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2024년 1월 첫 주에 “영적인 무성장증을 극복하라”, 두 번째 주일에는 “기도를 새롭게 하라”, 세 번째 주일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교회 밖으로까지 넘치게 하라”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구원받기 이전의 우리의 상태와 이러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 대하여 말씀하면서, 그러한 모든 것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욱 온전한 확신으로 받아들이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먼저, 1절 함께 읽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예수님께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여러분을 살리셨습니다. 아멘이십니까? 그리고 “살리셨다”라는 말은 “이전에는 죽었었다”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 과거의 우리는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였다”라는 것입니다. 특히, ‘죽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네크로스 νεκρός’는 ‘영적으로 죽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을 뜻합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생명’을 표현할 때 두 가지 단어를 사용합니다. ‘프쉬케 ψυχή’와 ‘조에 ζωή’입니다(참고. ‘비오스 βίος’ 생활, 분깃, 삶의 영역, 식물의 생명).
이 중에서 ‘프쉬케’는 ‘동물적인 생명’을 뜻합니다. 태어나서 먹고 자고 성장하다가 때가 되면 죽는 동물적인 생명이 프쉬케입니다(마 6:25, 막 8:35, 눅 12:19). 프쉬케의 생명은 반드시 죽습니다. 그래서 프쉬케의 삶은 허무한 삶입니다. 허무함을 이기려고 온갖 즐거움과 쾌락과 좋은 일들을 다 해보지만, 결국에는 허무에 빠지는 것이 프쉬케의 생명입니다(전 1:2-3). 혹, 잠시의 기쁨과 평안은 있을 수 있지만, 참 기쁨과 평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 ‘조에’는 영적인 생명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은 성도들이 누리는 삶을 조에라고 합니다(요일 5:12). 조에의 생명은 프쉬케의 생명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프쉬케의 생명은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의 생명이지만, 조에의 생명은 예수님의 생명이 함께하는 생명, 성령이 거듭나게 한 생명,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한 생명, 내 중심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된 생명입니다(롬 6:23).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변화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새 생명,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조에의 생명을 누리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지혜와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아 형통하고 복된 삶을 살게 됩니다(요 14:27, 롬 14:17). 형편과 처지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인생의 참 의미와 보람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함에도 우리가 조에의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치유되지 않은 마음의 상처로 인한 분노, 용서하지 못함, 원망, 배신감 등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엡 4:26-27). 우리 마음에 분노와 용서하지 못함이 있으면,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을 도적질하고, 우리를 멸망시키려는 사탄’이 더욱 강하게 미혹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만듭니다. 감사와 기쁨이 사라지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예수님의 사랑을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듬뿍 받아야 합니다. 그를 통해 원망도 이기고, 배신감도 이기고, 분노도 가라앉히고, 원수도 사랑으로 이겨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이러한 것을 꿈도 꿀 수 없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힘입으면 누구든지 능히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이에 대한 간증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진정한 생명’이란 죽음으로부터 위협을 받지 않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불안하지 않은 생명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은 ‘또 하나의 우상숭배’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7:3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원한 생명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뜻대로 사는 것이 믿음이요,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삶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3:1은 이것이 없는 사람들에 대하여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사실은 죽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1절에서 말씀하는 ‘죽었던’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을 알고, 만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호흡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게 하지 못했기에 그 영이 죽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런 우리를 “살리셨도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통해 그러한 우리를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신앙고백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2절 함께 읽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에베소 성도들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그때, 이 세상 풍조를 따랐다고 말씀합니다. 본문에 의하면 ‘이 세상 풍조’의 주관자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사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 풍조를 따라가면 곧 ‘사탄을 따라가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사탄’ 또는 ‘마귀’라고 표현하지 않고 ‘영’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이 세상 풍조를 사탄이 조장하고 있지만,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고, 혼미하게 하는 타락한 이 세상의 풍조 배후에 사탄이 역사하고 있지만, 사탄이 그 사실을 숨기고 있기에 사람들은 그 사실을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일 이 세상 풍조가 사탄의 역사함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사람들이 안다면 따라갈까요? 만일, 그 주관자가 사탄이라는 것이 눈에 띄게 드러난다면 지금처럼 쉽게, 타락한 세상 풍조에 물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탄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자신이 주관자가 되어서 하는 모든 일을 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시대에 따라 변하는 세태’라고 믿게 합니다. 이 세상 풍조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조금도 그것이 사탄의 역사라는 것을 눈치 못 채게 합니다. 그렇기에 세상 사람들이 거기에 빠져서 멸망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 말씀하고, “그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일이다”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롬 12:2, 약 4:4).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세상의 타락된 모든 풍조는 사탄의 주관 아래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세상 풍조를 따른다면 그것은 곧 사탄을 따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풍조가 아무리 우리의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또 좋아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따라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풍조는 인간을 멸망에 빠뜨리기 위한 사탄의 강력한 도구임을 늘 기억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3. 이어지는 3절 함께 읽습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 말씀은 ‘인간의 완전 타락’과 ‘원죄 교리’를 가르치는 매우 귀중한 말씀입니다. 인간의 원죄 교리를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 성경의 그 어떤 진리도 바르게 깨달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우리도…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말씀합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죄를 지으며 살게 된 모든 원인은 태어날 때부터 진노의 자녀이었고, 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를 짓고 싶어서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죄로 가득한 세상이기에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그 누구도 짓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7:18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예수를 믿고 자신이 의인이 된 줄로 알았는데, 또 의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했는데, 그러나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보니 여전히 죄를 지으며 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죄로 가득한 세상이기에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그 누구도 짓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우리는 의인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 안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의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의인으로 자처합니다. 물론,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한,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한시라도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이 말씀은 죄책감을 가지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죄에 연약한 상태로 노출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믿음이 자랄수록 죄를 경계하고, 겸손해지고, 자신의 믿음 없음을 고백하게 되고 더욱 낮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어지는 4-5절에 우리가 거듭나서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주관적 체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다고 힘주어 말씀합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성도들은 흔히 ‘거듭남’을 자신의 체험과 연관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거듭남’과 ‘거듭남의 체험’은 엄연히 다릅니다. 이에 대하여 몇 년 전에 제 아들과 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오늘 마침 이러한 내용이 주어져서 설명해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 ‘거듭남의 체험’이라는 것이 말 그대로 ‘거듭나는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거듭남을 자체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체험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미 거듭난 사실을 깨닫게 되는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령의 역사에 의해 눈물과 콧물을 쏟을 때, 바로 그때 여러분이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미 거듭났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깨닫는 것입니다. 그때서야 자신이 얼마나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며, 구제받을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사랑으로 자신을 구원해 주셨는지 그것이 깨달아짐으로 인해 그것으로 말미암아 감동하고 감격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체험과 거듭남을 일치시키려고 하기에 신앙의 문제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러한 감정적인 체험에 목을 매게 되고 그러한 것을 이용한 많은 종교인들의 유혹에 넘어가 복음과는 전혀 동떨어진 믿음에 빠져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잃어버리는 사람들까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체험이 전혀 없는 사람은 구원에 대한 자신이 없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구원을 받은 것인지 받지 못한 것인지 알지 못하는 가운데 구원의 확신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또,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집회의 분위기와 자신의 처지와 형편, 감정에 취해 눈물 콧물 흘리며 신세 한탄한 것을 거듭남의 체험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을 성령충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거듭남은 우리의 주관적인 체험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고린도후서 5:17에서 명쾌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여러분, 여기 어디에 체험을 해야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말이 나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체험을 했어도 좋습니다. 전혀 체험을 못 했어도 좋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지난날의 모든 악한 행실을 회개하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힘쓰고 있다면, 그는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성경은 베드로전서 1:3에서도 이 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거듭남을 우리의 체험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다시 사신 예수님의 부활에서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난 것은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특별한 체험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거듭남을 의심하고 불안해하시겠습니까? 제가 묻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죽음에서 부활하셨음을 믿습니까? 약간의 의심이나 일말의 의혹 없이 사실로 믿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도 예수님과 함께 죄와 허물로 인한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예수님께서 나를 끌어안고, 나를 대표하여, 나와 함께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이 사실을 증언함으로써 거듭남의 기쁨을 더욱 온전하게 누리는 여러분이 되기를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허물과 죄로 인해 죽었던 저희에게,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던 본질상 분노의 자녀였던 저희에게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시고, 거듭나게 해 주셨사오니 감사하옵나이다. 이 놀라운 구원의 감격이 식어지지 않도록 성령의 은사와 권능으로 함께 하여 주옵소서. 또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이 사실을 증언함으로써 생명을 살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2024년 1월 첫 주에 “영적인 무성장증을 극복하라”, 두 번째 주일에는 “기도를 새롭게 하라”, 세 번째 주일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교회 밖으로까지 넘치게 하라”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구원받기 이전의 우리의 상태와 이러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 대하여 말씀하면서, 그러한 모든 것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욱 온전한 확신으로 받아들이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먼저, 1절 함께 읽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예수님께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여러분을 살리셨습니다. 아멘이십니까? 그리고 “살리셨다”라는 말은 “이전에는 죽었었다”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 과거의 우리는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였다”라는 것입니다. 특히, ‘죽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네크로스 νεκρός’는 ‘영적으로 죽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을 뜻합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생명’을 표현할 때 두 가지 단어를 사용합니다. ‘프쉬케 ψυχή’와 ‘조에 ζωή’입니다(참고. ‘비오스 βίος’ 생활, 분깃, 삶의 영역, 식물의 생명).
이 중에서 ‘프쉬케’는 ‘동물적인 생명’을 뜻합니다. 태어나서 먹고 자고 성장하다가 때가 되면 죽는 동물적인 생명이 프쉬케입니다(마 6:25, 막 8:35, 눅 12:19). 프쉬케의 생명은 반드시 죽습니다. 그래서 프쉬케의 삶은 허무한 삶입니다. 허무함을 이기려고 온갖 즐거움과 쾌락과 좋은 일들을 다 해보지만, 결국에는 허무에 빠지는 것이 프쉬케의 생명입니다(전 1:2-3). 혹, 잠시의 기쁨과 평안은 있을 수 있지만, 참 기쁨과 평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 ‘조에’는 영적인 생명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은 성도들이 누리는 삶을 조에라고 합니다(요일 5:12). 조에의 생명은 프쉬케의 생명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프쉬케의 생명은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의 생명이지만, 조에의 생명은 예수님의 생명이 함께하는 생명, 성령이 거듭나게 한 생명,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한 생명, 내 중심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된 생명입니다(롬 6:23).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변화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새 생명,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조에의 생명을 누리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지혜와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아 형통하고 복된 삶을 살게 됩니다(요 14:27, 롬 14:17). 형편과 처지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인생의 참 의미와 보람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함에도 우리가 조에의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치유되지 않은 마음의 상처로 인한 분노, 용서하지 못함, 원망, 배신감 등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엡 4:26-27). 우리 마음에 분노와 용서하지 못함이 있으면,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을 도적질하고, 우리를 멸망시키려는 사탄’이 더욱 강하게 미혹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만듭니다. 감사와 기쁨이 사라지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예수님의 사랑을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듬뿍 받아야 합니다. 그를 통해 원망도 이기고, 배신감도 이기고, 분노도 가라앉히고, 원수도 사랑으로 이겨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이러한 것을 꿈도 꿀 수 없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힘입으면 누구든지 능히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이에 대한 간증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진정한 생명’이란 죽음으로부터 위협을 받지 않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불안하지 않은 생명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은 ‘또 하나의 우상숭배’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7:3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원한 생명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뜻대로 사는 것이 믿음이요,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삶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3:1은 이것이 없는 사람들에 대하여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사실은 죽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1절에서 말씀하는 ‘죽었던’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을 알고, 만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호흡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게 하지 못했기에 그 영이 죽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런 우리를 “살리셨도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통해 그러한 우리를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신앙고백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2절 함께 읽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에베소 성도들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그때, 이 세상 풍조를 따랐다고 말씀합니다. 본문에 의하면 ‘이 세상 풍조’의 주관자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사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 풍조를 따라가면 곧 ‘사탄을 따라가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사탄’ 또는 ‘마귀’라고 표현하지 않고 ‘영’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이 세상 풍조를 사탄이 조장하고 있지만,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고, 혼미하게 하는 타락한 이 세상의 풍조 배후에 사탄이 역사하고 있지만, 사탄이 그 사실을 숨기고 있기에 사람들은 그 사실을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일 이 세상 풍조가 사탄의 역사함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사람들이 안다면 따라갈까요? 만일, 그 주관자가 사탄이라는 것이 눈에 띄게 드러난다면 지금처럼 쉽게, 타락한 세상 풍조에 물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탄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자신이 주관자가 되어서 하는 모든 일을 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시대에 따라 변하는 세태’라고 믿게 합니다. 이 세상 풍조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조금도 그것이 사탄의 역사라는 것을 눈치 못 채게 합니다. 그렇기에 세상 사람들이 거기에 빠져서 멸망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 말씀하고, “그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일이다”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롬 12:2, 약 4:4).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세상의 타락된 모든 풍조는 사탄의 주관 아래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세상 풍조를 따른다면 그것은 곧 사탄을 따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풍조가 아무리 우리의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또 좋아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따라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풍조는 인간을 멸망에 빠뜨리기 위한 사탄의 강력한 도구임을 늘 기억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3. 이어지는 3절 함께 읽습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 말씀은 ‘인간의 완전 타락’과 ‘원죄 교리’를 가르치는 매우 귀중한 말씀입니다. 인간의 원죄 교리를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 성경의 그 어떤 진리도 바르게 깨달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우리도…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말씀합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죄를 지으며 살게 된 모든 원인은 태어날 때부터 진노의 자녀이었고, 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를 짓고 싶어서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죄로 가득한 세상이기에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그 누구도 짓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7:18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예수를 믿고 자신이 의인이 된 줄로 알았는데, 또 의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했는데, 그러나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보니 여전히 죄를 지으며 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죄로 가득한 세상이기에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그 누구도 짓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우리는 의인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 안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의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의인으로 자처합니다. 물론,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한,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한시라도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이 말씀은 죄책감을 가지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죄에 연약한 상태로 노출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믿음이 자랄수록 죄를 경계하고, 겸손해지고, 자신의 믿음 없음을 고백하게 되고 더욱 낮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어지는 4-5절에 우리가 거듭나서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주관적 체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다고 힘주어 말씀합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성도들은 흔히 ‘거듭남’을 자신의 체험과 연관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거듭남’과 ‘거듭남의 체험’은 엄연히 다릅니다. 이에 대하여 몇 년 전에 제 아들과 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오늘 마침 이러한 내용이 주어져서 설명해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 ‘거듭남의 체험’이라는 것이 말 그대로 ‘거듭나는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거듭남을 자체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체험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미 거듭난 사실을 깨닫게 되는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령의 역사에 의해 눈물과 콧물을 쏟을 때, 바로 그때 여러분이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미 거듭났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깨닫는 것입니다. 그때서야 자신이 얼마나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며, 구제받을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사랑으로 자신을 구원해 주셨는지 그것이 깨달아짐으로 인해 그것으로 말미암아 감동하고 감격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체험과 거듭남을 일치시키려고 하기에 신앙의 문제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러한 감정적인 체험에 목을 매게 되고 그러한 것을 이용한 많은 종교인들의 유혹에 넘어가 복음과는 전혀 동떨어진 믿음에 빠져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잃어버리는 사람들까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체험이 전혀 없는 사람은 구원에 대한 자신이 없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구원을 받은 것인지 받지 못한 것인지 알지 못하는 가운데 구원의 확신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또,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집회의 분위기와 자신의 처지와 형편, 감정에 취해 눈물 콧물 흘리며 신세 한탄한 것을 거듭남의 체험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을 성령충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거듭남은 우리의 주관적인 체험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고린도후서 5:17에서 명쾌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여러분, 여기 어디에 체험을 해야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말이 나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체험을 했어도 좋습니다. 전혀 체험을 못 했어도 좋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지난날의 모든 악한 행실을 회개하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힘쓰고 있다면, 그는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성경은 베드로전서 1:3에서도 이 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거듭남을 우리의 체험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다시 사신 예수님의 부활에서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난 것은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특별한 체험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거듭남을 의심하고 불안해하시겠습니까? 제가 묻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죽음에서 부활하셨음을 믿습니까? 약간의 의심이나 일말의 의혹 없이 사실로 믿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도 예수님과 함께 죄와 허물로 인한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예수님께서 나를 끌어안고, 나를 대표하여, 나와 함께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이 사실을 증언함으로써 거듭남의 기쁨을 더욱 온전하게 누리는 여러분이 되기를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허물과 죄로 인해 죽었던 저희에게,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던 본질상 분노의 자녀였던 저희에게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시고, 거듭나게 해 주셨사오니 감사하옵나이다. 이 놀라운 구원의 감격이 식어지지 않도록 성령의 은사와 권능으로 함께 하여 주옵소서. 또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이 사실을 증언함으로써 생명을 살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