시다 (행 18:18-23)

우인택 목사
2026-02-08
조회수 305

18.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19. 에베소에 와서 그들을 거기 머물게 하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20.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21. 작별하여 이르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22.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23.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처음의 열정은 누구나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을 마무리하는 순간까지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대장정을 마무리하고, 안디옥 교회로 귀환하는 과정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약 3년간 수천 km의 강행군을 마쳤음에도 에베소에서 보인 그의 ‘선교적 열정’은 여전히 불타올랐습니다. 그리고 유럽선교라는 큰 공로를 세웠음에도 변함없이 교회 공동체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유지했습니다. 더군다나 23절에, 얼마간 휴식을 취한 그는 지체하지 않고 제3차 전도여행의 길을 다시 나섰습니다. 

  여러분, 바울은 참으로 본받을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세계 복음화라는 큰일을 맡기신 것은 그가 이러한 멈추지 않는 열정과 겸손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 여러분도 바울과 같은 복음에의 열정과 겸손한 마음을 품으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1. 먼저 18절 함께 읽습니다.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을 마무리하고 수리아로 떠날 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데리고 갔습니다. 이 부부는 동역자로서 바울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계속해서 상고하게 될, 바울이 성공적으로 제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로마에까지 선교할 수 있었던 것도 이들과 같은, 뒤에서 힘이 되어 준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바울은 3차례의 전도여행을 온전히 마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서, 앞에 나서서 일을 하는 사람도 귀하지만 뒤에서 묵묵히 ‘앞에 선 사람을 빛나게 하는 일’도 참으로 귀한 일임을 알게 됩니다. 실제로 ‘목회데이터연구소’에서 ‘성장하는 교회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조사를 했는데, 가장 큰 특징은 서로 신뢰하는 동역자들이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바울처럼, 또는 아굴라 부부처럼 서로 힘이 되어 주는 동역자가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어서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말씀합니다. 

  바울이 머리를 깎은 것은 구약의 서원 규례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민수기 6장에 의하면, 하나님께 일정 기간 헌신을 서원한 사람은 서원이 끝남과 동시에 그동안 길렀던 머리카락을 잘라 화목제물과 함께 하나님 앞에 불태워 드리는 의식을 행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율법을 생각하며 오늘 본문을 읽으면, 바울이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는 것은 그의 서원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서원이 무엇인지 본문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에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지만, 제2차 전도여행을 위한 헌신의 서원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평소, ‘오직 은혜’를 강조하며 율법주의를 비판했던 바울이 무엇 때문에 구약의 율법을 이처럼 충실하게 따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복음은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마 5:17). 그럼에도 바울이 성경 곳곳에서 율법에 대하여 비판하는 이유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악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몇몇 이단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을 구원의 조건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악용되는 율법의 모습을 비판한 것이지, 원래 복음이란 구약의 율법을 복음적 차원에서 새롭게 살려내야 하고, 이것이야말로 더욱 복음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오늘 본문의 바울의 모습은 오늘날 율법을 도외시하는 우리 성도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몇몇 제사에 대한 것 이외의 ‘규범에 관한 율법’은 우리 성도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삶의 규범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을 본받아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다시 마음에 새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19절 함께 읽습니다.
  “에베소에 와서 그들을 거기 머물게 하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바울은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따로 머물게 하고 자기만 회당에 들어가 유대인들과 변론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홀로 회당에 전도하러 간 이유는 혹시 있을지도 모를 유대인들의 박해를 예상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자기는 박해를 받더라도 자기를 따르던 사람들은 보호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참으로 속 깊은 행동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배려의 모습은 바울뿐만 아니라 성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 다윗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 고통받을 때, 백성을 변호하며 자신을 대신 징계해달라는 간청을 했습니다(삼하 24:17). 또한, 예수님께서도 대제사장이 보낸 군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을 때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며 제자들을 보호하셨습니다(요 18:8).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아랫사람을 자신의 안전을 위한 방패막이로 삼지만,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결코 그리하면 안 됩니다. 도리어 아랫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그들의 방패와 울타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세상 사람들이 칭찬할 것이요, 하나님께서도 높이 올려주시며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백성을 핑계 대며 자기 죄를 숨기려 했던 사울 왕은 낮추시고, 양들을 위해 목숨 걸고 맹수들과 싸웠던 다윗을 높여 왕으로 삼으시는 분이심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삼상 15:20-23, 17:34-35).

  그리고 이어지는 20-21절에 바울은 자신에게 더 오래있기를 청하는 에베소 사람들의 요청을 거절하며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그들의 요청대로 더 오래 머물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내심 원했으나,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열정은 단순한 ‘일 중독’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머무는 곳이라면 언제든지 다시 달려갈 준비가 된 ‘거룩한 열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뜻이 계시면 다시 오리라” 약속하고 안디옥 교회로의 귀환을 재촉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바울은 언제나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였고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매사를 사람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했던 바울의 삶은 과연 어떠했을까요?(고전 4:19, 16:7) 모든 일이 형통했을까요?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뜻을 따라 복음을 전한 그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이방인과 유대인들의 폭력과 박해와 시련을 견뎌내야 했습니다(행 16-18장). 

  그러나 그렇다고 그가 사역에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그 모든 시련에도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그를 지켜 보호하셨고, 그로 인해 그는 놀라운 선교적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바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고 해서 꼭 형통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 모든 시련을 하나님을 의지하여 끝까지 순종하면 궁극적으로 큰 열매를 맺게 됨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자기의 뜻이나 사람의 뜻에 따르는 자는 일시적으로는 형통하고 성공하는 것 같을지는 모르나 결국 실패하고 만다는 사실 역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평생 목회한 한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내가 보니 신앙에 실패한 성도들에게는 두 가지의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 고집이나 고정 관념에 따르든가, 아니면 사람의 뜻에 좌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은 앞으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시련은 있되 궁극적인 승리가 보장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시겠습니까, 아니면 일시적으로는 옳고 형통한 길 같으나 필경 사망의 길인 사람의 뜻을 따르시겠습니까?(잠 16:25) 지혜로운 결정을 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22절 함께 읽습니다.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이 말씀은 바울이 참 멋진 목회자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가이사랴에 도착한 그가 ‘올라갔다’라는 것은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했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안부를 물었다’라는 말은 ‘찾아가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자신이 할 모든 일을 제쳐두고 먼저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 찾아가서 정중하게 선교 보고의 시간을 가졌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야 비로소 안디옥 교회로 갔습니다.

  여러분,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한 교회는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그를 위해 헌금해 준 것도 안디옥 교회였고, 그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 준 것도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왜 그가 안디옥 교회보다 예루살렘 교회에 먼저 문안합니까? 따지고 보면 자기도 사도입니다. 사도이되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습니다. 신학적으로나 은사나 능력 면에서도 결코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왜 예루살렘 교회에 가서 선교사역을 보고한 것입니까? 또,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왜 이것을 굳이 기록하고 있습니까? 그것도 일차, 이차, 삼차에 걸쳐 단 한 번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고, 업적이 뛰어날지라도 성도는 교회의 권위 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간혹 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성도들을 보게 됩니다. 자신 개인의 지식이나, 능력 혹은 업적이 뛰어나면 그 권위가 교회의 권위보다 앞서는 것으로 착각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그의 권위가 교회의 권위를 앞설 수는 없습니다. 

  물론, 교회에서 목회를 담당하는 목회자의 나이가 어릴 수도 있습니다. 또 미숙하거나 경험이 없거나 다소 능력이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종이요, 영적지도자입니다. 그 권위를 무시하거나 불순종한다는 것은 곧 그를 세우신 하나님과 교회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능력이 탁월한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권위를 존중한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도 늘 스스로를 겸비하여야 합니다. 겸손이 믿음의 척도입니다. 오늘, “나는 믿음의 겸손함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듯 교회를 섬기고 있는가?”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바울의 선교 여정을 통해 우리의 사역과 신앙을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서원을 마쳐도 멈추지 않았던 바울의 열정을 배우게 하시고, 큰 열매를 거두었음에도 낮아질 줄 알았던 바울의 겸손을 배우게 하여 주옵소서. 사람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 항상 머무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사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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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마을금고 / 동탄영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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