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오늘은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성부 하나님’,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성자 예수님’, 그리고 오순절에 우리의 구원을 지켜주시기 위해 이 땅에 강림하신 ‘성령 하나님’, 이렇게 ‘삼위’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주일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삼위로 역사하시지만, 그 근본은 한 분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이 ‘삼위일체’ 신앙입니다.
그리고 삼위일체주일은 교회력을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는 절기입니다.
성령강림절로 교회력의 전반기를 마치고, 삼위일체주일을 기점으로 후반기를 새롭게 시작함으로써, 남은 반년을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 아래서 믿음을 지키고 성도로서 합당한 삶을 살기를 결단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믿음의 삶을 새롭게 결단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지난주일 말씀에서 예수님은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포도나무에 가지가 건강하게 붙어 있고, 농부가 땀 흘려 나무를 가꾸는 과정을 거쳐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우리 성도들의 삶 또한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자로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가는 과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계신 성도님 중에는 이러한 열매를 맺기 위한 출발선에 계시는 분도 계시고, 또 어떤 분은 성숙한 믿음의 열매를 이미 맺고 계신 분도 계십니다.
성경은 이것을 또다른 표현으로 ‘믿음의 분량’이라고 말씀합니다(롬 12:3, 엡 4:13).
예를 들어, 어떤 고난이나 문제를 마주할 때, 어떤 사람은 그 일을 자신을 짓누르는 스트레스로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똑같은 일을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의 기회로 삼습니다.
이러한, 고난이나 문제를 마주할 때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은 ‘믿음의 분량’에 의해 결정이 되어집니다.
믿음의 분량에 따라, 열매를 맺기 위한 출발선에 있는 아직 믿음이 어린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은 결정을 하게 되고,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성숙한 결정을 하게 됩니다.
믿음의 분량에 따라, 똑같은 일을 당해도 어떤 사람은 침착하고 또 어떤 사람은 당황하고 좌절합니다.
똑같은 예수를 믿는데 어떤 사람은 행복하게, 열정적으로 믿고, 어떤 사람은 억지로 부담스럽게 믿습니다.
똑같은 예배를 드려도 어떤 사람은 예배를 통하여 삶의 에너지와 지혜를 공급받는데, 어떤 사람은 지겨운 설교시간으로 졸면서 허비합니다.
이러한 결과들은 다 믿음의 분량에 의해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구원을 이해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봉사하는 이 모든 신앙의 행위들은 “믿음의 분량이 얼마만큼 인가?”에 따라 열매를 맺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숙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숙한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답은 너무나도 명확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열매로 ‘교회를 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성숙한 믿음의 기준이 된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이 고백이 거리껴지고 부담이 된다면, 그것은 오늘 본문의 제자들처럼 우리의 믿음이 아직 미성숙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예수를 믿으면 무엇을 얻고, 믿지 않으면 무엇을 잃고 하는 그런 차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믿는 것은 어린아이의 믿음입니다.
“애야 사탕 줄께, 심부름 좀 할래?” 하는 말과 “믿어라. 그러면 구원해 줄께”하는 말이 무엇이 다릅니까?
“성숙한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하는 질문을 이해득실의 관점으로 이해하면 결코 믿음의 성숙을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시기 위하여, 찬양을 받으시기 위하여, 이런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구주 되신 예수님의 이름이 무엇입니까?‘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입니다.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임마누엘’, 그 이름의 뜻과 같이 우리와 함께 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성경을 기록하셨고, 예수님과 성령님을 이 땅에 보내시어 교회를 세우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구원받은 성도로서의 삶은 어떤 삶이어야 하는지 배우고 훈련받게 하셨습니다.
이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새 생명의 소망을 얻게 되고, 성도 간의 사랑의 교제를 힘입어서 삶 속에서 고난이나 슬픔이오면 믿음으로 이겨내고, 사랑과 행복이 넘칠 때면 서로 그 사랑을 나누며 “아, 이런 것이 바로 천국에서의 삶이구나” 감동하며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 하나님을 신앙고백하는 것은 성도로서의 마땅한 삶을 살기 위한 첫걸음이 됩니다.
오늘, 무엇보다도 임마누엘의 기쁨을 회복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그렇다면 임마누엘 되시는 성자 예수님께서 어떠한 모습으로 여러분과 함께 계셨으면 좋겠습니까?
왕입니까?
구원자입니까?
주님입니까?
선생님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합니까?
마음이 맞는 친구입니다.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 주는 친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시되, 아주 친근한 ‘친구’로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의 종인 우리를 우리의 죗값을 대신 지불하시고 우리들을 사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예수님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종으로 부르지 않고 ‘친구’로 부르셨다고 말씀합니다.
15절 함께 읽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우리는 모두가 본래 다 ‘죄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를 사시되 “종으로 삼지 않으시고 친구로 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임마누엘되신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서 계속해서 증거’되어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종과 친구는 서로 비교할 수 없는 신분입니다.
종은 주인이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일지라도 복종해야 합니다.
미리 약속하지 않은 일일지라도 시키는 모든 일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친구는 마음으로 행동하고 실천하는 관계입니다.
때로는 서로를 위해 희생도 너끈히 해 줄 수 있는 관계입니다.
우리와 예수님의 관계가 바로 이런 친구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친구가 되기 위한 조건을 한 가지를 요구하셨습니다.
14절 함께 읽습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우리가 예수님의 친구가 되려면 예수님께서 정해 놓으신 삶의 법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친구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15:5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지는 필연적으로 나무의 양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접붙임을 받으면 누구든지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 갈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한 몸이기에 예수님의 사랑이 내 것이 되고, 예수님의 권능이 내 것이 되고, 예수님의 생명력이 다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지가 나무에서 잘려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곧바로 말라 죽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5절에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은 ‘세상의 조롱거리, 웃음거리가 된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들이 세상의 조롱거리, 웃음거리가 되고 있는 이유는 포도나무에서 잘려진 가지처럼 우리 교회들이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행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나는 순간 세상의 조롱거리, 웃음거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의 좋은 가지가 되려면, 10절 말씀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키셨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무엇입니까?
12절 함께 읽습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이 계명은 13장부터 9번이나 계속해서 반복되는 말씀입니다.
이는 그만큼 중요하고 지키기 힘든 계명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의 사랑은 13절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랑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친구가 되고 싶다면, 예수님께서 친구인 나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으셨던 것처럼 나도 복음을 위해 나의 전부를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아멘” 하실 수 있습니까?
3.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면, 필연적으로 따르는 두 가지 열매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열매’와 ‘박해의 열매’입니다.
예수를 믿게 되면 누구든지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알 수 없는 힘이 나의 마음을 넓혀주고, 또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줍니다.
어느새 사람들이 말합니다.
“너 교회 다니더니 정말 많이 변했다. 편안해 보여” 이런 말을 들으면 예수를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열매인 ‘박해’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겐 좀처럼 보기 힘듭니다.
왜입니까? 평화의 시대이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박해는 진정한 신앙을 가진 자에게만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성도들은 사랑의 열매를 맺기는커녕 오히려 교회를 우상숭배의 본거지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박해가 아니라 조롱과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1년 4개월째 요한복음을 살펴보고 있는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계속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리고, 성경공부하고, 그랬더니 “다른 사람을 섬겨야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고, 그래서 먼저 가족에게 잘하고, 친구에게 잘하고, 이웃에게 잘하고, 믿음의 분량에 따라 은혜가 크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이렇게 살다가 이 땅의 생명이 다하면 천국에 가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랑하며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복음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뭐 그리 복잡하고, 머리 싸매고 생각해야 하고, 머리 나쁜 사람은 이해할 수 없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통째로 외우고,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고, 교회의 모든 행사에 참석해야 하는 그런 종교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런 건 바른 믿음을 갖기 위한 도구입니다.
바른 믿음은 그런 것을 기초로 해서 사는 삶입니다.
“나는 교회에서 기도하다 죽겠다” 결심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고, “나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며 살다 죽겠다” 고백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교회에서 기도하다 죽겠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다 죽겠다는 이 믿음의 고백을 지키기 위한 신앙훈련의 일부분입니다.
복음은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무엇을 믿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 그것을 진심으로 믿고 우리도 그와 같이 서로 사랑하면, 천국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동탄영락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이러한 곳이 되어야 합니다.
베를린예술대학교 한병철 교수는 그가 저술한 ‘피로사회’라는 책에서 현대사회를 이렇게 진단합니다.
“온 세상은 자기착취의 늪에 빠져 우울과 탈진으로 괴로워하고 있다.”
사람들은 미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기 스스로 쉬지 못하는 ‘자기착취’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미래를 위해 노력을 다하고 있기에 잘살고 있어!”라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타인에 의해 착취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착취하고, 그로 인해 탈진하고, “왜 이러지, 왜 이러지?” 하면서 스스로 삶을 망가뜨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오지 않은 잘못된 소망을 품고서 어제의 미래인 오늘을 포기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동의가 되십니까?
여러분들은 이러한 자기착취의 늪에 빠지지 않기 바랍니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내일인 오늘’ 행복한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포기하고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행복한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서, 그 사랑으로 옆에 계신 다른 성도님들을 사랑하는 복음의 일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함께 하는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복의 근원’이 되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찾을 때, 오는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여러분들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복음의 일꾼으로 세워지는 교회가 되도록 힘써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기쁨과 소망의 자리가 되고, 연약한 지체들을 돕는 나눔의 자리가 되고, 예배가 있고 복음이 있는 선교의 자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처럼 세워지는 교회를 어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우리 교회가 많은 열매를 맺으면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 받으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더 정직하고, 더 성실하고, 더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가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으로 우리 모두 이 말씀만은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16-17절 함께 읽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기도> 하나님 아버지, 많은 열매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함께하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함을 더하는 저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를 통해 저희가 서 있는 곳이 화해의 자리가 되고, 기쁨과 소망의 자리가 되고, 연약한 지체들을 돕는 나눔의 자리가 되고, 예배가 있고 복음이 있는 선교의 자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를 위해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께서 저희와 함께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계명에 온전히 순종하셨던 것처럼 저희도 예수님의 계명에 온전히 순종함으로 주신 사명 부족함 없이 감당하게 하여 주옵소서. 임마누엘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오늘은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성부 하나님’,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성자 예수님’, 그리고 오순절에 우리의 구원을 지켜주시기 위해 이 땅에 강림하신 ‘성령 하나님’, 이렇게 ‘삼위’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주일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삼위로 역사하시지만, 그 근본은 한 분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이 ‘삼위일체’ 신앙입니다.
그리고 삼위일체주일은 교회력을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는 절기입니다.
성령강림절로 교회력의 전반기를 마치고, 삼위일체주일을 기점으로 후반기를 새롭게 시작함으로써, 남은 반년을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 아래서 믿음을 지키고 성도로서 합당한 삶을 살기를 결단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믿음의 삶을 새롭게 결단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지난주일 말씀에서 예수님은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포도나무에 가지가 건강하게 붙어 있고, 농부가 땀 흘려 나무를 가꾸는 과정을 거쳐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우리 성도들의 삶 또한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자로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가는 과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계신 성도님 중에는 이러한 열매를 맺기 위한 출발선에 계시는 분도 계시고, 또 어떤 분은 성숙한 믿음의 열매를 이미 맺고 계신 분도 계십니다.
성경은 이것을 또다른 표현으로 ‘믿음의 분량’이라고 말씀합니다(롬 12:3, 엡 4:13).
예를 들어, 어떤 고난이나 문제를 마주할 때, 어떤 사람은 그 일을 자신을 짓누르는 스트레스로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똑같은 일을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의 기회로 삼습니다.
이러한, 고난이나 문제를 마주할 때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은 ‘믿음의 분량’에 의해 결정이 되어집니다.
믿음의 분량에 따라, 열매를 맺기 위한 출발선에 있는 아직 믿음이 어린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은 결정을 하게 되고,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성숙한 결정을 하게 됩니다.
믿음의 분량에 따라, 똑같은 일을 당해도 어떤 사람은 침착하고 또 어떤 사람은 당황하고 좌절합니다.
똑같은 예수를 믿는데 어떤 사람은 행복하게, 열정적으로 믿고, 어떤 사람은 억지로 부담스럽게 믿습니다.
똑같은 예배를 드려도 어떤 사람은 예배를 통하여 삶의 에너지와 지혜를 공급받는데, 어떤 사람은 지겨운 설교시간으로 졸면서 허비합니다.
이러한 결과들은 다 믿음의 분량에 의해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구원을 이해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봉사하는 이 모든 신앙의 행위들은 “믿음의 분량이 얼마만큼 인가?”에 따라 열매를 맺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숙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숙한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답은 너무나도 명확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열매로 ‘교회를 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성숙한 믿음의 기준이 된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이 고백이 거리껴지고 부담이 된다면, 그것은 오늘 본문의 제자들처럼 우리의 믿음이 아직 미성숙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예수를 믿으면 무엇을 얻고, 믿지 않으면 무엇을 잃고 하는 그런 차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믿는 것은 어린아이의 믿음입니다.
“애야 사탕 줄께, 심부름 좀 할래?” 하는 말과 “믿어라. 그러면 구원해 줄께”하는 말이 무엇이 다릅니까?
“성숙한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하는 질문을 이해득실의 관점으로 이해하면 결코 믿음의 성숙을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시기 위하여, 찬양을 받으시기 위하여, 이런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구주 되신 예수님의 이름이 무엇입니까?‘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임마누엘’, 그 이름의 뜻과 같이 우리와 함께 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성경을 기록하셨고, 예수님과 성령님을 이 땅에 보내시어 교회를 세우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구원받은 성도로서의 삶은 어떤 삶이어야 하는지 배우고 훈련받게 하셨습니다.
이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새 생명의 소망을 얻게 되고, 성도 간의 사랑의 교제를 힘입어서 삶 속에서 고난이나 슬픔이오면 믿음으로 이겨내고, 사랑과 행복이 넘칠 때면 서로 그 사랑을 나누며 “아, 이런 것이 바로 천국에서의 삶이구나” 감동하며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 하나님을 신앙고백하는 것은 성도로서의 마땅한 삶을 살기 위한 첫걸음이 됩니다.
오늘, 무엇보다도 임마누엘의 기쁨을 회복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그렇다면 임마누엘 되시는 성자 예수님께서 어떠한 모습으로 여러분과 함께 계셨으면 좋겠습니까?
왕입니까?
구원자입니까?
주님입니까?
선생님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합니까?
마음이 맞는 친구입니다.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 주는 친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시되, 아주 친근한 ‘친구’로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의 종인 우리를 우리의 죗값을 대신 지불하시고 우리들을 사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예수님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종으로 부르지 않고 ‘친구’로 부르셨다고 말씀합니다.
15절 함께 읽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우리는 모두가 본래 다 ‘죄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를 사시되 “종으로 삼지 않으시고 친구로 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임마누엘되신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서 계속해서 증거’되어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종과 친구는 서로 비교할 수 없는 신분입니다.
종은 주인이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일지라도 복종해야 합니다.
미리 약속하지 않은 일일지라도 시키는 모든 일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친구는 마음으로 행동하고 실천하는 관계입니다.
때로는 서로를 위해 희생도 너끈히 해 줄 수 있는 관계입니다.
우리와 예수님의 관계가 바로 이런 친구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친구가 되기 위한 조건을 한 가지를 요구하셨습니다.
14절 함께 읽습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우리가 예수님의 친구가 되려면 예수님께서 정해 놓으신 삶의 법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친구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15:5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지는 필연적으로 나무의 양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접붙임을 받으면 누구든지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 갈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한 몸이기에 예수님의 사랑이 내 것이 되고, 예수님의 권능이 내 것이 되고, 예수님의 생명력이 다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지가 나무에서 잘려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곧바로 말라 죽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5절에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은 ‘세상의 조롱거리, 웃음거리가 된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들이 세상의 조롱거리, 웃음거리가 되고 있는 이유는 포도나무에서 잘려진 가지처럼 우리 교회들이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행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나는 순간 세상의 조롱거리, 웃음거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의 좋은 가지가 되려면, 10절 말씀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키셨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무엇입니까?
12절 함께 읽습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이 계명은 13장부터 9번이나 계속해서 반복되는 말씀입니다.
이는 그만큼 중요하고 지키기 힘든 계명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의 사랑은 13절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랑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친구가 되고 싶다면, 예수님께서 친구인 나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으셨던 것처럼 나도 복음을 위해 나의 전부를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아멘” 하실 수 있습니까?
3.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면, 필연적으로 따르는 두 가지 열매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열매’와 ‘박해의 열매’입니다.
예수를 믿게 되면 누구든지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알 수 없는 힘이 나의 마음을 넓혀주고, 또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줍니다.
어느새 사람들이 말합니다.
“너 교회 다니더니 정말 많이 변했다. 편안해 보여” 이런 말을 들으면 예수를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열매인 ‘박해’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겐 좀처럼 보기 힘듭니다.
왜입니까? 평화의 시대이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박해는 진정한 신앙을 가진 자에게만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성도들은 사랑의 열매를 맺기는커녕 오히려 교회를 우상숭배의 본거지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박해가 아니라 조롱과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1년 4개월째 요한복음을 살펴보고 있는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계속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리고, 성경공부하고, 그랬더니 “다른 사람을 섬겨야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고, 그래서 먼저 가족에게 잘하고, 친구에게 잘하고, 이웃에게 잘하고, 믿음의 분량에 따라 은혜가 크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이렇게 살다가 이 땅의 생명이 다하면 천국에 가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랑하며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복음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뭐 그리 복잡하고, 머리 싸매고 생각해야 하고, 머리 나쁜 사람은 이해할 수 없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통째로 외우고,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고, 교회의 모든 행사에 참석해야 하는 그런 종교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런 건 바른 믿음을 갖기 위한 도구입니다.
바른 믿음은 그런 것을 기초로 해서 사는 삶입니다.
“나는 교회에서 기도하다 죽겠다” 결심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고, “나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며 살다 죽겠다” 고백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교회에서 기도하다 죽겠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다 죽겠다는 이 믿음의 고백을 지키기 위한 신앙훈련의 일부분입니다.
복음은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무엇을 믿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 그것을 진심으로 믿고 우리도 그와 같이 서로 사랑하면, 천국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동탄영락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이러한 곳이 되어야 합니다.
베를린예술대학교 한병철 교수는 그가 저술한 ‘피로사회’라는 책에서 현대사회를 이렇게 진단합니다.
“온 세상은 자기착취의 늪에 빠져 우울과 탈진으로 괴로워하고 있다.”
사람들은 미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기 스스로 쉬지 못하는 ‘자기착취’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미래를 위해 노력을 다하고 있기에 잘살고 있어!”라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타인에 의해 착취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착취하고, 그로 인해 탈진하고, “왜 이러지, 왜 이러지?” 하면서 스스로 삶을 망가뜨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오지 않은 잘못된 소망을 품고서 어제의 미래인 오늘을 포기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동의가 되십니까?
여러분들은 이러한 자기착취의 늪에 빠지지 않기 바랍니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내일인 오늘’ 행복한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포기하고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행복한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서, 그 사랑으로 옆에 계신 다른 성도님들을 사랑하는 복음의 일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함께 하는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복의 근원’이 되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찾을 때, 오는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여러분들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복음의 일꾼으로 세워지는 교회가 되도록 힘써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기쁨과 소망의 자리가 되고, 연약한 지체들을 돕는 나눔의 자리가 되고, 예배가 있고 복음이 있는 선교의 자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처럼 세워지는 교회를 어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우리 교회가 많은 열매를 맺으면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 받으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더 정직하고, 더 성실하고, 더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가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으로 우리 모두 이 말씀만은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16-17절 함께 읽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기도> 하나님 아버지, 많은 열매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함께하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함을 더하는 저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를 통해 저희가 서 있는 곳이 화해의 자리가 되고, 기쁨과 소망의 자리가 되고, 연약한 지체들을 돕는 나눔의 자리가 되고, 예배가 있고 복음이 있는 선교의 자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를 위해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께서 저희와 함께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계명에 온전히 순종하셨던 것처럼 저희도 예수님의 계명에 온전히 순종함으로 주신 사명 부족함 없이 감당하게 하여 주옵소서. 임마누엘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