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오늘 본문은 감옥에 투옥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이 일을 통해 역사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기뻐하는 바울의 신실한 믿음에 대한 기록입니다.
1. 먼저, 19절 함께 읽습니다.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여기에서 ‘이것’은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을 뜻합니다. 자신이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조차 걱정하지 않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빌립보 성도들이 자신을 위해 중보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자신을 구원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성도의 중보 기도를 자신의 구원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시켰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중요성은 그가 쓴 서신 곳곳에 강조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형제들아 나를 위하여 기도하기를”이라고 했고, 고린도 성도들에게도 “너희도 우리를 간구함으로 도우라”라고 기도를 부탁했습니다(살후 3:1, 고후 1:11). 또 빌레몬에게는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노라”라고 기도를 부탁했습니다(몬 1:22). 또 예루살렘에 갈 때도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기도를 부탁했습니다(롬 15:30-32). 바울은 자신의 사역은 자기의 기도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의 중보 기도가 없이는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가 쓴 서신마다 강조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서로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해야 합니다. 중보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를 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라는 말은 일차적으로는 감옥으로부터의 석방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로 감옥에서 석방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일례로, 성경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헤롯왕이 사도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마저 죽이려고 그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때 성도들의 행동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행 12:5). 그러자 하나님의 천사가 감옥에 나타나 베드로를 묶은 쇠사슬을 풀어주고 감옥에서 구해 주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행 12:7-11). 성경은 이를 통해 성도들의 중보 기도는 위기에 빠진 사역자에게 놀라운 기적을 만나게 함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8:19에서 중보 기도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그러므로 서로를 위하여 간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영적인 능력입니다. 영적인 능력이 있어야만 하나님 뜻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중보 기도는 위기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영적인 능력을 공급하는 파이프와 같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날마다 서로를 위해 간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20절 함께 읽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 말씀은 재판 결과가 어떠하든지 간에, 살든지 죽든지 간에 오직 예수님을 전하며 살겠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재판을 유리하게 받기 위해서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마음의 결단이기도 합니다. 오직 복음의 일꾼으로서의 당당하게 주어진 상황을 마주하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떳떳하고 당당한 자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 늘 힘썼습니다. 그는 사도로서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성도로서 부끄럽지 않게 행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구원이 세상에 전해지는 것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2천 년 전 바울의 고백이 곧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동료 성도들에게 중보 기도를 요청해야 합니다. 그를 통해 영적인 능력을 공급받아 매사에 어떤 것이 부끄러운 일인지 분별하여 그러한 것들을 멀리하고 피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오늘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것은 없는지 자신의 삶을 살피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바울과 같이 담대하게 성도로서의 선한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21절 함께 읽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놀라운 고백입니다. 자신의 삶은 곧 예수님을 대신한 삶이라는 고백입니다. 바울은 여기에서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서 2:20에서도 이러한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고백은 자신의 삶 전체가 예수님의 통치를 받으며, 그로 인해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이 자신의 삶 속에 그대로 증거되어지고 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그는 죽는 것도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죽음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고 또 어렴풋이 느껴지는 심판의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 이후를 알고 있습니다. 심판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러함에도 22-23절에서 우리는 바울이 삶과 죽음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함께 읽습니다.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바울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습니다. 죽어서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은 개인적인 소망이 있지만,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살아서 돕고 싶은 생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죽어서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이 고민은 참된 성도라면 한두 번씩은 해봤을 고민일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을 사모하는 성도에게는 세상에 대한 애착과 미련이 없습니다. 어서 주님이 불러주셔서 주님과 영원히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런 고민은 참된 성도만이 할 수 있는 거룩한 고민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민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고민을 해보셨습니까? 이런 고민을 해보지 않은 성도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부족한 성도입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성도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성도는 세상살이를 그렇게 재미있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현실은 잃어버린 양을 구원하기 위해 늘 수고하고 애쓰고 고난 당하는 삶입니다.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나그네와 같은 삶입니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양을 구원하기 위해 늘 수고하고 애쓰며 살아가는 성도는 어서 주님 곁에 가서 영원한 쉼을 얻고 싶어 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현세의 삶과 내세의 삶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며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현실을 부정하는 염세주의자와 같은 삶을 살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참된 성도는 이 세상의 삶보다는 주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삶을 더 원한다는 말입니다. 참된 성도는 현실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지만, 그렇지만 현실의 삶에 집착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4절 함께 읽습니다.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바울은 천국을 다녀온 체험까지 했기에 개인적으로 볼 때,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자기에게 더 유익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살아서 교회를 위하여 일하는 편이 성도들을 위해 더 유익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사는 것이 아직 말씀 위에 견고히 뿌리를 내리지 못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더 유익함을 분명하게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26절 함께 읽습니다.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우리도 바울의 이런 정신을 본받아야 합니다. 성도는 삶의 목적이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성도는 잃어버린 양을 구원하기 위해 늘 수고하고 애쓰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성도의 삶의 목적이요 가치관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살고 계십니까? 바울과 같은 가치관과 목적을 가지고 살고 계십니까? 오늘, 이러한 의미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 성도 사이의 중보 기도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됩니다. 또한, 성도의 삶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잃어버린 양을 구원하는 삶이어야 함도 가슴 깊이 새깁니다.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성령의 권능을 부어 주옵소서. 그를 통해 모든 불의한 것들을 이겨내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랑이 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9.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오늘 본문은 감옥에 투옥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이 일을 통해 역사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기뻐하는 바울의 신실한 믿음에 대한 기록입니다.
1. 먼저, 19절 함께 읽습니다.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여기에서 ‘이것’은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을 뜻합니다. 자신이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조차 걱정하지 않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빌립보 성도들이 자신을 위해 중보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자신을 구원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성도의 중보 기도를 자신의 구원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시켰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중요성은 그가 쓴 서신 곳곳에 강조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형제들아 나를 위하여 기도하기를”이라고 했고, 고린도 성도들에게도 “너희도 우리를 간구함으로 도우라”라고 기도를 부탁했습니다(살후 3:1, 고후 1:11). 또 빌레몬에게는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노라”라고 기도를 부탁했습니다(몬 1:22). 또 예루살렘에 갈 때도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기도를 부탁했습니다(롬 15:30-32). 바울은 자신의 사역은 자기의 기도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의 중보 기도가 없이는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가 쓴 서신마다 강조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서로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해야 합니다. 중보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를 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라는 말은 일차적으로는 감옥으로부터의 석방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로 감옥에서 석방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일례로, 성경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헤롯왕이 사도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마저 죽이려고 그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때 성도들의 행동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행 12:5). 그러자 하나님의 천사가 감옥에 나타나 베드로를 묶은 쇠사슬을 풀어주고 감옥에서 구해 주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행 12:7-11). 성경은 이를 통해 성도들의 중보 기도는 위기에 빠진 사역자에게 놀라운 기적을 만나게 함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8:19에서 중보 기도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그러므로 서로를 위하여 간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영적인 능력입니다. 영적인 능력이 있어야만 하나님 뜻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중보 기도는 위기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영적인 능력을 공급하는 파이프와 같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날마다 서로를 위해 간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20절 함께 읽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 말씀은 재판 결과가 어떠하든지 간에, 살든지 죽든지 간에 오직 예수님을 전하며 살겠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재판을 유리하게 받기 위해서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마음의 결단이기도 합니다. 오직 복음의 일꾼으로서의 당당하게 주어진 상황을 마주하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떳떳하고 당당한 자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 늘 힘썼습니다. 그는 사도로서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성도로서 부끄럽지 않게 행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구원이 세상에 전해지는 것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2천 년 전 바울의 고백이 곧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동료 성도들에게 중보 기도를 요청해야 합니다. 그를 통해 영적인 능력을 공급받아 매사에 어떤 것이 부끄러운 일인지 분별하여 그러한 것들을 멀리하고 피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오늘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것은 없는지 자신의 삶을 살피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바울과 같이 담대하게 성도로서의 선한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21절 함께 읽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놀라운 고백입니다. 자신의 삶은 곧 예수님을 대신한 삶이라는 고백입니다. 바울은 여기에서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서 2:20에서도 이러한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고백은 자신의 삶 전체가 예수님의 통치를 받으며, 그로 인해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이 자신의 삶 속에 그대로 증거되어지고 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그는 죽는 것도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죽음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고 또 어렴풋이 느껴지는 심판의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 이후를 알고 있습니다. 심판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러함에도 22-23절에서 우리는 바울이 삶과 죽음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함께 읽습니다.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바울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습니다. 죽어서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은 개인적인 소망이 있지만,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살아서 돕고 싶은 생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죽어서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이 고민은 참된 성도라면 한두 번씩은 해봤을 고민일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을 사모하는 성도에게는 세상에 대한 애착과 미련이 없습니다. 어서 주님이 불러주셔서 주님과 영원히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런 고민은 참된 성도만이 할 수 있는 거룩한 고민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민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고민을 해보셨습니까? 이런 고민을 해보지 않은 성도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부족한 성도입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성도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성도는 세상살이를 그렇게 재미있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현실은 잃어버린 양을 구원하기 위해 늘 수고하고 애쓰고 고난 당하는 삶입니다.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나그네와 같은 삶입니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양을 구원하기 위해 늘 수고하고 애쓰며 살아가는 성도는 어서 주님 곁에 가서 영원한 쉼을 얻고 싶어 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현세의 삶과 내세의 삶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며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현실을 부정하는 염세주의자와 같은 삶을 살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참된 성도는 이 세상의 삶보다는 주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삶을 더 원한다는 말입니다. 참된 성도는 현실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지만, 그렇지만 현실의 삶에 집착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4절 함께 읽습니다.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바울은 천국을 다녀온 체험까지 했기에 개인적으로 볼 때,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자기에게 더 유익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살아서 교회를 위하여 일하는 편이 성도들을 위해 더 유익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사는 것이 아직 말씀 위에 견고히 뿌리를 내리지 못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더 유익함을 분명하게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26절 함께 읽습니다.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우리도 바울의 이런 정신을 본받아야 합니다. 성도는 삶의 목적이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성도는 잃어버린 양을 구원하기 위해 늘 수고하고 애쓰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성도의 삶의 목적이요 가치관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살고 계십니까? 바울과 같은 가치관과 목적을 가지고 살고 계십니까? 오늘, 이러한 의미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 성도 사이의 중보 기도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됩니다. 또한, 성도의 삶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잃어버린 양을 구원하는 삶이어야 함도 가슴 깊이 새깁니다.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성령의 권능을 부어 주옵소서. 그를 통해 모든 불의한 것들을 이겨내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랑이 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