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오늘 본문은 마지막 일곱 재앙인 대접 재앙이 일어나기 직전에 대한 묵시입니다. 1. 먼저, 1절 함께 읽습니다.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사도 요한은 성령에 이끌려 하늘에서 일어나는 크고 이상한 이적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지막 진노로서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진 모습이었습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24장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나타나고, 전쟁과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그것이 재난의 시작이고, 이어서 ‘불법이 성행하고 사랑이 식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약속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러한 일들이 세상 곳곳에서 점점 더 많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점점 더 치밀하고 정교한 악행과 불법들이 판을 치고, 전쟁과 기근, 지진과 해일 등으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환경오염으로 온 세상이 몸살을 앓고 있고, 인류의 교만을 질책하듯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은 전 세계의 발을 꽁꽁 묶어 놓았습니다. 과학이 발전함과 마치 발을 맞추듯이 점점 더 어려운 문제들이 인류를 위기 속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일곱 인과 일곱 나팔 재앙들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 재앙들은 정말 무섭고 끔찍한 재앙들이지만 그러나 그 재앙 사이사이에는 첨가된 형식으로 하나님의 자비가 곳곳에 숨 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구원의 길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곧 시작될 일곱 대접 재앙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라는 말은 향후 쏟아질 일곱 재앙이 하나님의 진노를 종식시킨다는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진노가 가득히, 충만하게, 완전하게 담겨 있다는 의미가 더욱 강하게 내포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앞으로 전개될 일곱 재앙이 마지막 재앙인 까닭은 이 일곱 재앙 안에 하나님의 진노가 완전하게 담겨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곱 대접 재앙 이후에는 더 이상 진노가 뒤따르지 않고 곧바로 하나님의 최후 심판이 집행됩니다(19-20장). 그런데 여러분, 만일, 하나님의 진노에 끝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든 인간들은 절망 속에서 살아 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하심에는 끝이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 인간들에게 소망이 있고, 고난 중에도 참고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진노의 끝은 영원한 멸망을 의미하기에 그들에게는 가장 무서운 절망의 나락이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이 마지막 진노를 앞에 두고 어떠한 마음이 드십니까? 두려움이 앞섭니까? 소망이 앞섭니까? 여기에 나의 신앙의 현주소가 있습니다.
2. 이어지는 2절 함께 읽습니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사탄과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의 모든 박해를 믿음으로 승리한 성도들이 ‘불이 섞인 유리 바다’ 앞에 서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불은 연단을 상징합니다(벧전 1:7). 불같은 시험을 이긴 자들, 곧 12-14장에 기록된 사탄의 모든 박해와 시험들을 이겨낸 성도들이 지금 하나님 앞에서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유리 바다’는 이어지는 3-4절의 찬양이 출애굽기 15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라는 것에서 홍해 바다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바다’는 구약의 제사장들이 성전 봉사에 임하면서 자신을 깨끗하게 씻기 위해 물을 담아두는 곳이었습니다(대하 4:2-6). 하나님의 성전에서 번제용 기구들을 씻는 것이 ‘물두멍’이라면, 번제를 집행하는 제사장들의 몸을 씻는 것은 ‘바다’입니다. 제사장들은 바다라는 크고 둥근 놋 욕조 안에 들어가 몸을 씻어야만 하나님께 번제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그들이 정결한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찬양할 수 있는 성도의 자격과 자세의 기준이 됩니다. 여러분, 죄인인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기에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출 10:28).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환상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 큰일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라고 탄식했습니다(사 6:5).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찬양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열어 주신 그 길을 통하면 오늘 본문의 십사만 사천의 성도들과 같이 누구든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이 쌓은 선이나 덕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쌓아온 지식이나 부와 권력으로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의지나 노력으로는 결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 길은 오직 한 길 뿐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인류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써만 거룩하게 씻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미 살펴본 요한계시록 7장에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란 오늘 본문의 구원받은 십사만 사천 성도들을 가리키며, 그들이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죄 사함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결국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여러분,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예수의 보혈을 의지해야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의 죄를 사하고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진리를 굳게 믿고 그 믿음에서 흔들리지 말며, 더욱 주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3. 이어지는 3절에 두 가지의 노래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여기에서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세상에서 온갖 고난과 박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음을 포기하지 않은 십사만 사천 성도들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들을 ‘승리한 자들’이라고 부릅니다(요일 5:4-5) 믿음으로 세상의 박해에서 승리한 성도들은 이제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 앞 유리 바다에 서서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어떠한 일이든지 자신의 업적을 자랑합니다. 자서전을 내거나 주위의 사람들이 그를 환호하고 찬양합니다. 개선문을 만들고, 헌정시를 만들고, 업적을 칭송합니다. 그러나 승리한 성도는 그 누구도 스스로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누군가로부터 찬양을 받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위대한 승전가를 하나님께만 돌립니다. 그것이 바로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입니다. ‘모세의 노래’는 출애굽 직후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를 마른 땅과 같이 건넌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렀던 구원에 대한 감사의 노래입니다(출 15:1-18). 그리고 ‘어린 양의 노래’는 십자가를 지시고 보혈을 흘리신 예수님께 드리는 성도들의 구원에 대한 감사의 노래입니다. 이 두 노래는 승리한 자들의 노래이지만 공통적으로 그 승리를 가능하게 했던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찬양의 노래입니다. 승리한 성도들은 그것이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홍해를 가르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과 십자가를 지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신 어린 양 예수로 인한 승리였다는 사실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 성도들이 부르게 될 최종적인 승리의 노래임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를 낮추고 오직 하나님만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영광의 제목이 하나님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성경 고린도전서 10:31의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이 바로 이러한 뜻입니다. 성도는 자신이 지나간 자리에 자신의 이름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을 남기는 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며 멋진 삶입니다. 이러한 삶에는 사탄의 왜곡된 시기 질투는 있을지언정 어떠한 억울함도, 질투도, 상함도 없습니다. 여러분도 최종적인 승전가인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4. 이어지는 4절 함께 읽습니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이 말씀은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않거나 영화롭게 하지 않을 수 없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찬양이 없다하여 찬양받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찬양하지 않아도 이미 영화로우시며, 이미 온 우주만물로부터 경배를 받고 계신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찬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은 오직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입술에 찬양이 있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우리들은 두 가지 기본적인 자세를 가져야 하는데 첫째는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반문하는 것처럼 반드시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특히, 여기에서의 ‘두려움’은 ‘무서움’이라는 뜻이 아니라 ‘거룩한 경외심을 가지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경외란 공경하고 사랑하되 그 권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크나큰 범죄입니다. 오늘, 하나님을 찬양하되 경외심을 갖고 찬양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잠 1:7, 9:10).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본적인 자세 두 번째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자세’를 가져야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오늘날 찬양하는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걸고 찬양을 합니다. 서로 경쟁하듯이 자신의 음악적 실력을 자랑하는 도구로 찬양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마치 세상 음악가들처럼 찬양 사역자들의 몸값이 정해져 있고, 찬양에 각종 저작권이 걸려 있고, 악보에도 저작권이 걸려 있어 돈을 주고 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 10:8) 세상의 것은 우리 각자의 노력으로 얻었으니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믿음과 구원과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께로부터 거저 받았으니 자기소유권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찬양하는 자는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온 우주 만물 가운데 홀로 영광과 찬양을 받으실 분이심을 노래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 모든 만민이 함께 찬양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작사 작곡한 노래일지라도 그것은 본래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누구든지 함께 마음껏 찬양할 수 있도록 제공해야 합니다. 음악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나지 않는 노래는 찬양이라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이제부터 우리의 일상과 우리의 일평생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찬양의 도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마지막 일곱 심판을 앞에 두고, 세상의 모든 고난과 박해에서 승리한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찬양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희들도 이기는 자가 되어 우리를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주신 거듭난 삶을 살아갈 때,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위해 거저 주신 것임을 깨달아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사용하는 지혜로운 저희들이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1.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오늘 본문은 마지막 일곱 재앙인 대접 재앙이 일어나기 직전에 대한 묵시입니다.
1. 먼저, 1절 함께 읽습니다.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사도 요한은 성령에 이끌려 하늘에서 일어나는 크고 이상한 이적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지막 진노로서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진 모습이었습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24장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나타나고, 전쟁과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그것이 재난의 시작이고, 이어서 ‘불법이 성행하고 사랑이 식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약속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러한 일들이 세상 곳곳에서 점점 더 많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점점 더 치밀하고 정교한 악행과 불법들이 판을 치고, 전쟁과 기근, 지진과 해일 등으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환경오염으로 온 세상이 몸살을 앓고 있고, 인류의 교만을 질책하듯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은 전 세계의 발을 꽁꽁 묶어 놓았습니다.
과학이 발전함과 마치 발을 맞추듯이 점점 더 어려운 문제들이 인류를 위기 속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일곱 인과 일곱 나팔 재앙들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 재앙들은 정말 무섭고 끔찍한 재앙들이지만 그러나 그 재앙 사이사이에는 첨가된 형식으로 하나님의 자비가 곳곳에 숨 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구원의 길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곧 시작될 일곱 대접 재앙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라는 말은 향후 쏟아질 일곱 재앙이 하나님의 진노를 종식시킨다는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진노가 가득히, 충만하게, 완전하게 담겨 있다는 의미가 더욱 강하게 내포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앞으로 전개될 일곱 재앙이 마지막 재앙인 까닭은 이 일곱 재앙 안에 하나님의 진노가 완전하게 담겨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곱 대접 재앙 이후에는 더 이상 진노가 뒤따르지 않고 곧바로 하나님의 최후 심판이 집행됩니다(19-20장).
그런데 여러분, 만일, 하나님의 진노에 끝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든 인간들은 절망 속에서 살아 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하심에는 끝이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 인간들에게 소망이 있고, 고난 중에도 참고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진노의 끝은 영원한 멸망을 의미하기에 그들에게는 가장 무서운 절망의 나락이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이 마지막 진노를 앞에 두고 어떠한 마음이 드십니까?
두려움이 앞섭니까?
소망이 앞섭니까?
여기에 나의 신앙의 현주소가 있습니다.
2. 이어지는 2절 함께 읽습니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사탄과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의 모든 박해를 믿음으로 승리한 성도들이 ‘불이 섞인 유리 바다’ 앞에 서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불은 연단을 상징합니다(벧전 1:7).
불같은 시험을 이긴 자들, 곧 12-14장에 기록된 사탄의 모든 박해와 시험들을 이겨낸 성도들이 지금 하나님 앞에서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유리 바다’는 이어지는 3-4절의 찬양이 출애굽기 15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라는 것에서 홍해 바다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바다’는 구약의 제사장들이 성전 봉사에 임하면서 자신을 깨끗하게 씻기 위해 물을 담아두는 곳이었습니다(대하 4:2-6).
하나님의 성전에서 번제용 기구들을 씻는 것이 ‘물두멍’이라면, 번제를 집행하는 제사장들의 몸을 씻는 것은 ‘바다’입니다.
제사장들은 바다라는 크고 둥근 놋 욕조 안에 들어가 몸을 씻어야만 하나님께 번제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그들이 정결한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찬양할 수 있는 성도의 자격과 자세의 기준이 됩니다.
여러분, 죄인인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기에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출 10:28).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환상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 큰일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라고 탄식했습니다(사 6:5).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찬양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열어 주신 그 길을 통하면 오늘 본문의 십사만 사천의 성도들과 같이 누구든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이 쌓은 선이나 덕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쌓아온 지식이나 부와 권력으로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의지나 노력으로는 결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 길은 오직 한 길 뿐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인류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써만 거룩하게 씻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미 살펴본 요한계시록 7장에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란 오늘 본문의 구원받은 십사만 사천 성도들을 가리키며, 그들이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죄 사함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결국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여러분,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예수의 보혈을 의지해야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의 죄를 사하고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진리를 굳게 믿고 그 믿음에서 흔들리지 말며, 더욱 주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3. 이어지는 3절에 두 가지의 노래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여기에서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세상에서 온갖 고난과 박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음을 포기하지 않은 십사만 사천 성도들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들을 ‘승리한 자들’이라고 부릅니다(요일 5:4-5)
믿음으로 세상의 박해에서 승리한 성도들은 이제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 앞 유리 바다에 서서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어떠한 일이든지 자신의 업적을 자랑합니다.
자서전을 내거나 주위의 사람들이 그를 환호하고 찬양합니다.
개선문을 만들고, 헌정시를 만들고, 업적을 칭송합니다.
그러나 승리한 성도는 그 누구도 스스로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누군가로부터 찬양을 받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위대한 승전가를 하나님께만 돌립니다.
그것이 바로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입니다.
‘모세의 노래’는 출애굽 직후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를 마른 땅과 같이 건넌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렀던 구원에 대한 감사의 노래입니다(출 15:1-18).
그리고 ‘어린 양의 노래’는 십자가를 지시고 보혈을 흘리신 예수님께 드리는 성도들의 구원에 대한 감사의 노래입니다.
이 두 노래는 승리한 자들의 노래이지만 공통적으로 그 승리를 가능하게 했던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찬양의 노래입니다.
승리한 성도들은 그것이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홍해를 가르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과 십자가를 지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신 어린 양 예수로 인한 승리였다는 사실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 성도들이 부르게 될 최종적인 승리의 노래임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를 낮추고 오직 하나님만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영광의 제목이 하나님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성경 고린도전서 10:31의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이 바로 이러한 뜻입니다.
성도는 자신이 지나간 자리에 자신의 이름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을 남기는 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며 멋진 삶입니다.
이러한 삶에는 사탄의 왜곡된 시기 질투는 있을지언정 어떠한 억울함도, 질투도, 상함도 없습니다.
여러분도 최종적인 승전가인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4. 이어지는 4절 함께 읽습니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이 말씀은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않거나 영화롭게 하지 않을 수 없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찬양이 없다하여 찬양받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찬양하지 않아도 이미 영화로우시며, 이미 온 우주만물로부터 경배를 받고 계신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찬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은 오직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입술에 찬양이 있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우리들은 두 가지 기본적인 자세를 가져야 하는데 첫째는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반문하는 것처럼 반드시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특히, 여기에서의 ‘두려움’은 ‘무서움’이라는 뜻이 아니라 ‘거룩한 경외심을 가지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경외란 공경하고 사랑하되 그 권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크나큰 범죄입니다.
오늘, 하나님을 찬양하되 경외심을 갖고 찬양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잠 1:7, 9:10).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본적인 자세 두 번째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자세’를 가져야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오늘날 찬양하는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걸고 찬양을 합니다.
서로 경쟁하듯이 자신의 음악적 실력을 자랑하는 도구로 찬양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마치 세상 음악가들처럼 찬양 사역자들의 몸값이 정해져 있고, 찬양에 각종 저작권이 걸려 있고, 악보에도 저작권이 걸려 있어 돈을 주고 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 10:8)
세상의 것은 우리 각자의 노력으로 얻었으니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믿음과 구원과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께로부터 거저 받았으니 자기소유권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찬양하는 자는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온 우주 만물 가운데 홀로 영광과 찬양을 받으실 분이심을 노래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 모든 만민이 함께 찬양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작사 작곡한 노래일지라도 그것은 본래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누구든지 함께 마음껏 찬양할 수 있도록 제공해야 합니다.
음악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나지 않는 노래는 찬양이라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이제부터 우리의 일상과 우리의 일평생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찬양의 도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마지막 일곱 심판을 앞에 두고, 세상의 모든 고난과 박해에서 승리한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찬양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희들도 이기는 자가 되어 우리를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주신 거듭난 삶을 살아갈 때,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위해 거저 주신 것임을 깨달아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사용하는 지혜로운 저희들이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