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 설교

43. 교만은 신뢰를 대립으로 변질시킵니다 (욥 15:7-16)

우인택 목사
2026-04-17
조회수 93

7. ○네가 제일 먼저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
8.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네가 들었느냐 지혜를 홀로 가졌느냐
9. 네가 아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냐 네가 깨달은 것을 우리가 소유하지 못한 것이 무엇이냐
10. 우리 중에는 머리가 흰 사람도 있고 연로한 사람도 있고 네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느니라
11. 하나님의 위로와 은밀하게 하시는 말씀이 네게 작은 것이냐
12. 어찌하여 네 마음에 불만스러워하며 네 눈을 번뜩거리며
13. 네 영이 하나님께 분노를 터뜨리며 네 입을 놀리느냐
14. 사람이 어찌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찌 의롭겠느냐
15. 하나님은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가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16. 하물며 악을 저지르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을 용납하시겠느냐


  지난 본문에서 엘리바스는 욥의 고통 섞인 탄식을 ‘죄의 증거’로 몰아세우며 비판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엘리바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욥의 지혜와 도덕성을 정면으로 공격합니다. 엘리바스는 인간의 근본적인 부패함을 강조하며, 하나님께 항변하는 욥을 악을 저지르고도 깨닫지 못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존재로 규정합니다. 이러한 엘리바스의 매서운 질책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하는 것과 타인의 고난을 정죄의 도구로 사용하는 종교적 오만이 얼마나 무모한 행동인지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먼저, 7~8절 함께 읽습니다.
  “네가 제일 먼저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네가 들었느냐 지혜를 홀로 가졌느냐”

  엘리바스는 연장자일수록 지혜롭다는 당시의 전통적 사고에 근거하여 욥이 자기만 지혜 있는 척하고 있는 것을 조롱하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9~10절도 같은 의미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을 향한 자기와 두 친구의 권면은 조상들의 경험에 근거한 지혜로운 말이기에 욥이 반드시 충고를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욥이 충고를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도리어 자신들을 무정하고 지혜 없는 자들이라고 비난하자 화가 나서, 욥이 마치 혼자 지혜로운 자인 것처럼 교만하게 행하고 있다고 조롱하며 질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로써 욥과 친구들 사이에는 더이상 친구로서의 신뢰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 사이에 감정의 대립이 일어나서 서로를 비난하는 사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세 친구와 욥 수많은 논쟁을 했음에도 결국에는 그것이 무익한 논쟁으로 그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상대방의 처지는 돌아보지 않고 자기 생각만을 강하게 주장함으로써 마음에 큰 감정의 골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욥과 친구들은 오랫동안 우정을 쌓아왔고, 또한 신앙으로 서로 교제한 사이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욥의 고난을 바라보는 견해의 차로로 인해 한순간에 서로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자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오해와 분노와 비난과 책망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신뢰가 사라진 곳에서는 사소한 문제조차도 오해와 다툼이 일어남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지금도 끝없는 논쟁과 싸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공개적으로 밤샘 토론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어느 것 하나도 순조롭게 타협점을 찾지 못합니다. 오히려 더 큰 갈등으로 발전하기까지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저 악하고 무지한 사람들을 제압해 버려야겠다”라는 생각으로 상대방의 말에는 귀를 닫고 자기 말만 쏟아 놓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무슨 해결이 있고 타협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성경은 빌립보서 2:3에서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낫게 여기기 위해서는 상대를 신뢰해야 합니다. 상대를 신뢰하고 존중할 때 그의 말을 받아들일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분쟁이 사라지고 해결과 화합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성경은 갈라디아서 5:15에서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넓고 깊은 마음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조차 이해하려 애쓰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존중함으로써 서로 정죄하는 자들이 아니라 온전한 생명과 구원을 함께 이루는 복된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11절 함께 읽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은밀하게 하시는 말씀이 네게 작은 것이냐”

  이 말은 엘리바스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하여 욥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권고해 주심’을 믿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했기에, 그는 죄를 인정하고 회개할 것을 권고하는 자신의 말을 거부하는 욥을 용납하기 어려웠습니다. 욥의 그러한 태도를 하나님의 위로를 거부하는 것으로 단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2~13절에 “어찌하여 네 마음에 불만스러워하며 네 눈을 번뜩거리며 네 영이 하나님께 분노를 터뜨리며 네 입을 놀리느냐”라며 몰아세웠습니다.

  그러나 죄와 관계없어 고난을 당하는 욥으로서는 엘리바스의 말을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말이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견디기 어려운 고통만 더할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은 사람은 진정한 위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위로는 욥의 경우에서 보듯이 때로는 고통을 더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는 욥의 친구들이 욥을 정죄하지 않고 욥의 말에 동조하며 함께 탄식하는 상황이었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욥은 일시적으로 위로를 받았을지 모르겠지만, 친구들의 동조로 더욱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쩌면 욥은 그로 인해 더 큰 고통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이사야 2:22에서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사람의 위로가 무익하거나 전혀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고난 당하는 사람을 최선을 다해 위로해야 합니다. 

  다만, 여기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위로가 지닌 한계입니다. 사람은 고난을 당하는 사람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그저, 말로 위로하고 동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창조주이십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이 이같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한 위로를 얻으려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고 하나님의 위로를 소망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누구에게서 위로를 받기를 원하십니까? 오늘 기도하실 때, 참된 위로와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14절 함께 읽습니다.
  “사람이 어찌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찌 의롭겠느냐”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자기의 의로움을 주장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죄에 오염되어 있어서 자기의 의로움을 주장할 수 없으므로, 욥이 자신의 의를 주장하는 것은 지극히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바스의 이 말은 지금까지 그가 주장한 인과응보 논리와 모순이 됩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면 모두 재앙을 당해야 합니다. 하지만 엘리바스를 비롯한 그의 친구들과 세상의 대다수 사람은 욥과 같은 재앙을 당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엘리바스의 이 말이 잘못되었든, 그의 인과응보 논리가 잘못되었든 둘 중의 한 가지는 잘못된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로마서 3:10에서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엘리바스의 인과응보 논리에는 모순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엘리바스는 진리의 한편은 알고 한편을 모름으로써 모순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모두 타락한 아담의 자손으로서 아담의 죄를 물려받았고 필연적으로 죄를 범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양심에 따라 나름대로의 도덕적인 선은 행할 수 있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의 모든 행위는 그저 악할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시편 14:2~3에서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은 자신의 죄악됨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사람은 매우 선한 존재’라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이는 ‘교육을 통해’, ‘강한 의지와 노력을 통해’ 선하고 의로운 존재로 변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자신의 능력과 의로움을 과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람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선해 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권세를 사탄이 쥐고 있기에 죄를 범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세상의 악을 물리쳐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실 수 있음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기에 힘써야 합니다. 오늘 기도하실 때, 예수님의 의로써 구원받은 자로서 성령을 힘입어 더욱 겸손하고 선한 삶을 살기를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상대를 신뢰하고 존중할 때 분쟁이 사라지고 해결과 화합이 이루어지게 됨을 마음에 깊이 새깁니다. 또한, 사람의 위로는 우리를 고난에서 걸질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권능만이 우리를 살리심을 믿습니다. 죄에 오염된 인간의 힘과 능력에 기대지 말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님을 의지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금요일: 새끼손가락 기도> 소지, 곧 새끼손가락은 가장 작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소년소녀가장, 독거어르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교회의 전반적인 기도 제목과 주일 예배를 위해 기도합니다. 구약성경의 다섯 가지 제사를 삶에 적용하여, 이웃과의 삶에서 잘못한 것은 없는지 돌아보는 ‘속건제의 삶’을 결단합니다.

♡ 온라인 헌금 계좌 : 9002-1941-6987-1 

   (새마을금고 / 동탄영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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