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내가 네게 보이리니 내게서 들으라 내가 본 것을 설명하리라
18. 이는 곧 지혜로운 자들이 전하여 준 것이니 그들의 조상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9. 이 땅은 그들에게만 주셨으므로 외인은 그들 중에 왕래하지 못하였느니라
20. 그 말에 이르기를 악인은 그의 일평생에 고통을 당하며 포악자의 햇수는 정해졌으므로
21. 그의 귀에는 무서운 소리가 들리고 그가 평안할 때에 멸망시키는 자가 그에게 이르리니
22. 그가 어두운 데서 나오기를 바라지 못하고 칼날이 숨어서 기다리느니라
23. 그는 헤매며 음식을 구하여 이르기를 어디 있느냐 하며 흑암의 날이 가까운 줄을 스스로 아느니라
24. 환난과 역경이 그를 두렵게 하며 싸움을 준비한 왕처럼 그를 쳐서 이기리라
25. 이는 그의 손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교만하여 전능자에게 힘을 과시하였음이니라
우리는 계속해서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을 상고하고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의 고통을 함께 아파해주던 친구의 자리에서 이제는 욥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인으로 규정하고 심판을 선고하는 재판관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엘리바스는 자기가 경험한 것, 그리고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전통적인 지혜를 근거로 악인이 어떤 말로를 걷게 되는지 생생하고 끔찍하게 묘사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모든 묘사는 지금 고통당하고 있는 욥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1. 먼저 17~18절 함께 읽습니다.
“내가 네게 보이리니 내게서 들으라 내가 본 것을 설명하리라 이는 곧 지혜로운 자들이 전하여 준 것이니 그들의 조상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였느니라”
엘리바스는 자신이 주는 교훈은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권위 있는 전통적 지혜에 입각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전통적인 지혜에 의존하는 것은 엘리바스만이 아니라 빌닷과 소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전통적인 지혜를 하나님의 계시로 생각하고 맹신했습니다. 절대적인 지혜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말을 거부한 욥을 악인으로 규정하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지혜라고 해서 절대적인 지혜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들 또한 불완전한 인간의 사고와 경험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오랜 전통을 가진 지혜라고 할지라도 완전한 지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일례로, 욥의 친구들이 주장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인과응보 논리의 오류가 이를 잘 반증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일반 계시로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드러내시기에, 전통적인 지혜 가운데에도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지혜들이 많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지혜도 소중하게 여기고 존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다만 욥의 친구들처럼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단정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특별 계시인 성경 말씀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은 절대적으로 신뢰해서는 안 됩니다.
일례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서의 가장 큰 장애물은 무지한 백성들도, 이방인도 아니었습니다. 잘못된 신앙적인 전통을 맹목적으로 따르던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제사장들, 곧 유대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또한, 중세시대에 종교 개혁자들이 부패한 로마 가톨릭교회를 바로잡고 복음의 진리를 바로 세우고자 했을 때 가장 큰 장애물 역시 잘못된 신앙적인 전통을 맹목적으로 따르던 사제들과 교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신앙적인 전통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모든 것을 절대적인 진리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절대적 진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이며, 신앙적인 전통도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증되어야 합니다. 전통이란 언제든 시대적 환경과 사람의 생각과 경험이 반영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얼마든지 편협된 사상과 오류가 내포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교회도 이제 나름대로 신앙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전통을 소중히 여기고 잘 보존해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신앙 전통을 하나님 말씀처럼, 절대 불변의 진리인 것처럼 받들어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신앙 전통이든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증하고 오류가 발견될 때에는 즉시 수정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종교 개혁의 정신을 잇는 개혁 신앙의 바른 모습입니다. 오늘 기도하실 때, “나는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삶을 살고 있는가?”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19절 함께 읽습니다.
“이 땅은 그들에게만 주셨으므로 외인은 그들 중에 왕래하지 못하였느니라”
여기에서의 ‘이 땅’이란 엘리바스가 태어나고 자란 삶의 터전이며, 자신의 지혜와 전통을 자랑한 ‘데만’ 땅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외인은 그들 중에 왕래하지 못하였느니라”라는 말은 다른 나라로부터 침입을 받지 않고 평화스럽게 살았다는 뜻입니다. 엘리바스가 욥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자기가 가진 인과응보에 따른 주장이 외부인의 영향에 의해 오염되거나 왜곡되지 않고 순수하게 보존된 것임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자신이 욥에게 한 말은 그가 반론할 여지가 없는 진리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람의 사고와 지혜가 아무리 탁월하다고 해도 한계가 있게 마련이고, 사람의 경험이 아무리 많아도 부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엘리바스는 그러한 사고와 지혜와 경험에 의해 축적된 전통적인 지혜를 마치 절대적인 진리인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욥을 비난하기 위해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의 위치에 두는 교만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바스의 주장은 생각해볼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 사회는 이와는 정반대의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오늘날 사회에는 과학과 교통의 발달로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문화와 전통들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적인 환경 속에서 각각 자기가 가진 전통만이 진리라고 주장한다면 극도의 혼란을 피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절대적인 진리나 절대 선을 고집하기보다는 상대를 존중하며 서로의 강점을 인정하고 서로 보완하게 하는 사상적, 문화적, 영적, 신앙적 혼합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상호 존중을 주장하며 '오직 예수님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를 수정하고 보완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라고 선포하는 자들을 향해 비난을 퍼붓고 잘못된 신앙인 것처럼 매도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단호하게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행 4:12).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의 영적, 신앙적 혼합주의 요구는 사람들을 멸망으로 끌고 가려는 사탄의 술책일 뿐입니다(갈 1:7).
그러므로 사탄의 모든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를 붙잡고 마지막 날까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복음의 일꾼으로서의 삶을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당당하게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20~25절 말씀은 엘리바스가 묘사하는 악인의 비참한 상태입니다.
20절에 악인은 겉으로는 평안해 보일지 몰라도 항상 고통을 당하고, 21절에 귀에는 무서운 소리가 들리며, 22절에 어둠 속에서 칼날이 자기를 기다린다는 공포 속에 삽니다. 23절에 먹을 것이 없어 헤매고, 24절에 환난과 역경이 마치 왕처럼 자기를 쳐서 이길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묘사들은 지금 욥이 겪고 있는 현실과 매우 닮아있습니다. 욥은 지금 모든 재산을 잃었고, 밤마다 무서운 환상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의 고통스러운 증상들을 하나하나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의 지혜는 참으로 잔인한 지혜입니다. 친구의 아픔을 위로하기는커녕, 그 아픔의 현상을 죄의 증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실패나 질병을 보며 “무슨 죄가 있나 보네”라고 짐작하는 순간, 우리는 엘리바스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타인의 고난을 해석하려 들것이 아니라 그 고난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친구의 도리입니다.
특히, 그리고 25절에 '악인의 본질은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엘리바스의 눈에는 하나님께 항변하고 따져 묻는 욥의 태도가 교만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진짜 교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울부짖는 욥이 교만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심판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며 친구를 정죄하는 엘리바스가 교만합니까? 진짜 교만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형제를 심판하는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하나님을 변호한다는 명목으로 친구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무지한 존재인지를 인정해야 합니다. “나는 모릅니다. 다만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뿐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자가 겸손한 자입니다. 오늘 기도하실 때, 판단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는 자리에 서기를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엘리바스의 날카로운 정죄를 통해 우리 안에 숨겨진 종교적인 교만을 돌아봅니다. 우리의 신앙 지식과 전통과 경험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칼날이 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마음임을 깨닫게 하시고, 오직 겸손히 하나님의 긍휼만을 의지하게 하옵소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월요일: 엄지손가락 기도, 번제의 삶> 엄지는 심장에서 가장 가깝습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먼저,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나 자신, 그리고 가족, 형제, 이웃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 못한 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구약성경의 다섯 가지 제사를 삶에 적용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어떤 일인지, 내가 무엇을 하면 하나님께서 자랑스러워하실지 그것을 생각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번제의 삶’을 결단합니다.
17. ○내가 네게 보이리니 내게서 들으라 내가 본 것을 설명하리라
18. 이는 곧 지혜로운 자들이 전하여 준 것이니 그들의 조상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9. 이 땅은 그들에게만 주셨으므로 외인은 그들 중에 왕래하지 못하였느니라
20. 그 말에 이르기를 악인은 그의 일평생에 고통을 당하며 포악자의 햇수는 정해졌으므로
21. 그의 귀에는 무서운 소리가 들리고 그가 평안할 때에 멸망시키는 자가 그에게 이르리니
22. 그가 어두운 데서 나오기를 바라지 못하고 칼날이 숨어서 기다리느니라
23. 그는 헤매며 음식을 구하여 이르기를 어디 있느냐 하며 흑암의 날이 가까운 줄을 스스로 아느니라
24. 환난과 역경이 그를 두렵게 하며 싸움을 준비한 왕처럼 그를 쳐서 이기리라
25. 이는 그의 손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교만하여 전능자에게 힘을 과시하였음이니라
우리는 계속해서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을 상고하고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의 고통을 함께 아파해주던 친구의 자리에서 이제는 욥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인으로 규정하고 심판을 선고하는 재판관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엘리바스는 자기가 경험한 것, 그리고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전통적인 지혜를 근거로 악인이 어떤 말로를 걷게 되는지 생생하고 끔찍하게 묘사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모든 묘사는 지금 고통당하고 있는 욥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1. 먼저 17~18절 함께 읽습니다.
“내가 네게 보이리니 내게서 들으라 내가 본 것을 설명하리라 이는 곧 지혜로운 자들이 전하여 준 것이니 그들의 조상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였느니라”
엘리바스는 자신이 주는 교훈은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권위 있는 전통적 지혜에 입각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전통적인 지혜에 의존하는 것은 엘리바스만이 아니라 빌닷과 소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전통적인 지혜를 하나님의 계시로 생각하고 맹신했습니다. 절대적인 지혜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말을 거부한 욥을 악인으로 규정하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지혜라고 해서 절대적인 지혜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들 또한 불완전한 인간의 사고와 경험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오랜 전통을 가진 지혜라고 할지라도 완전한 지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일례로, 욥의 친구들이 주장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인과응보 논리의 오류가 이를 잘 반증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일반 계시로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드러내시기에, 전통적인 지혜 가운데에도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지혜들이 많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지혜도 소중하게 여기고 존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다만 욥의 친구들처럼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단정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특별 계시인 성경 말씀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은 절대적으로 신뢰해서는 안 됩니다.
일례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서의 가장 큰 장애물은 무지한 백성들도, 이방인도 아니었습니다. 잘못된 신앙적인 전통을 맹목적으로 따르던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제사장들, 곧 유대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또한, 중세시대에 종교 개혁자들이 부패한 로마 가톨릭교회를 바로잡고 복음의 진리를 바로 세우고자 했을 때 가장 큰 장애물 역시 잘못된 신앙적인 전통을 맹목적으로 따르던 사제들과 교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신앙적인 전통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모든 것을 절대적인 진리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절대적 진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이며, 신앙적인 전통도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증되어야 합니다. 전통이란 언제든 시대적 환경과 사람의 생각과 경험이 반영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얼마든지 편협된 사상과 오류가 내포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교회도 이제 나름대로 신앙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전통을 소중히 여기고 잘 보존해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신앙 전통을 하나님 말씀처럼, 절대 불변의 진리인 것처럼 받들어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신앙 전통이든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증하고 오류가 발견될 때에는 즉시 수정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종교 개혁의 정신을 잇는 개혁 신앙의 바른 모습입니다. 오늘 기도하실 때, “나는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삶을 살고 있는가?”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19절 함께 읽습니다.
“이 땅은 그들에게만 주셨으므로 외인은 그들 중에 왕래하지 못하였느니라”
여기에서의 ‘이 땅’이란 엘리바스가 태어나고 자란 삶의 터전이며, 자신의 지혜와 전통을 자랑한 ‘데만’ 땅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외인은 그들 중에 왕래하지 못하였느니라”라는 말은 다른 나라로부터 침입을 받지 않고 평화스럽게 살았다는 뜻입니다. 엘리바스가 욥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자기가 가진 인과응보에 따른 주장이 외부인의 영향에 의해 오염되거나 왜곡되지 않고 순수하게 보존된 것임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자신이 욥에게 한 말은 그가 반론할 여지가 없는 진리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람의 사고와 지혜가 아무리 탁월하다고 해도 한계가 있게 마련이고, 사람의 경험이 아무리 많아도 부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엘리바스는 그러한 사고와 지혜와 경험에 의해 축적된 전통적인 지혜를 마치 절대적인 진리인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욥을 비난하기 위해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의 위치에 두는 교만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바스의 주장은 생각해볼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 사회는 이와는 정반대의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오늘날 사회에는 과학과 교통의 발달로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문화와 전통들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적인 환경 속에서 각각 자기가 가진 전통만이 진리라고 주장한다면 극도의 혼란을 피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절대적인 진리나 절대 선을 고집하기보다는 상대를 존중하며 서로의 강점을 인정하고 서로 보완하게 하는 사상적, 문화적, 영적, 신앙적 혼합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상호 존중을 주장하며 '오직 예수님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를 수정하고 보완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라고 선포하는 자들을 향해 비난을 퍼붓고 잘못된 신앙인 것처럼 매도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단호하게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행 4:12).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의 영적, 신앙적 혼합주의 요구는 사람들을 멸망으로 끌고 가려는 사탄의 술책일 뿐입니다(갈 1:7).
그러므로 사탄의 모든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를 붙잡고 마지막 날까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복음의 일꾼으로서의 삶을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당당하게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20~25절 말씀은 엘리바스가 묘사하는 악인의 비참한 상태입니다.
20절에 악인은 겉으로는 평안해 보일지 몰라도 항상 고통을 당하고, 21절에 귀에는 무서운 소리가 들리며, 22절에 어둠 속에서 칼날이 자기를 기다린다는 공포 속에 삽니다. 23절에 먹을 것이 없어 헤매고, 24절에 환난과 역경이 마치 왕처럼 자기를 쳐서 이길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묘사들은 지금 욥이 겪고 있는 현실과 매우 닮아있습니다. 욥은 지금 모든 재산을 잃었고, 밤마다 무서운 환상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의 고통스러운 증상들을 하나하나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의 지혜는 참으로 잔인한 지혜입니다. 친구의 아픔을 위로하기는커녕, 그 아픔의 현상을 죄의 증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실패나 질병을 보며 “무슨 죄가 있나 보네”라고 짐작하는 순간, 우리는 엘리바스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타인의 고난을 해석하려 들것이 아니라 그 고난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친구의 도리입니다.
특히, 그리고 25절에 '악인의 본질은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엘리바스의 눈에는 하나님께 항변하고 따져 묻는 욥의 태도가 교만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진짜 교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울부짖는 욥이 교만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심판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며 친구를 정죄하는 엘리바스가 교만합니까? 진짜 교만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형제를 심판하는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하나님을 변호한다는 명목으로 친구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무지한 존재인지를 인정해야 합니다. “나는 모릅니다. 다만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뿐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자가 겸손한 자입니다. 오늘 기도하실 때, 판단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는 자리에 서기를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엘리바스의 날카로운 정죄를 통해 우리 안에 숨겨진 종교적인 교만을 돌아봅니다. 우리의 신앙 지식과 전통과 경험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칼날이 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마음임을 깨닫게 하시고, 오직 겸손히 하나님의 긍휼만을 의지하게 하옵소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월요일: 엄지손가락 기도, 번제의 삶> 엄지는 심장에서 가장 가깝습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먼저,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나 자신, 그리고 가족, 형제, 이웃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 못한 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구약성경의 다섯 가지 제사를 삶에 적용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어떤 일인지, 내가 무엇을 하면 하나님께서 자랑스러워하실지 그것을 생각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번제의 삶’을 결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