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오늘 본문은 육체를 신뢰하는 율법주의자들에 대한 경계의 말씀과 성도가 가져야 할 기쁨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1. 먼저 1절 함께 읽습니다.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여기에서 ‘끝으로’라는 말은 끝이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이제는’, ‘더 나아가서’, ‘덧붙여서’라는 뜻입니다. “내가 앞에서 한 말씀들을 마음에 새겼다면 이제는”이라는 뜻입니다.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 안다면 이제는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의 이 권면 앞에서 좌절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날마다 기뻐하며 사는 것은 말처럼 쉽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우리가 기뻐하는 삶을 살도록 놓아두지 않습니다. 기쁨보다는 오히려 슬픔과 고통을 느낄 일이 훨씬 더 많습니다. 더욱이 이 서신의 수신자였던 당시 성도들은 극심한 박해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사는 그들에게 기뻐하라고 말씀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그저 인사치레로 하는 불가능한 권면으로 느껴질 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바울이 거저 인사치레로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힘주고 용기를 주려고 하는 소리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바울 자신도 환경을 초월하여 기뻐하는 삶을 살면서 이 교훈을 주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매를 맞으면서도,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기뻐하는 생활을 했습니다(행 16:25).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무고하게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럼에도 기뻐했습니다(2:17-18).
그리고 그는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자신의 이 기쁨의 근원을 지금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주 안에서’입니다. 지금 바울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기쁨의 근원은 ‘주 안에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 안에서’라는 말은 아무 일에나 기뻐할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곧 ‘기쁨의 범위’와 동시에 ‘기쁨의 질’을 제한하는 말씀이 됩니다. ‘기쁨의 범위’를 제한한다는 것은 기뻐하는 삶을 살되,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맺어지는 복음의 열매를 바라보며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기쁨의 질’을 제한한다는 것은 기뻐하는 삶을 살되, 세상이 주는 세상적인 기쁨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기쁨으로 인해서 기뻐하는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오직 주님을 온전히 믿고 섬기는 가운데, 주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세상이 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주님 안에서의 특별한 기쁨을 인해서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누려야 할 참된 기쁨은 오직 ‘주 안에서’만 누릴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 없는 세상에도 기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누리는 그런 기쁨은 허무한 것이며 꾸며진 기쁨입니다. 그 기쁨은 상황이 변하거나, 형편이 변하고, 기분이 변하면 곧 사라져 버리는 신기루와 같은 것입니다. 기쁨처럼 보이지만 참 기쁨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그렇지 않습니다. 상황이 변하고, 형편이 변하고, 또 다른 무엇이 변한다고 할지라도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는 기쁨입니다. 예를 들면, 한 아이가 엄마를 따라 시장에 갔다가 그만 길을 잃었습니다. 여기저기서 팔고 있는 신기한 물건들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려서 엄마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때 아이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주위에서 팔고 있는 신기한 물건을 구경하는 것이 즐겁게 느껴졌겠습니까? 오히려 그렇게 재미있게만 느껴지던 것들이 두렵게 느껴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것들에게 마음을 빼앗겨 엄마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시장 구경이 재미있었던 것도, 또 집을 떠나 나들이 하는 일이 즐거운 것도 엄마가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엄마를 잃어버렸으니 그 어떤 일도 재미있거나 즐거운 일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느끼는 기쁨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주님 안에 있으며 주님과 함께 있으면 어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항상 기뻐할 수 있지만, 주님을 벗어나면 그래서 주님을 떠나있게 되면 그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없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처음부터 주님 안에서 살도록 지어진 존재입니다. 그 안에서만 기쁨을 누리도록 지어진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떠나서는 그 어디에서도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를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지금 나는 주님 안에 거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을 온전히 믿고 섬기며, 주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복된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2절에 ‘개들을 삼가고’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의 개로 상징되는 사람들은 성도들이 교제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치명적인 나쁜 영향을 주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무엇보다도 이들과의 교제를 삼가도록 성도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개들’은 집에서 기르는 개가 아니라 무리 지어 다니는 사나운 들개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특히 불량한 자들을 비유로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자들에 대한 주의를 요청하는 말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몇몇 예를 들면, 이사야 56:10-12입니다.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마시자 내일도 오늘 같이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 성도들을 통하여 자기 잇속만 챙기는 거짓 사도들과 교사들을 개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또 마태복음 7:6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무시하고 자기 정욕으로만 행하는 자들을 개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또 베드로 후서 2:22입니다.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죄를 회개하고서도 거듭 죄를 범하는 자들을 개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자기 잇속을 챙기고, 자기 정욕대로 행하고, 회개하고도 또 같은 죄를 반복하는 사람들이 바로 사도 바울이 ‘교제하지 말라’고 말하는 ‘개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분별하여 멀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그리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행악하는 자라는 말은 악한 일꾼이라는 뜻입니다. 이 역시 유대 율법주의자들과 거짓교사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양의 옷을 입고 속으로는 이리의 마음을 품은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그들에게 맺힌 삶의 열매가 악한 것들인지 선한 것들인지를 통해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몸을 상해하는 일’이란 종교 행위만을 강조한다는 뜻으로 자신이 할례받은 것을 자랑하던 자들입니다. 개역성경에는 이들을 ‘손할례당’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은혜보다 율법의 의식적인 행위만을 강조했습니다. 믿음은 없고 육신의 할례만을 중시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보다 외적인 행위만을 중요시하는 자들입니다. 또 실천은 없고 말만 앞세우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자들과의 교제를 삼가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든 성도들과는 친밀한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비록 불신자라도 그들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도 그들과의 교제를 완전히 단절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제를 삼가야 할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을 베풀어도, 복음을 전해도 소용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개들과 같은 자들, 행악하는 자들, 종교 행위만을 강조하는 손할례당과 같은 자들입니다. 이들과의 교제는 우리의 영혼을 괴롭게 하고 자칫 멸망으로 가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경계하고 이들과의 교제를 삼가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고 당당하게 말씀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오직 성령 안에서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임을 다시 한번 마음 깊이 새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우리를 믿음에서 떨어뜨리려는 많은 악한 자들의 간계를 성령의 권능으로 물리치고, 아버지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성령으로 봉사하고, 예수님으로 자랑하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신뢰함으로 허락하신 삶을 기쁨으로 살아가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오늘 본문은 육체를 신뢰하는 율법주의자들에 대한 경계의 말씀과 성도가 가져야 할 기쁨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1. 먼저 1절 함께 읽습니다.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여기에서 ‘끝으로’라는 말은 끝이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이제는’, ‘더 나아가서’, ‘덧붙여서’라는 뜻입니다. “내가 앞에서 한 말씀들을 마음에 새겼다면 이제는”이라는 뜻입니다.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 안다면 이제는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의 이 권면 앞에서 좌절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날마다 기뻐하며 사는 것은 말처럼 쉽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우리가 기뻐하는 삶을 살도록 놓아두지 않습니다. 기쁨보다는 오히려 슬픔과 고통을 느낄 일이 훨씬 더 많습니다. 더욱이 이 서신의 수신자였던 당시 성도들은 극심한 박해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사는 그들에게 기뻐하라고 말씀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그저 인사치레로 하는 불가능한 권면으로 느껴질 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바울이 거저 인사치레로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힘주고 용기를 주려고 하는 소리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바울 자신도 환경을 초월하여 기뻐하는 삶을 살면서 이 교훈을 주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매를 맞으면서도,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기뻐하는 생활을 했습니다(행 16:25).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무고하게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럼에도 기뻐했습니다(2:17-18).
그리고 그는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자신의 이 기쁨의 근원을 지금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주 안에서’입니다. 지금 바울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기쁨의 근원은 ‘주 안에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 안에서’라는 말은 아무 일에나 기뻐할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곧 ‘기쁨의 범위’와 동시에 ‘기쁨의 질’을 제한하는 말씀이 됩니다. ‘기쁨의 범위’를 제한한다는 것은 기뻐하는 삶을 살되,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맺어지는 복음의 열매를 바라보며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기쁨의 질’을 제한한다는 것은 기뻐하는 삶을 살되, 세상이 주는 세상적인 기쁨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기쁨으로 인해서 기뻐하는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오직 주님을 온전히 믿고 섬기는 가운데, 주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세상이 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주님 안에서의 특별한 기쁨을 인해서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누려야 할 참된 기쁨은 오직 ‘주 안에서’만 누릴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 없는 세상에도 기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누리는 그런 기쁨은 허무한 것이며 꾸며진 기쁨입니다. 그 기쁨은 상황이 변하거나, 형편이 변하고, 기분이 변하면 곧 사라져 버리는 신기루와 같은 것입니다. 기쁨처럼 보이지만 참 기쁨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그렇지 않습니다. 상황이 변하고, 형편이 변하고, 또 다른 무엇이 변한다고 할지라도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는 기쁨입니다. 예를 들면, 한 아이가 엄마를 따라 시장에 갔다가 그만 길을 잃었습니다. 여기저기서 팔고 있는 신기한 물건들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려서 엄마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때 아이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주위에서 팔고 있는 신기한 물건을 구경하는 것이 즐겁게 느껴졌겠습니까? 오히려 그렇게 재미있게만 느껴지던 것들이 두렵게 느껴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것들에게 마음을 빼앗겨 엄마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시장 구경이 재미있었던 것도, 또 집을 떠나 나들이 하는 일이 즐거운 것도 엄마가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엄마를 잃어버렸으니 그 어떤 일도 재미있거나 즐거운 일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느끼는 기쁨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주님 안에 있으며 주님과 함께 있으면 어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항상 기뻐할 수 있지만, 주님을 벗어나면 그래서 주님을 떠나있게 되면 그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없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처음부터 주님 안에서 살도록 지어진 존재입니다. 그 안에서만 기쁨을 누리도록 지어진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떠나서는 그 어디에서도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를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지금 나는 주님 안에 거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을 온전히 믿고 섬기며, 주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복된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2절에 ‘개들을 삼가고’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의 개로 상징되는 사람들은 성도들이 교제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치명적인 나쁜 영향을 주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무엇보다도 이들과의 교제를 삼가도록 성도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개들’은 집에서 기르는 개가 아니라 무리 지어 다니는 사나운 들개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특히 불량한 자들을 비유로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자들에 대한 주의를 요청하는 말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몇몇 예를 들면, 이사야 56:10-12입니다.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마시자 내일도 오늘 같이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 성도들을 통하여 자기 잇속만 챙기는 거짓 사도들과 교사들을 개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또 마태복음 7:6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무시하고 자기 정욕으로만 행하는 자들을 개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또 베드로 후서 2:22입니다.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죄를 회개하고서도 거듭 죄를 범하는 자들을 개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자기 잇속을 챙기고, 자기 정욕대로 행하고, 회개하고도 또 같은 죄를 반복하는 사람들이 바로 사도 바울이 ‘교제하지 말라’고 말하는 ‘개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분별하여 멀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그리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행악하는 자라는 말은 악한 일꾼이라는 뜻입니다. 이 역시 유대 율법주의자들과 거짓교사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양의 옷을 입고 속으로는 이리의 마음을 품은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그들에게 맺힌 삶의 열매가 악한 것들인지 선한 것들인지를 통해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몸을 상해하는 일’이란 종교 행위만을 강조한다는 뜻으로 자신이 할례받은 것을 자랑하던 자들입니다. 개역성경에는 이들을 ‘손할례당’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은혜보다 율법의 의식적인 행위만을 강조했습니다. 믿음은 없고 육신의 할례만을 중시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보다 외적인 행위만을 중요시하는 자들입니다. 또 실천은 없고 말만 앞세우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자들과의 교제를 삼가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든 성도들과는 친밀한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비록 불신자라도 그들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도 그들과의 교제를 완전히 단절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제를 삼가야 할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을 베풀어도, 복음을 전해도 소용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개들과 같은 자들, 행악하는 자들, 종교 행위만을 강조하는 손할례당과 같은 자들입니다. 이들과의 교제는 우리의 영혼을 괴롭게 하고 자칫 멸망으로 가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경계하고 이들과의 교제를 삼가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고 당당하게 말씀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오직 성령 안에서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임을 다시 한번 마음 깊이 새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우리를 믿음에서 떨어뜨리려는 많은 악한 자들의 간계를 성령의 권능으로 물리치고, 아버지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성령으로 봉사하고, 예수님으로 자랑하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신뢰함으로 허락하신 삶을 기쁨으로 살아가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