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3.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사람은 누구나 ‘미래’에 대한 관심이 있습니다. 특히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해 알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날씨를 예측하고, 경제를 분석하고, 건강을 관리합니다. 미리 알고 대비하고 싶어 합니다. 특히, 우리 성도들은 ‘종말’이나 ‘재림’이라는 말을 듣게 되면 마음 한구석이 좀 무거워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날이 언제일까?” 하는 호기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도 예수님이 곧 오신다고 배웠는데, 정확히 몇 날 몇 시에 오시는지에 대하여 알지 못하니 매우 조바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예수님 재림의 날을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라 확신과 기쁨으로 기다리는 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1. 먼저 1절 함께 읽습니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바울은 “주의 날이 언제 임하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더 쓸 게 없다”라고 매우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왜일까요? 몰라서가 아니라, 2절에 기록된 것처럼 이미 그들이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날짜’에 집착합니다. 몇년, 몇월, 몇일에 종말이 온다는 자극적인 소식에 귀를 기울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때’는 우리가 달력에 동그라미를 칠 수 있는 날이 아닙니다.
헬라어에는 시간을 뜻하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 χρόνος’와 하나님의 섭리가 일어나는 결정적 순간인 ‘카이로스 καιρός’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언제 오시느냐?”라는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살고 있느냐?”라는 존재의 변화입니다. 예를 들어, 수험생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시험 날짜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시험을 잘 치를 수 있는 실력을 닦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날짜를 계산하는 자가 아니라, 깨어 기도하는 예배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날은 어떤 모습으로 오게 됩니까?
2절 함께 읽습니다.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도둑같이 임한다’라는 표현은 재미있으면서도 무서운 표현입니다. 도둑은 예고하고 훔치러 오지 않습니다. 집주인이 가장 방심할 때, 가장 깊이 잠들었을 때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도둑같이’라는 비유의 강조점은 ‘불확실성’과 ‘갑작스러움’입니다. 주의 날은 우리가 세상 재미에 푹 빠져서 하나님을 잊고 있을 때, 혹은 “에이, 설마 오늘 오시겠어?”라고 안일하게 생각할 때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둑’이라는 비유는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는 ‘재앙’이지만, 깨어 기다리는 집주인에게는 ‘경각심’을 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다는 것은 단순히 잠을 안 자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시선이 세상을 향해 고정되어 있는지, 아니면 다시 오실 주님을 향해 있는지 점검하는지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3절 함께 읽습니다.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세상은 늘 속삭입니다. “이 정도 재력이면 걱정할 필요가 없어”, “이 정도 권력이면 아무도 나 못 건드려”, “종말 같은 건 없어, 오늘 즐겁게 살아.” 사람들은 스스로 쌓아 올린 바벨탑 안에서 안도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성경은 바로 그 ‘평안하다’ ‘안전하다’라고 안심하는 순간이 가장 위험한 때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임신한 여인의 비유도 도둑의 비유와 같이 급작스러움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의학이 발전해서 임신에서 출산까지의 과정을 모두 알 수 있지만, 이 글이 기록된 당시에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 임신한 여인은 언제 진통이 오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닥쳤습니다. 또한, 임신한 여인의 고통은 배 속에서 아기가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처럼, 종말 또한 언제 일어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의지하는 세상의 보험, 은행 잔고, 사회적 지위가 주님의 날에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보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기억하고 주의 날을 소망으로 기다리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이어지는 4절 함께 읽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앞서 2절에서는 주님의 날이 ‘도둑같이’ 온다고 말씀했는데, 여기에는 그날이 도둑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5절 함께 읽습니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도둑은 밤을 틈타 어둠 속에서 활동합니다. 밝은 대낮에는 활동할 수 없습니다. 밝은 대낮에 훔치는 도둑은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빛’ 가운데 살고 있다면, 주님이 언제 오시더라도 그것은 ‘기습’이 아니라 ‘기다리던 만남’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빛의 아들’이라는 말은 단순히 착하게 산다는 뜻을 넘어섭니다. 주일에 우리가 상고했던 바울처럼 ‘사람들에게 공개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지금 당장 재림하셔도 감출 것이 없는 상태, 코람데오의 신앙으로 언제 어디서나 투명하게 살아가는 것이 빛의 아들로서의 삶입니다. 우리가 낮에 속해 있다면, 예수님의 재림은 공포가 아니라 기쁨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6~7절에 충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성경에서 ‘잔다’라는 표현은 ‘죽음’을 뜻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영적인 무감각’을 뜻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관심 없이 그저 육신의 안일함에 빠져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취한다’라는 것은 세상의 쾌락과 가치관에 빠져 영적인 판단력을 잃은 상태를 뜻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것을 주의하고 정신을 차리라 권면합니다. 정신을 차린다는 것은 술에 취하지 않은 맑은 정신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폭풍우 속에서 선장이 배의 균형을 잡기 위해 온 힘을 다하듯이, 우리도 요동치는 세상 속에서 영적인 균형을 잡기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8절 함께 읽습니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믿음과 사랑으로 행하고, 구원의 소망으로 인내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영혼은 깨어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이 주는 안락함이라는 수면제에 취해 꾸벅꾸벅 졸고 있지는 않습니까?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라는 안일함이 가장 무서운 위기임을 기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날은 분명히 옵니다. 그날을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으로 맞이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9절 함께 읽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이 자리에 세우신 목적은 ‘노하심’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종종 신앙생활을 ‘하나님의 눈치를 보는 것’으로 오해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잘못하면 벌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공포 기반의 신앙을 가진 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세우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나 자격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 기록된 것처럼 ‘오직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10절 함께 읽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여기에서의 ‘깨어 있든지 자든지’라는 말은 중의적인 표현입니다. 첫째는 영적으로 깨어 있는 상태와 잠든 상태를 말하고, 둘째는 육체적으로 살아있는 상태와 죽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열심히 사역하며 깨어 있을 때나, 혹은 인생의 마침표를 찍고 잠들 때나 상관없이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은 변함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심으로 세상의 끝날이 와도 우리는 주님과 함께할 것입니다. 죽음의 문턱을 넘는 순간에도 우리는 주님과 함께할 것입니다. 이러한 ‘임마누엘’의 은혜는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라, 영원히 우리 곁에서 함께 사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아는 우리는 11절 함께 읽습니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신앙은 혼자 가는 외로운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실 날이 가까울수록 우리는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에 힘써야 합니다. 지치고 낙심한 지체를 격려하고, 상대방의 장점을 발견해주고 신앙의 성장을 피차 도와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미 이 일을 잘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하는 것 같이 계속하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는 서로의 손을 맞잡고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에 힘써야 합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은 우리를 심판하러 오시는 무서운 심판주가 아니라, 우리와 영원히 살기 위해 다시 오시는 사랑의 주님이심을 믿고, 이 소망 안에서 오늘도 서로 사랑하며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세상은 끊임없이 평안하다, 안전하다며 우리에게 영적인 잠을 재우려 합니다. 세상의 헛된 미혹에 속지 않게 하시고, 도둑같이 임할 주님의 날을 빛의 자녀답게 예비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가슴에 붙이고, 구원의 소망이라는 투구를 머리에 쓰고 담대히 세상으로 나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늘 깨어 기도하며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에 힘쓰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3.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사람은 누구나 ‘미래’에 대한 관심이 있습니다. 특히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해 알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날씨를 예측하고, 경제를 분석하고, 건강을 관리합니다. 미리 알고 대비하고 싶어 합니다. 특히, 우리 성도들은 ‘종말’이나 ‘재림’이라는 말을 듣게 되면 마음 한구석이 좀 무거워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날이 언제일까?” 하는 호기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도 예수님이 곧 오신다고 배웠는데, 정확히 몇 날 몇 시에 오시는지에 대하여 알지 못하니 매우 조바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예수님 재림의 날을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라 확신과 기쁨으로 기다리는 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1. 먼저 1절 함께 읽습니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바울은 “주의 날이 언제 임하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더 쓸 게 없다”라고 매우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왜일까요? 몰라서가 아니라, 2절에 기록된 것처럼 이미 그들이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날짜’에 집착합니다. 몇년, 몇월, 몇일에 종말이 온다는 자극적인 소식에 귀를 기울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때’는 우리가 달력에 동그라미를 칠 수 있는 날이 아닙니다.
헬라어에는 시간을 뜻하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 χρόνος’와 하나님의 섭리가 일어나는 결정적 순간인 ‘카이로스 καιρός’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언제 오시느냐?”라는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살고 있느냐?”라는 존재의 변화입니다. 예를 들어, 수험생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시험 날짜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시험을 잘 치를 수 있는 실력을 닦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날짜를 계산하는 자가 아니라, 깨어 기도하는 예배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날은 어떤 모습으로 오게 됩니까?
2절 함께 읽습니다.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도둑같이 임한다’라는 표현은 재미있으면서도 무서운 표현입니다. 도둑은 예고하고 훔치러 오지 않습니다. 집주인이 가장 방심할 때, 가장 깊이 잠들었을 때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도둑같이’라는 비유의 강조점은 ‘불확실성’과 ‘갑작스러움’입니다. 주의 날은 우리가 세상 재미에 푹 빠져서 하나님을 잊고 있을 때, 혹은 “에이, 설마 오늘 오시겠어?”라고 안일하게 생각할 때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둑’이라는 비유는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는 ‘재앙’이지만, 깨어 기다리는 집주인에게는 ‘경각심’을 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다는 것은 단순히 잠을 안 자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시선이 세상을 향해 고정되어 있는지, 아니면 다시 오실 주님을 향해 있는지 점검하는지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3절 함께 읽습니다.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세상은 늘 속삭입니다. “이 정도 재력이면 걱정할 필요가 없어”, “이 정도 권력이면 아무도 나 못 건드려”, “종말 같은 건 없어, 오늘 즐겁게 살아.” 사람들은 스스로 쌓아 올린 바벨탑 안에서 안도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성경은 바로 그 ‘평안하다’ ‘안전하다’라고 안심하는 순간이 가장 위험한 때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임신한 여인의 비유도 도둑의 비유와 같이 급작스러움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의학이 발전해서 임신에서 출산까지의 과정을 모두 알 수 있지만, 이 글이 기록된 당시에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 임신한 여인은 언제 진통이 오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닥쳤습니다. 또한, 임신한 여인의 고통은 배 속에서 아기가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처럼, 종말 또한 언제 일어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의지하는 세상의 보험, 은행 잔고, 사회적 지위가 주님의 날에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보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기억하고 주의 날을 소망으로 기다리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이어지는 4절 함께 읽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앞서 2절에서는 주님의 날이 ‘도둑같이’ 온다고 말씀했는데, 여기에는 그날이 도둑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5절 함께 읽습니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도둑은 밤을 틈타 어둠 속에서 활동합니다. 밝은 대낮에는 활동할 수 없습니다. 밝은 대낮에 훔치는 도둑은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빛’ 가운데 살고 있다면, 주님이 언제 오시더라도 그것은 ‘기습’이 아니라 ‘기다리던 만남’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빛의 아들’이라는 말은 단순히 착하게 산다는 뜻을 넘어섭니다. 주일에 우리가 상고했던 바울처럼 ‘사람들에게 공개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지금 당장 재림하셔도 감출 것이 없는 상태, 코람데오의 신앙으로 언제 어디서나 투명하게 살아가는 것이 빛의 아들로서의 삶입니다. 우리가 낮에 속해 있다면, 예수님의 재림은 공포가 아니라 기쁨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6~7절에 충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성경에서 ‘잔다’라는 표현은 ‘죽음’을 뜻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영적인 무감각’을 뜻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관심 없이 그저 육신의 안일함에 빠져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취한다’라는 것은 세상의 쾌락과 가치관에 빠져 영적인 판단력을 잃은 상태를 뜻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것을 주의하고 정신을 차리라 권면합니다. 정신을 차린다는 것은 술에 취하지 않은 맑은 정신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폭풍우 속에서 선장이 배의 균형을 잡기 위해 온 힘을 다하듯이, 우리도 요동치는 세상 속에서 영적인 균형을 잡기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8절 함께 읽습니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믿음과 사랑으로 행하고, 구원의 소망으로 인내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영혼은 깨어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이 주는 안락함이라는 수면제에 취해 꾸벅꾸벅 졸고 있지는 않습니까?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라는 안일함이 가장 무서운 위기임을 기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날은 분명히 옵니다. 그날을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으로 맞이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9절 함께 읽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이 자리에 세우신 목적은 ‘노하심’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종종 신앙생활을 ‘하나님의 눈치를 보는 것’으로 오해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잘못하면 벌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공포 기반의 신앙을 가진 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세우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나 자격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 기록된 것처럼 ‘오직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10절 함께 읽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여기에서의 ‘깨어 있든지 자든지’라는 말은 중의적인 표현입니다. 첫째는 영적으로 깨어 있는 상태와 잠든 상태를 말하고, 둘째는 육체적으로 살아있는 상태와 죽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열심히 사역하며 깨어 있을 때나, 혹은 인생의 마침표를 찍고 잠들 때나 상관없이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은 변함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심으로 세상의 끝날이 와도 우리는 주님과 함께할 것입니다. 죽음의 문턱을 넘는 순간에도 우리는 주님과 함께할 것입니다. 이러한 ‘임마누엘’의 은혜는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라, 영원히 우리 곁에서 함께 사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아는 우리는 11절 함께 읽습니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신앙은 혼자 가는 외로운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실 날이 가까울수록 우리는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에 힘써야 합니다. 지치고 낙심한 지체를 격려하고, 상대방의 장점을 발견해주고 신앙의 성장을 피차 도와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미 이 일을 잘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하는 것 같이 계속하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는 서로의 손을 맞잡고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에 힘써야 합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은 우리를 심판하러 오시는 무서운 심판주가 아니라, 우리와 영원히 살기 위해 다시 오시는 사랑의 주님이심을 믿고, 이 소망 안에서 오늘도 서로 사랑하며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세상은 끊임없이 평안하다, 안전하다며 우리에게 영적인 잠을 재우려 합니다. 세상의 헛된 미혹에 속지 않게 하시고, 도둑같이 임할 주님의 날을 빛의 자녀답게 예비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가슴에 붙이고, 구원의 소망이라는 투구를 머리에 쓰고 담대히 세상으로 나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늘 깨어 기도하며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에 힘쓰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