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지난주 우리는 예수님의 빈 무덤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한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보려면, 그의 무덤을 보면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위인들과 권세가들은 무덤의 크기로 영광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광은 곧 무덤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빈 무덤의 주인공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이 빈 무덤은 예수님 한 사람만의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뒤를 이어 두 번째, 세 번째…. 이렇게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세상의 권세, 곧 무덤의 영광을 바라보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빈 무덤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1.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의 소망을 기억하지 못했기에 기뻐해야 할 예수님의 빈 무덤이 오히려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두려움에 빠진 이유는 자신들이 그토록 열광하며 따르던 예수님이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게다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시신까지 훼손하려고 훔쳐 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간 유대인들이 자신들까지 붙잡아 죽이려고 한다는 두려움에 빠져 19절에 기록된 것처럼 함께 모여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막달라 마리아는 차마 무덤에서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스승의 억울한 죽음을 애통해하고 있었습니다(11절).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15절).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동산지기인 줄 알았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죽은 줄 알았습니다.
마리아는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첫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올 만큼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그녀가 찾은 예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니라 죽은 예수님이었습니다.
마리아는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주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나름대로 선행을 하면서 산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믿지 못하고, 그저 나를 지키시는 예수님, 내게 복 주시는 예수님,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으로만 믿는다면, 마리아처럼 부활의 주님이 눈앞에 나타나시더라도 알아보지 못하게 됩니다.
제자들처럼 삶에 풍파가 없고, 모든 일이 잘될 때는 신앙생활을 잘하지만,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하나님 원망하고 불평하고 실망과 절망의 나락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적을 베푸시고 병자를 치유하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님의 시체를 찾는 신앙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찾고 만나야 합니다.
죽은 예수님을 찾으면 슬픔과 두려움으로 통곡하게 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기쁨과 소망이 넘칩니다.
죽은 예수님을 생각하던 사람들은 다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사람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변화된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소망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슴 깊은 곳에 영접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19절 함께 읽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제자들은 마리아로부터 예수님의 부활을 전해 들었지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18절).
마리아가 예수님을 너무 그리워해서 환상을 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서도 여전히 불안과 두려움에 빠져 모인 곳의 문들을 다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분명 문을 잠그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집안으로 들어오셔서 제자들 앞에 서셨습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은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신비로운 몸을 가지셨음”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닫힌 문을 통과하셔서 제자들 앞에 서신 예수님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지금 제자들에게 있어 부활하신 예수님이야말로 두렵게 하는 모든 것을 극복하게 할 평강 그 자체였기 때문에 이렇게 인사를 하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죄와 질병과 죽음 때문에 평강이 사라진 이 세상에 진정한 평강을 주시기 위해 부활하셨음을 확인시키기 위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0절에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라고 말씀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처음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처럼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손과 창에 찔리셨던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증거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자국을 보이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인식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증거는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자국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땅의 삶을 마치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나타낼 수 있는 가장 큰 증거는 주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십자가를 진 흔적 뿐입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믿음으로 살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십자가를 알고 지고 사는 삶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21절 함께 읽습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지금 여기 있는 우리는 자신의 의지로 지금 이곳에 있는 것 같지만, 성경은 그렇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지명하여 부르셨다고 말씀합니다(사 43:1, 엡 1:4).
예수님은 죄와 질병과 죽음의 고통 가운데 있는 이 세상을 구원할 복음의 일꾼으로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예수님의 대리인이 되어 예수님이 하시려는 말씀을 전하고,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연약한 곳을 치유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는 단순히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만은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또 다른 한 명의 예수’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구원의 통로로 이 땅에 보내신 것 같이, 우리도 구원의 통로로 세움을 받기 위해 먼저는 예수님으로부터 교회의 지체로서 부르심을 받았고, 또 세상에 보내심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사실을 가슴깊이 새기고 많은 사람을 살리는 구원의 통로로서의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잃어버린 양들을 구원하는 복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22-23절 함께 읽습니다.
오늘 제가 강조하고 싶은 말씀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교회가 구원의 통로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을 받으면 지혜를 얻고, 병을 고치고, 예언하고, 방언하고 하는 외적인 능력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성령을 받는 것은 곧 죄를 사하는 권능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쫓는 그런 능력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은 도구이고, 진짜 목적은 예수님이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지심으로 그들의 죄를 사하여 주신 것 같이 우리에게도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짐으로 그들의 죄를 사하는 권능’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넓은 마음으로 죄를 사해 주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도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거나 정죄할 자격도, 권한도 없습니다.
죄 사함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권한입니다(막 2:7 ).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어지는 우리 성도들조차 용서받은 죄인에 불과하며, 목회자들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뜻은 우리가 직접 죄를 사해 주는 것이 아니라, 다만 죄에 대한 용서를 예수의 이름으로 선언할 권리가 우리 성도들에게 위탁되었다는 뜻입니다.
내가 죄를 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신 내가 전하는 예수님이 그들의 죄를 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될 것이지만,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그 죄가 그대로 있어 그들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저 말로만 “죄가 사해졌습니다”라고 한다고 죄가 사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기에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세상 사람들에게 ‘싸구려’라는 오명을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죄 사함의 권능은 예수님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던 그들을 용서한 것 같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은 자들을 용서할 때 주어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 용서는 “은혜받았다”라는 들뜬 마음으로 쉽게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일례로, 너무나도 많은 성도들이 먼저 죄사함을 받은 자로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지로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용서는 얼마가지 않아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오히려 자신의 선행과 용서에 감사하지 않는 상대방의 반응에 갈등하고 방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어떤 죄를 지었어도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다 용서받았다”고 하면서 자신으로 인해 고통받은 사람에게 아무런 사죄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용서는 필요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용서를 받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회개를 오해한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죄를 지으면 그때마다 당사자에게 직접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눅 17:3-4).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받았으니 마음이 편하다 감사하다 하며 끝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의 애통함을 가슴으로 느끼며 그 사람 앞에서 눈물로 용서를 빌고 회개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한 깊은 애통함도 없고, 피해자에게 잘못했다는 진심 어린 고백 한 마디 없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가슴을 치면서 자기 죄를 눈물로 회개해 본적이 없이, 죄를 반복해 짓고 살면서 단순히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죽으셨으니, 나는 용서를 받았다”라는 교리를 믿는다고 해서 지옥에서 천국으로 건너뛰게 될 줄 아는 것은 십자가 복음을 곡해한 것입니다.
그러한 십자가 복음은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어떤 죄에서도 다 건져내는 능력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의 능력은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가 있는 자에게만 역사합니다.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가 없는 십자가 복음에 대한 믿음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의 열매가 없고, 내 죄에 대한 애통함이 없이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 내 모든 죄를 사하셨다” 이렇게 믿는 복음은 없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의 죄에 대한 진정한 애통함을 거친 후에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였습니까?
지금도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죄로 인한 진정한 애통함이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매일 외우는 주기도문의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라는 고백을 실천하고 살고 계십니까?
신앙에 있어 이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라”
“죄를 사하는 권능, 복음을 선포하는 삶을 살아라”
오늘,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아 죄를 사하는 삶, 복음으로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기적을 베푸시고 병자를 치유하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님의 시체를 찾는 신앙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찾고 만나는 신앙을 소유하기를 원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참 평강을 누리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또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구원의 통로로 이 땅에 보내신 것 같이, 저희도 예수님으로부터 각각 처한 곳의 구원의 통로로 보냄을 받았음을 믿습니다. 성령 충만 받아서 죄 사하는 권능, 곧 복음 전도의 복된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지난주 우리는 예수님의 빈 무덤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한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보려면, 그의 무덤을 보면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위인들과 권세가들은 무덤의 크기로 영광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광은 곧 무덤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빈 무덤의 주인공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이 빈 무덤은 예수님 한 사람만의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뒤를 이어 두 번째, 세 번째…. 이렇게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세상의 권세, 곧 무덤의 영광을 바라보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빈 무덤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1.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의 소망을 기억하지 못했기에 기뻐해야 할 예수님의 빈 무덤이 오히려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두려움에 빠진 이유는 자신들이 그토록 열광하며 따르던 예수님이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게다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시신까지 훼손하려고 훔쳐 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간 유대인들이 자신들까지 붙잡아 죽이려고 한다는 두려움에 빠져 19절에 기록된 것처럼 함께 모여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막달라 마리아는 차마 무덤에서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스승의 억울한 죽음을 애통해하고 있었습니다(11절).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15절).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동산지기인 줄 알았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죽은 줄 알았습니다.
마리아는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첫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올 만큼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그녀가 찾은 예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니라 죽은 예수님이었습니다.
마리아는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주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나름대로 선행을 하면서 산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믿지 못하고, 그저 나를 지키시는 예수님, 내게 복 주시는 예수님,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으로만 믿는다면, 마리아처럼 부활의 주님이 눈앞에 나타나시더라도 알아보지 못하게 됩니다.
제자들처럼 삶에 풍파가 없고, 모든 일이 잘될 때는 신앙생활을 잘하지만,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하나님 원망하고 불평하고 실망과 절망의 나락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적을 베푸시고 병자를 치유하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님의 시체를 찾는 신앙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찾고 만나야 합니다.
죽은 예수님을 찾으면 슬픔과 두려움으로 통곡하게 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기쁨과 소망이 넘칩니다.
죽은 예수님을 생각하던 사람들은 다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사람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변화된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소망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슴 깊은 곳에 영접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19절 함께 읽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제자들은 마리아로부터 예수님의 부활을 전해 들었지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18절).
마리아가 예수님을 너무 그리워해서 환상을 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서도 여전히 불안과 두려움에 빠져 모인 곳의 문들을 다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분명 문을 잠그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집안으로 들어오셔서 제자들 앞에 서셨습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은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신비로운 몸을 가지셨음”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닫힌 문을 통과하셔서 제자들 앞에 서신 예수님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지금 제자들에게 있어 부활하신 예수님이야말로 두렵게 하는 모든 것을 극복하게 할 평강 그 자체였기 때문에 이렇게 인사를 하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죄와 질병과 죽음 때문에 평강이 사라진 이 세상에 진정한 평강을 주시기 위해 부활하셨음을 확인시키기 위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0절에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라고 말씀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처음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처럼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손과 창에 찔리셨던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증거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자국을 보이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인식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증거는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자국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땅의 삶을 마치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나타낼 수 있는 가장 큰 증거는 주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십자가를 진 흔적 뿐입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믿음으로 살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십자가를 알고 지고 사는 삶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21절 함께 읽습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지금 여기 있는 우리는 자신의 의지로 지금 이곳에 있는 것 같지만, 성경은 그렇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지명하여 부르셨다고 말씀합니다(사 43:1, 엡 1:4).
예수님은 죄와 질병과 죽음의 고통 가운데 있는 이 세상을 구원할 복음의 일꾼으로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예수님의 대리인이 되어 예수님이 하시려는 말씀을 전하고,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연약한 곳을 치유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는 단순히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만은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또 다른 한 명의 예수’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구원의 통로로 이 땅에 보내신 것 같이, 우리도 구원의 통로로 세움을 받기 위해 먼저는 예수님으로부터 교회의 지체로서 부르심을 받았고, 또 세상에 보내심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사실을 가슴깊이 새기고 많은 사람을 살리는 구원의 통로로서의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잃어버린 양들을 구원하는 복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22-23절 함께 읽습니다.
오늘 제가 강조하고 싶은 말씀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교회가 구원의 통로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을 받으면 지혜를 얻고, 병을 고치고, 예언하고, 방언하고 하는 외적인 능력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성령을 받는 것은 곧 죄를 사하는 권능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쫓는 그런 능력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은 도구이고, 진짜 목적은 예수님이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지심으로 그들의 죄를 사하여 주신 것 같이 우리에게도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짐으로 그들의 죄를 사하는 권능’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넓은 마음으로 죄를 사해 주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도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거나 정죄할 자격도, 권한도 없습니다.
죄 사함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권한입니다(막 2:7 ).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어지는 우리 성도들조차 용서받은 죄인에 불과하며, 목회자들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뜻은 우리가 직접 죄를 사해 주는 것이 아니라, 다만 죄에 대한 용서를 예수의 이름으로 선언할 권리가 우리 성도들에게 위탁되었다는 뜻입니다.
내가 죄를 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신 내가 전하는 예수님이 그들의 죄를 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될 것이지만,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그 죄가 그대로 있어 그들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저 말로만 “죄가 사해졌습니다”라고 한다고 죄가 사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기에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세상 사람들에게 ‘싸구려’라는 오명을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죄 사함의 권능은 예수님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던 그들을 용서한 것 같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은 자들을 용서할 때 주어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 용서는 “은혜받았다”라는 들뜬 마음으로 쉽게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일례로, 너무나도 많은 성도들이 먼저 죄사함을 받은 자로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지로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용서는 얼마가지 않아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오히려 자신의 선행과 용서에 감사하지 않는 상대방의 반응에 갈등하고 방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어떤 죄를 지었어도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다 용서받았다”고 하면서 자신으로 인해 고통받은 사람에게 아무런 사죄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용서는 필요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용서를 받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회개를 오해한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죄를 지으면 그때마다 당사자에게 직접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눅 17:3-4).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받았으니 마음이 편하다 감사하다 하며 끝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의 애통함을 가슴으로 느끼며 그 사람 앞에서 눈물로 용서를 빌고 회개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한 깊은 애통함도 없고, 피해자에게 잘못했다는 진심 어린 고백 한 마디 없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가슴을 치면서 자기 죄를 눈물로 회개해 본적이 없이, 죄를 반복해 짓고 살면서 단순히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죽으셨으니, 나는 용서를 받았다”라는 교리를 믿는다고 해서 지옥에서 천국으로 건너뛰게 될 줄 아는 것은 십자가 복음을 곡해한 것입니다.
그러한 십자가 복음은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어떤 죄에서도 다 건져내는 능력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의 능력은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가 있는 자에게만 역사합니다.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가 없는 십자가 복음에 대한 믿음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의 열매가 없고, 내 죄에 대한 애통함이 없이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 내 모든 죄를 사하셨다” 이렇게 믿는 복음은 없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의 죄에 대한 진정한 애통함을 거친 후에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였습니까?
지금도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죄로 인한 진정한 애통함이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매일 외우는 주기도문의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라는 고백을 실천하고 살고 계십니까?
신앙에 있어 이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라”
“죄를 사하는 권능, 복음을 선포하는 삶을 살아라”
오늘,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아 죄를 사하는 삶, 복음으로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기적을 베푸시고 병자를 치유하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님의 시체를 찾는 신앙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찾고 만나는 신앙을 소유하기를 원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참 평강을 누리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또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구원의 통로로 이 땅에 보내신 것 같이, 저희도 예수님으로부터 각각 처한 곳의 구원의 통로로 보냄을 받았음을 믿습니다. 성령 충만 받아서 죄 사하는 권능, 곧 복음 전도의 복된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