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10.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성령강림절과 관계가 있는 구약의 절기는 ‘칠질절(샤부오트 שבועות)’입니다. 칠칠절은 ‘유월절(페사흐פֶסַח)’ 다음날부터 50일째 되는 날인데,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밀 수확의 첫 열매’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민 28:26).
그리고 ‘칠칠절’을 헬라식으로 표현하면 ‘오순절(펜테코스테 Πεντηκοστή)’이 되는데, 오순절은 신구약 중간기를 거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광야에서 하나님께 율법을 받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음으로 ‘언약공동체’가 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오순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고 언약공동체가 된 것, 곧 ‘구약의 교회’가 시작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간 이 땅에 계시다가 하나님 나라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 1:4-9). 그리고 그로부터 열흘 후인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셔서 제자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부어주셨고, 그로 인해 제자들이 힘 있게 복음을 전함으로 이 땅에 ‘신약의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께서 강림하신 날을 기념하여 ‘성령강림절’로 지켰습니다(행 2:1, 20:16, 고전 16:8).
그러므로 이를 정리하면, 구약시대에는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스라엘 언약공동체인 교회가 시작되었고, 신약시대에는 ‘성령의 임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시대 교회의 완성이 신약시대의 교회라고 할 때,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께서 충만하게 역사하는 곳이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을 때, 교회에 생명력이 넘치게 되고 복음을 땅끝까지 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강림 주일인 오늘, 무엇보다도 우리 교회가 ‘말씀 충만’, ‘성령 충만’한 교회로 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행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했는데, 오늘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합니다.
1. 먼저 8절 함께 읽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이 말씀은 성도의 삶의 변화가 어디에까지 이르러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지난 본문은 우리 성도들이 반드시 버려야 할 것들에 대한 말씀이었는데, 그것은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 등 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 서신이 전해진 헬라 사회에서의 그러한 행위들은 지극히 일상화되어 있는 삶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습관화되고 일상화되어 감각이 무뎌진 죄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들은 12절에 기록된 것처럼 말하기도 부끄러운,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큰 죄악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상화되어 양심을 무디게 하는 그러한 죄악들에서 떠나야 새 사람을 입을 수 있다”고 강력한 어조로 충고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악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성도로서의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느 정도 자신의 신앙은 지킬 수는 있지만 오래가지 않아 다시 옛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래서 일상화되어 양심을 무디게 하는 죄악들에서 떠나 새 사람을 입었다면, 거기서 더 나아가 능동적으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새 사람을 입은 성도로서 삶의 변화는 불법적이고 죄악된 일을 그치는 정도에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더 나아가 빛의 자녀들처럼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빛의 자녀같이 보여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생명의 빛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빛의 자녀들처럼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단히 힘겹고, 두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빛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사는 것만이 구원받은 성도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8절을 다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지금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너희가 전에는 어둠 속에 있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어둠 그 자체였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5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빛이 비춰도 그 빛을 깨닫지 못할 만큼 ‘깊은 어두움’이었던 것이 예전 우리의 본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어둠을 벗어 버리고 빛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빛을 받아들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빛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빛의 자녀’ 이것이 지금 우리의 신분이요, 모습입니다.
여러분, 옆 사람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빛의 자녀처럼 보입니까? 여러분 모두, 빛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그렇다면 빛의 자녀로서의 우리들의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어떤 삶의 열매가 맺혀져야 합니까? 이에 대하여 3가지를 말씀합니다. 9절 함께 읽습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빛의 자녀가 사는 삶에는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는 세 가지 열매가 맺혀진다고 말씀합니다.
1) 첫 번째 열매는 ‘착함’인데, 여러분, 여러분은 착하게 사십니까? 성경에서의 착함은 마음과 삶이 정직하고 선한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관용과 자비와 인내’를 소유하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된 우리를 향해 ‘심판과 징계와 진노’ 대신 ‘자비와 긍휼과 오래 참으심’으로 대하시는 것처럼, 우리 역시 이웃을 이러한 자세로 대할 때 착함의 열매가 맺혀지게 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이러한 착함의 열매가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악하게 대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관용과 자비와 인내로 그들을 대하고 계십니까? 그러하시다면 여러분의 삶에 착함의 열매가 맺혀지고 있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열매인 ‘의로움’은 ‘하나님의 공의’를 가리킵니다. 빛의 자녀가 된 성도의 삶에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큼 정의롭고 도덕적인 삶이 나타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이러한 삶을 살고 계십니까?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저분은 법이 필요 없는 분입니다”하고 칭찬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에 의로움의 열매가 맺혀지고 있는 것입니다.
3) 세 번째 열매인 ‘진실함’은 거짓과 가식과 위선 없는 성품을 가리킵니다. 빛의 자녀가 된 성도의 삶에는 거짓이나 가식, 위선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의 말은 믿습니다” 하고 칭찬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에 진실함의 열매가 맺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 모두 쉽지 않습니다. 사람의 노력으로는 이루어 내기 힘든 덕목들입니다. 이렇게 살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은 예수님을 믿고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맺게 되는 빛의 열매,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께서 비추시는 빛이 비춰질 때만 이러한 덕목을 열매 맺을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이 세 덕목 앞에 ‘모든’이라는 전제가 붙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 성품은 어쩌다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과 진실하심이 상황과 조건과 관계없이 항상 변함없이 우리에게 비추어지듯이, 우리도 항상 변함없이 그러한 빛의 자녀로서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갈라디아서 5:23에서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굳건하게 하고 빛의 자녀처럼 살기를 결단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그를 통해 빛의 자녀로서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말씀은, 자신이 맺고 있는 빛의 열매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맺혀진 열매인지 시험해 보라고 말씀합니다. 10절 함께 읽습니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여기에서 ‘시험하라’는 말은 ‘분별하여 가려내라’는 뜻입니다. 빛 된 성도의 삶은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까?”하는 것을 끝없이 고민하고, 힘쓰며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고린도전서 10:31에서 “그런즉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먹는 일, 마시는 일, 얼마나 사소한 일입니까? 하루에도 몇 번씩 계속 반복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조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우리의 삶의 방식이 철저히 변화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성도들이 가져야 할, 보다 적극적인 자세에 대하여 추가하여 말씀합니다. 11절 함께 읽습니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여기에서의 ‘책망’이란 ‘잘못을 말하여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변화된 성도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야 하는 것은, 아직도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깨달을 수 있도록 ‘책망’하는 일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분명하게 지적하여 깨닫게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지금 한국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침체의 가장 큰 요인은 이렇게 세상의 죄를 책망해야 하는 성도들이 전혀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얼마나 빛의 자녀처럼 살지 못했고, 본을 보이지 못했으면 충고를 해도 “너나 잘하라”는 말을 듣습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빛의 자녀로서의 자세를 잃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과 성도들 사이의 구분이 모호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성도들이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빠지게 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13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우리가 빛의 자녀처럼 살지 못할 때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짓밟히게 됩니다. 성도가 성도로서, 교회가 교회로서 그 맛을 잃으면 세상이 먼저 알고 비난하고 외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세상의 죄를 책망하는 위치에 자신을 세워야 합니다. 그 사명을 분명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독교 윤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와 성도의 존립 자체에 관계된 일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세상을 책망해야 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세상을 향한 정죄나 비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과 세상 약자들의 ‘친구’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친구가 되어주셨던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이들에게도 똑같은 사랑으로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온화함으로 대하셨던 예수님은 죄인들을 대하는 일에서도 온화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가 의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빛으로서의 삶, 본으로서의 삶입니다. 세리장 ‘삭개오’의 회심에서 볼 수 있는 것같이, 예수님께서 그에게 어떠한 정죄도 비난도 하지 않으셨지만, 그는 자신의 죄를 스스로 깨닫고 회개하고 변화되었습니다(눅 19:2-8).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가 스스로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고 돌이켜 빛의 자녀로 변화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정죄하는 것은 성도가 행할 바른 책망이 아닙니다. 성도가 세상을 향해 행해야 하는 책망은 빛으로서의 삶, 본으로서의 삶을 보이는 것입니다.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한 삶의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세상 사람들을 향해 행해야 하는 책망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반드시 생명의 빛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덕스러운 결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를 위해, 우리가 먼저 예수님의 사랑을 듬뿍 받아야 하고 예수님을 더 많이 닮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빛의 자녀들처럼 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오늘, 이 교훈을 가슴 깊이 새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어둠이던 저희를 찾아오셔서 빛의 자녀 삼으시고, 또한 저희를 통해 어둠을 밝혀주시니 감사하옵나이다. 세월이 지날수록 생명의 빛이 희미해지고, 믿음의 본이 사라지고 있는 이때, 다시 한번 빛의 자녀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삶을 다짐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책망하는 자가 아니라 생명의 빛을 소유한 자로서 본을 보이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참 빛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10.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성령강림절과 관계가 있는 구약의 절기는 ‘칠질절(샤부오트 שבועות)’입니다. 칠칠절은 ‘유월절(페사흐פֶסַח)’ 다음날부터 50일째 되는 날인데,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밀 수확의 첫 열매’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민 28:26).
그리고 ‘칠칠절’을 헬라식으로 표현하면 ‘오순절(펜테코스테 Πεντηκοστή)’이 되는데, 오순절은 신구약 중간기를 거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광야에서 하나님께 율법을 받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음으로 ‘언약공동체’가 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오순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고 언약공동체가 된 것, 곧 ‘구약의 교회’가 시작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간 이 땅에 계시다가 하나님 나라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 1:4-9). 그리고 그로부터 열흘 후인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셔서 제자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부어주셨고, 그로 인해 제자들이 힘 있게 복음을 전함으로 이 땅에 ‘신약의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께서 강림하신 날을 기념하여 ‘성령강림절’로 지켰습니다(행 2:1, 20:16, 고전 16:8).
그러므로 이를 정리하면, 구약시대에는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스라엘 언약공동체인 교회가 시작되었고, 신약시대에는 ‘성령의 임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시대 교회의 완성이 신약시대의 교회라고 할 때,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께서 충만하게 역사하는 곳이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을 때, 교회에 생명력이 넘치게 되고 복음을 땅끝까지 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강림 주일인 오늘, 무엇보다도 우리 교회가 ‘말씀 충만’, ‘성령 충만’한 교회로 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행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했는데, 오늘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합니다.
1. 먼저 8절 함께 읽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이 말씀은 성도의 삶의 변화가 어디에까지 이르러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지난 본문은 우리 성도들이 반드시 버려야 할 것들에 대한 말씀이었는데, 그것은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 등 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 서신이 전해진 헬라 사회에서의 그러한 행위들은 지극히 일상화되어 있는 삶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습관화되고 일상화되어 감각이 무뎌진 죄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들은 12절에 기록된 것처럼 말하기도 부끄러운,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큰 죄악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상화되어 양심을 무디게 하는 그러한 죄악들에서 떠나야 새 사람을 입을 수 있다”고 강력한 어조로 충고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악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성도로서의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느 정도 자신의 신앙은 지킬 수는 있지만 오래가지 않아 다시 옛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래서 일상화되어 양심을 무디게 하는 죄악들에서 떠나 새 사람을 입었다면, 거기서 더 나아가 능동적으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새 사람을 입은 성도로서 삶의 변화는 불법적이고 죄악된 일을 그치는 정도에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더 나아가 빛의 자녀들처럼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빛의 자녀같이 보여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생명의 빛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빛의 자녀들처럼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단히 힘겹고, 두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빛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사는 것만이 구원받은 성도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8절을 다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지금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너희가 전에는 어둠 속에 있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어둠 그 자체였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5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빛이 비춰도 그 빛을 깨닫지 못할 만큼 ‘깊은 어두움’이었던 것이 예전 우리의 본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어둠을 벗어 버리고 빛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빛을 받아들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빛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빛의 자녀’ 이것이 지금 우리의 신분이요, 모습입니다.
여러분, 옆 사람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빛의 자녀처럼 보입니까? 여러분 모두, 빛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그렇다면 빛의 자녀로서의 우리들의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어떤 삶의 열매가 맺혀져야 합니까? 이에 대하여 3가지를 말씀합니다. 9절 함께 읽습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빛의 자녀가 사는 삶에는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는 세 가지 열매가 맺혀진다고 말씀합니다.
1) 첫 번째 열매는 ‘착함’인데, 여러분, 여러분은 착하게 사십니까? 성경에서의 착함은 마음과 삶이 정직하고 선한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관용과 자비와 인내’를 소유하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된 우리를 향해 ‘심판과 징계와 진노’ 대신 ‘자비와 긍휼과 오래 참으심’으로 대하시는 것처럼, 우리 역시 이웃을 이러한 자세로 대할 때 착함의 열매가 맺혀지게 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이러한 착함의 열매가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악하게 대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관용과 자비와 인내로 그들을 대하고 계십니까? 그러하시다면 여러분의 삶에 착함의 열매가 맺혀지고 있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열매인 ‘의로움’은 ‘하나님의 공의’를 가리킵니다.
빛의 자녀가 된 성도의 삶에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큼 정의롭고 도덕적인 삶이 나타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이러한 삶을 살고 계십니까?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저분은 법이 필요 없는 분입니다”하고 칭찬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에 의로움의 열매가 맺혀지고 있는 것입니다.
3) 세 번째 열매인 ‘진실함’은 거짓과 가식과 위선 없는 성품을 가리킵니다. 빛의 자녀가 된 성도의 삶에는 거짓이나 가식, 위선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의 말은 믿습니다” 하고 칭찬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에 진실함의 열매가 맺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 모두 쉽지 않습니다. 사람의 노력으로는 이루어 내기 힘든 덕목들입니다. 이렇게 살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은 예수님을 믿고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맺게 되는 빛의 열매,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께서 비추시는 빛이 비춰질 때만 이러한 덕목을 열매 맺을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이 세 덕목 앞에 ‘모든’이라는 전제가 붙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 성품은 어쩌다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과 진실하심이 상황과 조건과 관계없이 항상 변함없이 우리에게 비추어지듯이, 우리도 항상 변함없이 그러한 빛의 자녀로서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갈라디아서 5:23에서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굳건하게 하고 빛의 자녀처럼 살기를 결단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그를 통해 빛의 자녀로서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말씀은, 자신이 맺고 있는 빛의 열매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맺혀진 열매인지 시험해 보라고 말씀합니다. 10절 함께 읽습니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여기에서 ‘시험하라’는 말은 ‘분별하여 가려내라’는 뜻입니다. 빛 된 성도의 삶은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까?”하는 것을 끝없이 고민하고, 힘쓰며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고린도전서 10:31에서 “그런즉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먹는 일, 마시는 일, 얼마나 사소한 일입니까? 하루에도 몇 번씩 계속 반복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조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우리의 삶의 방식이 철저히 변화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성도들이 가져야 할, 보다 적극적인 자세에 대하여 추가하여 말씀합니다. 11절 함께 읽습니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여기에서의 ‘책망’이란 ‘잘못을 말하여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변화된 성도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야 하는 것은, 아직도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깨달을 수 있도록 ‘책망’하는 일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분명하게 지적하여 깨닫게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지금 한국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침체의 가장 큰 요인은 이렇게 세상의 죄를 책망해야 하는 성도들이 전혀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얼마나 빛의 자녀처럼 살지 못했고, 본을 보이지 못했으면 충고를 해도 “너나 잘하라”는 말을 듣습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빛의 자녀로서의 자세를 잃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과 성도들 사이의 구분이 모호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성도들이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빠지게 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13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우리가 빛의 자녀처럼 살지 못할 때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짓밟히게 됩니다. 성도가 성도로서, 교회가 교회로서 그 맛을 잃으면 세상이 먼저 알고 비난하고 외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세상의 죄를 책망하는 위치에 자신을 세워야 합니다. 그 사명을 분명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독교 윤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와 성도의 존립 자체에 관계된 일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세상을 책망해야 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세상을 향한 정죄나 비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과 세상 약자들의 ‘친구’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친구가 되어주셨던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이들에게도 똑같은 사랑으로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온화함으로 대하셨던 예수님은 죄인들을 대하는 일에서도 온화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가 의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빛으로서의 삶, 본으로서의 삶입니다. 세리장 ‘삭개오’의 회심에서 볼 수 있는 것같이, 예수님께서 그에게 어떠한 정죄도 비난도 하지 않으셨지만, 그는 자신의 죄를 스스로 깨닫고 회개하고 변화되었습니다(눅 19:2-8).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가 스스로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고 돌이켜 빛의 자녀로 변화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정죄하는 것은 성도가 행할 바른 책망이 아닙니다. 성도가 세상을 향해 행해야 하는 책망은 빛으로서의 삶, 본으로서의 삶을 보이는 것입니다.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한 삶의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세상 사람들을 향해 행해야 하는 책망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반드시 생명의 빛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덕스러운 결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를 위해, 우리가 먼저 예수님의 사랑을 듬뿍 받아야 하고 예수님을 더 많이 닮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빛의 자녀들처럼 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오늘, 이 교훈을 가슴 깊이 새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어둠이던 저희를 찾아오셔서 빛의 자녀 삼으시고, 또한 저희를 통해 어둠을 밝혀주시니 감사하옵나이다. 세월이 지날수록 생명의 빛이 희미해지고, 믿음의 본이 사라지고 있는 이때, 다시 한번 빛의 자녀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삶을 다짐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책망하는 자가 아니라 생명의 빛을 소유한 자로서 본을 보이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참 빛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