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지난 골로새서에 이어 오늘부터 데살로니가전서를 상고합니다.
1. 먼저 기록 배경을 보면, 저자는 사도 바울입니다. 그리고 공동 발신자는 실루아노와 디모데입니다. 기록 시기는 주후 50–51년경으로 바울의 서신서 중에 가장 먼저 기록되었습니다. 기록 장소는 고린도이고, 수신처는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상고한 사도행전 17장에 의하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매우 짧은 기간의 사역 속에서 세워졌습니다. 바울은 회당에서 세 안식일 동안 복음을 전했고, 그 후 박해로 인해 급히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말은 곧,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영접한 성도들이 충분한 제자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고난을 맞이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몇 번이고 데살로니가를 다시 방문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대적자들로 인해 그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2:18). 그래서 부득불 디모데를 대신 데살로니가로 파송하고(3:2), 자신은 고린도에서 사역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디모데가 바울을 방문하여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을 전하게 되었습니다(3:6, 행 18:5). 그 소식을 듣고 쓴 서신서가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의 핵심 주제는 박해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입니다. 이미 임한 구원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종말 사이의 삶, 곧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태도에 대하여 권면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차차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오늘은 1절 인사말만 상고합니다.
바울의 편지들은 대부분 인사말로 시작하지만, 그 인사말은 결코 형식적이지 않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는 교회가 무엇인지,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에 속해 있는 사람들인지에 대한 교훈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2. 본문을 살펴보면, 먼저 편지의 저자에 대하여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단독 저자로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이는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이 말 속에는 교회는 개인의 지도력이 아니라 팀 사역으로 섬겨야 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동시에 교회는 목회자 개인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개척했고, 실루아노는 함께 고난을 겪었고, 디모데는 눈물로 섬긴 교회였습니다. 이 세 사람이 함께 섬긴 교회였습니다.
이들 중에서 ‘실루아노’는 ‘실라’와 동일인물입니다.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실라’를 헬라식 이름으로 부른 것입니다. 성경은 수신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그들에게 더 익숙한 이름을 각각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기록한 사도행전에서는 그를 ‘실라’로 부른 반면, 오늘 본문의 수신처인 데살로니가는 헬라 지방에 있는 교회였기 때문에 그를 실루아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의하면, 실루아노는 선지자로 인정받았고,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의 사항을 안디옥 교회에 알리도록 파송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제2차 전도 여행을 하면서 감옥에 함께 투옥되는 등 고난을 함께한 동역자였습니다(행 16장). 그는 제2차 전도 여행 중 바울과 함께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웠기에(행 17:1-9)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잘 알려진 그를 송신자의 한 사람으로 거명한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인 ‘디모데’는 바울에 의해 데살로니가 교회에 파송되어(3:2) 그들로부터 좋은 소식을 가져온 사람입니다(3:6). 그 역시 편지의 송신자로 거명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때 회심하고(행 14:6), 2차 전도 여행 때부터 바울의 동역자로 헌신했습니다. 특히, 바울을 대신하여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돌보는 목회 사역을 감당했습니다(행 13:14).
이처럼 바울은 혼자서 모든 일을 감당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동역자들과 함께 합력하여 복음을 감당했고 교회를 세워갔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의 교회는 한 사람의 지도력으로 이끌어 가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카리스마 있는 목회자가 전적으로 교회의 모든 것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이는 규모가 작은 교회일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교회는 ‘우리가’ 세운 교회입니다. 교회는 함께 세워가야 합니다. 그러할 때 건전성이 유지되고,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잡힌 성장을 이룰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우리 교회가 ‘성도들이 힘을 모아 동역하는 교회’가 되도록 함께 힘써 주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드립니다.
3. 계속해서 본문을 보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회’ 있는 교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어떤 지역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건물 안에 있는 공동체도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예수님 안에 있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안전은 환경에 있지 않습니다. 숫자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의 인정받을 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안전합니다.
특히,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에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며, 예수님은 주님이시라는 믿음의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당시, ‘주’라는 표현은 로마 황제에게만 붙이던 칭호였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십니다”라고 담대하게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 때문에 초대교회 성도들은 경제적인 불이익을 당했고, 사회적인 배척을 받았고, 생명의 위협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고백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말씀합니다. 교회는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교회에만 이어지는 성경의 선포가 축복으로 주어지게 됩니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이 인사말은 서신서에서 반복되지만,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그 무게가 다릅니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고난 중에 있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교회를 잘 지킬 때 주어지는 보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먼저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경은 고난 가운데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고난 중에 버텨라, 견뎌라, 더 노력해라 하지 않습니다.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평강’은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질 때 나타나는 결과물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상황이 좋아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 따라오는 열매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했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았지만, 그들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로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평강을 누렸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 교회는 어디에 속한 교회입니까? 우리 교회는 무엇 안에 있는 공동체입니까? 우리 교회는 누구를 주라 고백하며 서 있습니까?
교회는 크기나 형식으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단 하나로 증명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이 믿음이 분명할 때, 박해도, 혼란도, 종말의 두려움도 교회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이 믿음을 붙들고 데살로니가전서 1장으로부터 5장까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교회의 삶에 대하여 함께 상고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교회를 세상 속에 두셨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교회로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교회가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 열매로 은혜와 평강을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이를 힘입어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쁨으로 기다리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지난 골로새서에 이어 오늘부터 데살로니가전서를 상고합니다.
1. 먼저 기록 배경을 보면, 저자는 사도 바울입니다. 그리고 공동 발신자는 실루아노와 디모데입니다. 기록 시기는 주후 50–51년경으로 바울의 서신서 중에 가장 먼저 기록되었습니다. 기록 장소는 고린도이고, 수신처는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상고한 사도행전 17장에 의하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매우 짧은 기간의 사역 속에서 세워졌습니다. 바울은 회당에서 세 안식일 동안 복음을 전했고, 그 후 박해로 인해 급히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말은 곧,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영접한 성도들이 충분한 제자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고난을 맞이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몇 번이고 데살로니가를 다시 방문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대적자들로 인해 그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2:18). 그래서 부득불 디모데를 대신 데살로니가로 파송하고(3:2), 자신은 고린도에서 사역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디모데가 바울을 방문하여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을 전하게 되었습니다(3:6, 행 18:5). 그 소식을 듣고 쓴 서신서가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의 핵심 주제는 박해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입니다. 이미 임한 구원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종말 사이의 삶, 곧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태도에 대하여 권면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차차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오늘은 1절 인사말만 상고합니다.
바울의 편지들은 대부분 인사말로 시작하지만, 그 인사말은 결코 형식적이지 않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는 교회가 무엇인지,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에 속해 있는 사람들인지에 대한 교훈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2. 본문을 살펴보면, 먼저 편지의 저자에 대하여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단독 저자로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이는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이 말 속에는 교회는 개인의 지도력이 아니라 팀 사역으로 섬겨야 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동시에 교회는 목회자 개인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개척했고, 실루아노는 함께 고난을 겪었고, 디모데는 눈물로 섬긴 교회였습니다. 이 세 사람이 함께 섬긴 교회였습니다.
이들 중에서 ‘실루아노’는 ‘실라’와 동일인물입니다.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실라’를 헬라식 이름으로 부른 것입니다. 성경은 수신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그들에게 더 익숙한 이름을 각각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기록한 사도행전에서는 그를 ‘실라’로 부른 반면, 오늘 본문의 수신처인 데살로니가는 헬라 지방에 있는 교회였기 때문에 그를 실루아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의하면, 실루아노는 선지자로 인정받았고,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의 사항을 안디옥 교회에 알리도록 파송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제2차 전도 여행을 하면서 감옥에 함께 투옥되는 등 고난을 함께한 동역자였습니다(행 16장). 그는 제2차 전도 여행 중 바울과 함께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웠기에(행 17:1-9)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잘 알려진 그를 송신자의 한 사람으로 거명한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인 ‘디모데’는 바울에 의해 데살로니가 교회에 파송되어(3:2) 그들로부터 좋은 소식을 가져온 사람입니다(3:6). 그 역시 편지의 송신자로 거명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때 회심하고(행 14:6), 2차 전도 여행 때부터 바울의 동역자로 헌신했습니다. 특히, 바울을 대신하여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돌보는 목회 사역을 감당했습니다(행 13:14).
이처럼 바울은 혼자서 모든 일을 감당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동역자들과 함께 합력하여 복음을 감당했고 교회를 세워갔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의 교회는 한 사람의 지도력으로 이끌어 가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카리스마 있는 목회자가 전적으로 교회의 모든 것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이는 규모가 작은 교회일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교회는 ‘우리가’ 세운 교회입니다. 교회는 함께 세워가야 합니다. 그러할 때 건전성이 유지되고,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잡힌 성장을 이룰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우리 교회가 ‘성도들이 힘을 모아 동역하는 교회’가 되도록 함께 힘써 주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드립니다.
3. 계속해서 본문을 보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회’ 있는 교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어떤 지역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건물 안에 있는 공동체도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예수님 안에 있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안전은 환경에 있지 않습니다. 숫자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의 인정받을 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안전합니다.
특히,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에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며, 예수님은 주님이시라는 믿음의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당시, ‘주’라는 표현은 로마 황제에게만 붙이던 칭호였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십니다”라고 담대하게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 때문에 초대교회 성도들은 경제적인 불이익을 당했고, 사회적인 배척을 받았고, 생명의 위협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고백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말씀합니다. 교회는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교회에만 이어지는 성경의 선포가 축복으로 주어지게 됩니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이 인사말은 서신서에서 반복되지만,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그 무게가 다릅니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고난 중에 있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교회를 잘 지킬 때 주어지는 보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먼저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경은 고난 가운데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고난 중에 버텨라, 견뎌라, 더 노력해라 하지 않습니다.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평강’은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질 때 나타나는 결과물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상황이 좋아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 따라오는 열매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했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았지만, 그들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로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평강을 누렸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 교회는 어디에 속한 교회입니까? 우리 교회는 무엇 안에 있는 공동체입니까? 우리 교회는 누구를 주라 고백하며 서 있습니까?
교회는 크기나 형식으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단 하나로 증명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이 믿음이 분명할 때, 박해도, 혼란도, 종말의 두려움도 교회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이 믿음을 붙들고 데살로니가전서 1장으로부터 5장까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교회의 삶에 대하여 함께 상고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교회를 세상 속에 두셨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교회로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교회가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 열매로 은혜와 평강을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이를 힘입어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쁨으로 기다리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