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오늘 본문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규정짓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앞부분에서 예수님과 교회의 신비한 연합 관계가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도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면서, 아내는 남편에게 교회가 예수님에게 하듯 복종해야 하고 남편은 예수님께서 교회에게 하셨듯이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 강하게 권면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서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권면은 모두 5:21의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가 바르게 정립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기초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자녀의 무조건적인 순종만을 강조하지 않고 부모와 자녀가 서로 존중할 것을 말씀하되, 특히, 자녀의 부모에 대한 순종은 주 안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1. 먼저 1절에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말씀합니다.
자녀가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것은, 성경에서뿐만 아니라 어느 사회건 시대를 초월하여 강조하는 사회윤리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되 조건을 두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라는 전제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 안에 거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구원입니다. 주 안에 거하는 자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라는 말에는 부모를 공경하되 부모가 예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순종하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부모님을 구원받게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에 대하여 언급하셨는데, 만일 부모 또는 자녀가 예수에 대한 신앙을 반대할 경우, 어떤 면에서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37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그러나 이 말씀은 부모와 자녀를 버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모와 자녀를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부모와 자녀가 예수님을 믿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그들의 말을 따르게 되면 구원받지 못하니, 어찌하든지 부모와 자녀를 믿음의 자리로 이끌라는 역설적인 말씀입니다.
이처럼 부모를 거역하고 버리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원수도 사랑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목숨까지 버려야 마땅한 성도가 어찌 자기 부모를 버릴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그 순간에도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봉양할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배척하던 형제들도 다 구원하셨습니다. 신약성경 야고보서와 유다서를 기록한 저자가 바로 예수님의 형제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부모 형제를 버려서도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에도, 그리고 구원받은 지금도 여전히 죄를 짓고 살고 있음에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속하여 용서하시고 품어주시기에 자신의 구원이 유지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압니다. 그래서 부모도 얼마든지 잘못된 일을 할 수 있고, 또 죄 가운데 거할 수도 있음을 알아 하나님의 마음으로 부모의 잘못이나 결점을 용납하고 부모님이 믿음 가운데 서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부모님의 말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그날을 고대하며 인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혹, 여러분 가운데 아직 부모님이 구원받지 못했다면 그 무엇보다도 부모님이 예수님을 영접하실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자녀로서 또 성도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옳은 일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것이 옳으니라’는 말씀은 상당히 강한 표현입니다. 이것이 옳다는 말은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 안에 있다, 하나님의 공의 안에 있다, 하나님의 율법 안에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부모가 교회를 반대하거나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금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부모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 차원으로 보든지, 하나님의 성품으로 보든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면에서 보든지 전혀 어긋남이나 모순됨이 없고, 잘 어울리고 만족시키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에베소 성도들에게 이 말씀을 하는 것은 당시 이 서신을 받는 그들은 이방인들이라, 예수를 믿기를 거부하고 박해하는 부모들이 적지 않게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했기에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라는 충고는 당시 그들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권면이었을 것입니다. 만일, 부모에게 효도하고자 하여 신앙을 버리거나, 신앙을 갖기 위해 부모를 버린다면, 그보다도 더 어리석은 행동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부모에게 순종하되 부모님들도 예수님을 믿게 해서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권면을 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었는데, 당시 성도 중에서 자신의 신앙생활을 핑계로 부모에 대한 공경을 게을리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고르반’이라고 하며 부모 공경을 게을리했듯이 교회를 열심히 섬긴다는 구실로 부모 봉양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부모 공경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 중에서,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하여 주신 첫 계명이자, 부연하여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신 계명입니다(출 20:12). 2-3절은 이러한 십계명의 5계명을 풀어서 설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라고 가르치며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있습니다(출 21:17; 레 20:9).
그런데 어찌, 나의 구원에 방해가 된다고 부모를 배척하고 버릴 수 있겠습니까? 성경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너무나도 이기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믿음에 신실하다는 우리가 혹, 부모를 소홀히 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부모 공경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4절에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아비들’는 당시의 가부장적인 시대상을 반영한 것으로, 지금 이 시대의 우리는 아버지가 아니라 부모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성경은 ‘어버이들아’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엽게’라는 말은 ‘인격적으로 무시하거나 학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은 자녀에게 이렇게 대하면 경찰이 잡아가지만, 당시 자녀는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교회는 자녀의 인권을 바르게 세우는데 기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간혹, 부모들 가운데 자녀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음식을 먹이고, 좋은 학원에 보내주면 부모 역할을 다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부모들일수록 “내가 안 해준 게 뭐 있니!” 하면서 자녀에게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모로서 자신은 자식을 위해 해줄 만큼 해주었으니 함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좋은 음식 먹고, 좋은 옷에, 좋은 학원을 다닌다고 해서 만족합니까? 그것으로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랍니까?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은 부모로부터 인격적인 대우와 사랑을 받을 때입니다.
여러분, 부잣집 아이들이라고 해서 항상 건강하고 밝게 자랍니까? 그렇지 않은 경우를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가난한 집 아이들도 얼마든지 밝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좋은 음식, 좋은 옷, 좋은 학원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사랑과 관심, 인격적인 대우를 받고 살 때 건강하게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이 자녀 교육에서 항상 우선해서 생각할 것은,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무시하거나 그들에게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입양하는 가정이 많은데, 어린이 입양이 가능한 이유는 아이들은 조금만 정을 주어도 쉽게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에 민감한 아이를 무시하고, 상처를 주고, 학대한다면 아이가 제대로 자라겠습니까? 반드시 삐뚤게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오죽하면 교육학에서 “문제 있는 부모는 있어도 문제아는 없다”라는 말이 있겠습니까? 아이들이 비뚤어지고 잘못되는 이면을 살펴보면 반드시 아이들을 그릇 대하는 부모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녀들에게 무엇을 잘해 주었는가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혹시라도 자녀들에게 어떤 상처를 준 적은 없었는지 돌아보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부모된 자신의 언행으로 자녀에게 상처를 주거나 절망감을 주고 있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모라 할지라도 자녀에게 상처를 입힐 권한은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자녀를 무시하거나 마음 아프게 해도 된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없습니다. 비록 자녀가 실수하거나 잘못했을지라도 자녀를 바로잡는 방식은 가혹한 것이어서는 안 되며,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고, 신뢰하고, 존경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 이를 가슴에 새기고 부모로서의 자신을 돌아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서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권면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신앙으로 교육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자녀 교육은 신앙이 그 방법이면서도 목표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교양이 있고, 아이들을 건실하게 잘 키웠다고 생각해도 이것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성도님 가정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머리가 남달리 뛰어났고 공부도 잘했습니다. 학교에서 1등을 놓쳐 본 적이 없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자기 자식이 그와 같으면 세상 걱정이 없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습니다.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최고 명문대학을 수석 입학하고, 수석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사법시험을 수석 합격하고 검사가 되어 출세 가도를 달렸습니다. 그런데 출세 가도를 달리던 그는 그만 날마다 마신 술이 화근이 되어 급기야 간암에 걸리게 되었고,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어떻습니까? 이래도 그저 공부만 잘하면 걱정이 없습니까? 만사가 잘되어 가는 것입니까?
여러분, 신앙으로 살 때만이 걱정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성경에 기록된 모세의 삶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아이였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가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민족을 학대하는 애굽 공주의 양자가 되어 궁궐 깊은 곳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도행전 7장에서 그가 나이 사십이 되자, 자기 민족을 돌볼 마음이 생겼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그가 애굽의 궁궐에서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마음은 순간적인 감정에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얼마가지 않아 포기했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가 끝까지 자기 민족을 애굽의 학대에서 구해 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자기 민족을 위하는 마음이 가슴속 깊이 다짐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모세에게 이러한 결단이 생겨나게 했을까요? 그는 무려 40년간을 애굽 궁궐에서 왕자로서 철저한 애굽 식의 문화와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그가 어떻게 이런 결단을 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성경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애굽 궁궐에 유모로 들어간 모세의 친어머니 요게벳의 신앙교육에서였습니다. 모세는 어려서부터 듣던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에 대한 언약을 가슴 깊이 품고 있다가, 때가 되자 결단을 하고 나서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어려서부터 철저한 신앙교육을 할 때, 그 자녀는 참된 지도자로 자라나게 됩니다. 이것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낀 사람이 모세 자신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설교를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후손들에게 가르치되 ‘어려서부터 가르치라’고 강조하여 명령했습니다. 자녀가 어디에 있든지 항상 철저하게 가르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것이 그 유명한 ‘쉐마’, 신명기 6:4-9 말씀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이 말씀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도록 그 환경을 조성하라는 것입니다. 왜 모세가 이런 말씀을 남겼습니까? 신앙교육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백성들을 데리고 40년간 광야 목회를 해보니 너무 힘들더라는 것입니다. 결국엔 자신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가나안에 못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명령은 한이 맺힌 절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녀들에게 신앙을 가르쳐야 합니다. 영어를 가르치기 전에 신앙을 가르치기 바랍니다. 학원에 가는 것이 몸에 배기 전에 교회 가는 것을 먼저 몸에 배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마땅히 행할 길을 자녀에게 가르치면 자녀가 자라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됩니다(잠 22:6). 그렇게 하시면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에게는 복 받은 사람, 여러분의 자녀에게는 효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 ‘복된 부모’, ‘복을 받는 자녀’의 자리에 서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부모의 역할과 자녀의 자세에 대하여 분명하게 배웠습니다. 주신 말씀을 기억하여 부모를 주 안에서 공경하고, 자녀를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머리에 머무는 지식이 아니라 삶의 열매로 맺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부모 공경의 본이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오늘 본문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규정짓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앞부분에서 예수님과 교회의 신비한 연합 관계가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도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면서, 아내는 남편에게 교회가 예수님에게 하듯 복종해야 하고 남편은 예수님께서 교회에게 하셨듯이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 강하게 권면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서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권면은 모두 5:21의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가 바르게 정립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기초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자녀의 무조건적인 순종만을 강조하지 않고 부모와 자녀가 서로 존중할 것을 말씀하되, 특히, 자녀의 부모에 대한 순종은 주 안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1. 먼저 1절에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말씀합니다.
자녀가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것은, 성경에서뿐만 아니라 어느 사회건 시대를 초월하여 강조하는 사회윤리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되 조건을 두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라는 전제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 안에 거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구원입니다. 주 안에 거하는 자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라는 말에는 부모를 공경하되 부모가 예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순종하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부모님을 구원받게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에 대하여 언급하셨는데, 만일 부모 또는 자녀가 예수에 대한 신앙을 반대할 경우, 어떤 면에서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37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그러나 이 말씀은 부모와 자녀를 버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모와 자녀를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부모와 자녀가 예수님을 믿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그들의 말을 따르게 되면 구원받지 못하니, 어찌하든지 부모와 자녀를 믿음의 자리로 이끌라는 역설적인 말씀입니다.
이처럼 부모를 거역하고 버리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원수도 사랑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목숨까지 버려야 마땅한 성도가 어찌 자기 부모를 버릴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그 순간에도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봉양할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배척하던 형제들도 다 구원하셨습니다. 신약성경 야고보서와 유다서를 기록한 저자가 바로 예수님의 형제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부모 형제를 버려서도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에도, 그리고 구원받은 지금도 여전히 죄를 짓고 살고 있음에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속하여 용서하시고 품어주시기에 자신의 구원이 유지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압니다. 그래서 부모도 얼마든지 잘못된 일을 할 수 있고, 또 죄 가운데 거할 수도 있음을 알아 하나님의 마음으로 부모의 잘못이나 결점을 용납하고 부모님이 믿음 가운데 서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부모님의 말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그날을 고대하며 인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혹, 여러분 가운데 아직 부모님이 구원받지 못했다면 그 무엇보다도 부모님이 예수님을 영접하실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자녀로서 또 성도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옳은 일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것이 옳으니라’는 말씀은 상당히 강한 표현입니다. 이것이 옳다는 말은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 안에 있다, 하나님의 공의 안에 있다, 하나님의 율법 안에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부모가 교회를 반대하거나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금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부모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 차원으로 보든지, 하나님의 성품으로 보든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면에서 보든지 전혀 어긋남이나 모순됨이 없고, 잘 어울리고 만족시키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에베소 성도들에게 이 말씀을 하는 것은 당시 이 서신을 받는 그들은 이방인들이라, 예수를 믿기를 거부하고 박해하는 부모들이 적지 않게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했기에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라는 충고는 당시 그들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권면이었을 것입니다. 만일, 부모에게 효도하고자 하여 신앙을 버리거나, 신앙을 갖기 위해 부모를 버린다면, 그보다도 더 어리석은 행동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부모에게 순종하되 부모님들도 예수님을 믿게 해서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권면을 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었는데, 당시 성도 중에서 자신의 신앙생활을 핑계로 부모에 대한 공경을 게을리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고르반’이라고 하며 부모 공경을 게을리했듯이 교회를 열심히 섬긴다는 구실로 부모 봉양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부모 공경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 중에서,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하여 주신 첫 계명이자, 부연하여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신 계명입니다(출 20:12). 2-3절은 이러한 십계명의 5계명을 풀어서 설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라고 가르치며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있습니다(출 21:17; 레 20:9).
그런데 어찌, 나의 구원에 방해가 된다고 부모를 배척하고 버릴 수 있겠습니까? 성경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너무나도 이기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믿음에 신실하다는 우리가 혹, 부모를 소홀히 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부모 공경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4절에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아비들’는 당시의 가부장적인 시대상을 반영한 것으로, 지금 이 시대의 우리는 아버지가 아니라 부모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성경은 ‘어버이들아’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엽게’라는 말은 ‘인격적으로 무시하거나 학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은 자녀에게 이렇게 대하면 경찰이 잡아가지만, 당시 자녀는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교회는 자녀의 인권을 바르게 세우는데 기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간혹, 부모들 가운데 자녀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음식을 먹이고, 좋은 학원에 보내주면 부모 역할을 다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부모들일수록 “내가 안 해준 게 뭐 있니!” 하면서 자녀에게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모로서 자신은 자식을 위해 해줄 만큼 해주었으니 함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좋은 음식 먹고, 좋은 옷에, 좋은 학원을 다닌다고 해서 만족합니까? 그것으로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랍니까?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은 부모로부터 인격적인 대우와 사랑을 받을 때입니다.
여러분, 부잣집 아이들이라고 해서 항상 건강하고 밝게 자랍니까? 그렇지 않은 경우를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가난한 집 아이들도 얼마든지 밝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좋은 음식, 좋은 옷, 좋은 학원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사랑과 관심, 인격적인 대우를 받고 살 때 건강하게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이 자녀 교육에서 항상 우선해서 생각할 것은,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무시하거나 그들에게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입양하는 가정이 많은데, 어린이 입양이 가능한 이유는 아이들은 조금만 정을 주어도 쉽게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에 민감한 아이를 무시하고, 상처를 주고, 학대한다면 아이가 제대로 자라겠습니까? 반드시 삐뚤게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오죽하면 교육학에서 “문제 있는 부모는 있어도 문제아는 없다”라는 말이 있겠습니까? 아이들이 비뚤어지고 잘못되는 이면을 살펴보면 반드시 아이들을 그릇 대하는 부모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녀들에게 무엇을 잘해 주었는가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혹시라도 자녀들에게 어떤 상처를 준 적은 없었는지 돌아보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부모된 자신의 언행으로 자녀에게 상처를 주거나 절망감을 주고 있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모라 할지라도 자녀에게 상처를 입힐 권한은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자녀를 무시하거나 마음 아프게 해도 된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없습니다. 비록 자녀가 실수하거나 잘못했을지라도 자녀를 바로잡는 방식은 가혹한 것이어서는 안 되며,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고, 신뢰하고, 존경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 이를 가슴에 새기고 부모로서의 자신을 돌아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서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권면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신앙으로 교육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자녀 교육은 신앙이 그 방법이면서도 목표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교양이 있고, 아이들을 건실하게 잘 키웠다고 생각해도 이것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성도님 가정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머리가 남달리 뛰어났고 공부도 잘했습니다. 학교에서 1등을 놓쳐 본 적이 없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자기 자식이 그와 같으면 세상 걱정이 없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습니다.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최고 명문대학을 수석 입학하고, 수석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사법시험을 수석 합격하고 검사가 되어 출세 가도를 달렸습니다. 그런데 출세 가도를 달리던 그는 그만 날마다 마신 술이 화근이 되어 급기야 간암에 걸리게 되었고,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어떻습니까? 이래도 그저 공부만 잘하면 걱정이 없습니까? 만사가 잘되어 가는 것입니까?
여러분, 신앙으로 살 때만이 걱정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성경에 기록된 모세의 삶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아이였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가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민족을 학대하는 애굽 공주의 양자가 되어 궁궐 깊은 곳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도행전 7장에서 그가 나이 사십이 되자, 자기 민족을 돌볼 마음이 생겼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그가 애굽의 궁궐에서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마음은 순간적인 감정에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얼마가지 않아 포기했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가 끝까지 자기 민족을 애굽의 학대에서 구해 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자기 민족을 위하는 마음이 가슴속 깊이 다짐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모세에게 이러한 결단이 생겨나게 했을까요? 그는 무려 40년간을 애굽 궁궐에서 왕자로서 철저한 애굽 식의 문화와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그가 어떻게 이런 결단을 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성경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애굽 궁궐에 유모로 들어간 모세의 친어머니 요게벳의 신앙교육에서였습니다. 모세는 어려서부터 듣던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에 대한 언약을 가슴 깊이 품고 있다가, 때가 되자 결단을 하고 나서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어려서부터 철저한 신앙교육을 할 때, 그 자녀는 참된 지도자로 자라나게 됩니다. 이것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낀 사람이 모세 자신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설교를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후손들에게 가르치되 ‘어려서부터 가르치라’고 강조하여 명령했습니다. 자녀가 어디에 있든지 항상 철저하게 가르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것이 그 유명한 ‘쉐마’, 신명기 6:4-9 말씀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이 말씀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도록 그 환경을 조성하라는 것입니다. 왜 모세가 이런 말씀을 남겼습니까? 신앙교육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백성들을 데리고 40년간 광야 목회를 해보니 너무 힘들더라는 것입니다. 결국엔 자신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가나안에 못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명령은 한이 맺힌 절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녀들에게 신앙을 가르쳐야 합니다. 영어를 가르치기 전에 신앙을 가르치기 바랍니다. 학원에 가는 것이 몸에 배기 전에 교회 가는 것을 먼저 몸에 배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마땅히 행할 길을 자녀에게 가르치면 자녀가 자라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됩니다(잠 22:6). 그렇게 하시면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에게는 복 받은 사람, 여러분의 자녀에게는 효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 ‘복된 부모’, ‘복을 받는 자녀’의 자리에 서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부모의 역할과 자녀의 자세에 대하여 분명하게 배웠습니다. 주신 말씀을 기억하여 부모를 주 안에서 공경하고, 자녀를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머리에 머무는 지식이 아니라 삶의 열매로 맺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부모 공경의 본이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