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3. 헛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네가 무엇에 자극을 받아 이같이 대답하는가
4.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 자리에 있다 하자 나도 그럴 듯한 말로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
5. 그래도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 하며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근심을 풀었으리라
지금까지 욥은 친구들의 정죄에 맞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고,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붙들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이제 욥의 인내도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오늘 본문부터 욥은 친구들을 향해 매우 뼈아픈 말을 던집니다.
1. 먼저, 1~3절 함께 읽습니다.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헛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네가 무엇에 자극을 받아 이같이 대답하는가”
욥은 친구들을 향해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라며 항변합니다. 이들은 악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욥을 미워해서 욥을 방문한 것도 아닙니다. 욥을 진정으로 위로하기 위해 욥을 방문했습니다. 그래서 7일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욥의 고난을 함께 슬퍼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나름대로 신앙적 확신을 두고, 하나님을 변호하며, 그리고 욥을 회개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권면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이 욥에게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큰 상처와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들은 욥을 위해 입을 열었지만, 말을 하면 할수록 욥에게 더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자신들이 옳은 말을 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는 진리를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신학적 원칙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욥은 그들의 말을 ‘재난’이라고 말합니다.
왜일까요? 고난당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정답이 아니라 공감과 동행이기 때문입니다. 아파서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회개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 겁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의사가 수술대 위에 있는 환자에게 “건강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병이 난 겁니다”라고 훈계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맞는 말인 것 같지만, 그것은 위로가 아니라 정죄의 칼날일 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도 누군가의 아픔을 공감하기보다 신앙적인 잣대로 정죄한 적은 없습니까? 그 말이 설령 맞는다고 할지라도 당사자가 듣게 되면 실족하게 됩니다. 당사자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재난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오늘 기도하실 때, “하나님, 내 입술이 정죄하는 칼이 아니라, 누군가를 살리는 위로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간절히 간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4절 함께 읽습니다.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 자리에 있다 하자 나도 그럴 듯한 말로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
욥의 이 말을 쉽게 풀어 말한다면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다. 너희가 지금 내 앞에서 하는 그 정죄의 말들, 그 훈계의 말들, 나라고 못 할 줄 아느냐? 나도 너희를 향해 똑같이 머리를 흔들고 비난할 수 있다”라는 뜻이 됩니다.
여러분, 진정한 위로의 시작은 마음의 자리를 옮기는 데서 시작됩니다. 공감의 핵심은 상대방의 입장에 서 보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마음과 내 마음을 바꿔서 돌아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고통을 너무 쉽게 말하는 이유는, 그 사람의 마음 자리에 한 번도 앉아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내가 저 사람의 입장이라면….” 이라는 전제가 사라진 신앙은 차가운 율법주의로 변합니다. 하지만 내가 저 사람이 겪고 있는 고난의 자리에 대신 앉아 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재산을 다 잃어버렸다면, 내 자녀가 억울하게 죽었다면, 내 몸에 알 수 없는 불치병이 생겨났다면….” 이라고 생각한다면, 과연 고난을 겪는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을까요? 아마 자신도 고난을 겪는 사람과 함께 울부짖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깨달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정죄를 멈추고 고난을 겪는 사람의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 오늘 기도하실 때, “좁은 내 마음의 자리를 넓혀, 고통받는 이들의 마음을 넉넉히 담을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간절히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5절 함께 읽습니다.
“그래도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 하며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근심을 풀었으리라”
욥의 이 말은 ‘자신이 친구들에게 원하는 진정한 위로’에 대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욥은 친구들이 자신을 강하게 해 주는 말과 근심을 풀어주는 위로의 말을 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강하게 하며’라는 말은 힘내라고 소리치는 것이 아닙니다. 쓰러져 있는 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곁을 지켜주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근심을 풀었으리라’라는 말은 상대방의 상한 마음을 이해하고 눈물을 닦아주어 그의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해 주는 것을 뜻합니다.
일례로,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삶을 돌아보면 그러한 삶을 사셨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향해 “너희는 왜 죄지었느냐, 그러니 벌 받아 마땅하다”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마음 자리에 직접 앉으신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고난을 다 해결할 수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 역시 똑같은 연약한 인생임을 고백하고, 그와 함께 무릎 꿇는 데서 위로가 시작됩니다.
오늘 기도하실 때, 판단하고 정죄하는 엘리바스가 아니라, 함께 아파하며 근심을 풀어주는 참된 위로자가 되기를 결단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말로 사람을 죽이는 자가 아니라, 말로 사람을 살리는 위로자가 되게 하옵소서” 간절히 간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욥에게 정죄의 말로 상처를 주었던 친구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남의 고통은 쉽게 판단하면서, 정작 그 고통의 자리에는 함께 앉지 못했던 우리의 교만함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말이 누군가에게 재난이 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처럼 상대방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느끼고, 그 근심을 함께 풀어갈 수 있는 진정한 위로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참된 위로의 본이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수요일: 중지손가락 기도, 화목제의 삶> 중지는 가장 긴 손가락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 대통령을 비롯한 위정자, 공무원, 정치인, 경제인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북한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저녁에 있을 수요예배를 위해 기도합니다. 구약성경의 다섯 가지 제사를 삶에 적용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는 ‘화목제의 삶’을 결단합니다.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3. 헛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네가 무엇에 자극을 받아 이같이 대답하는가
4.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 자리에 있다 하자 나도 그럴 듯한 말로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
5. 그래도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 하며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근심을 풀었으리라
지금까지 욥은 친구들의 정죄에 맞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고,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붙들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이제 욥의 인내도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오늘 본문부터 욥은 친구들을 향해 매우 뼈아픈 말을 던집니다.
1. 먼저, 1~3절 함께 읽습니다.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헛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네가 무엇에 자극을 받아 이같이 대답하는가”
욥은 친구들을 향해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라며 항변합니다. 이들은 악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욥을 미워해서 욥을 방문한 것도 아닙니다. 욥을 진정으로 위로하기 위해 욥을 방문했습니다. 그래서 7일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욥의 고난을 함께 슬퍼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나름대로 신앙적 확신을 두고, 하나님을 변호하며, 그리고 욥을 회개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권면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이 욥에게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큰 상처와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들은 욥을 위해 입을 열었지만, 말을 하면 할수록 욥에게 더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자신들이 옳은 말을 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는 진리를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신학적 원칙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욥은 그들의 말을 ‘재난’이라고 말합니다.
왜일까요? 고난당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정답이 아니라 공감과 동행이기 때문입니다. 아파서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회개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 겁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의사가 수술대 위에 있는 환자에게 “건강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병이 난 겁니다”라고 훈계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맞는 말인 것 같지만, 그것은 위로가 아니라 정죄의 칼날일 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도 누군가의 아픔을 공감하기보다 신앙적인 잣대로 정죄한 적은 없습니까? 그 말이 설령 맞는다고 할지라도 당사자가 듣게 되면 실족하게 됩니다. 당사자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재난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오늘 기도하실 때, “하나님, 내 입술이 정죄하는 칼이 아니라, 누군가를 살리는 위로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간절히 간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4절 함께 읽습니다.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 자리에 있다 하자 나도 그럴 듯한 말로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
욥의 이 말을 쉽게 풀어 말한다면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다. 너희가 지금 내 앞에서 하는 그 정죄의 말들, 그 훈계의 말들, 나라고 못 할 줄 아느냐? 나도 너희를 향해 똑같이 머리를 흔들고 비난할 수 있다”라는 뜻이 됩니다.
여러분, 진정한 위로의 시작은 마음의 자리를 옮기는 데서 시작됩니다. 공감의 핵심은 상대방의 입장에 서 보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마음과 내 마음을 바꿔서 돌아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고통을 너무 쉽게 말하는 이유는, 그 사람의 마음 자리에 한 번도 앉아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내가 저 사람의 입장이라면….” 이라는 전제가 사라진 신앙은 차가운 율법주의로 변합니다. 하지만 내가 저 사람이 겪고 있는 고난의 자리에 대신 앉아 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재산을 다 잃어버렸다면, 내 자녀가 억울하게 죽었다면, 내 몸에 알 수 없는 불치병이 생겨났다면….” 이라고 생각한다면, 과연 고난을 겪는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을까요? 아마 자신도 고난을 겪는 사람과 함께 울부짖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깨달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정죄를 멈추고 고난을 겪는 사람의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 오늘 기도하실 때, “좁은 내 마음의 자리를 넓혀, 고통받는 이들의 마음을 넉넉히 담을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간절히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5절 함께 읽습니다.
“그래도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 하며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근심을 풀었으리라”
욥의 이 말은 ‘자신이 친구들에게 원하는 진정한 위로’에 대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욥은 친구들이 자신을 강하게 해 주는 말과 근심을 풀어주는 위로의 말을 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강하게 하며’라는 말은 힘내라고 소리치는 것이 아닙니다. 쓰러져 있는 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곁을 지켜주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근심을 풀었으리라’라는 말은 상대방의 상한 마음을 이해하고 눈물을 닦아주어 그의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해 주는 것을 뜻합니다.
일례로,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삶을 돌아보면 그러한 삶을 사셨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향해 “너희는 왜 죄지었느냐, 그러니 벌 받아 마땅하다”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마음 자리에 직접 앉으신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고난을 다 해결할 수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 역시 똑같은 연약한 인생임을 고백하고, 그와 함께 무릎 꿇는 데서 위로가 시작됩니다.
오늘 기도하실 때, 판단하고 정죄하는 엘리바스가 아니라, 함께 아파하며 근심을 풀어주는 참된 위로자가 되기를 결단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말로 사람을 죽이는 자가 아니라, 말로 사람을 살리는 위로자가 되게 하옵소서” 간절히 간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욥에게 정죄의 말로 상처를 주었던 친구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남의 고통은 쉽게 판단하면서, 정작 그 고통의 자리에는 함께 앉지 못했던 우리의 교만함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말이 누군가에게 재난이 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처럼 상대방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느끼고, 그 근심을 함께 풀어갈 수 있는 진정한 위로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참된 위로의 본이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수요일: 중지손가락 기도, 화목제의 삶> 중지는 가장 긴 손가락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 대통령을 비롯한 위정자, 공무원, 정치인, 경제인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북한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저녁에 있을 수요예배를 위해 기도합니다. 구약성경의 다섯 가지 제사를 삶에 적용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는 ‘화목제의 삶’을 결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