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 설교

31.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계 11:1-3)

우인택 목사
2020-11-19
조회수 2702
1.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2.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1. 지난 시간에 사도 요한에게 ‘입에는 꿀같이 다나 배에서는 쓴 작은 두루마리’를 먹게 하고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고 말한 천사가 이제는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는 명령을 했습니다(1절).
보통 ‘측량’은 자신의 소유를 확인하기 위해 합니다.
측량을 통해 자신의 소유를 확인하고, 공식적으로 타인의 침범을 방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지금 이런 명령을 하신 것은 이 측량의 대상들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를 받을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금 무엇을 측량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
특히,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당시에는 이미 성전이 사라졌었기 때문에 여기에서의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은 ‘교회와 성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를 보호하실 것을 측량이라는 방법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환상을 통해 당시 극심한 박해 가운데 있던 초대교회 성도들을 위로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2. 그런데, 2절 함께 읽습니다.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의 ‘성전 바깥 마당’은 ‘이방인의 뜰’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냥 두라’는 말은 ‘던져 버리라’라는 뜻입니다.
이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성전 밖의 마당을 밖으로 던져버리라’입니다.
성전 바깥 마당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에서 제외되었고 그로 인해 성전 바깥 마당은 이방인들에게 마흔두 달 동안 짓밟히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성도들이 알고 있던 예루살렘 성전은 모두 네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그 중에서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의 한계는 ‘이방인의 뜰’ 까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의 뜰은 회당 모임과 율법을 토론하는 장소로도 쓰였지만, 이방인들이 성전을 구경하기 위한 관광지의 일부분이었습니다.
성전에 예배를 드리기 위한 목적 보다는 관광하기 위해 온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성전 바깥 마당, 곧 이방인의 뜰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 바깥 마당을 보호하지 않겠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명목상의 성도, 곧 거짓 성도를 참 성도와 구별하여 보호하지 않을 것임을 계시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도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거룩한 교회에 온전히 속하지 않고, 교회와 세상에 두 발을 딛고 있는 자들을 참 성도들과 구분하여 심판의 날에 보호하지 않을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농부가 곡식과 가라지, 둘 다 추수할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지만, 추수 때가 되면 둘을 구분하여 서로 다른 운명에 놓이게 될 것임을 말씀하셨듯이(마 13:24-30), 지금은 교회 안에 참 성도와 거짓 성도가 함께 공존하도록 허용하시지만, 마지막 때에는 그 둘을 구분하여 서로 다른 운명에 처하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교회에 출석하는 자들이 모두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는 알곡과 가라지가 교회 안에 함께 공존하는 것을 교회역사를 통해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많은 이단들은 교회 안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요일 2:18-19).
또한, 중세의 타락한 교회들과 유럽제국들의 무자비한 식민지 개척에 앞장선 당시 교회들에서도 그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또, 지금도 교회를 계모임이나 사업의 수단으로 삼아 교회에 출석하는 거짓 성도들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심판의 날이 오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믿는다는 이름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참 성도와 구별하실 것입니다.
어떤 곡식이든지 어릴 때에는 잘 분별이 되지 않지만 결실기가 되면 확연하게 그 본연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3. 그런데 2절 후반부에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성전 바깥 마당을 측량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그곳을 이방인에게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이방인에게 마흔두 달 동안 짓밟히는 대상은 진실한 성도가 아니라 교회에 속했으나 실상은 거짓 성도인 자들입니다.
이러한 박해에 대해 예수님께서도 예언하셨는데, 누가복음 21:24에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들은 잠깐 동안 하나님의 교회를 짓밟고, 세상을 차지하고 군림하며, 심지어 교회에서도 그들의 입지가 절대적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성공은 비록 가라지가 논밭을 가득 채웠다 할지라도 그것들이 추수 때에는 모두 다 불살라지는 것과 같이
잠깐 부러움의 대상은 될 수 있으나 반드시 대가를 치르고 허무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마흔두 달’은 종말의 때에 교회가 세상 사람들의 핍박에 시달릴 기간을 상징하는데, 이 숫자는 성경 곳곳에 나타나는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마흔두 달’은 ‘1,260일’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1,260일이 두 번 언급됩니다(11:3, 12:6)
그리고 한 달을 30일로 계산하면 ‘3년 반’, 곧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로도 나타납니다(12:14).
구약성경 다니엘에도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가 언급됩니다.
그러나 이 기간은 실제 기간을 나타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세상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이나 교회가 짓밟히는 시기를 예언하기 위해 사용된 묵시적인 숫자입니다.
그런데 이 기간은 BC 168년 6월부터 BC 165년 12월까지 자행되었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예루살렘 압제 기간과 일치합니다.
그래서 이 때문에 이후로 ‘마흔두 달’은 악이 마음대로 활개치도록 허락된 짧은 기간을 상징하는 전통적인 숫자가 되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성전 바깥 마당에 있는 사람들, 곧 비록 겉으로는 교회에 속했으나 참 성도가 아닌 자들이 악인들에게 짓밟히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에 교회가 박해를 받는 것은 참 믿음 때문이 아니라 형식적인 종교인으로 타락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락한 교회를 세상사람들이 박해를 하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마흔두 달’ 동안 박해를 받도록 버려두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를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교회가 거룩을 잃어버리면 예수님 당시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된 것처럼 가짜 신앙인들의 알력의 장소로 변질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교회는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에서 벗어나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지탄의 대상이 되고, 그로 인해 거짓 성도뿐만 아니라 참 성도들도 함께 박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4. 그 때에 하나님께서 ‘두 증인’을 세우신다고 말씀합니다.
3절 함께 읽습니다.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그런데 두 증인은 굵은 베옷을 입었습니다.
굵은 베옷은 회개할 때나 크게 애통할 일이 있을 때 입는 옷입니다(렘 4:8).
그러므로 두 증인이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한다는 것은 이들이 세상에 대하여 회개를 선포함을 의미합니다.
회개는 세례 요한의 핵심 메시지이자(마 3:1-2),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처음하신 선포의 말씀입니다(마 4:17).
또한 오순절에 각국에서 온 경건한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물은 것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이었습니다(행 2:37-38).
이처럼 회개는 죄인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한 필수요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거룩한 성을 짓밟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회개만이 그들을 살릴 수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두 증인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어떤 말씀을 전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부자가 될 것’이라는 말이나 ‘병이 낫는다’라는 말보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라’고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을 죄에서 돌이키게 하는 진리의 선포가 우리들에게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이 원하는 말이 아닌 그들에게 필요한 말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두 증인이 굵은 베옷을 입은 것은 그들이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입으로 회개를 외치면서 좋고 화려한 옷을 입고 다닐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주어진 임무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입으로 회개와 순결과 거룩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향락과 탐욕에 빠진 삶을 산다면 누가 우리가 전하는 말을 믿겠습니까?
사랑을 말하면서 자기 몫을 챙긴다면 누가 우리를 믿고 의지하겠습니까?
회개의 열매인 거룩과 아가페 사랑을 겸비한 성도만이 구원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때 교회는 세상 속에서 빛이 될 수 있습니다.
부를 추구하는 교회, 양적인 부흥에만 가치를 두는 교회는 세상을 움직일 만한 능력을 이미 상실한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들은 세상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을 외치기 전에 스스로 굵은 베옷을 입을 줄 아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특권중의 특권이지만, 동시에 눈물과 회개 없이는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향해 회개를 선포하되 먼저 자신의 죄를 고백하여 회개하고 이웃을 향해 애통해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세상 사람들에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이 땅에 보내진 사람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5. 마지막으로 두 증인이 회개를 촉구하는 기간은 1,260일입니다.
이것은 앞서 2절에 언급된 교회가 박해를 받는 마흔두 달과 같은 기간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로마서 5:20 말씀처럼 이 기간은 교회가 심한 박해를 받는 기간인 동시에 교회가 회개를 선포하며 강력하게 복음을 증거하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떠한 때를 살고 있습니까?
지금 우리가 성도로서 살아야 할 삶은 어떤 삶입니까?
앞으로 우리 교회가 반드시 지켜야 할 예수님의 명령은 무엇입니까?
더 나아가 나는 ‘알곡’입니까, ‘죽정이’입니까?
혹시 ‘가라지’는 아닙니까?
오늘, 하나님의 측량 안에 거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두 증인처럼 굵은 베옷을 입고 복음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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