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오늘은 종려 주일입니다.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수많은 사람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부르며 환영한 것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요12:13). 그러나 그들은 불과 닷새 후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칩니다(마 27:22-25, 요 19:6). 그들이 그렇게 돌변한 것은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잘못 해석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성경 해석을 잘못하자 신앙과 자신의 직분을 권력의 도구로 삼게 되었고, 그들의 삶은 점점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자신들의 불의를 숨기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악행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배우기에 힘쓰는 것은 그들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사탄은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사람들을 넘어뜨리려고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탄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알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집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배경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가려고 다메섹으로 향하던 사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계시의 음성을 듣고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닫고 사흘 동안 금식하며 회개와 기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9:1-9).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사울에게 아나니아를 보내셔서 멀었던 눈과 기운을 회복하게 하시고 성령 충만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9:10-19).
1. 그리고 19절에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박해하던 사울과 예수님을 섬기던 다메섹 성도들이 평화롭게 함께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사울에게 복수를 해도 시원찮을 다메섹의 성도들이 사울이 건강을 회복하고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상황이 이해되십니까?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사탄이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생존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을 최우선으로 위하며 살아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인간 관계는 상처투성이가 되고 말았고, 이 세상에서 더이상 진실한 희생과 사랑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고 말았습니다.
원수지간이 조건없이 서로 돕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도 없고, 가장 좋은 관계라고 할 수 있는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도 자신의 생존이 위협받게 되면 대립하게 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부모가 자녀를, 형제가 형제를 법정에 고소하는 일들이 다반사인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서로 목숨까지 줄 것 같던 남편과 아내가 자신의 작은 이익을 양보하지 못하고 이혼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인간관계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기 이익을 최우선으로 위하는 인간들을 위해 아무런 조건없이 그들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는 새로운 법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너희도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해주는 삶을 살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모든 사람을 용서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깨어진 모든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이 땅의 유일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방금 읽은 19절도 이러한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울은 그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성도들을 박해하던 자였습니다. 그가 다메섹에 온 것도 2절에 의하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가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다메섹 성도들은 단지 그가 예수님을 믿고 자기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교회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또한,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자기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8:3에 사울이 교회와 성도들을 박해하고 잔멸하기까지 한 전력이 있었음에도 그를 용서하고, 교회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예수님의 보혈은 서로 원수지간이 되어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인간관계까지도 회복시키는 권능이 있습니다. 원수 관계였던 사람들을 서로 친구가 되게 하고 형제자매가 되게 합니다. 성경 빌레몬서를 읽어보면, 빌레몬과 오네시모는 원래 주인과 노예의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가 도망쳤습니다. 도망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빌레몬과 오네시모는 인간적으로 볼 때 결코 회복할 수 없는 원수 관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 안에서 모든 악한 감정과 죄를 용서하고 서로 존중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몬 1:16-18). 예수를 믿는 것은 바로 이러한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깨어진 모든 인간관계를 사랑과 용서로 주 안에서 하나가 되는 관계로 회복시키는 복음의 일꾼들이 되시기 바랍니다(골 1:21-23). 오늘, 인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오직 예수님의 사랑을 힘입어 모든 막힌 담을 무너뜨리고 예수님께서 이루신 화평을 이루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20절 함께 읽습니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사울은 회심하자마자 즉시 자신이 체험한 회개와 죄 용서와 구원의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랬을 때, 많은 유대인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사울뿐만 아니라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다 이렇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되었음에도 전혀 복음을 전하지 않는 성도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심지어 어떤 성도는 일평생 동안 단 한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영원히 오지 않을 때를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복음을 전할만한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며, 좀 더 복음을 전하기에 적합한 때를 기다리기 때문에 일평생 단 한 명에게도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도들은 언제나 마음속으로 “비록 지금은 복음을 전하지 못하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반드시 전하겠다”고 다짐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러한 때는 결코 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을 기다려도 복음을 전할 만한 충분한 능력을 갖춘 때, 복음을 전하기에 적합한 때는 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믿음이 약해지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용기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겉모습만의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할만한 때를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그때를 기다리는 것은 영원히 복음을 전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복음은 내가 입을 열면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권능을 발하셔서 듣는 사람을 감동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와 상황에 상관없이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아는 것이 많건 적건, 상황이 좋건 나쁘건 항상, 내가 받은 복음을 전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디모데후서 4:1-2에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말씀이지만, 동시에 성경을 읽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를 통해, 성경에 대한 지식이 얼마 없다는 이유로, 복음을 전할 만한 상황이 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복음 전하는 일을 회피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언제나 ‘바로 지금’이 복음을 전하기에 가장 좋은 때입니다. 우리가 움직이면 성령께서 일하십니다. 오늘, 이 교훈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 여러분 모두 능력 있는 복음의 일꾼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22절 함께 읽습니다.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여기에서 ‘힘을 더 얻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영적인 힘을 공급해 주셨음’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사명만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사명을 능히 감당할 힘도 공급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명만 주시고, 그 후에는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라, 사명을 맡기시고 그 사명을 이룰 수 있도록 힘과 능력도 함께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비록 자신에게 아무런 힘과 능력이 없을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친히 이루십니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면 부족할수록 오히려 하나님께서 더 큰 힘과 은혜를 공급해 주실 것을 믿고 최선을 다해 맡겨진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도 바울처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사울이 이처럼 열정적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니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이 당혹해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증언하여 συμβιβάζων’라는 표현은 ‘가르쳐 증명했다’라는 뜻이고, ‘당혹하게 하니라 συνέχυννεν’라는 표현은 ‘굴복시켰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은 지 얼마되지 않은 사울이 유대인들을 복음으로 굴복시켰다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은 믿음의 연수가 오랠수록 더 많은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체험하게 되고, 그래서 더 깊고 강한 믿음을 갖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믿었음에도 초보적인 믿음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정성껏 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10:31에서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믿었다고 해서 항상 더 나은 믿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래 믿었다고 해서 반드시 더 크고 강한 믿음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연수는 아무런 자랑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오직 진실하고 성실한 믿음만이 인정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연륜이 오랠수록 더욱 겸손한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더욱 진실과 성실을 겸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믿음의 연륜과 믿음의 깊이와 넓이가 일치하게 됩니다.
여러분, 사울은 몸이 회복되는 즉시 나가서 복음을 증언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구원받은 성도에게 가장 우선하여 요청되는 일이 무엇인지를 교훈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택하여 구원하신 것은 복음을 증언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듯이, 또한 우리를 택하여 구원하신 것도 복음을 증언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울처럼 주어진 복음증거 사명에 충성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부활 주일을 한 주 앞둔 종려 주일인 오늘, 자신의 믿음의 자리를 다시 한번 점검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보혈은 서로 원수지간이 되어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인간관계까지도 회복시키는 권능이 있음을 믿습니다. 원수 관계였던 사울과 다메섹 성도들을 친구가 되게 하고 형제자매가 되게 했음을 믿습니다. 저희도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불신이 팽배한 이 사회를 예수님의 사랑으로 덮게 하여 주옵소서. 용서하고 품어주고 함께 진실하고 선한 삶을 사는 사회로 변화시키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마음으로만 품지 말고 사울처럼 즉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9.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오늘은 종려 주일입니다.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수많은 사람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부르며 환영한 것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요12:13). 그러나 그들은 불과 닷새 후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칩니다(마 27:22-25, 요 19:6). 그들이 그렇게 돌변한 것은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잘못 해석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성경 해석을 잘못하자 신앙과 자신의 직분을 권력의 도구로 삼게 되었고, 그들의 삶은 점점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자신들의 불의를 숨기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악행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배우기에 힘쓰는 것은 그들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사탄은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사람들을 넘어뜨리려고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탄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알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집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배경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가려고 다메섹으로 향하던 사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계시의 음성을 듣고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닫고 사흘 동안 금식하며 회개와 기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9:1-9).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사울에게 아나니아를 보내셔서 멀었던 눈과 기운을 회복하게 하시고 성령 충만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9:10-19).
1. 그리고 19절에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박해하던 사울과 예수님을 섬기던 다메섹 성도들이 평화롭게 함께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사울에게 복수를 해도 시원찮을 다메섹의 성도들이 사울이 건강을 회복하고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상황이 이해되십니까?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사탄이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생존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을 최우선으로 위하며 살아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인간 관계는 상처투성이가 되고 말았고, 이 세상에서 더이상 진실한 희생과 사랑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고 말았습니다.
원수지간이 조건없이 서로 돕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도 없고, 가장 좋은 관계라고 할 수 있는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도 자신의 생존이 위협받게 되면 대립하게 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부모가 자녀를, 형제가 형제를 법정에 고소하는 일들이 다반사인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서로 목숨까지 줄 것 같던 남편과 아내가 자신의 작은 이익을 양보하지 못하고 이혼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인간관계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기 이익을 최우선으로 위하는 인간들을 위해 아무런 조건없이 그들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는 새로운 법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너희도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해주는 삶을 살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모든 사람을 용서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깨어진 모든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이 땅의 유일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방금 읽은 19절도 이러한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울은 그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성도들을 박해하던 자였습니다. 그가 다메섹에 온 것도 2절에 의하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가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다메섹 성도들은 단지 그가 예수님을 믿고 자기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교회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또한,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자기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8:3에 사울이 교회와 성도들을 박해하고 잔멸하기까지 한 전력이 있었음에도 그를 용서하고, 교회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예수님의 보혈은 서로 원수지간이 되어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인간관계까지도 회복시키는 권능이 있습니다. 원수 관계였던 사람들을 서로 친구가 되게 하고 형제자매가 되게 합니다. 성경 빌레몬서를 읽어보면, 빌레몬과 오네시모는 원래 주인과 노예의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가 도망쳤습니다. 도망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빌레몬과 오네시모는 인간적으로 볼 때 결코 회복할 수 없는 원수 관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 안에서 모든 악한 감정과 죄를 용서하고 서로 존중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몬 1:16-18). 예수를 믿는 것은 바로 이러한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깨어진 모든 인간관계를 사랑과 용서로 주 안에서 하나가 되는 관계로 회복시키는 복음의 일꾼들이 되시기 바랍니다(골 1:21-23). 오늘, 인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오직 예수님의 사랑을 힘입어 모든 막힌 담을 무너뜨리고 예수님께서 이루신 화평을 이루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20절 함께 읽습니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사울은 회심하자마자 즉시 자신이 체험한 회개와 죄 용서와 구원의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랬을 때, 많은 유대인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사울뿐만 아니라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다 이렇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되었음에도 전혀 복음을 전하지 않는 성도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심지어 어떤 성도는 일평생 동안 단 한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영원히 오지 않을 때를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복음을 전할만한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며, 좀 더 복음을 전하기에 적합한 때를 기다리기 때문에 일평생 단 한 명에게도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도들은 언제나 마음속으로 “비록 지금은 복음을 전하지 못하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반드시 전하겠다”고 다짐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러한 때는 결코 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을 기다려도 복음을 전할 만한 충분한 능력을 갖춘 때, 복음을 전하기에 적합한 때는 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믿음이 약해지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용기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겉모습만의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할만한 때를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그때를 기다리는 것은 영원히 복음을 전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복음은 내가 입을 열면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권능을 발하셔서 듣는 사람을 감동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와 상황에 상관없이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아는 것이 많건 적건, 상황이 좋건 나쁘건 항상, 내가 받은 복음을 전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디모데후서 4:1-2에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말씀이지만, 동시에 성경을 읽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를 통해, 성경에 대한 지식이 얼마 없다는 이유로, 복음을 전할 만한 상황이 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복음 전하는 일을 회피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언제나 ‘바로 지금’이 복음을 전하기에 가장 좋은 때입니다. 우리가 움직이면 성령께서 일하십니다. 오늘, 이 교훈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 여러분 모두 능력 있는 복음의 일꾼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22절 함께 읽습니다.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여기에서 ‘힘을 더 얻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영적인 힘을 공급해 주셨음’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사명만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사명을 능히 감당할 힘도 공급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명만 주시고, 그 후에는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라, 사명을 맡기시고 그 사명을 이룰 수 있도록 힘과 능력도 함께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비록 자신에게 아무런 힘과 능력이 없을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친히 이루십니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면 부족할수록 오히려 하나님께서 더 큰 힘과 은혜를 공급해 주실 것을 믿고 최선을 다해 맡겨진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도 바울처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사울이 이처럼 열정적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니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이 당혹해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증언하여 συμβιβάζων’라는 표현은 ‘가르쳐 증명했다’라는 뜻이고, ‘당혹하게 하니라 συνέχυννεν’라는 표현은 ‘굴복시켰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은 지 얼마되지 않은 사울이 유대인들을 복음으로 굴복시켰다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은 믿음의 연수가 오랠수록 더 많은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체험하게 되고, 그래서 더 깊고 강한 믿음을 갖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믿었음에도 초보적인 믿음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정성껏 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10:31에서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믿었다고 해서 항상 더 나은 믿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래 믿었다고 해서 반드시 더 크고 강한 믿음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연수는 아무런 자랑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오직 진실하고 성실한 믿음만이 인정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연륜이 오랠수록 더욱 겸손한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더욱 진실과 성실을 겸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믿음의 연륜과 믿음의 깊이와 넓이가 일치하게 됩니다.
여러분, 사울은 몸이 회복되는 즉시 나가서 복음을 증언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구원받은 성도에게 가장 우선하여 요청되는 일이 무엇인지를 교훈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택하여 구원하신 것은 복음을 증언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듯이, 또한 우리를 택하여 구원하신 것도 복음을 증언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울처럼 주어진 복음증거 사명에 충성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부활 주일을 한 주 앞둔 종려 주일인 오늘, 자신의 믿음의 자리를 다시 한번 점검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보혈은 서로 원수지간이 되어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인간관계까지도 회복시키는 권능이 있음을 믿습니다. 원수 관계였던 사울과 다메섹 성도들을 친구가 되게 하고 형제자매가 되게 했음을 믿습니다. 저희도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불신이 팽배한 이 사회를 예수님의 사랑으로 덮게 하여 주옵소서. 용서하고 품어주고 함께 진실하고 선한 삶을 사는 사회로 변화시키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마음으로만 품지 말고 사울처럼 즉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