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너희가 어느 때에 가서 말의 끝을 맺겠느냐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
3. 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하게 보느냐
4. 울분을 터뜨리며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아 너 때문에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
욥기는 의인도 고난을 당할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고난당하는 이웃을 향해 우리가 범하기 쉬운 ‘종교적 냉혹함’에 대하여 그 사례를 제시하며, 타인의 아픔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빌닷의 두 번째 변론이 시작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빌닷은 첫 번째 변론에 비해 매우 감정적이고 격렬하게 욥을 비난합니다. 그가 이같은 행동을 하게 된 것은 욥이 자신을 비롯한 두 친구의 권고를 거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보기에 자신들의 권고를 거절하며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는 욥은 분명히 교만하고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욥에게는 빌닷이 주장한 것과 같은 죄가 없었습니다. 빌닷과 두 친구는 욥이 극심한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욥에게 죄가 있다고 단정하고, 욥을 정죄하며 책망하고 회개를 강요한 것입니다.
1. 먼저, 1~2절 함께 읽습니다.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에 가서 말의 끝을 맺겠느냐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
2절에서 욥을 ‘너’라고 부르지 않고 ‘너희’라고 부른 것은 욥을 일반적인 악인의 범주에 포함시키려는 의도에서입니다. 자신들의 충고를 듣지 않는 욥은 수많은 악인 중의 한 사람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때에 가서 말의 끝을 맺겠느냐?”라는 말은 한마디로 “그 입 좀 다물라”라는 뜻입니다. 빌닷은 욥의 고통스러운 절규를 ‘시끄러운 소리’로 치부하며, 네 죄를 제대로 인식하고 정신 차리라고 훈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빌닷이 멀리서 욥을 찾아온 것은 욥을 위로하러 온 것이었습니다. 욥을 돕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욥의 말을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욥을 가르치려 하고 있습니다. 그는 욥이 고통 중에 내뱉는 영혼의 신음을 조금도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신학적 논리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욥의 말을 들을 가치가 없는 시끄러운 소리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는 욥을 위로하기 위해 와서 도리어 실족하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안에도 이런 빌닷의 모습이 있습니다. 누군가 고민을 이야기하면, 끝까지 들어주기보다 빨리 정답을 말해주고 싶어 참지 못합니다. “그건 네가 이렇게 안 해서 그래”, “기도가 부족해서 그래”라며 상대의 말을 끊어버립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위로가 아니라 폭력입니다. 마음을 울리고 움직이는 진정한 위로는 상대방이 말을 다 쏟아낼 때까지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기도하실 때, “하나님, 내 입을 닫고 상대방의 아픔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 주옵소서”라고 간절히 간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3절 함께 읽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하게 보느냐”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말입니다. 지금 자식을 잃고, 전 재산을 잃고, 온몸이 썩어가는 것은 욥입니다. 그런데 정작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은 건강하고 평안한 빌닷이 “나를 짐승 취급하지 말라”며 화내고 있습니다. 욥이 자신의 고통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그의 무정함을 비판하자, 빌닷은 자기들의 자존심이 상했다는 이유로 욥을 무자비하게 공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종교적인 사람’이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고난당하는 사람의 실수를 용납하지 못합니다. 아파서 내뱉은 거친 말 한마디에 “신앙인이 어떻게 저런 말을 하느냐?”며 자기들이 더 분노합니다. 빌닷은 욥의 아픔보다 자신의 권위가 훼손된 것을 더 견디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고통 중에 있던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실수하거나 상처 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까? 그것을 여러분을 멸시하는 것으로 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영혼이 너무 아프다는 비명입니다. 그러므로 내 자존심을 세우기보다 상대방의 아픔을 먼저 품어주는 넉넉한 마음을 갖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기도하실 때, “듣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종교적인 충고자보다 사랑의 위로자가 되게 하옵소서.” 간절히 간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4절 함께 읽습니다.
“울분을 터뜨리며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아 너 때문에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
이 말은 “하나님께서 땅을 견고히 세우시고 바위를 땅에 고정시키신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정하신 자연법칙인 것처럼, 네가 아무리 아프다고 소리치고 몸부림쳐도 하나님께서 친히 세워두신 인과응보의 법칙이 변하겠느냐?”라는 비웃음입니다.
빌닷은 하나님의 주권과 공의의 원리를 지금 당장 죽어가는 친구의 존재 가치를 말살하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공의를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온 천하보다 한 생명을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고통으로 울부짖을 때 하늘 보좌가 흔들리고, 하나님의 마음이 찢어진다는 것입니다.
빌닷은 ‘바위’처럼 굳건한 신학을 가졌을지 모르지만, 그 안에 ‘따스한 사랑’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신학적인 지식으로 사람을 넘어지게 하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너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바뀌겠느냐?”라는 냉소적인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 바위를 대신 짊어지고 골고다를 오르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고통받는 상대방의 작은 신음 소리에 귀기울이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너 하나 때문에 세상이 변하겠느냐? 하나님의 뜻이 바뀌겠느냐?”라는 절망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너의 눈물을 기억하신다.”라는 소망의 말을 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사랑을 실천할 때, 굳게 닫힌 상대방의 마음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기도하실 때, “이러한 은혜의 통로로 쓰임 받는 복음의 일꾼이 되게 하옵소서” 간절히 간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나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고통당하는 이웃을 함부로 대하고 정죄했던 우리의 교만을 내려놓습니다. 세상의 원칙과 인과응보의 논리로 사람을 죽이는 자가 아니라, 한 영혼의 아픔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갖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상처받은 이들을 싸매고 일으키는 위로의 사람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위로자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금요일: 새끼손가락 기도> 소지, 곧 새끼손가락은 가장 작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소년소녀가장, 독거어르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교회의 전반적인 기도 제목과 주일 예배를 위해 기도합니다. 구약성경의 다섯 가지 제사를 삶에 적용하여, 이웃과의 삶에서 잘못한 것은 없는지 돌아보는 ‘속건제의 삶’을 결단합니다.
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너희가 어느 때에 가서 말의 끝을 맺겠느냐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
3. 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하게 보느냐
4. 울분을 터뜨리며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아 너 때문에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
욥기는 의인도 고난을 당할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고난당하는 이웃을 향해 우리가 범하기 쉬운 ‘종교적 냉혹함’에 대하여 그 사례를 제시하며, 타인의 아픔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빌닷의 두 번째 변론이 시작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빌닷은 첫 번째 변론에 비해 매우 감정적이고 격렬하게 욥을 비난합니다. 그가 이같은 행동을 하게 된 것은 욥이 자신을 비롯한 두 친구의 권고를 거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보기에 자신들의 권고를 거절하며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는 욥은 분명히 교만하고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욥에게는 빌닷이 주장한 것과 같은 죄가 없었습니다. 빌닷과 두 친구는 욥이 극심한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욥에게 죄가 있다고 단정하고, 욥을 정죄하며 책망하고 회개를 강요한 것입니다.
1. 먼저, 1~2절 함께 읽습니다.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에 가서 말의 끝을 맺겠느냐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
2절에서 욥을 ‘너’라고 부르지 않고 ‘너희’라고 부른 것은 욥을 일반적인 악인의 범주에 포함시키려는 의도에서입니다. 자신들의 충고를 듣지 않는 욥은 수많은 악인 중의 한 사람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때에 가서 말의 끝을 맺겠느냐?”라는 말은 한마디로 “그 입 좀 다물라”라는 뜻입니다. 빌닷은 욥의 고통스러운 절규를 ‘시끄러운 소리’로 치부하며, 네 죄를 제대로 인식하고 정신 차리라고 훈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빌닷이 멀리서 욥을 찾아온 것은 욥을 위로하러 온 것이었습니다. 욥을 돕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욥의 말을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욥을 가르치려 하고 있습니다. 그는 욥이 고통 중에 내뱉는 영혼의 신음을 조금도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신학적 논리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욥의 말을 들을 가치가 없는 시끄러운 소리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는 욥을 위로하기 위해 와서 도리어 실족하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안에도 이런 빌닷의 모습이 있습니다. 누군가 고민을 이야기하면, 끝까지 들어주기보다 빨리 정답을 말해주고 싶어 참지 못합니다. “그건 네가 이렇게 안 해서 그래”, “기도가 부족해서 그래”라며 상대의 말을 끊어버립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위로가 아니라 폭력입니다. 마음을 울리고 움직이는 진정한 위로는 상대방이 말을 다 쏟아낼 때까지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기도하실 때, “하나님, 내 입을 닫고 상대방의 아픔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 주옵소서”라고 간절히 간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3절 함께 읽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하게 보느냐”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말입니다. 지금 자식을 잃고, 전 재산을 잃고, 온몸이 썩어가는 것은 욥입니다. 그런데 정작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은 건강하고 평안한 빌닷이 “나를 짐승 취급하지 말라”며 화내고 있습니다. 욥이 자신의 고통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그의 무정함을 비판하자, 빌닷은 자기들의 자존심이 상했다는 이유로 욥을 무자비하게 공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종교적인 사람’이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고난당하는 사람의 실수를 용납하지 못합니다. 아파서 내뱉은 거친 말 한마디에 “신앙인이 어떻게 저런 말을 하느냐?”며 자기들이 더 분노합니다. 빌닷은 욥의 아픔보다 자신의 권위가 훼손된 것을 더 견디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고통 중에 있던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실수하거나 상처 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까? 그것을 여러분을 멸시하는 것으로 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영혼이 너무 아프다는 비명입니다. 그러므로 내 자존심을 세우기보다 상대방의 아픔을 먼저 품어주는 넉넉한 마음을 갖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기도하실 때, “듣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종교적인 충고자보다 사랑의 위로자가 되게 하옵소서.” 간절히 간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4절 함께 읽습니다.
“울분을 터뜨리며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아 너 때문에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
이 말은 “하나님께서 땅을 견고히 세우시고 바위를 땅에 고정시키신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정하신 자연법칙인 것처럼, 네가 아무리 아프다고 소리치고 몸부림쳐도 하나님께서 친히 세워두신 인과응보의 법칙이 변하겠느냐?”라는 비웃음입니다.
빌닷은 하나님의 주권과 공의의 원리를 지금 당장 죽어가는 친구의 존재 가치를 말살하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공의를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온 천하보다 한 생명을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고통으로 울부짖을 때 하늘 보좌가 흔들리고, 하나님의 마음이 찢어진다는 것입니다.
빌닷은 ‘바위’처럼 굳건한 신학을 가졌을지 모르지만, 그 안에 ‘따스한 사랑’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신학적인 지식으로 사람을 넘어지게 하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너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바뀌겠느냐?”라는 냉소적인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 바위를 대신 짊어지고 골고다를 오르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고통받는 상대방의 작은 신음 소리에 귀기울이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너 하나 때문에 세상이 변하겠느냐? 하나님의 뜻이 바뀌겠느냐?”라는 절망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너의 눈물을 기억하신다.”라는 소망의 말을 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사랑을 실천할 때, 굳게 닫힌 상대방의 마음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기도하실 때, “이러한 은혜의 통로로 쓰임 받는 복음의 일꾼이 되게 하옵소서” 간절히 간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나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고통당하는 이웃을 함부로 대하고 정죄했던 우리의 교만을 내려놓습니다. 세상의 원칙과 인과응보의 논리로 사람을 죽이는 자가 아니라, 한 영혼의 아픔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갖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상처받은 이들을 싸매고 일으키는 위로의 사람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위로자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금요일: 새끼손가락 기도> 소지, 곧 새끼손가락은 가장 작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소년소녀가장, 독거어르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교회의 전반적인 기도 제목과 주일 예배를 위해 기도합니다. 구약성경의 다섯 가지 제사를 삶에 적용하여, 이웃과의 삶에서 잘못한 것은 없는지 돌아보는 ‘속건제의 삶’을 결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