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세상을 공의로 다스리시는데, 왜 성도들은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고, 하나님을 조롱하고 교회를 미워하는 세상 사람들은 왜 저렇게 풍족하게 살아가는 것인지에 대한 아픈 질문을 늘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는 우리만의 질문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도 그러했고, 초대교회 시절 수많은 성도들이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아무 죄도 없이 고통을 당하고 목숨을 잃으며 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도들을 보며 세상 사람들은 비웃습니다. “너희가 믿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있다면 왜 너희를 건져주지 않느냐?” 오늘 본문은 그들의 질문에 대한 바울의 답변입니다.
1. 먼저, 6절 함께 읽습니다.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하나님의 성품 중 가장 중요한 성품 중 하나는 ‘공의’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대충 덮고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반드시 행한 대로 갚으십니다.
여기에서의 ‘갚으신다 ἀνταποδίδωμι’라는 표현은 ‘상응하는 것을 되돌려 주다’, ‘받은 만큼 갚는다’라는 뜻으로 ‘상업적인 장부의 빚을 완벽하게 정산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는 세상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영적인 회계장부’가 있고, 마침내 그 장부에 기록된 대로 그 행위를 정산할 날이 온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정산의 방식에 대하여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에서 권력을 쥐고 성도들을 괴롭히며 박해했던 자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조롱하고 탄식하게 했던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자기가 저지른 그 악행의 무게만큼 되돌려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을 듣게 될 때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그들이 자신의 죗값을 치르게 되니 참 잘 되었다”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악인들이 징계를 받게 되었으니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악인의 멸망을 보며 기뻐한다면, 우리 역시 세상의 악한 본성과 똑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이미 상고한 데살로니가전서 5:15에서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난 당한 수많은 성도들의 소원은 악인들에 대한 보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복수를 요청하며 피를 흘린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죽이는 자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피를 흘렸습니다.
그 일례로, 교회의 최초의 순교자였던 스데반 집사님은 악한 유대인들이 던진 돌에 맞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에, 하늘을 우러러보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 스데반 집사님의 이 기도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못 박은 군인들을 바라보시며,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기도였습니다(눅 23:34).
이처럼 예수님을 죽이고 스데반을 돌로 쳤던 자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던 영적인 소경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공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불쌍한 영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역시, 한때 교회를 잔인하게 박해하던 자신을 오래 참음으로 기다려 주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기에, 박해자들을 저주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눈물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뿐만 아니라 다른 믿음의 사람들도 똑같이 행했습니다. 그 일례로 베드로도 베드로전서 3:9에서 이렇게 교훈합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여러분, 참된 성도의 힘은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에게 똑같이 갚아주는 데서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있음을 확실히 믿기 때문에, 내가 직접 원수를 갚으려 칼을 들지 않습니다. 심판은 온전히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맡겨드리고, 우리는 도리어 그들의 영혼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로서 선한 삶의 본을 보이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권세 있는 성도의 삶입니다. 오늘 이러한 삶을 다시 한번 결단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서 바울은 7절 전반부에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박해를 견뎌내야 했습니다.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활시위가 끊어질 만큼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의 눈물겨운 삶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통해 그들에게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 안식으로 갚아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의 ‘안식 ἄνεσις’은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기고 있다가 그것을 ‘느슨하게 풀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동안 박해와 시련 속에서 영적인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팽팽하게 당겨진 채 하루하루 힘겹게 버텨내던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그동안 고생 많았다. 이제 그만 긴장을 풀어라” 하시며 그 품에 안아주시는 것이 장차 그들이 누리게 될 안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은 단순히 ‘일을 안 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오랫동안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영혼의 활시위를 하나님께서 친히 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성도들에게 환난을 주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안식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은 성도들에게 눈물 흘리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세상은 성도들을 짓누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압박을 제거하여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안식은 단순히 천국에 들어가 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랫동안 고난 가운데 버텨온 성도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이제 됐다.” “그동안 수고가 많았다.” “이제는 긴장을 풀어라.” “이제는 울지 말아라.” “이제는 내가 너를 품겠다.” 친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기고 살아야 합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버텨야 하고,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견뎌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영원히 활시위를 당기고 살아가는 성도는 없습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오면, 우리의 영혼을 팽팽하게 만들었던 모든 고난과 두려움과 염려는 끝이 나게 될 것입니다. 그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손을 붙드시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제 놓아라.” 이것이 성도가 기다리는 안식이며, 하나님께서 공의로 갚아주시는 영광스러운 보상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를 기억하며 믿음의 선한 삶을 더욱 힘있게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7절 하단부에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은 그 성격이 완전히 다릅니다.
이천 년 전 예수님이 이 땅에 처음 오셨을 때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유대 땅 베들레헴의 마구간 말구유에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악인들의 조롱을 받으시며, 채찍에 맞으셨고, 무력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초림의 예수님은 오직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자비와 구원의 왕’으로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예수님의 모습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을 거느리시고, 온 우주를 호령하는 ‘만왕의 왕’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그리고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십니다. 성경에서의 ‘불’은 하나님의 임재와 죄를 태워버리는 거룩한 심판의 불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의 날은 성도들에게는 영원한 안식이 시작되는 영광스러운 날이지만, 하나님을 대적했던 사람에게는 공포와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8~9절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일어날 일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성경은 심판의 대상을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명확하게 지정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하나님을 모른다”라는 것은 지식적으로 모른다는 뜻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교만’을 뜻합니다. 그리고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예수님의 구원을 거부하고 조롱하고 멸시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복음을 멸시한 자들이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상징하는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지옥이라고 하면 활활 타오르는 불 못에 떨어져 육체적인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성경은 그것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그러나 지옥이 가진 진정한 공포, 형벌의 가장 깊은 본질은 다른 데 있습니다. 바로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영원히 격리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영원히 격리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선하심과 자비와 은혜가 완전히 차단됨을 뜻합니다. 그 결과 기쁨과 소망이 완전히 소멸되고, 오직 증오와 절망과 어둠과 슬피 우는 것만이 존재하게 됩니다. 그것도 잠시가 아니라 ‘영원히’ 계속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영원한 멸망의 형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무서운 영원한 형벌 앞에서,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떤 자리에 서 있습니까? 우리는 내 공로나 내 자격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건짐을 받아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 보는 ‘안식’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생각할 때,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작은 고난 때문에 어찌 낙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이 교훈을 가슴 깊이 새기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멸망의 형벌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복음의 감격을 날마다 새롭게 고백하는 복된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 땅의 모순과 불의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환난 받는 성도에게 안식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비웃고 복음을 거역할지라도, 불꽃 가운데 능력으로 천군 천사들과 함께 다시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영광을 바라보며 끝까지 복음을 지키고 정직하고 거룩하게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복음의 일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6.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세상을 공의로 다스리시는데, 왜 성도들은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고, 하나님을 조롱하고 교회를 미워하는 세상 사람들은 왜 저렇게 풍족하게 살아가는 것인지에 대한 아픈 질문을 늘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는 우리만의 질문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도 그러했고, 초대교회 시절 수많은 성도들이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아무 죄도 없이 고통을 당하고 목숨을 잃으며 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도들을 보며 세상 사람들은 비웃습니다. “너희가 믿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있다면 왜 너희를 건져주지 않느냐?” 오늘 본문은 그들의 질문에 대한 바울의 답변입니다.
1. 먼저, 6절 함께 읽습니다.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하나님의 성품 중 가장 중요한 성품 중 하나는 ‘공의’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대충 덮고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반드시 행한 대로 갚으십니다.
여기에서의 ‘갚으신다 ἀνταποδίδωμι’라는 표현은 ‘상응하는 것을 되돌려 주다’, ‘받은 만큼 갚는다’라는 뜻으로 ‘상업적인 장부의 빚을 완벽하게 정산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는 세상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영적인 회계장부’가 있고, 마침내 그 장부에 기록된 대로 그 행위를 정산할 날이 온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정산의 방식에 대하여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에서 권력을 쥐고 성도들을 괴롭히며 박해했던 자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조롱하고 탄식하게 했던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자기가 저지른 그 악행의 무게만큼 되돌려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을 듣게 될 때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그들이 자신의 죗값을 치르게 되니 참 잘 되었다”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악인들이 징계를 받게 되었으니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악인의 멸망을 보며 기뻐한다면, 우리 역시 세상의 악한 본성과 똑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이미 상고한 데살로니가전서 5:15에서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난 당한 수많은 성도들의 소원은 악인들에 대한 보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복수를 요청하며 피를 흘린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죽이는 자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피를 흘렸습니다.
그 일례로, 교회의 최초의 순교자였던 스데반 집사님은 악한 유대인들이 던진 돌에 맞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에, 하늘을 우러러보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 스데반 집사님의 이 기도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못 박은 군인들을 바라보시며,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기도였습니다(눅 23:34).
이처럼 예수님을 죽이고 스데반을 돌로 쳤던 자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던 영적인 소경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공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불쌍한 영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역시, 한때 교회를 잔인하게 박해하던 자신을 오래 참음으로 기다려 주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기에, 박해자들을 저주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눈물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뿐만 아니라 다른 믿음의 사람들도 똑같이 행했습니다. 그 일례로 베드로도 베드로전서 3:9에서 이렇게 교훈합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여러분, 참된 성도의 힘은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에게 똑같이 갚아주는 데서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있음을 확실히 믿기 때문에, 내가 직접 원수를 갚으려 칼을 들지 않습니다. 심판은 온전히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맡겨드리고, 우리는 도리어 그들의 영혼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로서 선한 삶의 본을 보이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권세 있는 성도의 삶입니다. 오늘 이러한 삶을 다시 한번 결단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서 바울은 7절 전반부에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박해를 견뎌내야 했습니다.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활시위가 끊어질 만큼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의 눈물겨운 삶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통해 그들에게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 안식으로 갚아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의 ‘안식 ἄνεσις’은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기고 있다가 그것을 ‘느슨하게 풀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동안 박해와 시련 속에서 영적인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팽팽하게 당겨진 채 하루하루 힘겹게 버텨내던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그동안 고생 많았다. 이제 그만 긴장을 풀어라” 하시며 그 품에 안아주시는 것이 장차 그들이 누리게 될 안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은 단순히 ‘일을 안 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오랫동안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영혼의 활시위를 하나님께서 친히 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성도들에게 환난을 주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안식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은 성도들에게 눈물 흘리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세상은 성도들을 짓누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압박을 제거하여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안식은 단순히 천국에 들어가 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랫동안 고난 가운데 버텨온 성도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이제 됐다.” “그동안 수고가 많았다.” “이제는 긴장을 풀어라.” “이제는 울지 말아라.” “이제는 내가 너를 품겠다.” 친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기고 살아야 합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버텨야 하고,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견뎌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영원히 활시위를 당기고 살아가는 성도는 없습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오면, 우리의 영혼을 팽팽하게 만들었던 모든 고난과 두려움과 염려는 끝이 나게 될 것입니다. 그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손을 붙드시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제 놓아라.” 이것이 성도가 기다리는 안식이며, 하나님께서 공의로 갚아주시는 영광스러운 보상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를 기억하며 믿음의 선한 삶을 더욱 힘있게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7절 하단부에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은 그 성격이 완전히 다릅니다.
이천 년 전 예수님이 이 땅에 처음 오셨을 때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유대 땅 베들레헴의 마구간 말구유에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악인들의 조롱을 받으시며, 채찍에 맞으셨고, 무력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초림의 예수님은 오직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자비와 구원의 왕’으로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예수님의 모습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을 거느리시고, 온 우주를 호령하는 ‘만왕의 왕’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그리고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십니다. 성경에서의 ‘불’은 하나님의 임재와 죄를 태워버리는 거룩한 심판의 불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의 날은 성도들에게는 영원한 안식이 시작되는 영광스러운 날이지만, 하나님을 대적했던 사람에게는 공포와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8~9절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일어날 일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성경은 심판의 대상을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명확하게 지정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하나님을 모른다”라는 것은 지식적으로 모른다는 뜻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교만’을 뜻합니다. 그리고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예수님의 구원을 거부하고 조롱하고 멸시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복음을 멸시한 자들이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상징하는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지옥이라고 하면 활활 타오르는 불 못에 떨어져 육체적인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성경은 그것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그러나 지옥이 가진 진정한 공포, 형벌의 가장 깊은 본질은 다른 데 있습니다. 바로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영원히 격리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영원히 격리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선하심과 자비와 은혜가 완전히 차단됨을 뜻합니다. 그 결과 기쁨과 소망이 완전히 소멸되고, 오직 증오와 절망과 어둠과 슬피 우는 것만이 존재하게 됩니다. 그것도 잠시가 아니라 ‘영원히’ 계속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영원한 멸망의 형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무서운 영원한 형벌 앞에서,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떤 자리에 서 있습니까? 우리는 내 공로나 내 자격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건짐을 받아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 보는 ‘안식’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생각할 때,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작은 고난 때문에 어찌 낙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이 교훈을 가슴 깊이 새기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멸망의 형벌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복음의 감격을 날마다 새롭게 고백하는 복된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 땅의 모순과 불의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환난 받는 성도에게 안식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비웃고 복음을 거역할지라도, 불꽃 가운데 능력으로 천군 천사들과 함께 다시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영광을 바라보며 끝까지 복음을 지키고 정직하고 거룩하게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복음의 일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