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18.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19.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20.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21.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22.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23.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24.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25.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26.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오늘 본문은 박해와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에게 주어진 새로운 도전과 그 해결 과정에 대한 기록입니다.
바울은 그토록 원하던 예루살렘에 도착했지만, 성령께서 예고하신 대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의 수고를 인정하는 환영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차가운 시선과 오해와 그 오해를 풀어야 하는 복잡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모든 상황을 놀라운 유연함으로 해결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와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고 교회를 바르게 세워가야 할지, 그 지혜를 얻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먼저 17~18절 함께 읽습니다.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이튿날 동역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를 섬기던 야고보와 장로들을 방문했습니다. 물론, 본문의 야고보는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12장에서 헤롯의 박해로 순교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생전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받은 성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베드로와 함께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같은 인물로서 성도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로부터도 존경을 받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19절 함께 읽습니다.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바울은 야고보를 비롯한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에게 이방 선교사역에 대하여 소상하게 보고하되, 그는 “내가 하나님의 일을 이렇게 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내가 이렇게 일을 했다”라고도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일하셨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한 가지 큰 유혹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했다”라고 사람들 앞에서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내가 이렇게 했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솔직한 심정이고, 또 우리는 대개 그렇게 말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면서 은근히 자기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내가 이렇게 하였으니 자기를 좀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자기와 같이 부족하고 연약한 자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일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은 비록 내가 그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내가 주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체이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친히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의 사역을 돕는 ‘종’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나서도 겸손한 모습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내가 가로채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기고 복음이 왜곡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종’은 아무리 훌륭한 일을 했을지라도 자신이 ‘종’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7장에서 가르치시기를 “종이 주인이 맡긴 일에 대가를 바라지 않고 최선을 다해 충성해야 하듯이, 너희도 하나님께로부터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라고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이기 이전에,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은 ‘하나님의 종’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내 생각, 내 노력으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에 순종하며 이루어 가야 함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실 수 있도록 맡겨진 사명에 더욱 충성으로 봉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큰 영광을 받으시고, 여러분 또한 복된 삶을 누릴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20절 함께 읽습니다.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여기서 주목할 것은 유대인 출신 성도들이 다 ‘율법에 열성을 가졌었다’라는 사실입니다. ‘열성 ζηλωτής’은 ‘열심’과 같은 단어를 번역한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율법에 열심을 가진 자”라는 이 표현이 여러분의 마음에 어떻게 다가오십니까? 이들은 유대교에 속한 유대인이 아니라 ‘유대교를 믿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입니다. 말하자면 우리와 똑같은 ‘성도’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들은 당연히 어디에 열심을 내야 하겠습니까? 율법에 열심을 내야 했습니까? 아니면 복음에 열심을 내야 했습니까? 여러분,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조차 아끼지 않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정작 ‘모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복음이 아닌 율법에 열심을 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무엇이든지 ‘열심을 내면 좋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무엇을 위해 열심을 내는지, 그것이 정말 옳은 일인지 고려하거나 검증하지 않고 그저 열심 자체에 몰두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바울이 열심이 부족해서 유대교에 있을 때 살인자의 역할을 자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유대교에 대해 그 누구보다 특별한 종교적 열심을 지니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죄인 중 괴수가 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도 열심이 있는 유대인 성도들이 바울에게 어떤 존재가 되고 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율법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종인 바울을 위협하는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21절 이하). 본문을 보시면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성도가 수만 명이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하는 일이란 고작 위대한 사도에게 위협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유대교를 믿던 유대인들보다 더한 직접적인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의 열심은 정말 바른 것입니까? 자기 감정에 의해 움직이면서 그것을 하나님을 위한 열심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혹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종교적 열심’에 대하여 심각하게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유대인 성도들처럼 우리의 옛사람이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믿음으로 날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이러한 의미에서 나의 신앙적인 열심이 복음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피고, 복음으로 복음화된 복음의 일꾼으로서의 마땅한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23~24절 함께 읽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바울에게 자기들이 말하는 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시시각각 전해 오는 바울에 대한 유대인 성도들의 오해와 증오의 소식을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가볍게 듣고 넘기지 않고 나름대로 만반의 대비책을 세워놓았음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사랑하듯 그렇게 바울을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충고라는 것이 어떻습니까? 듣는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안 하는 것보다 못한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별다른 항변을 하지 않고 순순히 그들의 권고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26절에 서원한 사람들을 성전으로 데리고 가서 율법의 규정을 따라 결례를 행했습니다.
혹자는 이러한 바울의 행위에 대하여 그가 나약하게 현실과 타협하여 복음의 진리를 버렸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바울의 참모습을 바로 보지 못한데서 비롯된 오해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복음을 위해 죽을 각오도 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로마의 천부장과 같은 사람은 물론, 총독과 유대의 왕 앞에서도 당당하게 복음을 전할 만큼 담대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굳은 각오와 함께 그 어떤 권력자들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또한 복음 외에 그 어떤 다른 것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리라고 말할 만큼 복음에 대해 단호했던 바울이 이와 같이 야고보와 장로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율법의 규례를 따랐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려는 세심함과 성숙한 배려 때문이었습니다. 또 사실 바울은 율법의 규례에 얽매일 필요가 없음을 강조했을 뿐, 율법을 지키지 말라거나 폐지를 주장한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에서 율법의 규례에 따라 결례를 행했던 바울의 모습은 그의 나약함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을 위하는 마음은 자신의 자존심도 꺾을 수 있을 만큼 강했다”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 강력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참된 믿음은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을 향해서는 한없이 온유하고 겸손하면서도, 세상을 향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담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바울을 본받아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을 위해서는 한없이 온유하고 겸손하면서도, 세상을 향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강하고 담대히 행하는 참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하여 교회를 위해서는 든든한 방패가 되고, 복음을 위해서는 충성스런 일꾼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바울은 가장 위대한 사역을 했으면서도 언제나 교회의 권위와 질서를 존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 교회를 직접 방문하여 이방인 선교에 대한 결과를 보고하는 겸손함을 보였습니다. 또한, 자신에 대하여 오해하는 유대인 성도들을 향해서는 분을 내는 대신 그들을 위해 율법의 규례를 따르는 온유함과 자유함을 보였습니다. 저희도 세상을 향해서는 한없이 담대하고 강하면서도, 교회 안에서는 언제나 그 권위와 질서를 존중하는 겸손함과 함께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을 향해서는 온유함을 잃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참된 겸손과 온유함의 본이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7.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18.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19.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20.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21.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22.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23.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24.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25.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26.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오늘 본문은 박해와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에게 주어진 새로운 도전과 그 해결 과정에 대한 기록입니다.
바울은 그토록 원하던 예루살렘에 도착했지만, 성령께서 예고하신 대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의 수고를 인정하는 환영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차가운 시선과 오해와 그 오해를 풀어야 하는 복잡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모든 상황을 놀라운 유연함으로 해결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와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고 교회를 바르게 세워가야 할지, 그 지혜를 얻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먼저 17~18절 함께 읽습니다.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이튿날 동역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를 섬기던 야고보와 장로들을 방문했습니다. 물론, 본문의 야고보는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12장에서 헤롯의 박해로 순교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생전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받은 성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베드로와 함께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같은 인물로서 성도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로부터도 존경을 받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19절 함께 읽습니다.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바울은 야고보를 비롯한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에게 이방 선교사역에 대하여 소상하게 보고하되, 그는 “내가 하나님의 일을 이렇게 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내가 이렇게 일을 했다”라고도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일하셨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한 가지 큰 유혹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했다”라고 사람들 앞에서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내가 이렇게 했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솔직한 심정이고, 또 우리는 대개 그렇게 말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면서 은근히 자기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내가 이렇게 하였으니 자기를 좀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자기와 같이 부족하고 연약한 자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일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은 비록 내가 그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내가 주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체이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친히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의 사역을 돕는 ‘종’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나서도 겸손한 모습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내가 가로채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기고 복음이 왜곡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종’은 아무리 훌륭한 일을 했을지라도 자신이 ‘종’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7장에서 가르치시기를 “종이 주인이 맡긴 일에 대가를 바라지 않고 최선을 다해 충성해야 하듯이, 너희도 하나님께로부터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라고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이기 이전에,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은 ‘하나님의 종’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내 생각, 내 노력으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에 순종하며 이루어 가야 함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실 수 있도록 맡겨진 사명에 더욱 충성으로 봉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큰 영광을 받으시고, 여러분 또한 복된 삶을 누릴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20절 함께 읽습니다.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여기서 주목할 것은 유대인 출신 성도들이 다 ‘율법에 열성을 가졌었다’라는 사실입니다. ‘열성 ζηλωτής’은 ‘열심’과 같은 단어를 번역한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율법에 열심을 가진 자”라는 이 표현이 여러분의 마음에 어떻게 다가오십니까? 이들은 유대교에 속한 유대인이 아니라 ‘유대교를 믿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입니다. 말하자면 우리와 똑같은 ‘성도’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들은 당연히 어디에 열심을 내야 하겠습니까? 율법에 열심을 내야 했습니까? 아니면 복음에 열심을 내야 했습니까? 여러분,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조차 아끼지 않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정작 ‘모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복음이 아닌 율법에 열심을 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무엇이든지 ‘열심을 내면 좋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무엇을 위해 열심을 내는지, 그것이 정말 옳은 일인지 고려하거나 검증하지 않고 그저 열심 자체에 몰두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바울이 열심이 부족해서 유대교에 있을 때 살인자의 역할을 자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유대교에 대해 그 누구보다 특별한 종교적 열심을 지니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죄인 중 괴수가 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도 열심이 있는 유대인 성도들이 바울에게 어떤 존재가 되고 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율법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종인 바울을 위협하는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21절 이하). 본문을 보시면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성도가 수만 명이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하는 일이란 고작 위대한 사도에게 위협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유대교를 믿던 유대인들보다 더한 직접적인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의 열심은 정말 바른 것입니까? 자기 감정에 의해 움직이면서 그것을 하나님을 위한 열심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혹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종교적 열심’에 대하여 심각하게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유대인 성도들처럼 우리의 옛사람이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믿음으로 날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이러한 의미에서 나의 신앙적인 열심이 복음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피고, 복음으로 복음화된 복음의 일꾼으로서의 마땅한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23~24절 함께 읽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바울에게 자기들이 말하는 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시시각각 전해 오는 바울에 대한 유대인 성도들의 오해와 증오의 소식을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가볍게 듣고 넘기지 않고 나름대로 만반의 대비책을 세워놓았음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사랑하듯 그렇게 바울을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충고라는 것이 어떻습니까? 듣는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안 하는 것보다 못한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별다른 항변을 하지 않고 순순히 그들의 권고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26절에 서원한 사람들을 성전으로 데리고 가서 율법의 규정을 따라 결례를 행했습니다.
혹자는 이러한 바울의 행위에 대하여 그가 나약하게 현실과 타협하여 복음의 진리를 버렸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바울의 참모습을 바로 보지 못한데서 비롯된 오해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복음을 위해 죽을 각오도 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로마의 천부장과 같은 사람은 물론, 총독과 유대의 왕 앞에서도 당당하게 복음을 전할 만큼 담대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굳은 각오와 함께 그 어떤 권력자들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또한 복음 외에 그 어떤 다른 것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리라고 말할 만큼 복음에 대해 단호했던 바울이 이와 같이 야고보와 장로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율법의 규례를 따랐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려는 세심함과 성숙한 배려 때문이었습니다. 또 사실 바울은 율법의 규례에 얽매일 필요가 없음을 강조했을 뿐, 율법을 지키지 말라거나 폐지를 주장한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에서 율법의 규례에 따라 결례를 행했던 바울의 모습은 그의 나약함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을 위하는 마음은 자신의 자존심도 꺾을 수 있을 만큼 강했다”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 강력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참된 믿음은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을 향해서는 한없이 온유하고 겸손하면서도, 세상을 향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담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바울을 본받아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을 위해서는 한없이 온유하고 겸손하면서도, 세상을 향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강하고 담대히 행하는 참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하여 교회를 위해서는 든든한 방패가 되고, 복음을 위해서는 충성스런 일꾼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바울은 가장 위대한 사역을 했으면서도 언제나 교회의 권위와 질서를 존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 교회를 직접 방문하여 이방인 선교에 대한 결과를 보고하는 겸손함을 보였습니다. 또한, 자신에 대하여 오해하는 유대인 성도들을 향해서는 분을 내는 대신 그들을 위해 율법의 규례를 따르는 온유함과 자유함을 보였습니다. 저희도 세상을 향해서는 한없이 담대하고 강하면서도, 교회 안에서는 언제나 그 권위와 질서를 존중하는 겸손함과 함께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을 향해서는 온유함을 잃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참된 겸손과 온유함의 본이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