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29.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30.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31.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32.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33.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34.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 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35.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36.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어린이 주일은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건강하고 지혜롭게 자라날 수 있을까?”를 성경의 가르침 안에서 고민하고 결단하는 날입니다. 행복한 가정의 아이들은 집에 머물기를 좋아하고, 불행한 가정의 아이들은 집에 머무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가정에 머물게 하려면 가정을 행복하게 하면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이 교회에 모이게 하려면 교회에 오는 것이 행복해야 합니다. 교회 생활이 행복하면 아이들이 교회로 모이고 행복하지 않으면 세상의 즐거움을 찾아 세상으로 나갑니다. 어린이 주일인 오늘,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행복하게 하는 교회를 세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부모의 가르침을 신뢰하게 할 수 있을까?” 성경의 가르침 안에서 깊이 고민하고 결단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를 통해 아이들에게 행복한 교회를 선물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억울한 누명을 쓴 바울’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마음을 힘들고 아프게 하는 일들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힘든 일은 ‘억울함’일 것입니다. 나는 진심이었는데 상대방은 오해할 때, 나는 선을 베풀었는데 돌아오는 것은 악일 때, 우리는 가슴이 답답하여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하나님, 제가 왜 이런 오해를 받아야 합니까?”라는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바울의 아름다운 결단을 보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권면을 따라,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권리와 자유를 내려놓고 유대인들의 오해를 풀기 위해 정결 의식인 결례에 참여했습니다. 화평을 위해 스스로 율법의 규례 아래로 들어갔습니다.
여러분, 이렇게까지 노력했으니 이제 오해가 풀리고 모든 것이 잘 해결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오늘 본문은 우리의 기대를 무너뜨립니다. 바울의 선의는 무참히 짓밟히고, 그는 인생 최대의 위기인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됩니다. 오늘 이 사건을 통해, 바울이 당한 억울한 누명이 무엇인지와 그 너머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어떠하셨는지 교훈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성도에게 주어지는 고난을 해석하는 영적인 눈이 열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먼저, 27절 함께 읽습니다.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지난 본문에서 시작된 바울의 7일간의 결례가 거의 마쳐갈 무렵에,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아시아에서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온 군중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에워쌌습니다.
여기서 ‘아시아’란 당시 소아시아 지역 최대도시였던 에베소를 가리킵니다. 에베소는 바울의 전도여행 기간 중 가장 오래 머문 곳으로, 10여 년의 전도여행 중에서 약 3년간 목회했던 곳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알아본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고, 평소 바울에 대하여 악감정을 가지고 있던 그들이 바울을 곤경에 몰아넣은 것입니다.
28절 함께 읽습니다.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그들은 바울이 “백성과 율법과 성전을 비방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며 성전을 모독했다”라는 죄목으로 바울을 고발했습니다. 여기에서 ‘백성을 비방한 죄’란 바울이 이스라엘 사람이나 이방인이나 다 믿음으로 구원받으며 이스라엘 사람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한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이 이방인인 헬라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가서 성전을 더럽혔다는 죄목을 하나 더 추가하여 바울이 올무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못을 박았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만이 하나님이 선택한 거룩한 민족임을 강조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했습니다.
여러분, 사실 세상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이스라엘 민족만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하나님의 선민이 된 것은 말할 수 없이 큰 축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선민으로 선택하신 것은 그들에게 그만한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였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선민이 될 만한 아무런 자격도, 내세울 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노예 민족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을 택하여 선민 삼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이 된 것이 자기들에게 그만한 조건과 자격이 있어서 된 것인 양, 우월의식에 빠져 교만해져 갔습니다. 그리고 결국 다른 민족을 무시하며 다른 민족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구원은 오직 이스라엘 민족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유대인이라는 것만으로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이방인들은 하나님께서 ‘지옥의 땔감’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과는 상종조차 하지 않았고, 이방인들을 개, 돼지만도 못한 존재로 취급했습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태도입니까? 이 얼마나 교만하고 그릇된 태도입니까?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으로 삼으신 이유는 그들만 구원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제사장 나라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출 19:6).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을 중보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과 이방 민족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해야 마땅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민족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중재 역할을 하게 하려고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더욱이 성경이 가르치기를, 하나님께서 만민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그들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신 것은 그들이 교만에 빠지지 않고 주어진 사명을 잘 수행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릇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자신들의 본분을 망각하고 도리어 교만하게 행하며 이방 민족을 무시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은 행동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우리 성도 중에도 이러한 그릇된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다는 데 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성도가 된 것이 세상에 대하여 제사장적 사명을 감당하라는 것인 줄 모르고, 그릇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믿지 않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정죄하고, 그들과는 상종조차 하지 않는 잘못을 범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성도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무시하고 정죄하고 상종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구원에 이르게 할 제사장적인 사명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9에서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말씀함으로써 이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차별하고 무조건 멀리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도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게 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 사명을 망각하고 선민의식에만 사로잡혀 교만하게 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버림받고 멸망한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성도로서의 제사장적인 역할에 대하여 깊이 교훈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28절 다시 한번 읽습니다.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여기에서 바울을 고소하기 위해 유대인들이 말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성전’은 ‘유대교의 3요소’입니다. 유대인들은 철저한 선민의식 속에서 율법과 성전을 생명 이상으로 귀하게 여겼습니다.
이어지는 29절 함께 읽습니다.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그들은 바울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와 성전을 더럽혔다는 누명을 씌웠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기가 막힙니다. 시내에서 바울과 드로비모가 함께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당연히 성전에도 데리고 들어갔을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실을 확인도 하지 않고 자신들의 선입견과 추측만으로 바울을 범죄자로 몰아세웠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미움과 편견을 정당화하기 위해 거짓말을 이용한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바울에게 적용한 범죄 항목은 모두 터무니없는 거짓이었습니다. 여러분, 바울은 누구보다도 동족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동족을 위해서라면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말할 정도로 동족을 사랑했습니다(롬 3:9). 또, 그는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가르친 일도 없습니다. 그는 오히려 율법의 규례에 따라 결례를 행했습니다. 또, 그는 성전을 모독한 일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아시아에서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바울을 해하기 위해 거짓을 꾸며 모함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마귀에게 속한 자임을 보여 주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가리켜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44).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거짓은 ‘마귀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만일 거짓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자신이 마귀에게 속한 자임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성도는 여하한 경우에도 거짓말해서는 안 됩니다. 거짓말은 성도에게서는 발견되어서는 안 될 요소입니다. 성도는 설령 막대한 손해가 주어지거나 심지어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고 해도 진리를 말하고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우리는 이른바 ‘하얀 거짓말’ 곧 “악의 없는 거짓말이나 선한 의도의 거짓말은 해도 괜찮다”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선한 거짓말’이란 없습니다. 또 악의 없는 거짓말이라 해도 감당할 수 없는 큰 피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체의 거짓말을 삼가해야 합니다. 성경은 거짓말을 옛사람의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골3:9) 거짓말하는 자는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 없다고 경고합니다(시 120:2). 그러므로 힘이 들더라도 거짓은 추호도 입에 담지 마시고 오직 진실만을 말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자신이 하는 말을 돌아보고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다면 돌이키고 바르고 선한 말을 하기에 더욱 힘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30절 함께 읽습니다.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여러분, 우리가 이미 상고한 7장에서, 유대인들은 성전을 모독했다는 구실로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여기에 선민과 율법, 이 두 가지 항목이 더 추가되었으니 어찌 유대인들이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렇게 누명이 씌워지자 성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온 성이 소동했습니다. 백성들이 달려와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어내고 성전 문을 닫았습니다. 이어지는 31절에 군중들은 바울을 때리기 시작했고, 바울을 죽이려 했습니다.
여러분, 이때 바울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는 지금 복음을 전하다 잡힌 게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의 권면을 듣고 유대인 형제들을 배려해서 정결 의식을 치르던 중이었습니다. 가장 경건해야 할 성전에서, 가장 선한 의도로 행한 일 때문에, 가장 억울하게 매를 맞으며 죽음의 위협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보다 더 억울한 상황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정도 상황이면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함을 탄식할 만한 법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바울이 이 억울함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군중과 맞서 싸웠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에서, 우리가 소유해야 할 믿음은 억울한 상황 자체보다, 그 상황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더 크게 보는 믿음이어야 함을 교훈 받게 됩니다.
이어지는 33절 이하에, 바울이 죽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로마 군대의 천부장을 보내 개입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천부장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나타나자 바울을 폭행하던 손을 멈추었습니다. 그러자 천부장은 바울을 두 쇠사슬로 결박하여 병영으로 끌고 가라고 명령했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쇠사슬에 묶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억울하게 죄수가 된 비참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로마군의 쇠사슬이 아니었으면 바울은 그 자리에서 순교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보면 이 쇠사슬은 폭도들의 손에서 바울을 건져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안전한 피난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가보 선지자의 예언대로 바울이 결박되게 하셨지만, 그 결박을 통해 바울의 생명을 보존하셨습니다. 34~36절에 군중들은 “그를 죽이자”라고 외치며 살기를 뿜어냈지만, 바울은 군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안전하게 영내로 들어갔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의 바울은 너무나 억울한 사람입니다. 하지도 않은 일로 비난받고, 선한 의도가 악의로 왜곡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억울함을 스스로 풀려고 발버둥 치지 않았습니다. 그저 묵묵히 그 고난의 자리를 견뎌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삶에도 바울처럼 억울한 누명이 찾아올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들어주는 이 없고, 진심이 왜곡되어 사방이 막힌 것 같은 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누명을 씌우지만, 하나님은 그 누명을 통해 더 큰 사명을 이루게 하십니다. 군중의 위협보다 더 큰 하나님의 침묵이 우리를 지키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나의 억울함을 풀려고 하면 싸움이 되지만, 하나님께 맡기면 구원의 역사가 됩니다. 오늘 바울을 보호했던 로마의 군대처럼,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의 생각을 넘어서는 방법으로 여러분을 지키시고 생명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바울처럼 ‘억울한 누명’의 시간을 묵묵히 통과하여, 결국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눈으로 보게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음의 위기에 처한 바울을 통해, 우리도 때로 오해받고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음을 마음에 새깁니다. 그때 분노에 휩싸이지 않게 하시고, 바울처럼 묵묵히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는 믿음을 갖게 하여 주옵소서. 사람들의 위협과 정죄보다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게 하옵시고, 지금 우리를 묶고 있는 고난의 쇠사슬이 도리어 우리를 보호하는 방패가 되고, 사명의 길로 인도하는 통로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지키시고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7.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29.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30.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31.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32.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33.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34.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 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35.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36.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어린이 주일은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건강하고 지혜롭게 자라날 수 있을까?”를 성경의 가르침 안에서 고민하고 결단하는 날입니다. 행복한 가정의 아이들은 집에 머물기를 좋아하고, 불행한 가정의 아이들은 집에 머무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가정에 머물게 하려면 가정을 행복하게 하면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이 교회에 모이게 하려면 교회에 오는 것이 행복해야 합니다. 교회 생활이 행복하면 아이들이 교회로 모이고 행복하지 않으면 세상의 즐거움을 찾아 세상으로 나갑니다. 어린이 주일인 오늘,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행복하게 하는 교회를 세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부모의 가르침을 신뢰하게 할 수 있을까?” 성경의 가르침 안에서 깊이 고민하고 결단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를 통해 아이들에게 행복한 교회를 선물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억울한 누명을 쓴 바울’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마음을 힘들고 아프게 하는 일들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힘든 일은 ‘억울함’일 것입니다. 나는 진심이었는데 상대방은 오해할 때, 나는 선을 베풀었는데 돌아오는 것은 악일 때, 우리는 가슴이 답답하여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하나님, 제가 왜 이런 오해를 받아야 합니까?”라는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바울의 아름다운 결단을 보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권면을 따라,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권리와 자유를 내려놓고 유대인들의 오해를 풀기 위해 정결 의식인 결례에 참여했습니다. 화평을 위해 스스로 율법의 규례 아래로 들어갔습니다.
여러분, 이렇게까지 노력했으니 이제 오해가 풀리고 모든 것이 잘 해결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오늘 본문은 우리의 기대를 무너뜨립니다. 바울의 선의는 무참히 짓밟히고, 그는 인생 최대의 위기인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됩니다. 오늘 이 사건을 통해, 바울이 당한 억울한 누명이 무엇인지와 그 너머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어떠하셨는지 교훈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성도에게 주어지는 고난을 해석하는 영적인 눈이 열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먼저, 27절 함께 읽습니다.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지난 본문에서 시작된 바울의 7일간의 결례가 거의 마쳐갈 무렵에,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아시아에서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온 군중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에워쌌습니다.
여기서 ‘아시아’란 당시 소아시아 지역 최대도시였던 에베소를 가리킵니다. 에베소는 바울의 전도여행 기간 중 가장 오래 머문 곳으로, 10여 년의 전도여행 중에서 약 3년간 목회했던 곳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알아본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고, 평소 바울에 대하여 악감정을 가지고 있던 그들이 바울을 곤경에 몰아넣은 것입니다.
28절 함께 읽습니다.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그들은 바울이 “백성과 율법과 성전을 비방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며 성전을 모독했다”라는 죄목으로 바울을 고발했습니다. 여기에서 ‘백성을 비방한 죄’란 바울이 이스라엘 사람이나 이방인이나 다 믿음으로 구원받으며 이스라엘 사람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한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이 이방인인 헬라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가서 성전을 더럽혔다는 죄목을 하나 더 추가하여 바울이 올무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못을 박았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만이 하나님이 선택한 거룩한 민족임을 강조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했습니다.
여러분, 사실 세상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이스라엘 민족만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하나님의 선민이 된 것은 말할 수 없이 큰 축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선민으로 선택하신 것은 그들에게 그만한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였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선민이 될 만한 아무런 자격도, 내세울 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노예 민족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을 택하여 선민 삼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이 된 것이 자기들에게 그만한 조건과 자격이 있어서 된 것인 양, 우월의식에 빠져 교만해져 갔습니다. 그리고 결국 다른 민족을 무시하며 다른 민족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구원은 오직 이스라엘 민족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유대인이라는 것만으로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이방인들은 하나님께서 ‘지옥의 땔감’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과는 상종조차 하지 않았고, 이방인들을 개, 돼지만도 못한 존재로 취급했습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태도입니까? 이 얼마나 교만하고 그릇된 태도입니까?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으로 삼으신 이유는 그들만 구원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제사장 나라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출 19:6).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을 중보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과 이방 민족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해야 마땅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민족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중재 역할을 하게 하려고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더욱이 성경이 가르치기를, 하나님께서 만민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그들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신 것은 그들이 교만에 빠지지 않고 주어진 사명을 잘 수행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릇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자신들의 본분을 망각하고 도리어 교만하게 행하며 이방 민족을 무시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은 행동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우리 성도 중에도 이러한 그릇된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다는 데 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성도가 된 것이 세상에 대하여 제사장적 사명을 감당하라는 것인 줄 모르고, 그릇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믿지 않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정죄하고, 그들과는 상종조차 하지 않는 잘못을 범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성도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무시하고 정죄하고 상종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구원에 이르게 할 제사장적인 사명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9에서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말씀함으로써 이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차별하고 무조건 멀리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도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게 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 사명을 망각하고 선민의식에만 사로잡혀 교만하게 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버림받고 멸망한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성도로서의 제사장적인 역할에 대하여 깊이 교훈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28절 다시 한번 읽습니다.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여기에서 바울을 고소하기 위해 유대인들이 말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성전’은 ‘유대교의 3요소’입니다. 유대인들은 철저한 선민의식 속에서 율법과 성전을 생명 이상으로 귀하게 여겼습니다.
이어지는 29절 함께 읽습니다.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그들은 바울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와 성전을 더럽혔다는 누명을 씌웠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기가 막힙니다. 시내에서 바울과 드로비모가 함께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당연히 성전에도 데리고 들어갔을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실을 확인도 하지 않고 자신들의 선입견과 추측만으로 바울을 범죄자로 몰아세웠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미움과 편견을 정당화하기 위해 거짓말을 이용한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바울에게 적용한 범죄 항목은 모두 터무니없는 거짓이었습니다. 여러분, 바울은 누구보다도 동족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동족을 위해서라면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말할 정도로 동족을 사랑했습니다(롬 3:9). 또, 그는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가르친 일도 없습니다. 그는 오히려 율법의 규례에 따라 결례를 행했습니다. 또, 그는 성전을 모독한 일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아시아에서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바울을 해하기 위해 거짓을 꾸며 모함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마귀에게 속한 자임을 보여 주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가리켜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44).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거짓은 ‘마귀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만일 거짓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자신이 마귀에게 속한 자임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성도는 여하한 경우에도 거짓말해서는 안 됩니다. 거짓말은 성도에게서는 발견되어서는 안 될 요소입니다. 성도는 설령 막대한 손해가 주어지거나 심지어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고 해도 진리를 말하고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우리는 이른바 ‘하얀 거짓말’ 곧 “악의 없는 거짓말이나 선한 의도의 거짓말은 해도 괜찮다”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선한 거짓말’이란 없습니다. 또 악의 없는 거짓말이라 해도 감당할 수 없는 큰 피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체의 거짓말을 삼가해야 합니다. 성경은 거짓말을 옛사람의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골3:9) 거짓말하는 자는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 없다고 경고합니다(시 120:2). 그러므로 힘이 들더라도 거짓은 추호도 입에 담지 마시고 오직 진실만을 말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자신이 하는 말을 돌아보고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다면 돌이키고 바르고 선한 말을 하기에 더욱 힘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30절 함께 읽습니다.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여러분, 우리가 이미 상고한 7장에서, 유대인들은 성전을 모독했다는 구실로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여기에 선민과 율법, 이 두 가지 항목이 더 추가되었으니 어찌 유대인들이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렇게 누명이 씌워지자 성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온 성이 소동했습니다. 백성들이 달려와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어내고 성전 문을 닫았습니다. 이어지는 31절에 군중들은 바울을 때리기 시작했고, 바울을 죽이려 했습니다.
여러분, 이때 바울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는 지금 복음을 전하다 잡힌 게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의 권면을 듣고 유대인 형제들을 배려해서 정결 의식을 치르던 중이었습니다. 가장 경건해야 할 성전에서, 가장 선한 의도로 행한 일 때문에, 가장 억울하게 매를 맞으며 죽음의 위협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보다 더 억울한 상황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정도 상황이면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함을 탄식할 만한 법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바울이 이 억울함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군중과 맞서 싸웠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에서, 우리가 소유해야 할 믿음은 억울한 상황 자체보다, 그 상황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더 크게 보는 믿음이어야 함을 교훈 받게 됩니다.
이어지는 33절 이하에, 바울이 죽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로마 군대의 천부장을 보내 개입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천부장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나타나자 바울을 폭행하던 손을 멈추었습니다. 그러자 천부장은 바울을 두 쇠사슬로 결박하여 병영으로 끌고 가라고 명령했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쇠사슬에 묶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억울하게 죄수가 된 비참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로마군의 쇠사슬이 아니었으면 바울은 그 자리에서 순교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보면 이 쇠사슬은 폭도들의 손에서 바울을 건져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안전한 피난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가보 선지자의 예언대로 바울이 결박되게 하셨지만, 그 결박을 통해 바울의 생명을 보존하셨습니다. 34~36절에 군중들은 “그를 죽이자”라고 외치며 살기를 뿜어냈지만, 바울은 군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안전하게 영내로 들어갔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의 바울은 너무나 억울한 사람입니다. 하지도 않은 일로 비난받고, 선한 의도가 악의로 왜곡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억울함을 스스로 풀려고 발버둥 치지 않았습니다. 그저 묵묵히 그 고난의 자리를 견뎌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삶에도 바울처럼 억울한 누명이 찾아올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들어주는 이 없고, 진심이 왜곡되어 사방이 막힌 것 같은 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누명을 씌우지만, 하나님은 그 누명을 통해 더 큰 사명을 이루게 하십니다. 군중의 위협보다 더 큰 하나님의 침묵이 우리를 지키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나의 억울함을 풀려고 하면 싸움이 되지만, 하나님께 맡기면 구원의 역사가 됩니다. 오늘 바울을 보호했던 로마의 군대처럼,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의 생각을 넘어서는 방법으로 여러분을 지키시고 생명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바울처럼 ‘억울한 누명’의 시간을 묵묵히 통과하여, 결국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눈으로 보게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음의 위기에 처한 바울을 통해, 우리도 때로 오해받고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음을 마음에 새깁니다. 그때 분노에 휩싸이지 않게 하시고, 바울처럼 묵묵히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는 믿음을 갖게 하여 주옵소서. 사람들의 위협과 정죄보다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게 하옵시고, 지금 우리를 묶고 있는 고난의 쇠사슬이 도리어 우리를 보호하는 방패가 되고, 사명의 길로 인도하는 통로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지키시고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