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77. 십자가 위에서 (요 19:17-30)

우인택 목사
2023-08-27
조회수 2915

17.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18.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21.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22.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23.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2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성경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이 두 성경을 ‘생명’과 ‘죽음’의 기준으로 보면, 구약성경은 인류의 시조 아담의 범죄로부터 시작된 ‘죄와 죽음’의 역사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고, 신약성경은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 ‘의와 생명’의 역사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 5장에는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라고 말씀하면서 아담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아담을 비롯한 그의 자손들이 “자녀를 낳고 몇 년을 살다가 죽었더라”라는 말을 계속하여 반복합니다.
“아담은 셋을 낳은 후 800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930세를 살고 죽었더라 셋은 105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807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912세를 살고 죽었더라 에노스는 90세에 게난을 낳았고 게난을 낳은 후 815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905세를 살고 죽었더라…” 이렇게 계속 반복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몇 년을 살았든 결론은 다 ‘죽었더라’입니다. 죽음의 계보입니다.

이에 비해, 신약성경의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 1장의 계보에는 ‘죽었더라’가 아니라 ‘낳고, 낳고, 낳고’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이렇게 계속 반복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마지막에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의 나심을 기록합니다. 생명의 계보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도 구약성경의 사람들처럼 자신의 삶을 살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에 대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잔다”라고 말씀합니다(고전 15장).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못 박혀 돌아가신 곳의 지명을 ‘해골’, 히브리어로 ‘골고다 Γολγοθα’라고 말씀합니다(영어: 갈보리 Calvary).
그곳은 지형이 해골같이 생겼고, 유대 전설에 인류의 시조 아담의 해골이 그곳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해졌기 때문에 그곳을 ‘골고다’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곳은 예로부터 ‘처형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골고다를 구약, 곧 아담의 범죄, 죄와 죽음을 상징한다고 볼 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죄와 죽음을 상징하는 골고다에서 죄와 죽음의 역사인 구약을 마감하시고, 신약, 곧 의와 생명의 역사를 여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1. 먼저, 17절에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의 그들은 유대인들을 의미합니다.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하자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사형 집행을 서둘렀습니다.
왜냐하면, 다음날이 유대인들의 최고 명절인 유월절이 시작되는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거짓 모함과 불의한 재판으로 한 젊은이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악행을 저지르고서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유월절을 거룩하게 지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어이없고 악한 일입니까?
그들은 사랑의 하나님을 고백하면서도 타인에 대한 용서와 사랑은 조금도 실천하지 않는 이중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신앙은 자신들의 지위와 부를 축적하는 도구였을 뿐, 더이상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들의 이러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조명하면서 삶과 연결되지 않는 종교적인 열심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강조하고 있습니다.
삶과 연결되지 않는 종교적인 열심은 불신자들보다 더 악한 삶의 열매를 맺게 됨을 극명하게 보여 준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열정과 삶이 분리되는 이러한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배우고 익힌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에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임을 분명하게 기억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약 2:26).

 

2. 이어지는 18절 함께 읽습니다.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예수님은 홀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다른 죄수 두 사람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그들은 강도들이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의 처형을 정당화하기 위해 예수님을 마치 강도들의 두목인 것처럼 꾸며 십자가형을 집행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는 예수님이 철저한 죄인의 자리까지 내려가셨음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흉악한 사람들의 죄까지도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19-20절 함께 읽습니다.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당시 십자가형이 집행되면 십자가에 죄수가 왜 처형되었는지 이유를 밝히는 패를 붙이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히브리어(아람어), 로마어(라틴어), 헬라어(그리스어), 이렇게 3개의 언어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를 붙였습니다.
당시 히브리어는 유대인의 언어였고, 로마어는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인의 언어였고, 헬라어는 로마 제국 전역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공용어였습니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이렇게 3개의 언어로 죄패를 쓴 것은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죄수의 죄명을 알게 함으로써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두 강도 사건과 마찬가지로 십자가 사건이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의 종교’, ‘로마의 법과 정치’, ‘헬라의 철학과 문화’, 곧 온 세상이 공범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의 죄까지도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23절 함께 읽습니다.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당시 군인들은 4인 1조였습니다(행 12:4).
4명의 군인이 예수님의 옷을 4깃으로 나누었다는 것은 옷을 4조각으로 찢어서 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의 평상복은 허리띠, 두건, 신발, 겉옷, 속옷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중에서 허리띠, 두건, 신발, 겉옷을 하나씩 가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속옷은 나눌 수가 없어서 제비를 뽑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대로 속옷까지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죄인들에게 주셨습니다(24절).

그런데 여러분, 누가복음 8장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눅 8:43-44).
여인은 예수님의 옷깃에 손을 댔을 뿐인데,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이 그녀에게 임했고 그녀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예수님이 주시지 않아도 믿음으로 그 옷깃에 손 만대도 나타나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군인들은 예수님의 겉옷뿐만 아니라 속옷까지 만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아무런 능력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옷깃을 잡았던 혈루증을 앓던 여인과 예수님의 옷을 나눠 가졌던 군인들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목적입니다.
“무엇을 목적으로 예수님의 옷을 만졌느냐?”에 따라 그 능력이 나타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했던 것입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자신이 예수님께 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예수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옷깃에 손을 대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자신의 병을 고치시리라 믿었습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면 자신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대가로 예수님의 옷을 가질 권리를 가졌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들의 권리행사로 예수님의 옷을 나누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옷은 그 자체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으로 그 옷을 잡았을 때에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잡았을 때에는 한낱 천 조각에 불과했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이지만, “내가 이만큼 헌신했으니 하나님께서 마땅히 도와주셔야 합니다. 이만큼 충성했는데 어찌 내게 복을 주시지 않습니까?” 하고 믿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이름이 글자 조각일 뿐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습니까?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마음입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그 대가로 예수님의 옷을 나누던 군인의 마음입니까?
오늘, 스스로의 믿음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이어지는 26-27절 함께 읽습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님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처절한 십자가의 고통 중에서도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았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여자’로 번역된 헬라어 ‘귀나이 γυναι’는 존중하는 상대에 대한 존칭입니다.
“어머니 보소서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또한, 이는 창세기 3:15의 ‘여자의 후손’(원시복음)에 대한 예언의 성취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제자에게 어머니의 부양을 당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는 남동생이 네 명이나 있었습니다.
또, 여동생도 있었습니다(마 13:55-56).
어머니의 부양을 부탁하려면 동생들에게 해야 더 옳습니다.
게다가 본문에서의 제자는 ‘요한’인데, 요한은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성격이 차분하지 못한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더욱이 자기 어머니를 통해 예수님에게 부당한 청탁을 할 정도로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그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신 것은 성령의 강림하심으로 새롭게 탄생할 교회를 염두에 두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장차 이루어질 교회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혈연관계를 초월하여 ‘새로운 가족 관계’가 시작될 것임을 이 사건을 통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가족은 기본적으로 피를 나눈 사람들을 말하는데, 우리 성도들에게는 예수님의 피가 흐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의 피보다도 귀하고 진한 예수님의 피를 나누어 받은 한 가족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에 한 가족이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가 우리에게 흐르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한 분 아버지와 형제자매들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예표로서 우리에게 교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모든 성도들을 한 가족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비결입니다(30절).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한 가족으로 살면,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십자가 위에서조차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시고 다 이루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어느 곳에 있던지, 어떠한 상황 속에 있던지 있는 그곳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까지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을 멈추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들도 예수님을 본받아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의 십자가 위에 선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일은 혼자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의 피로 가족이 되었음을 기억하고 서로 돕고 의지함으로 합력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온라인 헌금 계좌 : 9002-1941-6987-1 

   (새마을금고 / 동탄영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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