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지난주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십사만 사천은 구원받은 성도 모두를 상징하는 숫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1. 이어서 사도요한은 9절에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셀 수 없이 많은 큰 무리를 보았다고 증언합니다.
이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라와 민족과 언어 등 모든 장벽을 넘어 땅 끝까지 퍼져나갈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놀라운 역사가 시간이 흐르면 과연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물론 대답은 ‘아니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14에서 분명하게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기까지는 종말이 올 수 없고 반드시 먼저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열매를 맺은 다음에야 수확을 위해 예수님께서 천사들과 함께 재림하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속히 뵙고 싶다면 부지런히 복음을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해야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다니엘서 벨사살 왕의 삶을 설교하면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은혜는 우리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빨리 올 수도 있고 늦게 올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는 우리의 이러한 노력이 태초부터 정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재림과 심판을 연기하시는 것은 오직 모든 인류가 구원 얻기를 원하시기 때문인데(벧후 3:9), 복음이 완전히 전해지면 더 이상 기다리실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보다 더한 열심으로 부지런히 복음을 증거함으로써 계획된 모든 영혼들이 구원의 방주에 들어오면, 누구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는 한시도 지체하지 않으시고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만일 진정으로 예수님을 속히 뵙고 싶다면, 막연히 앉아서 예수님의 재림이 더디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뵙기 원하는 마음이 간절할수록 더 열심히, 더 부지런히 복음을 증거함으로써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의 방주에 들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성도의 본분입니다.
2. 이어지는 말씀에 온 땅의 구원받은 백성들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는데,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흰 옷’은 귀족이나 제사장들이 입는 긴 옷을 가리키며, ‘종려 가지’는 승리와 영광을 의미합니다(요 12:13).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흰 옷을 입고 종려 가지를 들었다는 것은 계시록 5:10에 언급된 찬양처럼 그들이 이제 왕과 제사장으로서의 지위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요한은 이러한 모습을 한 그들이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있다고 말씀하는데 이것은 제7장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왜냐하면 이 한마디 속에 6장 마지막 절에 제시된 질문에 대한 모든 답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6장 마지막 절을 보면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높고 낮음의 구분 없이 모두 대재앙의 날에 산과 바위틈에 숨어 “누가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과 어린 양의 진노에서 능히 서리요”라고 물었습니다(계 6:17).
그리고 사도요한은 바로 이에 대한 대답을 여기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만이 이처럼 당당하게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10절에 천지가 울릴 만큼 큰소리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찬양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한 구절 속에서 마지막 대심판이 있는 날, 산과 바위틈에 숨어 떨며 탄식하는 무리와 하나님과 예수님 앞에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찬양하는 사람들의 대조적인 모습을 생생하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6장에 언급된 사람들은 대개 왕과 귀족, 부자 등 참으로 많은 것을 가진 자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굴과 바위틈으로 숨을 수밖에 없었는데, 어찌하여 성도들은 이처럼 당당하게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양 앞에 설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도대체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고의 차이’입니다.
바위틈에 숨은 자들은 복음을 들었을 때 이를 거절한 자들이고, 흰 옷을 입고 종려 가지를 든 사람들은 복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어찌 보면 한 순간의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보듯 그 한 순간의 차이가 이처럼 엄청난 결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류에게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선물은 바로 예수임과 복음이고 우리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날은 그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서 생일도 중요하고, 결혼기념일도 중요하고, 기타 많은 날들이 중요하지만, 그 무엇보다 예수님을 만나고 영접한 날이 가장 소중한 날임을 알고, 그때 그 믿음을 더욱 귀하게 가꾸고 키워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가 누군가의 고마운 전도를 통해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부지런히 복음을 전함으로써 이 놀랍고 귀한 구원의 은혜를 더 많은 영혼들이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를 받은 자의 본분입니다.
3. 이어지는 10절에 구원받은 수많은 무리들이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수많은 무리가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찬양하는 모습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많은 무리가 종려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던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요 12:13).
그러므로 ‘구원이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있도다’라는 이 찬양은 당시 땅에서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라고 외치던 자들에 대한 응답이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땅에서의 ‘호산나’가 질병으로 죽어 가는 자의 절망적인 호소였다면 지금 이 찬양은 완전히 병에서 회복되어 생명을 얻은 자가 부르는 기쁨의 노래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도 장차 예수님이 다시 오시고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면 이 무리들 가운데 합류하여 이 찬양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콧등이 시려옵니다.
그날에, 우리보다 먼저 주님을 믿다가 주님 곁으로 간, 셀 수 없는 믿음의 선진들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이 땅에 살 때 예수님께서 유일한 구주이심을 믿고 또 증거하다가 하나님이 정하신 수한이 다 되어서, 혹은 세상의 박해를 받고 순교하여 예수님 곁에 간 분들입니다.
이분들은 지금 예수님 곁에서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고 있을 것이며, 장차 예수님의 재림의 날이 되면 우리도 그들과 함께 하나님과 예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11-12절 함께 읽습니다.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구원받은 무리들의 찬양이 끝나자 네 생물과 장로들 주위에 있던 천사들이 일제히 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러한 천사들의 찬양은 성도들의 찬양에 대한 화답송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도들과 천사들의 찬양은 요한계시록 5장, 14장, 15장, 19장에 계속해서 반복하여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통해 천국의 삶을 여러 가지로 표현될 수 있겠지만 그중에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기독교를 타종교와 구분짓는 뚜렷한 특징이기도 합니다.
타종교를 믿는 사람들이나 세상 사람들은 천당, 혹은 극락이라 하면 단지 고통이 없는 상태에서 부족함 없이 잘 먹고 잘 사는 곳으로만 생각하는데 반해 성경에서 보여주는 천국의 삶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그 특징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는 사도바울의 말씀처럼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을 누리며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교제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롬 14:17).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들이 천국을 세상 사람들처럼 부귀영화를 누리는 곳으로 상상합니다.
입으로는 천국을 사모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구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보다는 이 땅의 것들이 훨씬 더 많이 구합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천국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면 먼저는 성경에 기록된 천국이 어떠한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온 몸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날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러한 찬양과 경배를 기쁠 때나 즐거울 때는 물론, 슬프고 어려울 때도 멈추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늘 교회에 함께 모여 말씀과 친교의 교제를 나누고 하나님을 찬송함으로 세상의 칭송을 받았던 초대교회 성도들처럼(행 2:46,47), 심지어 감옥에서도 찬양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드러냈던 바울과 실라처럼(행 16:24-40), 여러분도 이러한 감사와 찬양을 통해 여러분의 삶은 물론이고 어두운 이 땅을 천국의 기쁨으로 채우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천국은 오직 믿는 자들을 위해 예비된 곳임을 항상 기억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지난주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십사만 사천은 구원받은 성도 모두를 상징하는 숫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1. 이어서 사도요한은 9절에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셀 수 없이 많은 큰 무리를 보았다고 증언합니다.
이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라와 민족과 언어 등 모든 장벽을 넘어 땅 끝까지 퍼져나갈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놀라운 역사가 시간이 흐르면 과연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물론 대답은 ‘아니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14에서 분명하게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기까지는 종말이 올 수 없고 반드시 먼저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열매를 맺은 다음에야 수확을 위해 예수님께서 천사들과 함께 재림하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속히 뵙고 싶다면 부지런히 복음을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해야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다니엘서 벨사살 왕의 삶을 설교하면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은혜는 우리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빨리 올 수도 있고 늦게 올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는 우리의 이러한 노력이 태초부터 정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재림과 심판을 연기하시는 것은 오직 모든 인류가 구원 얻기를 원하시기 때문인데(벧후 3:9), 복음이 완전히 전해지면 더 이상 기다리실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보다 더한 열심으로 부지런히 복음을 증거함으로써 계획된 모든 영혼들이 구원의 방주에 들어오면, 누구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는 한시도 지체하지 않으시고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만일 진정으로 예수님을 속히 뵙고 싶다면, 막연히 앉아서 예수님의 재림이 더디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뵙기 원하는 마음이 간절할수록 더 열심히, 더 부지런히 복음을 증거함으로써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의 방주에 들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성도의 본분입니다.
2. 이어지는 말씀에 온 땅의 구원받은 백성들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는데,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흰 옷’은 귀족이나 제사장들이 입는 긴 옷을 가리키며, ‘종려 가지’는 승리와 영광을 의미합니다(요 12:13).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흰 옷을 입고 종려 가지를 들었다는 것은 계시록 5:10에 언급된 찬양처럼 그들이 이제 왕과 제사장으로서의 지위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요한은 이러한 모습을 한 그들이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있다고 말씀하는데 이것은 제7장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왜냐하면 이 한마디 속에 6장 마지막 절에 제시된 질문에 대한 모든 답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6장 마지막 절을 보면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높고 낮음의 구분 없이 모두 대재앙의 날에 산과 바위틈에 숨어 “누가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과 어린 양의 진노에서 능히 서리요”라고 물었습니다(계 6:17).
그리고 사도요한은 바로 이에 대한 대답을 여기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만이 이처럼 당당하게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10절에 천지가 울릴 만큼 큰소리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찬양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한 구절 속에서 마지막 대심판이 있는 날, 산과 바위틈에 숨어 떨며 탄식하는 무리와 하나님과 예수님 앞에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찬양하는 사람들의 대조적인 모습을 생생하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6장에 언급된 사람들은 대개 왕과 귀족, 부자 등 참으로 많은 것을 가진 자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굴과 바위틈으로 숨을 수밖에 없었는데, 어찌하여 성도들은 이처럼 당당하게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양 앞에 설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도대체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고의 차이’입니다.
바위틈에 숨은 자들은 복음을 들었을 때 이를 거절한 자들이고, 흰 옷을 입고 종려 가지를 든 사람들은 복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어찌 보면 한 순간의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보듯 그 한 순간의 차이가 이처럼 엄청난 결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류에게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선물은 바로 예수임과 복음이고 우리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날은 그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서 생일도 중요하고, 결혼기념일도 중요하고, 기타 많은 날들이 중요하지만, 그 무엇보다 예수님을 만나고 영접한 날이 가장 소중한 날임을 알고, 그때 그 믿음을 더욱 귀하게 가꾸고 키워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가 누군가의 고마운 전도를 통해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부지런히 복음을 전함으로써 이 놀랍고 귀한 구원의 은혜를 더 많은 영혼들이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를 받은 자의 본분입니다.
3. 이어지는 10절에 구원받은 수많은 무리들이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수많은 무리가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찬양하는 모습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많은 무리가 종려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던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요 12:13).
그러므로 ‘구원이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있도다’라는 이 찬양은 당시 땅에서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라고 외치던 자들에 대한 응답이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땅에서의 ‘호산나’가 질병으로 죽어 가는 자의 절망적인 호소였다면 지금 이 찬양은 완전히 병에서 회복되어 생명을 얻은 자가 부르는 기쁨의 노래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도 장차 예수님이 다시 오시고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면 이 무리들 가운데 합류하여 이 찬양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콧등이 시려옵니다.
그날에, 우리보다 먼저 주님을 믿다가 주님 곁으로 간, 셀 수 없는 믿음의 선진들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이 땅에 살 때 예수님께서 유일한 구주이심을 믿고 또 증거하다가 하나님이 정하신 수한이 다 되어서, 혹은 세상의 박해를 받고 순교하여 예수님 곁에 간 분들입니다.
이분들은 지금 예수님 곁에서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고 있을 것이며, 장차 예수님의 재림의 날이 되면 우리도 그들과 함께 하나님과 예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11-12절 함께 읽습니다.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구원받은 무리들의 찬양이 끝나자 네 생물과 장로들 주위에 있던 천사들이 일제히 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러한 천사들의 찬양은 성도들의 찬양에 대한 화답송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도들과 천사들의 찬양은 요한계시록 5장, 14장, 15장, 19장에 계속해서 반복하여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통해 천국의 삶을 여러 가지로 표현될 수 있겠지만 그중에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기독교를 타종교와 구분짓는 뚜렷한 특징이기도 합니다.
타종교를 믿는 사람들이나 세상 사람들은 천당, 혹은 극락이라 하면 단지 고통이 없는 상태에서 부족함 없이 잘 먹고 잘 사는 곳으로만 생각하는데 반해 성경에서 보여주는 천국의 삶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그 특징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는 사도바울의 말씀처럼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을 누리며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교제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롬 14:17).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들이 천국을 세상 사람들처럼 부귀영화를 누리는 곳으로 상상합니다.
입으로는 천국을 사모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구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보다는 이 땅의 것들이 훨씬 더 많이 구합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천국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면 먼저는 성경에 기록된 천국이 어떠한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온 몸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날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러한 찬양과 경배를 기쁠 때나 즐거울 때는 물론, 슬프고 어려울 때도 멈추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늘 교회에 함께 모여 말씀과 친교의 교제를 나누고 하나님을 찬송함으로 세상의 칭송을 받았던 초대교회 성도들처럼(행 2:46,47), 심지어 감옥에서도 찬양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드러냈던 바울과 실라처럼(행 16:24-40), 여러분도 이러한 감사와 찬양을 통해 여러분의 삶은 물론이고 어두운 이 땅을 천국의 기쁨으로 채우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천국은 오직 믿는 자들을 위해 예비된 곳임을 항상 기억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