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2.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4.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지난 시간에 배운 것을 복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삶이란 ‘선하게 사는 삶’이고, 이러한 선한 삶은 ‘교회를 통해 유지’될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네 가지의 교회’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첫 번째, 가장 작은 규모의 교회는 성령을 모시고 사는 ‘성도 자신’이고, 두 번째 교회는 예수님을 가장으로 모시고 사는 ‘우리의 가정’이고, 세 번째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이고, 네 번째는 이스라엘이 광야에 있을 때 그들을 광야교회로 불렀듯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나라’가 또한 교회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진정한 성도라면, 교회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 안에서 한마음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고 존중하면서 다함께 단단한 연합의 관계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이 정말 건강한 성도, 참 성도라면 반드시 이에 힘써야 합니다. 만일, 한 지체가 실족하여 교회를 떠날 경우 ‘생명 단절의 아픔’이 느껴야 하고, 새로운 한 사람이 구원받고 우리 교회의 성도가 되었다면, 그것이 나의 기쁨이요, 교회 전체에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예수님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만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삶과 소망을 예수님 안에 두시기 바랍니다. 그를 통해, 먼저는 주위 사람들과 예수님 안에서 하나를 이루고, 그 열매로써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화목의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경륜’에 대한 말씀입니다.
1. 먼저, 1절 함께 읽습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여기에서의 ‘이러므로’는 ‘이방인인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받게 했으므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에 힘썼기 때문에 지금 바울 자신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언급한 적이 있는데(2월 11일),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힌 데에는 에베소 성도인 ‘드로비모’가 연관되어 있습니다.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돌아온 바울은 종교적인 관습을 중시하는 유대인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그들 앞에서 율법에 따라 정결 예식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과 함께 있던 이방인 드로비모를 보는 순간, 바울이 드로비모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것으로 생각하며 소란을 피웠습니다. 그로 인해 바울은 로마 군사들에게 체포되었고, 재판 중에 해결이 되지 않은 몇몇 문제들로 인해 결국 로마에까지 와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행 21:27-36). 그때 감옥에서 기록한 성경을 ‘옥중서신’이라고 하는데, 에베소서도 옥중서신 중 하나입니다(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그래서 1절에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옥에 갇혀서까지 복음을 위해 힘써 일을 하는 이유에 대하여 2절에 말씀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보통 ‘경륜’이라고 함은 ‘일을 조직적으로 계획함’, ‘천하를 다스림’을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경륜은 조금 다릅니다. 여기서 ‘경륜’이란 ‘하나님께서 맡기신 직무, 직책’을 뜻합니다(표준새번역, 현대인의성경).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복음의 일꾼으로서의 사명을 뜻합니다.
그러나 원래 바울은 그러한 사명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비방하고 박해하고 폭행한 자였습니다(딤전 1:13). 교회를 박해하는 자들 중에서도 우두머리였습니다(딤전 1:15). 그에게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고초를 당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그로 인해 신앙을 버렸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그는 세상 어떤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요, 큰 죗값을 치뤄야 마땅한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러한 바울을 구원하셨습니다. 그것도 여느 사람들과는 달리 친히 찾아가 구원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만도 얼마나 감격할 일입니까? 그런데 그러한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은혜의 직책까지 맡기셨습니다.
바울은 이러하신 하나님을 항상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맡겨진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는 곳마다 그를 박해하는 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그들을 선하게 대해도 그들의 악한 모습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좌절하지 않고, 더욱 힘을 내어 맡겨진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다 그는 교회를 박해하는 자들에 의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그는 감옥에 갇힌 후에도 은혜의 직책에 대한 뜨거운 소명이 식지 않았습니다. 편지를 써서라도 한 영혼을 구원하겠다는 마음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는 교회들에게 서신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그의 은혜의 경륜 중 하나가 지금 우리가 상고하는 에베소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베소서를 읽을 때, 이러한 그의 심정을 갖고 읽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말씀 한구절 한구절에서 사도 바울이 품은 뜨거운 은혜의 경륜을 전달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살아 움직여 역사하는 성경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은혜의 일꾼으로 삼으신 것은 사도 바울만이 아닙니다. 또 목회자들만도 아닙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베드로전서 2:9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는 일을 특정 소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통해서 성취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에 따라 바울과 같은 복음의 일꾼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분명한 소명의식을 지녀야 합니다. 그러할 때, 어떤 고난과 역경도 이길 수 있습니다. 큰 고난과 시련이 오고 억울한 일이 닥칠 때, 원망하지 않고 간절한 소망에 따라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특히 우리 성도들은 형통하게 하는 사람들이지만, 이 형통은 자신의 형통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은 그대로지만 자신의 삶을 통해 주위를 형통케 하는 역사를 이루는 사람입니다.
성경의 일례로, 야곱의 아들 요셉을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요셉처럼 억울하고 원망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것도 매우 어린 나이로부터 오랜시간 동안 그 일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가 원망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고난 속에서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노예로 살 때도, 억울하게 범죄자로 몰렸을 때도,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도 모든 사람을 형통하게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노예로 살 때 범사에 형통하게 되었다고 해서 자신이 노예에서 해방되고 부유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정 총무로 승진하기는 했으나 그는 여전히 보디발 집의 노예였고 주인인 보디발 집만 점점더 형통해 졌습니다(창 39:2-5). 그가 감옥에 있을 때도 형통했지만 그는 여전히 죄인의 신분이었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도 그는 애굽 왕 바로와 그의 백성들을 형통하게 했습니다. 그는 항상 그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어디에 있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하는 사람을 복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방인들을 구원하고 그들에게 형통의 삶을 선물하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조금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했기에 그는 감옥에까지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생명을 구하는 은혜의 사람이었습니다. 또 심히 존귀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습니까?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의 일꾼’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고 철저하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원한 것은 세상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그도 세상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원했다면 그 또한 그들의 경쟁자 중 한사람일뿐, 복음의 일꾼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워진 은혜의 일꾼이라는 분명한 소명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요셉이나 바울과 같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로서 사람들을 살리는 은혜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 자신의 값어치를 다시 찾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3절에, 2절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가리켜 ‘비밀’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밀’이란 ‘남에게 공개하지 않고 숨기는 일’을 뜻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이건 비밀인데 네게만 말하는 거야.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 돼” 하면서 비밀을 퍼뜨립니다. 그래서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라는 속담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비밀은 지키지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비밀’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뮈스테리온 μυστήριον’은 우리가 아는 비밀이라는 말과는 조금 다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정한 사람에게만 알려질 가치가 있는 신비한 어떤 내용’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비밀은 비밀인데, 모든 사람에게 숨겨진 비밀이 아니라 ‘특정한 사람들에게는 공공연히 밝혀진 비밀’을 뜻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세상에 공개적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정한 사람에게’라는 단서조항처럼, 이 비밀은 이미 밝혀진 비밀이지만 그 값어치를 알기 위해서는 어떠한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깨달음은 인간 스스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복음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이해나 능력이나 지식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깊은 지성을 갖고 있고, 또 거기에 더하여 종교적인 노력과 열심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인간 스스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성경의 일례로, 요한복음 3장에 예수님께서 밤에 찾아온 유대인 종교지도자인 니고데모에게 복음을 들려주신 후, 그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종교지도자였음에도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이러하신 말씀도 하셨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복음을 어린아이들은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꼭 어린아이뿐만 아니라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렇게 지성이나 학식이 높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고전 1:26). 예수님의 사도들도 학문이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행 4:13). 그런데도 이들은 성령 충만을 받은 후, 종교지도자들조차 감탄하는 지식과 지혜를 소유한 교회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이루어짐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의 지식이나 기도나 특별한 노력이 아니라 ‘계시’, 곧 하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셔서 복음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신약의 성도들에게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성경의 한 예로, 믿음의 조상으로 칭함을 받는 아브라함은 예수님이 오시기 무려 2천 년 전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56).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2천 년 전에 살던 아브라함이 이미 예수님을 알았고, 보았고, 믿었고, 기뻐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일입니까? 지성이나 지식으로 되는 일입니까? 오직 ‘계시’로만 되는 일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시로만 알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복음의 비밀입니다.
여러분, 감사하게도 우리는 이 복음의 비밀을 아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에게 임했기에 우리가 복음의 비밀을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으로 우리가 구원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참으로 똑똑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많은 사람이 복음을 듣고 보아도 그 비밀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큰 은혜를 입은 것입니까?
물론, 우리는 복음이 항상 우리에게 있기에 구원받은 것이 은혜중의 은혜인 줄 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복음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이야 말로 사람의 일생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구원을 듣고 볼 때마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할 때마다, 깨닫게 하시고 진리로 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 찬송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저희를 택하셔서 복음의 일꾼으로서의 은혜의 직분을 맡겨 주셨사오니 감사하옵나이다. 이 귀한 소명 앞에 늘 겸손으로 순종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허락하신 계시의 말씀들을 청지기의 심정으로 전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2.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4.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지난 시간에 배운 것을 복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삶이란 ‘선하게 사는 삶’이고, 이러한 선한 삶은 ‘교회를 통해 유지’될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네 가지의 교회’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첫 번째, 가장 작은 규모의 교회는 성령을 모시고 사는 ‘성도 자신’이고, 두 번째 교회는 예수님을 가장으로 모시고 사는 ‘우리의 가정’이고, 세 번째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이고, 네 번째는 이스라엘이 광야에 있을 때 그들을 광야교회로 불렀듯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나라’가 또한 교회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진정한 성도라면, 교회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 안에서 한마음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고 존중하면서 다함께 단단한 연합의 관계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이 정말 건강한 성도, 참 성도라면 반드시 이에 힘써야 합니다. 만일, 한 지체가 실족하여 교회를 떠날 경우 ‘생명 단절의 아픔’이 느껴야 하고, 새로운 한 사람이 구원받고 우리 교회의 성도가 되었다면, 그것이 나의 기쁨이요, 교회 전체에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예수님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만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삶과 소망을 예수님 안에 두시기 바랍니다. 그를 통해, 먼저는 주위 사람들과 예수님 안에서 하나를 이루고, 그 열매로써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화목의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경륜’에 대한 말씀입니다.
1. 먼저, 1절 함께 읽습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여기에서의 ‘이러므로’는 ‘이방인인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받게 했으므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에 힘썼기 때문에 지금 바울 자신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언급한 적이 있는데(2월 11일),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힌 데에는 에베소 성도인 ‘드로비모’가 연관되어 있습니다.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돌아온 바울은 종교적인 관습을 중시하는 유대인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그들 앞에서 율법에 따라 정결 예식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과 함께 있던 이방인 드로비모를 보는 순간, 바울이 드로비모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것으로 생각하며 소란을 피웠습니다. 그로 인해 바울은 로마 군사들에게 체포되었고, 재판 중에 해결이 되지 않은 몇몇 문제들로 인해 결국 로마에까지 와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행 21:27-36). 그때 감옥에서 기록한 성경을 ‘옥중서신’이라고 하는데, 에베소서도 옥중서신 중 하나입니다(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그래서 1절에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옥에 갇혀서까지 복음을 위해 힘써 일을 하는 이유에 대하여 2절에 말씀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보통 ‘경륜’이라고 함은 ‘일을 조직적으로 계획함’, ‘천하를 다스림’을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경륜은 조금 다릅니다. 여기서 ‘경륜’이란 ‘하나님께서 맡기신 직무, 직책’을 뜻합니다(표준새번역, 현대인의성경).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복음의 일꾼으로서의 사명을 뜻합니다.
그러나 원래 바울은 그러한 사명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비방하고 박해하고 폭행한 자였습니다(딤전 1:13). 교회를 박해하는 자들 중에서도 우두머리였습니다(딤전 1:15). 그에게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고초를 당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그로 인해 신앙을 버렸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그는 세상 어떤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요, 큰 죗값을 치뤄야 마땅한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러한 바울을 구원하셨습니다. 그것도 여느 사람들과는 달리 친히 찾아가 구원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만도 얼마나 감격할 일입니까? 그런데 그러한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은혜의 직책까지 맡기셨습니다.
바울은 이러하신 하나님을 항상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맡겨진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는 곳마다 그를 박해하는 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그들을 선하게 대해도 그들의 악한 모습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좌절하지 않고, 더욱 힘을 내어 맡겨진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다 그는 교회를 박해하는 자들에 의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그는 감옥에 갇힌 후에도 은혜의 직책에 대한 뜨거운 소명이 식지 않았습니다. 편지를 써서라도 한 영혼을 구원하겠다는 마음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는 교회들에게 서신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그의 은혜의 경륜 중 하나가 지금 우리가 상고하는 에베소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베소서를 읽을 때, 이러한 그의 심정을 갖고 읽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말씀 한구절 한구절에서 사도 바울이 품은 뜨거운 은혜의 경륜을 전달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살아 움직여 역사하는 성경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은혜의 일꾼으로 삼으신 것은 사도 바울만이 아닙니다. 또 목회자들만도 아닙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베드로전서 2:9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는 일을 특정 소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통해서 성취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에 따라 바울과 같은 복음의 일꾼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분명한 소명의식을 지녀야 합니다. 그러할 때, 어떤 고난과 역경도 이길 수 있습니다. 큰 고난과 시련이 오고 억울한 일이 닥칠 때, 원망하지 않고 간절한 소망에 따라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특히 우리 성도들은 형통하게 하는 사람들이지만, 이 형통은 자신의 형통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은 그대로지만 자신의 삶을 통해 주위를 형통케 하는 역사를 이루는 사람입니다.
성경의 일례로, 야곱의 아들 요셉을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요셉처럼 억울하고 원망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것도 매우 어린 나이로부터 오랜시간 동안 그 일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가 원망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고난 속에서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노예로 살 때도, 억울하게 범죄자로 몰렸을 때도,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도 모든 사람을 형통하게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노예로 살 때 범사에 형통하게 되었다고 해서 자신이 노예에서 해방되고 부유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정 총무로 승진하기는 했으나 그는 여전히 보디발 집의 노예였고 주인인 보디발 집만 점점더 형통해 졌습니다(창 39:2-5). 그가 감옥에 있을 때도 형통했지만 그는 여전히 죄인의 신분이었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도 그는 애굽 왕 바로와 그의 백성들을 형통하게 했습니다. 그는 항상 그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어디에 있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하는 사람을 복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방인들을 구원하고 그들에게 형통의 삶을 선물하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조금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했기에 그는 감옥에까지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생명을 구하는 은혜의 사람이었습니다. 또 심히 존귀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습니까?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의 일꾼’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고 철저하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원한 것은 세상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그도 세상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원했다면 그 또한 그들의 경쟁자 중 한사람일뿐, 복음의 일꾼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워진 은혜의 일꾼이라는 분명한 소명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요셉이나 바울과 같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로서 사람들을 살리는 은혜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 자신의 값어치를 다시 찾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3절에, 2절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가리켜 ‘비밀’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밀’이란 ‘남에게 공개하지 않고 숨기는 일’을 뜻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이건 비밀인데 네게만 말하는 거야.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 돼” 하면서 비밀을 퍼뜨립니다. 그래서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라는 속담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비밀은 지키지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비밀’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뮈스테리온 μυστήριον’은 우리가 아는 비밀이라는 말과는 조금 다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정한 사람에게만 알려질 가치가 있는 신비한 어떤 내용’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비밀은 비밀인데, 모든 사람에게 숨겨진 비밀이 아니라 ‘특정한 사람들에게는 공공연히 밝혀진 비밀’을 뜻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세상에 공개적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정한 사람에게’라는 단서조항처럼, 이 비밀은 이미 밝혀진 비밀이지만 그 값어치를 알기 위해서는 어떠한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깨달음은 인간 스스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복음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이해나 능력이나 지식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깊은 지성을 갖고 있고, 또 거기에 더하여 종교적인 노력과 열심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인간 스스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성경의 일례로, 요한복음 3장에 예수님께서 밤에 찾아온 유대인 종교지도자인 니고데모에게 복음을 들려주신 후, 그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종교지도자였음에도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이러하신 말씀도 하셨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복음을 어린아이들은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꼭 어린아이뿐만 아니라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렇게 지성이나 학식이 높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고전 1:26). 예수님의 사도들도 학문이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행 4:13). 그런데도 이들은 성령 충만을 받은 후, 종교지도자들조차 감탄하는 지식과 지혜를 소유한 교회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이루어짐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의 지식이나 기도나 특별한 노력이 아니라 ‘계시’, 곧 하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셔서 복음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신약의 성도들에게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성경의 한 예로, 믿음의 조상으로 칭함을 받는 아브라함은 예수님이 오시기 무려 2천 년 전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56).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2천 년 전에 살던 아브라함이 이미 예수님을 알았고, 보았고, 믿었고, 기뻐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일입니까? 지성이나 지식으로 되는 일입니까? 오직 ‘계시’로만 되는 일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시로만 알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복음의 비밀입니다.
여러분, 감사하게도 우리는 이 복음의 비밀을 아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에게 임했기에 우리가 복음의 비밀을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으로 우리가 구원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참으로 똑똑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많은 사람이 복음을 듣고 보아도 그 비밀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큰 은혜를 입은 것입니까?
물론, 우리는 복음이 항상 우리에게 있기에 구원받은 것이 은혜중의 은혜인 줄 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복음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이야 말로 사람의 일생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구원을 듣고 볼 때마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할 때마다, 깨닫게 하시고 진리로 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 찬송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저희를 택하셔서 복음의 일꾼으로서의 은혜의 직분을 맡겨 주셨사오니 감사하옵나이다. 이 귀한 소명 앞에 늘 겸손으로 순종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허락하신 계시의 말씀들을 청지기의 심정으로 전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