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큰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전인격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왜입니까? 예수님은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 만큼 놀라운 분이시기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울은 유대인들이 스데반 집사를 죽일 때, 그 일의 정당성을 주장할 증인으로 설만큼 유대교에 심취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열심은 자연스럽게 초대교회에 대한 극심한 박해로 나타났고, 이제는 대제사장으로부터 공문을 받아 박해를 피해 흩어진 성도들까지 체포하기 위해 다메섹으로까지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구주로 영접함으로 그의 생애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복음을 박해하는 자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자로 변화되어, 세계역사의 흐름을 새롭게 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다메섹 도상에서 겪은 사울의 체험은 교회사에서 가장 유명한 회심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오늘, 이 회심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1-2절을 함께 읽습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라는 표현은 사울이 성도들을 박해하는 일에 얼마나 열성적이었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을 박해하는 것으로 분에 차지 않아 이제는 박해를 피해 이방 땅으로 흩어진 성도들까지도 박해하기 위해 대제사장으로부터 지금의 체포영장에 해당하는 ‘공문’까지 받아냈습니다.
그가 이렇게까지 하게 된 것은 그가 악해서라기보다는 유대교와 율법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한 일이라는 절대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신념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열심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거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사울뿐만 아니라 당시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목숨과 같이 여겼습니다. 열심히 읽고 연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목적대로 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민으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율법을 주신 것은 그들이 세상을 이롭게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자기중심적이고 탐욕적인 태도로 대했습니다. 자기들만을 위한 것인양 왜곡했습니다.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이방 우상을 섬기듯 왜곡된 종교적 신념으로 변질시켰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러한 자신들의 불의를 감추기 위해 회개를 외치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가장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적인 신념과 신앙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종교적 신념과 신앙을 혼동합니다. 사울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그러했듯이 자신이 가진 종교적인 신념을 신앙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종교적인 신념과 신앙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종교적인 신념은 자신이 가진 신앙적인 지식과 경험에 근거하여 갖게 되는 굳게 믿는 마음입니다. 굳게 믿기에 그 믿음은 누구도 쉽게 흔들 수 없을 만큼 견고합니다.
이들을 부정적으로 표현할 때 근본주의자 또는 율법주의자라고 하는데, 이들의 특징은 자기들의 뜻과 다르면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제도와 형식과 권위, 그리고 자신이 속한 단체나 교회의 체면과 명예를 우선시 합니다. 종교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자신과 자신이 속한 교회만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고, 자신의 신념과 다른 신앙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으로 비판하고 배척합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테러를 자행하는 자들의 대부분이 근본주의자들입니다. 그리고 이들뿐만 아니라 많은 이단들이 이러한 형태의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 앞에 마음의 무릎을 꿇습니다. 예를 들어, 자부심과 우월감에 사로잡힌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면 사울이 바울로 변화된 것처럼 진리에 새롭게 눈을 뜨게 됩니다.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온갖 죄와 이기적인 삶들을 깨닫고 회개함으로 새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제도와 형식, 자신의 체면과 명예보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양선을 우선하는 사람이 됩니다. 자신과 신앙이 다르고 의견이 다른 사람과 대립각을 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 사랑으로 품는 사람이 됩니다. 삶의 목적이 이타적으로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적인 신념의 사람이 아니라 신앙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종교적인 경험과 지식에 근거하여 자의적으로 어떠한 사실을 굳게 믿는 자가 아니라,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원수까지도 사랑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이러한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커다란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의지가 강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고집을 꺾고 믿음에 들어서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풍성한 생명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최대의 적은 바로 ‘자기 자신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예수를 믿으면 믿을수록 겸손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융통성이 없어지고, 이기적인 아집만 남게 됩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제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종교적인 신념인지, 신앙인지, 혹 종교적인 신념을 신앙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모두, 종교적인 신념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마침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바른 믿음을 가진 신실한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3절 함께 읽습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에게 ‘홀연히 ἐξαίφνης’, 홀연히는 ‘갑자기’라는 뜻입니다. 갑자기 하늘로부터 예수님의 영광의 빛이 사울을 에워쌌습니다.
여러분, 사울은 어떤 사람입니까? 8:3에 의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을 박해하되, ‘잔멸 λυμαίνομαι’하기까지 하던 사람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성도들을 박해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달려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큰 벌을 주어도 시원치 않은데, 어떻게 이런 자에게 예수님의 영광의 빛이 비추어지는 이러한 놀라운 은혜가 주어질 수 있습니까? 사람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악한 사울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는 사울처럼 교회를 잔멸하던 악한 죄인에게까지도 차별없이 주어짐을 분명하게 보여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의롭고 거룩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악하고 불의한 자에게도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니, 보다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사실상 하나님의 은혜는 오히려 불의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입니까? 이 땅에는 의롭고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10-12 말씀입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기준에서 볼 때 의롭고 거룩한 자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결국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불의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고,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자 일지라도 구원의 소망은 있는 것입니다.
사울뿐만 아니라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달렸다가 구원받았던 강도도 ‘예수님의 죄를 과장하기 위해 예수님 옆에 십자가에 달릴 만큼 큰 죄를 지은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악한 죄인이 회개하며 자신을 예수님께 의탁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여러분,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구원의 소망은 모든 사람에게 있지만 구원의 열쇠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회개 여부에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큰 죄를 지었을지라도 진정으로 믿고 회개하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9:13). 의롭고 거룩한 자가 아니라, 불의하고 악한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아무리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얼마든지 구원의 대상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악한 사람일지라도 섣불리 그에 대한 구원 여부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만 차별 없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자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든 그들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드립니다.
3. 이어지는 4-5절 함께 읽습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예수님을 대적하던 ‘사울’이 구원받고 복음의 일꾼이요,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선택과 의지가 아니라, 그를 선택하시고 사랑하셔서 복음의 일꾼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사울뿐만아니라, 아브라함, 모세, 다윗, 엘리야, 이사야, 다니엘, 세례 요한 등 그 누구도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지 않고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일꾼이 된 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16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의 결단으로 복음의 일꾼이 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복음의 일꾼은 하나님이 친히 부르십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은혜로 부르셨기에 이 자리에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을 ‘소명’이라고 합니다. 소명은 우리를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도록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헬라어로 ‘클레시스 κλῆσις’, 영어로 ‘calling’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소명은 우리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디모데후서 1:9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그래서 소명을 인식하는 성도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왜 부르셨는지, 하나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하는 삶을 살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또 질문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을 통해서 얻게 되는 답이 바로 ‘사명’입니다.
사명이라는 말은 우리가 읽는 개역개정성경에는 사도행전 20:24, 고린도전서 9:27에 두 번 기록되어 있는데, 섬김, 봉사라는 뜻을 가진 ‘디아코니아 διακονία’라는 단어를 ‘사명’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mission’이라고 합니다. 디아코니아를 사명으로 번역한 것은 다른 사람을 섬기고 봉사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는 분명한 소명 의식을 가질 때 자신의 사명에 눈을 뜰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사도행전 20:24에서 자신의 사명을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일평생 전도자로 살았습니다.
정리하자면, 소명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성도로서의 마땅한 삶을 사는 것이고, 사명은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직무입니다. 소명을 받은 성도로서 사명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 찾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만이 인생을 무의미하게 허비하지 않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한, 오늘 본문 9절에 사울은 이 사건으로 사흘 동안 보지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고통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이 고통을 통해서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어쩌면 이 고통은 바울이라는 새로운 생명을 낳는 산모의 고통과 같은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러한 고통을 통과해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롭게 거듭나는 삶, 새 생명을 누리는 새사람이 될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사울의 회심 사건은 아무리 생각하고 양보해도 인간의 이성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사건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잔멸하던 자를 사도로 변하게 한 이 사건을 어찌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일도 사실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은혜 중의 은혜요, 기적 중에서 가장 큰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지혜나 상식으로 측량하기에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는 오늘도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이 은혜를 날마다 순간마다 기억하며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구원의 은혜를 깊이 찬양하며 하나님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드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주신 말씀을 상고하면서 우리가 가진 믿음이 종교적인 신념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가슴에 품은 신앙인지 돌아보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은혜로 모든 사람에게 차별이 없음을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 이 깨달음을 가슴 깊이 새기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에 대한 소명과 사명의 삶을 사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큰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전인격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왜입니까? 예수님은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 만큼 놀라운 분이시기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울은 유대인들이 스데반 집사를 죽일 때, 그 일의 정당성을 주장할 증인으로 설만큼 유대교에 심취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열심은 자연스럽게 초대교회에 대한 극심한 박해로 나타났고, 이제는 대제사장으로부터 공문을 받아 박해를 피해 흩어진 성도들까지 체포하기 위해 다메섹으로까지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구주로 영접함으로 그의 생애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복음을 박해하는 자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자로 변화되어, 세계역사의 흐름을 새롭게 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다메섹 도상에서 겪은 사울의 체험은 교회사에서 가장 유명한 회심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오늘, 이 회심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1-2절을 함께 읽습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라는 표현은 사울이 성도들을 박해하는 일에 얼마나 열성적이었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을 박해하는 것으로 분에 차지 않아 이제는 박해를 피해 이방 땅으로 흩어진 성도들까지도 박해하기 위해 대제사장으로부터 지금의 체포영장에 해당하는 ‘공문’까지 받아냈습니다.
그가 이렇게까지 하게 된 것은 그가 악해서라기보다는 유대교와 율법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한 일이라는 절대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신념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열심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거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사울뿐만 아니라 당시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목숨과 같이 여겼습니다. 열심히 읽고 연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목적대로 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민으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율법을 주신 것은 그들이 세상을 이롭게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자기중심적이고 탐욕적인 태도로 대했습니다. 자기들만을 위한 것인양 왜곡했습니다.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이방 우상을 섬기듯 왜곡된 종교적 신념으로 변질시켰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러한 자신들의 불의를 감추기 위해 회개를 외치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가장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적인 신념과 신앙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종교적 신념과 신앙을 혼동합니다. 사울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그러했듯이 자신이 가진 종교적인 신념을 신앙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종교적인 신념과 신앙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종교적인 신념은 자신이 가진 신앙적인 지식과 경험에 근거하여 갖게 되는 굳게 믿는 마음입니다. 굳게 믿기에 그 믿음은 누구도 쉽게 흔들 수 없을 만큼 견고합니다.
이들을 부정적으로 표현할 때 근본주의자 또는 율법주의자라고 하는데, 이들의 특징은 자기들의 뜻과 다르면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제도와 형식과 권위, 그리고 자신이 속한 단체나 교회의 체면과 명예를 우선시 합니다. 종교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자신과 자신이 속한 교회만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고, 자신의 신념과 다른 신앙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으로 비판하고 배척합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테러를 자행하는 자들의 대부분이 근본주의자들입니다. 그리고 이들뿐만 아니라 많은 이단들이 이러한 형태의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 앞에 마음의 무릎을 꿇습니다. 예를 들어, 자부심과 우월감에 사로잡힌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면 사울이 바울로 변화된 것처럼 진리에 새롭게 눈을 뜨게 됩니다.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온갖 죄와 이기적인 삶들을 깨닫고 회개함으로 새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제도와 형식, 자신의 체면과 명예보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양선을 우선하는 사람이 됩니다. 자신과 신앙이 다르고 의견이 다른 사람과 대립각을 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 사랑으로 품는 사람이 됩니다. 삶의 목적이 이타적으로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적인 신념의 사람이 아니라 신앙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종교적인 경험과 지식에 근거하여 자의적으로 어떠한 사실을 굳게 믿는 자가 아니라,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원수까지도 사랑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이러한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커다란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의지가 강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고집을 꺾고 믿음에 들어서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풍성한 생명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최대의 적은 바로 ‘자기 자신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예수를 믿으면 믿을수록 겸손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융통성이 없어지고, 이기적인 아집만 남게 됩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제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종교적인 신념인지, 신앙인지, 혹 종교적인 신념을 신앙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모두, 종교적인 신념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마침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바른 믿음을 가진 신실한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3절 함께 읽습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에게 ‘홀연히 ἐξαίφνης’, 홀연히는 ‘갑자기’라는 뜻입니다. 갑자기 하늘로부터 예수님의 영광의 빛이 사울을 에워쌌습니다.
여러분, 사울은 어떤 사람입니까? 8:3에 의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을 박해하되, ‘잔멸 λυμαίνομαι’하기까지 하던 사람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성도들을 박해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달려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큰 벌을 주어도 시원치 않은데, 어떻게 이런 자에게 예수님의 영광의 빛이 비추어지는 이러한 놀라운 은혜가 주어질 수 있습니까? 사람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악한 사울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는 사울처럼 교회를 잔멸하던 악한 죄인에게까지도 차별없이 주어짐을 분명하게 보여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의롭고 거룩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악하고 불의한 자에게도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니, 보다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사실상 하나님의 은혜는 오히려 불의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입니까? 이 땅에는 의롭고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10-12 말씀입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기준에서 볼 때 의롭고 거룩한 자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결국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불의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고,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자 일지라도 구원의 소망은 있는 것입니다.
사울뿐만 아니라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달렸다가 구원받았던 강도도 ‘예수님의 죄를 과장하기 위해 예수님 옆에 십자가에 달릴 만큼 큰 죄를 지은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악한 죄인이 회개하며 자신을 예수님께 의탁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여러분,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구원의 소망은 모든 사람에게 있지만 구원의 열쇠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회개 여부에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큰 죄를 지었을지라도 진정으로 믿고 회개하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9:13). 의롭고 거룩한 자가 아니라, 불의하고 악한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아무리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얼마든지 구원의 대상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악한 사람일지라도 섣불리 그에 대한 구원 여부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만 차별 없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자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든 그들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드립니다.
3. 이어지는 4-5절 함께 읽습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예수님을 대적하던 ‘사울’이 구원받고 복음의 일꾼이요,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선택과 의지가 아니라, 그를 선택하시고 사랑하셔서 복음의 일꾼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사울뿐만아니라, 아브라함, 모세, 다윗, 엘리야, 이사야, 다니엘, 세례 요한 등 그 누구도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지 않고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일꾼이 된 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16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의 결단으로 복음의 일꾼이 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복음의 일꾼은 하나님이 친히 부르십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은혜로 부르셨기에 이 자리에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을 ‘소명’이라고 합니다. 소명은 우리를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도록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헬라어로 ‘클레시스 κλῆσις’, 영어로 ‘calling’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소명은 우리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디모데후서 1:9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그래서 소명을 인식하는 성도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왜 부르셨는지, 하나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하는 삶을 살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또 질문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을 통해서 얻게 되는 답이 바로 ‘사명’입니다.
사명이라는 말은 우리가 읽는 개역개정성경에는 사도행전 20:24, 고린도전서 9:27에 두 번 기록되어 있는데, 섬김, 봉사라는 뜻을 가진 ‘디아코니아 διακονία’라는 단어를 ‘사명’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mission’이라고 합니다. 디아코니아를 사명으로 번역한 것은 다른 사람을 섬기고 봉사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는 분명한 소명 의식을 가질 때 자신의 사명에 눈을 뜰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사도행전 20:24에서 자신의 사명을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일평생 전도자로 살았습니다.
정리하자면, 소명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성도로서의 마땅한 삶을 사는 것이고, 사명은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직무입니다. 소명을 받은 성도로서 사명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 찾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만이 인생을 무의미하게 허비하지 않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한, 오늘 본문 9절에 사울은 이 사건으로 사흘 동안 보지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고통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이 고통을 통해서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어쩌면 이 고통은 바울이라는 새로운 생명을 낳는 산모의 고통과 같은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러한 고통을 통과해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롭게 거듭나는 삶, 새 생명을 누리는 새사람이 될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사울의 회심 사건은 아무리 생각하고 양보해도 인간의 이성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사건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잔멸하던 자를 사도로 변하게 한 이 사건을 어찌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일도 사실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은혜 중의 은혜요, 기적 중에서 가장 큰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지혜나 상식으로 측량하기에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는 오늘도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이 은혜를 날마다 순간마다 기억하며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구원의 은혜를 깊이 찬양하며 하나님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드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주신 말씀을 상고하면서 우리가 가진 믿음이 종교적인 신념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가슴에 품은 신앙인지 돌아보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은혜로 모든 사람에게 차별이 없음을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 이 깨달음을 가슴 깊이 새기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에 대한 소명과 사명의 삶을 사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