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10.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
1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12.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언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언이 참된 줄을 아느니라
13. ○내가 네게 쓸 것이 많으나 먹과 붓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14. 속히 보기를 바라노니 또한 우리가 대면하여 말하리라
15.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너는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라
지난주일 본문은 신실한 믿음의 자세로 순회 전도자들을 도운 ‘가이오’에 대한 칭찬과 격려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 말씀을 상고할 때 우리의 마음이 참으로 따스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교만한 지도자 ‘디오드레베’의 악행에 대하여 책망하고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우리의 마음이 조금 답답합니다.
1. 먼저 9절 함께 읽습니다.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앞서 소개된 ‘가이오’와는 완전히 대조되는 인물입니다. 우리 모두가 꿈꾸는 성령충만한 초대교회에 어떻게 이처럼 악한 사람이 교회를 마구 흔들수 있었는지 의아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또, 세상 어떤 교회도 완전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디오드레베는 가이오와는 달리 예수님을 본받아 섬기는 삶을 살기 보다는, 으뜸이 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으뜸이 되려고 하다 보니, 겸손하게 교회를 섬기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그에게 눈의 가시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경쟁을 좋아하고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자신과는 달리 겸손하게 교회를 섬기는 하나님의 일꾼들을 악한 말로 비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환으로 하나님의 명령이기까지 한 순회 전도자들을 돕는 것을 낭비라고 주장하며 그들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문전박대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순회 전도자들을 도우려고 하는 선한 성도들을 교회에서 내쫓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고 섬기라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디오드레베는 성도라고 할 수 없는 자였습니다. 그는 성도가 아니라 성도의 모습으로 교회에 몰래 숨어들어온 ‘거짓 교사’, 곧 ‘사탄의 종’이었습니다. 여러분, 교만하여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며, 성도들을 비방하고 박해하는 자를 가장 좋아할 존재는 누구입니까? 사탄입니다. 디오드레베가 하는 행동은 사탄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디오드레베가 다른 성도들에게 순회 전도자를 돕는 것을 금할 뿐 아니라, 돕고자 하는 성도들까지 내어 쫓았다는 것은, 당시 그가 교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가이오가 있던 교회의 감독이었거나, 아니면 그에 비슷한 위치에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교회에서 어느 정도 권력을 차지한 디오드레베는 자신이 완전한 주도권을 갖기 위해 진실한 성도들을 비방하고 내쫓고, 이로써 교단과의 관계까지 단절하고, 교회를 자기 사유화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10절에, 예수님의 사도이자 교회의 최고 권위자인 사도 요한이 나서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라며 매우 강하게 경고하게 되었고, 자신이 직접 그곳에 가서 디오드레베의 죄악을 밝혀 그의 행위에 따라 징계를 하겠다고 이 서신을 읽는 모든 성도들에게 약속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평소에 ‘사랑의 사도’로 알려진 사도 요한이 이처럼 분노하고 있다는 이 사실은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떠한 형태로든 그의 이러한 경고가 그대로 이루어졌을 것임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은 ‘사랑의 사도’인 동시에 예수님으로부터 ‘우레의 아들, 보아너게’라는 이름을 얻을 정도로 불법을 행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단호한 ‘공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이러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이 땅에서는 잘되는 것 같으나, 사도 요한이 디오드레베를 징계했듯이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그들을 심판하실 것임을 교훈하기 위함입니다. 디오드레베와 같이 이 땅에서 잠시 세력을 얻어 하나님을 비방하고, 교회와 성도를 박해하는 자들은 반드시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성경의 매우 중요한 가르침 중의 하나입니다(계 19:11-21).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사람들이 잘되고 잘산다고 해서 결코 낙심하거나 불평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한, 그들의 박해가 두려워, 믿음을 버리거나 정직하고 의롭게 사는 것을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그러할수록 악을 행하는 자들을 반드시 심판하실 하나님을 믿고, 용기를 내어 믿음과 말씀으로 선한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가이오처럼 하나님의 자랑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이를 위해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여 선한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11절에,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게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라고 권면하는데, 이는 가이오가 디오드레베의 영향을 받아 그를 따름으로써 구원에서 멀어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라는 권면은 한편으로 보면 어른에게 할 말이 아니라, 어린아이에게나 할만한 유치한 권면입니다.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라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이고 당연한 말입니다. 그래서 대개 우리는 이 권면을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지나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너무 상식적이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기에서의 ‘본받으라’라는 말은 ‘모방하라’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좀 더 분명한 어조로 번역한다면 “너는 악한 것을 모방하지 말고, 선한 것을 모방하라”라는 뜻이 됩니다. 여러분, ‘모방’은 인간에게 있어, 가르치고 배우는 모든 일의 기본입니다. 그래서 ‘교육은 모방이다’, ‘창조는 모방에서 시작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좋은 교육 환경을 위해 애쓰는 것이며,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시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성을 지닌 우리 인간은 언제나 선한 것보다는 악한 것을 쉽게 모방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린아이들만 해도 건전한 것은 열심히 가르쳐도 쉽게 잊지만, 나쁜 것은 가르치지 않아도 쉽게 보고 배웁니다. 청소년들 역시 어른을 흉내낼 때, 하고 많은 것들 가운데, 술, 담배, 유흥업소 출입과 같은 나쁜 것을 흉내내기를 좋아합니다. 이는 어른들이라고 해서 결코 예외가 아닙니다. 편법, 탈법, 쉽게 돈버는 법을 너무나도 좋아합니다. 그리고 외국인들도 말을 배울 때, 욕부터 배웁니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우리가 악한 것이 아닌 선한 것을 본받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러한 세태 속에 살아가면서 악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는 정신을 차리고, 악한 것을 피하고, 선한 것을 본받되, 특히 최고의 모범이신 예수님을 닮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성경 고린도전서 14:20에서 말씀한 것처럼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악에는 어린아이’라는 말은 ‘순진한 아이처럼 악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악한 일에는 조금의 관심이나 미련도 두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부단한 노력을 할 때, 성도로서 선하게 사는 일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신앙의 연륜이 쌓이고 교회의 지도자가 된 후에는 사도 바울처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고전 11:1). 여러분 모두, 믿음의 본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3.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뵈옵지 못했다’라는 말은 ‘만나지 못했다’라는 뜻입니다. 악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역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악을 행하지 않는다”라는 말씀이 됩니다. 동의하십니까?
그러면서 12절에,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게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을 소개합니다.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언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언이 참된 줄을 아느니라”
여기서 ‘데메드리오’는 본 서신을 가이오에게 전달한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의 서신을 전하는 데메드리오에 대하여 주변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것은 물론 성경에 비추어 보아도 부족함이 없으며 요한 자신이 보기에도 칭찬 받기에 충분하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들도 이처럼 칭찬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처럼 자신과 함께 복음을 위해 동역하고 있는 사람을 칭찬하고 높여주는 모습은 사도 요한뿐 아니라 모든 사도의 공통적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도, 베드로도 그들이 쓴 서신에서 동역자들을 칭찬하기를 잊지 않았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사도 바울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공식적으로 책망했음에도 그를 ‘사랑하는 형제’라고 부르며 그의 서신들이 성경과 동일한 영감을 받은 것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세워주었습니다(벧후 3:15.16). 이처럼 다른 사람들의 책망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수고하는 믿음의 동역자들을 진심으로 세워주고 높이는 아름다운 모습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공통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러한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친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틈만 있으면 타인들 앞에서 상대의 약점을 들춰내고 흉을 봅니다. 여러 가지 험담으로 상대방을 깎아내림으로써 자신을 높이는 것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에 대하여 조금의 죄책감도 갖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물론 교역자들 사이에서조차 서로를 칭찬하여 높이는 일은 오히려 귀한 일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들은 자신의 죄로 인해 멸망당할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로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구원받고 의인으로 세움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우리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도 우리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자격이 없지만, 그러함에도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공로에 의해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우리가 누구의 흉을 보며, 무엇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뿐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자들입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복음의 일꾼으로 세우셔서 잃어버린 양들을 구원하시고, 이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겸손하게 서로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모든 죄를 조건 없이 용서받은 자로서, 이웃의 실수를 될 수 있는 대로 감싸고 덮어주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 요한이 가이오와 데메드리오의 선행을 기뻐하고 칭찬하고 격려하고 자랑한 것처럼, 우리도 서로 칭찬하고 격려하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결코 인색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본분은 오직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이웃을 비판하고 정죄하기보다는 오히려 칭찬과 격려로 세우고 높여주는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궁극적으로는 자신도 높이고 교회도 함께 세워나가는 아름답고 모범적인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입니까?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성도가 되면 아무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선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까? 성도가 하는 모든 일이 선한 행동이 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성도라고 불리는 사람들 중에도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하게, 세상의 것을 따르지 않고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것이 ‘선’이라고 말씀합니다. 선과 악, 그리고 그 기준에 대한 질문의 답은 거창한 철학적 사고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을뿐더러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선과 악은 어떤 사상이나 이론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믿고 행함으로 선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다 악으로 치우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악이 선처럼 되어버린 세상에서 뜨겁고 신실한 믿음으로 무장하여 선으로 악을 이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악의 세력이 잘되고 번성한다고 해서 결코 낙심하거나 불평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그들의 박해가 두려워, 믿음을 버리거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오히려 그러할수록 용기를 내어 악을 버리고 더욱 선을 행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뜨겁고 신실한 믿음으로 무장하여 악이 선처럼 되어버린 세상에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9.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10.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
1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12.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언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언이 참된 줄을 아느니라
13. ○내가 네게 쓸 것이 많으나 먹과 붓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14. 속히 보기를 바라노니 또한 우리가 대면하여 말하리라
15.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너는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라
지난주일 본문은 신실한 믿음의 자세로 순회 전도자들을 도운 ‘가이오’에 대한 칭찬과 격려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 말씀을 상고할 때 우리의 마음이 참으로 따스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교만한 지도자 ‘디오드레베’의 악행에 대하여 책망하고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우리의 마음이 조금 답답합니다.
1. 먼저 9절 함께 읽습니다.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앞서 소개된 ‘가이오’와는 완전히 대조되는 인물입니다. 우리 모두가 꿈꾸는 성령충만한 초대교회에 어떻게 이처럼 악한 사람이 교회를 마구 흔들수 있었는지 의아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또, 세상 어떤 교회도 완전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디오드레베는 가이오와는 달리 예수님을 본받아 섬기는 삶을 살기 보다는, 으뜸이 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으뜸이 되려고 하다 보니, 겸손하게 교회를 섬기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그에게 눈의 가시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경쟁을 좋아하고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자신과는 달리 겸손하게 교회를 섬기는 하나님의 일꾼들을 악한 말로 비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환으로 하나님의 명령이기까지 한 순회 전도자들을 돕는 것을 낭비라고 주장하며 그들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문전박대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순회 전도자들을 도우려고 하는 선한 성도들을 교회에서 내쫓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고 섬기라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디오드레베는 성도라고 할 수 없는 자였습니다. 그는 성도가 아니라 성도의 모습으로 교회에 몰래 숨어들어온 ‘거짓 교사’, 곧 ‘사탄의 종’이었습니다. 여러분, 교만하여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며, 성도들을 비방하고 박해하는 자를 가장 좋아할 존재는 누구입니까? 사탄입니다. 디오드레베가 하는 행동은 사탄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디오드레베가 다른 성도들에게 순회 전도자를 돕는 것을 금할 뿐 아니라, 돕고자 하는 성도들까지 내어 쫓았다는 것은, 당시 그가 교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가이오가 있던 교회의 감독이었거나, 아니면 그에 비슷한 위치에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교회에서 어느 정도 권력을 차지한 디오드레베는 자신이 완전한 주도권을 갖기 위해 진실한 성도들을 비방하고 내쫓고, 이로써 교단과의 관계까지 단절하고, 교회를 자기 사유화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10절에, 예수님의 사도이자 교회의 최고 권위자인 사도 요한이 나서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라며 매우 강하게 경고하게 되었고, 자신이 직접 그곳에 가서 디오드레베의 죄악을 밝혀 그의 행위에 따라 징계를 하겠다고 이 서신을 읽는 모든 성도들에게 약속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평소에 ‘사랑의 사도’로 알려진 사도 요한이 이처럼 분노하고 있다는 이 사실은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떠한 형태로든 그의 이러한 경고가 그대로 이루어졌을 것임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은 ‘사랑의 사도’인 동시에 예수님으로부터 ‘우레의 아들, 보아너게’라는 이름을 얻을 정도로 불법을 행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단호한 ‘공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이러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이 땅에서는 잘되는 것 같으나, 사도 요한이 디오드레베를 징계했듯이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그들을 심판하실 것임을 교훈하기 위함입니다. 디오드레베와 같이 이 땅에서 잠시 세력을 얻어 하나님을 비방하고, 교회와 성도를 박해하는 자들은 반드시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성경의 매우 중요한 가르침 중의 하나입니다(계 19:11-21).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사람들이 잘되고 잘산다고 해서 결코 낙심하거나 불평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한, 그들의 박해가 두려워, 믿음을 버리거나 정직하고 의롭게 사는 것을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그러할수록 악을 행하는 자들을 반드시 심판하실 하나님을 믿고, 용기를 내어 믿음과 말씀으로 선한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가이오처럼 하나님의 자랑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이를 위해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여 선한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11절에,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게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라고 권면하는데, 이는 가이오가 디오드레베의 영향을 받아 그를 따름으로써 구원에서 멀어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라는 권면은 한편으로 보면 어른에게 할 말이 아니라, 어린아이에게나 할만한 유치한 권면입니다.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라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이고 당연한 말입니다. 그래서 대개 우리는 이 권면을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지나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너무 상식적이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기에서의 ‘본받으라’라는 말은 ‘모방하라’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좀 더 분명한 어조로 번역한다면 “너는 악한 것을 모방하지 말고, 선한 것을 모방하라”라는 뜻이 됩니다. 여러분, ‘모방’은 인간에게 있어, 가르치고 배우는 모든 일의 기본입니다. 그래서 ‘교육은 모방이다’, ‘창조는 모방에서 시작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좋은 교육 환경을 위해 애쓰는 것이며,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시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성을 지닌 우리 인간은 언제나 선한 것보다는 악한 것을 쉽게 모방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린아이들만 해도 건전한 것은 열심히 가르쳐도 쉽게 잊지만, 나쁜 것은 가르치지 않아도 쉽게 보고 배웁니다. 청소년들 역시 어른을 흉내낼 때, 하고 많은 것들 가운데, 술, 담배, 유흥업소 출입과 같은 나쁜 것을 흉내내기를 좋아합니다. 이는 어른들이라고 해서 결코 예외가 아닙니다. 편법, 탈법, 쉽게 돈버는 법을 너무나도 좋아합니다. 그리고 외국인들도 말을 배울 때, 욕부터 배웁니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우리가 악한 것이 아닌 선한 것을 본받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러한 세태 속에 살아가면서 악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는 정신을 차리고, 악한 것을 피하고, 선한 것을 본받되, 특히 최고의 모범이신 예수님을 닮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성경 고린도전서 14:20에서 말씀한 것처럼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악에는 어린아이’라는 말은 ‘순진한 아이처럼 악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악한 일에는 조금의 관심이나 미련도 두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부단한 노력을 할 때, 성도로서 선하게 사는 일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신앙의 연륜이 쌓이고 교회의 지도자가 된 후에는 사도 바울처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고전 11:1). 여러분 모두, 믿음의 본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3.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뵈옵지 못했다’라는 말은 ‘만나지 못했다’라는 뜻입니다. 악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역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악을 행하지 않는다”라는 말씀이 됩니다. 동의하십니까?
그러면서 12절에,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게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을 소개합니다.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언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언이 참된 줄을 아느니라”
여기서 ‘데메드리오’는 본 서신을 가이오에게 전달한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의 서신을 전하는 데메드리오에 대하여 주변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것은 물론 성경에 비추어 보아도 부족함이 없으며 요한 자신이 보기에도 칭찬 받기에 충분하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들도 이처럼 칭찬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처럼 자신과 함께 복음을 위해 동역하고 있는 사람을 칭찬하고 높여주는 모습은 사도 요한뿐 아니라 모든 사도의 공통적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도, 베드로도 그들이 쓴 서신에서 동역자들을 칭찬하기를 잊지 않았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사도 바울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공식적으로 책망했음에도 그를 ‘사랑하는 형제’라고 부르며 그의 서신들이 성경과 동일한 영감을 받은 것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세워주었습니다(벧후 3:15.16). 이처럼 다른 사람들의 책망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수고하는 믿음의 동역자들을 진심으로 세워주고 높이는 아름다운 모습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공통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러한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친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틈만 있으면 타인들 앞에서 상대의 약점을 들춰내고 흉을 봅니다. 여러 가지 험담으로 상대방을 깎아내림으로써 자신을 높이는 것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에 대하여 조금의 죄책감도 갖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물론 교역자들 사이에서조차 서로를 칭찬하여 높이는 일은 오히려 귀한 일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들은 자신의 죄로 인해 멸망당할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로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구원받고 의인으로 세움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우리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도 우리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자격이 없지만, 그러함에도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공로에 의해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우리가 누구의 흉을 보며, 무엇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뿐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자들입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복음의 일꾼으로 세우셔서 잃어버린 양들을 구원하시고, 이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겸손하게 서로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모든 죄를 조건 없이 용서받은 자로서, 이웃의 실수를 될 수 있는 대로 감싸고 덮어주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 요한이 가이오와 데메드리오의 선행을 기뻐하고 칭찬하고 격려하고 자랑한 것처럼, 우리도 서로 칭찬하고 격려하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결코 인색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본분은 오직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이웃을 비판하고 정죄하기보다는 오히려 칭찬과 격려로 세우고 높여주는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궁극적으로는 자신도 높이고 교회도 함께 세워나가는 아름답고 모범적인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입니까?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성도가 되면 아무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선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까? 성도가 하는 모든 일이 선한 행동이 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성도라고 불리는 사람들 중에도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하게, 세상의 것을 따르지 않고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것이 ‘선’이라고 말씀합니다. 선과 악, 그리고 그 기준에 대한 질문의 답은 거창한 철학적 사고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을뿐더러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선과 악은 어떤 사상이나 이론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믿고 행함으로 선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다 악으로 치우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악이 선처럼 되어버린 세상에서 뜨겁고 신실한 믿음으로 무장하여 선으로 악을 이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악의 세력이 잘되고 번성한다고 해서 결코 낙심하거나 불평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그들의 박해가 두려워, 믿음을 버리거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오히려 그러할수록 용기를 내어 악을 버리고 더욱 선을 행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뜨겁고 신실한 믿음으로 무장하여 악이 선처럼 되어버린 세상에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