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지난시간에 우리는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찬양한 말씀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1. 이어서 오늘 본문이 13-14절에 횐 옷을 입은 사람들에 대한 한 장로와 사도요한의 문답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어떤 내용을 두고 문답하는 방식은 현재 다루고 있는 내용을 더욱 강조하고자 할 때 자주 사용하는 일종의 히브리 묵시 문학의 표현기법입니다(렘 1:11, 겔 37:3, 암 7:8, 슥 4:2,4,5).
그러므로 횐 옷을 입은 사람들에 대해 이러한 문답이 있었다는 것은 그들의 존재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하여 14절에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의 ‘큰 환난’이란 일차적으로는 마지막 때의 대환난을 의미하지만, 이 사람들이 9절의 ‘횐 옷 입은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와 동일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모든 시대에서 고난을 통과한 구원받은 모든 성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 그들은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말씀합니다.
‘어린 양의 피로 옷을 씻었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음을 믿고 죄사함을 받아 거룩하고 정결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어린양의 피로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성도란 어린 양의 피로 죄사함을 받아 정결하게 되고 예수님의 삶을 이어받은 존재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현상을 거듭남이라고 말씀하셨고 사도바울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다 잘 아시는 것이지만 다시 한 번 설명한다면 인간들은 본래 자기의 죄악을 스스로는 씻을 수 없고 마침내 그 죄악으로 인하여
영원한 멸망에 처해져야 할 운명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자신들의 죄악으로 허 망하게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자기의 죄를 씻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는데, 그 길이 바로 예수님으로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죽는 대신 그를 믿는 자마다 그의 보혈로 죄를 씻어 주시고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오늘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 말씀인가를 생각하면서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과 기꺼이 그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 깊은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구원의 길을 세상에 널리 알림으로써 지금 이 시간에도 허망한 것들로 자기의 죄를 씻어보려는 수많은 영혼들을 진정한 죄 씻음과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2. 이어지는 15절부터 17절까지는 천국에서의 삶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15절에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신다’는 표현은 구원 받은 성도들과 하나님께서 함께 거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천국에서 성도들은 할일 없이 게으름을 피우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제사장으로서의 일을 하리라는 것입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마지막 22장에는 성도들이 예수님을 섬기되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3,5절).
그러므로 성도들은 장차 천국에서 왕과 제사장으로서의 영광과 지위를 누리게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천국에서의 왕과 제사장은 이 땅에서의 왕과 제사장들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제사장들은 죄사함을 위해 희생제물을 잡는 등의 일을 해야 하지만 천국에서의 제사장은 그러한 일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모든 죄와 사망이 사라진 곳으로 더 이상 어떠한 희생제물도 필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의 왕들은 전쟁의 위험을 앞두고 고민하고, 철마다 때마다 홍수나 가뭄과 같은 재해를 염려하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늘 주위를 경계하며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천국에서의 왕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장차 열릴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의 평강이 충만한 곳으로 그야말로 생명수가 흐르며(계 22:1,2) 사자가 어린 양과 뛰노는(사 11:6- 8) 참으로 평화로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6절에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49:10의 예언과 동일한 것으로 천국에는 모든 것이 풍요하나 없는 것도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배고픔과 목마름과 추위와 더위 등의 고통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땅은 태초에 인간의 범죄로 인해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하늘의 기후까지도 추위와 더위가 반복되는 곳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창 3:17,18; 8:22).
하지만 이제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능력으로 처음의 모든 것이 지나가고 만물이 새롭게 된 천국에서는 이러한 것들은 물론 아픈 것이나 눈물과 같은 일체의 부정적인 것들이 모두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또한 천국의 모습을 묘사한 21장 말씀들을 더 살펴보면 죄와 사망까지도 모두 사라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계 21:4,8).
물론 천국에는 그와 더불어 우리가 죄악 속에서 누리던 욕망과 쾌락도 더 이상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고 겪는 모든 육신적인 쾌락이나 즐거움은 물론 고통과 고난까지도 잠시 있다 사라질 안개일 뿐이라 할 수 있습니다(벧전 1:6).
죄가 사라지면 그 죄와 함께 사라질 것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사실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눈앞의 쾌락이나 고통이 마치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물론 심지어 성도들까지 잠시의 쾌락을 위해 죄와 실수를 저지르고 또 잠시의 고난을 견디지 못하여 믿음을 저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우리는 눈앞에 고난이나 쾌락이 있을 때 좀 더 눈을 크게 뜨고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의 쾌락은 물론 고난조차도 조금만 견디면 된다는 시실을 기억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사탄의 유혹에 속지 말고 오직 믿음을 지키고 진리를 따름으로써 땅에서는 잠시 고난을 받으나 하늘에서는 영원한 복을 누리는 성도다운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히 11:25.26).
3. 마지막으로 17절에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의 그들은, 이 땅에 있을 때 복음과 믿음을 위해 주리며 목마르고 애통하며 눈물 흘리는 고난과 함께 심지어 생명까지 빼앗겼던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알 것은 참된 성도는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딤후 3:12).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심지어 성도들 가운데에도 땅에서는 부자처럼 살고 죽어 천국에 가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나사로처럼 살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눅 16:19-22).
물론 가급적이면 고난은 적게 받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될 수 있다면 믿음을 지키면서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안락하고 풍족한 삶만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과 진리를 위해 고난을 겪어야 하는 길이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락함과 풍성함만을 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심으로(고후 8:9) 배부른 때보다 주리고 목마르신 때가 더 많았습니다(마 8:20).
사도바울 역시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고전 4:10-13).
물론 예수님이나 바울시대는 지금에 비하여 사회 전체적으로 훨씬 가난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삶을 예수님이나 바울의 삶처럼 살라는 것은 합당하게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이나 바울도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대접을 받으며 사실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예수님이나 사도바울은 그러한 삶을 원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물론 그것은 오직 복음을 위해서였습니다.
복음을 위해 스스로 고난의 삶을 자처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흰 옷 입은 성도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분들이 이 땅에서 복음을 위해 그러한 희생을 감내하셨기에 천국에서 생명수를 마시며, 다시는 슬픔과 고통이 없는 영원한 복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며 물질적 축복만을 구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성도의 길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야 합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고난도 마다하지 않으며, 현실의 안락함과 행복마저도 스스로 버릴 수 있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장차 천국에서 눈물을 닦아주러 재림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복음과 믿음을 위한 상처와 흔적으로 큰 위로와 상급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너무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복음으로 인한 고난은 두렵고 아프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시험을 주실 때 이길 힘을 주시고, 또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피할 길을 열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고난가운데 오히려 더 큰 기쁨을 누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하기에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4:4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했던 것입니다.
이 믿음 붙잡고 성도의 길을 힘차게 걷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지난시간에 우리는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찬양한 말씀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1. 이어서 오늘 본문이 13-14절에 횐 옷을 입은 사람들에 대한 한 장로와 사도요한의 문답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어떤 내용을 두고 문답하는 방식은 현재 다루고 있는 내용을 더욱 강조하고자 할 때 자주 사용하는 일종의 히브리 묵시 문학의 표현기법입니다(렘 1:11, 겔 37:3, 암 7:8, 슥 4:2,4,5).
그러므로 횐 옷을 입은 사람들에 대해 이러한 문답이 있었다는 것은 그들의 존재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하여 14절에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의 ‘큰 환난’이란 일차적으로는 마지막 때의 대환난을 의미하지만, 이 사람들이 9절의 ‘횐 옷 입은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와 동일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모든 시대에서 고난을 통과한 구원받은 모든 성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 그들은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말씀합니다.
‘어린 양의 피로 옷을 씻었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음을 믿고 죄사함을 받아 거룩하고 정결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어린양의 피로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성도란 어린 양의 피로 죄사함을 받아 정결하게 되고 예수님의 삶을 이어받은 존재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현상을 거듭남이라고 말씀하셨고 사도바울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다 잘 아시는 것이지만 다시 한 번 설명한다면 인간들은 본래 자기의 죄악을 스스로는 씻을 수 없고 마침내 그 죄악으로 인하여
영원한 멸망에 처해져야 할 운명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자신들의 죄악으로 허 망하게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자기의 죄를 씻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는데, 그 길이 바로 예수님으로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죽는 대신 그를 믿는 자마다 그의 보혈로 죄를 씻어 주시고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오늘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 말씀인가를 생각하면서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과 기꺼이 그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 깊은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구원의 길을 세상에 널리 알림으로써 지금 이 시간에도 허망한 것들로 자기의 죄를 씻어보려는 수많은 영혼들을 진정한 죄 씻음과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2. 이어지는 15절부터 17절까지는 천국에서의 삶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15절에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신다’는 표현은 구원 받은 성도들과 하나님께서 함께 거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천국에서 성도들은 할일 없이 게으름을 피우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제사장으로서의 일을 하리라는 것입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마지막 22장에는 성도들이 예수님을 섬기되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3,5절).
그러므로 성도들은 장차 천국에서 왕과 제사장으로서의 영광과 지위를 누리게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천국에서의 왕과 제사장은 이 땅에서의 왕과 제사장들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제사장들은 죄사함을 위해 희생제물을 잡는 등의 일을 해야 하지만 천국에서의 제사장은 그러한 일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모든 죄와 사망이 사라진 곳으로 더 이상 어떠한 희생제물도 필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의 왕들은 전쟁의 위험을 앞두고 고민하고, 철마다 때마다 홍수나 가뭄과 같은 재해를 염려하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늘 주위를 경계하며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천국에서의 왕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장차 열릴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의 평강이 충만한 곳으로 그야말로 생명수가 흐르며(계 22:1,2) 사자가 어린 양과 뛰노는(사 11:6- 8) 참으로 평화로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6절에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49:10의 예언과 동일한 것으로 천국에는 모든 것이 풍요하나 없는 것도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배고픔과 목마름과 추위와 더위 등의 고통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땅은 태초에 인간의 범죄로 인해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하늘의 기후까지도 추위와 더위가 반복되는 곳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창 3:17,18; 8:22).
하지만 이제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능력으로 처음의 모든 것이 지나가고 만물이 새롭게 된 천국에서는 이러한 것들은 물론 아픈 것이나 눈물과 같은 일체의 부정적인 것들이 모두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또한 천국의 모습을 묘사한 21장 말씀들을 더 살펴보면 죄와 사망까지도 모두 사라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계 21:4,8).
물론 천국에는 그와 더불어 우리가 죄악 속에서 누리던 욕망과 쾌락도 더 이상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고 겪는 모든 육신적인 쾌락이나 즐거움은 물론 고통과 고난까지도 잠시 있다 사라질 안개일 뿐이라 할 수 있습니다(벧전 1:6).
죄가 사라지면 그 죄와 함께 사라질 것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사실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눈앞의 쾌락이나 고통이 마치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물론 심지어 성도들까지 잠시의 쾌락을 위해 죄와 실수를 저지르고 또 잠시의 고난을 견디지 못하여 믿음을 저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우리는 눈앞에 고난이나 쾌락이 있을 때 좀 더 눈을 크게 뜨고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의 쾌락은 물론 고난조차도 조금만 견디면 된다는 시실을 기억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사탄의 유혹에 속지 말고 오직 믿음을 지키고 진리를 따름으로써 땅에서는 잠시 고난을 받으나 하늘에서는 영원한 복을 누리는 성도다운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히 11:25.26).
3. 마지막으로 17절에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의 그들은, 이 땅에 있을 때 복음과 믿음을 위해 주리며 목마르고 애통하며 눈물 흘리는 고난과 함께 심지어 생명까지 빼앗겼던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알 것은 참된 성도는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딤후 3:12).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심지어 성도들 가운데에도 땅에서는 부자처럼 살고 죽어 천국에 가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나사로처럼 살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눅 16:19-22).
물론 가급적이면 고난은 적게 받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될 수 있다면 믿음을 지키면서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안락하고 풍족한 삶만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과 진리를 위해 고난을 겪어야 하는 길이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락함과 풍성함만을 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심으로(고후 8:9) 배부른 때보다 주리고 목마르신 때가 더 많았습니다(마 8:20).
사도바울 역시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고전 4:10-13).
물론 예수님이나 바울시대는 지금에 비하여 사회 전체적으로 훨씬 가난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삶을 예수님이나 바울의 삶처럼 살라는 것은 합당하게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이나 바울도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대접을 받으며 사실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예수님이나 사도바울은 그러한 삶을 원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물론 그것은 오직 복음을 위해서였습니다.
복음을 위해 스스로 고난의 삶을 자처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흰 옷 입은 성도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분들이 이 땅에서 복음을 위해 그러한 희생을 감내하셨기에 천국에서 생명수를 마시며, 다시는 슬픔과 고통이 없는 영원한 복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며 물질적 축복만을 구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성도의 길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야 합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고난도 마다하지 않으며, 현실의 안락함과 행복마저도 스스로 버릴 수 있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장차 천국에서 눈물을 닦아주러 재림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복음과 믿음을 위한 상처와 흔적으로 큰 위로와 상급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너무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복음으로 인한 고난은 두렵고 아프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시험을 주실 때 이길 힘을 주시고, 또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피할 길을 열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고난가운데 오히려 더 큰 기쁨을 누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하기에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4:4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했던 것입니다.
이 믿음 붙잡고 성도의 길을 힘차게 걷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