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108. 로마를 향한 항해의 시작 (행 27:1-8)

우인택 목사
2026-08-16
조회수 105

1. 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2.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항해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3.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대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기를 허락하더니

4.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맞바람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항해하여

5.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시에 이르러

6.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7. 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로 항해하여

8.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 시에서 가깝더라



  우리는 지난 주일에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그리고 많은 고관 앞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담대하게 선포했던 바울의 최후 변론을 상고했습니다. 바울은 비록 쇠사슬에 묶인 죄수의 신분이었지만, 세상 권력자들을 향해 “내가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당신들도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당당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늘 본문부터는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항구의 이름들, 바람의 방향, 배의 종류, 항해 중에 만난 고난의 일들을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겉보기에는 호송 책임자인 백부장 율리오가 죄수들을 로마로 호송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네가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셨던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과 인도하심이 흐르고 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 108번째 강해를 통해, 로마를 향한 첫 항해의 길목에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뜻을 온전히 깨닫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먼저, 1절 함께 읽습니다.

  “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여기에서의 ‘우리가’라는 표현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만 세 번 거듭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바울의 로마행에 동행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누가는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당시 드로아에서 전도단에 합류한 인물입니다(행 16:10-17). 그 후 빌립보에서 사역하다가 바울의 제3차 전도여행 때 다시 합류한 뒤, 줄곧 바울과 동행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가이사랴 감옥에 2년 동안 갇혀 있을 때도 곁을 떠나지 않고 바울의 건강을 지키는 의사로서, 또 믿음의 동역자로서 바울을 도왔습니다. 성경은 디모데후서 4:11에 바울이 순교를 앞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가 바울 곁을 떠나지 않았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누가의 삶은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줍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바울의 전도여행을 바울 혼자서 다 해낸 것처럼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바울의 이름이 거론되지만, 바울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고 말없이 그를 도운 많은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누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루디아, 그리고 2절의 아리스다고와 같은 많은 성도들이 바울을 헌신적으로 도왔기에 세 차례의 전도여행이 가능했던 것입니다(롬 16장). 


  여러분, 성경이 몇몇 위대한 사람의 이름만을 기록하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그들 몇 명에 의해서만 유지되어 온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엘리야시대 때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을 남겨 두셨던 것처럼(왕상 19:18), 각각의 시대마다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헌신하고 수고할 ‘이름없는 성도들’을 남겨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신앙의 순수함 지키셨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의 교회 역시 이름난 몇몇 목사님들의 수고와 능력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알아주는 이가 없고 상 주는 이도 없지만,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말없이 수고하고 봉사하는 성도들에 의해 거룩한 교회의 명맥이 이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이름없는 성도란 과연 누구입니까? 


  바로 여러분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이 시대의 교회를 일으켜 세우고 부흥시켜 가야 할 이름없는 하나님의 일꾼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칭찬 듣지 못한다고 해서 마음 상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가 알아주든지 알아주지 않든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복음의 일꾼이며, 하나님께서 여러분들로 인해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좋은 동역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고 ‘바울’처럼, ‘누가’처럼 항상 교회의 충성된 일꾼으로서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3절 함께 읽습니다.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대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기를 허락하더니”


  바울 호송의 책임자인 백부장 율리오가 바울에게 친절을 베풀어, 시돈 항구에 닿았을 때 바울이 육지에 내려가 그곳의 성도들에게 보살핌을 받는 것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사실 매우 뜻밖의 일입니다. 엄격한 로마 법에 따라 죄수의 호송을 맡은 호송관이 죄수에게 이러한 특혜와 자유를 베푸는 것은 결코 상식적이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백부장 율리오에게 뇌물을 주었겠습니까? 바울이 뇌물을 줄 사람이었다면 벌써 총독 벨릭스에게 뇌물을 주고 풀려났지, 이렇게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백부장 율리오가 예수님을 믿는 성도여서 바울에게 호의를 베풀었겠습니까? 그가 예수님을 믿었다면 누가가 그 사실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더욱이 11절에 보면, 바울이 미항에서 출항하지 말자고 경고했을 때, 백부장은 바울의 말을 무시하고 선장의 말을 따릅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백부장 율리오가 유독 바울에게만 이러한 호의를 베푼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바울에게서 어떤 감동을 받았기 때문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율리오는 1절에 언급된 것처럼 로마 황제에게 소속된 아구스도대의 백부장이었기에 많은 죄수를 황제에게 호송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바울 외에 다른 죄수들을 함께 호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한 바울에게서는 다른 죄수에게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함이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죄수의 신분이지만 그를 함부로 대하지 않고 예의를 갖추고 다른 죄수들에게 베풀지 않은 호의까지 베풀게 된 것입니다.


  물론, 바울의 어떤 모습이 백부장에게 감동을 주었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에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백부장 율리오가 불신자였음에도 감동을 받을 만큼 바울의 인품이 뛰어났음이 분명합니다. 


  여러분, 이러한 사실을 보면서 우리도 바울과 같이 되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늘 강조하지만,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기가 막히게 논리적으로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이벤트를 만들어 사람들이 교회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러한 방법들도 도움을 줄 수 있겠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삶 속에서 선한 인품으로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잘난 척하지 않으면서도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선한 인품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됩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정직하고 깨끗하게 살고, 말없이 이웃을 도우며 살 때, 사람들은 감동을 받고 우리가 믿는 복음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나의 유익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고 희생하는 삶을 살 때, 사람들은 그 모습에 감동을 받고 하나님께 나아오게 됩니다. 백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감동이 훨씬 더 큰 전도의 효과를 거두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의 위기를 말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성도들이 불신자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더 지독하다”라는 말을 듣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 백 마디의 전도의 말보다 삶과 인품으로 감동을 주는 진정한 신앙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6절 함께 읽습니다.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바울 일행이 로마로 갈 때 탄 배는 로마군대의 배가 아니었습니다. 일반인들이 함께 타는 대형 상선이었습니다. 바울 일행이 탄 ‘알렉산드리아 배’는 이집트에서 생산한 곡물을 로마로 운반하는 배로서, 화물 외에도 37절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이 승객을 276명이나 태울 수 있을 만큼 당시로서는 매우 큰 배였습니다. 백부장 율리오는 이렇게 큰 배라면 웬만한 풍랑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안전에 대해서는 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안전을 확신하고 이 배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그 배는 백부장 율리오의 생각과는 달리 매우 위태롭고 힘겹게 항해해 갔습니다. 7절을 보면, 배가 더디 가서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렀다고 말씀합니다. 또 8절을 보면, ‘간신히’ 연안을 지나서 미항이라는 곳에 도착했다고 말씀합니다. 율리오의 마음에는 안전할 것이라는 확신을 준 큰 배였지만, 그 배는 그야말로 간신히, 간신히 침몰의 위기를 모면하면서 아슬아슬하게 항해를 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록을 통해 인간의 기술과 과학과 지혜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아무리 뛰어난 인간의 기술과 과학과 지혜도 완전한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없습니다. 안전을 확신하고 바울 일행이 승선한 큰 배가 지중해에서 역풍을 만나 위기를 겪고, 14절에 마침내는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파선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만들어낸 안전 보장책은 언제나 한계를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60:11에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라고 탄식했습니다. 사람이 제시하고 마련하는 안전은 그것이 무엇이든 다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발자국도 편히 딛지 못하는 불안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좀 더 확실한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더 많이 가지는 것, 더 높은 자리에 앉는 것, 좀 더 안전한 세상의 안전장치나 보험 같은 것을 붙들고 발버둥 치는 것뿐입니다. 그러다가 한계를 맞이하게 되면 주저앉아 세상을 원망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미쁘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세상의 안전장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더욱이 오늘 로마에 복음을 전하려고 죄수의 신분으로까지 자신을 낮춘 바울의 앞길에 이러한 고난이 계속해서 닥친다면, 하물며 우리에게는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바울이 소유한 큰 믿음을 본받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오늘 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매일매일 하나님께 믿음의 하루를 드리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를 통해, 여러분의 삶이 어떠한 풍랑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당당하게 믿음의 항해를 이어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바울이 그토록 소원하던 로마행이 드디어 시작되었습니다. 그를 호송하던 백부장도 호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안전을 보장할 것 같은 큰 배에 올랐지만, 온전한 항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를 통해, 성도의 삶은 단 한순간이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중단해서는 안 됨을 깨닫습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갈 때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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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마을금고 / 동탄영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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