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우리는 지금, 작년 7월부터 시작하여 33번째 사도행전을 살펴보고 있는데 지난주에 사도행전 1부가 끝이 났습니다.
사도행전은 크게 3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부는 1-7장까지로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부터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시작과 성장 과정에 대하여, 2부는 8-12장까지로 복음이 예루살렘이라는 제한된 지역의 틀을 벗어나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팔레스타인 전역까지 확장된 사실에 대하여, 3부는 13-28장까지로 사도 바울의 전도사역을 통해 복음이 지역적으로 확장될 뿐만 아니라, 그 대상이 이방인에게까지, 로마에까지 확장되는 역사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본문으로부터 시작되는 2부에는 유대인 중심의 선교를 기록한 1부와 본격적인 이방인 중심의 선교를 기록한 3부를 이어주는 과도기적 사건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먼저, 1절에
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말씀합니다.
사울은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되기 전에 불리던 옛 이름으로 이스라엘 초대 왕의 이름과 같습니다. 이름의 뜻은 ‘요청하다, 바라다’ 곧, ‘희망’이라는 의미를 지녔는데, 그러나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다가 아들들과 함께 희망 없이 죽임을 당한 것처럼 ‘청년 사울’도 예수님을 믿기 전까지는 희망 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도 희망이 없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무런 희망을 주지 못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었고, 또 당대의 석학으로 불리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하고, 율법에도 열심이었지만, 정작 하나님의 뜻에 무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실한 종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가담했고, 교회를 박해하는 일에 누구보다도 열심이었습니다(3절). 그는 그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에 대하여 열심이던 사울이 왜 이러한 오류를 범했을까요?
그것은 ‘영적인 무지’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훗날 디모데전서 1:13에서 자신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전에 교회를 박해한 것은 “알지 못하고 행하였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영적으로 무지하게 되면 먼저는 자기 자신에게 가장 큰 해를 끼치고, 더 나아가서 타인들에게도 악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무지에 빠지지 않기 위해 날마다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깨닫기 위해 기도하고, 깨달은 말씀에 순종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선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놓치고 영적인 무지에 빠지는 순간, 우리 또한 언제든지 사울과 같이 하나님을 위한다면서 오히려 교회를 박해하는 자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2)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을 계속해서 보면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일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미리 예고하신 일의 성취였습니다. 요한복음 16:2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이 말씀처럼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스데반 사건을 기점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목하에 교회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성도들에게 큰 박해를 가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제외한 모든 성도들은 박해를 견딜수가 없어서 예루살렘을 떠나 피신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볼 때, 유대인들이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누구를 먼저 체포해야 했겠습니까? 교회의 지도자들인 사도들이었을 것입니다(행 4-5장).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어떤 모임이든 지도자가 사라지게 될 때 가장 큰 타격을 입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만일, 사도들마저 예루살렘을 떠났다면 예루살렘 교회는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사도들이 순교를 각오하고 교회를 지킨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양과 목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삯꾼 목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큰 박해 앞에서 목숨을 걸고 교회를 지켰습니다.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은 사도들의 이 자세를 본받아야 합니다. 교회 지도자는 자신의 안위보다 교회와 성도들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 지도자가 자기 안위만 생각한다면 그는 거짓 목자입니다. 교회 지도자는 교회에 분란이 일어나고 위기가 닥쳐도 자기의 맡은 직분에 흔들리지 말고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3) 그런데 여러분, 1절 마지막 부분에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어디서 들어본 말씀 같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언이 되리라”(행 1:8) 이 말씀대로, 비록 자발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성도들은 유대 전역과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여러분,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초대교회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큰 박해를 가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 땅 여러 곳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표면적으로만 보면 교회가 와해된 것 같고, 또 큰 위기에 직면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온 세계에 교회를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성도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세계 각지로 흩어진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교회가 사라졌습니까? 아닙니다. 교회는 이 사건을 계기로 오히려 더욱 확장되었습니다. 각지로 흩어진 성도들이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움으로 예루살렘에만 머물던 복음이 온 세계에 전해졌습니다.
이처럼 성도의 삶에는 우연이 없습니다. 없었으면 좋았을 것 같은 일은 없습니다. 모든 사건, 기쁨, 은혜, 형통뿐만아니라, 고난, 실패, 아픔의 일들까지도 그 안에는 하나님의 뜻과 사랑과 은혜가 깃들어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어려움이 왔다고 실망할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를 통해 오늘 본문의 사도들처럼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언하는 간증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2절 함께 읽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여기에서의 ‘경건한 사람들 ἄνδρες εὐλαβεῖς’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여러 곳에서 이 단어를 유대인으로서 율법에 충실했던 사람들을 가리킬 때 사용했습니다(눅 2:25, 행 2:5, 행 8:2, 행 22:12).
그러므로 스데반의 장례를 치러준 이들은 성도들이 아닌 일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이단으로 처형한 스데반의 시신을 잘 거두어 장례식을 치러주고 또한,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했습니다.
여러분, 참으로 놀라운 일 아닙니까?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유죄판결을 받아 돌에 맞아 사형당한 죄인을 위해 장례를 치르는 것과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을 매우 엄히 금했었습니다. 그럼에도 경건한 유대인들은 자신에게 불이익이 닥칠 것을 알면서도 스데반의 장례를 치르고 진심으로 슬퍼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평소에 그만큼 스데반을 존경하고 아끼고 사랑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누가 이웃들에게 존경받고 사랑을 받습니까?
돈 많은 자입니까? 권세 있는 자입니까? 아닙니다. 돈이 없고, 권세가 없어도 최선을 다해 이웃에게 선을 베풀고 덕을 행한 자가 이웃의 사랑을 받습니다. 스데반은 신앙생활만 잘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이웃에게도 사랑과 구제와 덕을 풍성하게 베푸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이처럼 맺혀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습니까?
만일 우리가 죽어 장례를 치른다면,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겠습니까? 자신의 장례식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가족과 가까운 동료나 친지들이 슬퍼할 것입니다. 목회자와 성도들도 애도를 표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웃들도 우리의 죽음을 슬퍼할까요?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만 사랑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내가 사는 지역사회에서도 이웃들에게 아낌받고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이야말로 참된 성도의 삶입니다. 오늘, 나는 과연 이웃들에게 어떤 존재로 인식되고 있는가? 스스로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스데반과 같이 이웃들에게 칭찬받고 존경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3절 함께 읽습니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당시 유대인들은 기독교를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단으로 정죄하고 재산을 몰수하고 유대교 공동체에서 추방했습니다. 심할 경우에는 사형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의 사울은 이러한 유대교의 기독교 말살 정책의 선봉에 섰습니다. 이로써 성도들은 유대교인들의 눈에 띄면 체포당하고, 재산을 빼앗기고, 사형까지 당하는 위기를 맞았습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본문에 ‘잔멸할새 ἐλυμαίνετο’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는 ‘마치 멧돼지가 포도원을 마구 부수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시 80:13). 그래서 이 단어는 ‘모욕을 주다, 더럽히다, 파괴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사울이 이렇게 교회를 모욕하고, 더럽히고, 파괴하려고 할 때 성도들은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그들은 무력으로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법에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그들의 박해를 감내하거나 아니면 오늘 본문에 기록된 것처럼 그들을 피해 흩어졌습니다.
당시 초대교회에는 수만 명의 성도가 있었고, 그들에게는 놀라운 기적들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었습니다(행 6:7, 21:20). 마음만 먹으면 법으로나 무력으로나 충분히 대항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성도들은 대항하지 않고 순순히 체포당하고 피하고 흩어졌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그러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죽은 자도 살리시는 놀라운 권능을 가지신 분이셨지만, 유대인들의 모든 박해를 순순히 다 받으시고 목숨까지 내려놓으셨습니다. 왜입니까? 악한 그들이었지만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까지도 구원하시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8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래서 스데반도 예수님을 본받아 자신의 목숨보다 자기를 죽이려던 유대인들의 영혼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복음을 끝까지 전했고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순교했습니다. 스데반뿐만 아나라 사도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제자, 사도 바울, 그리고 수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본받아 자신을 박해하는 자들을 용서하고 그들도 구원받기를 기도하며 죽어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정말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나에게 악한 행동을 하는 자들을 볼 때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깁니까? 예수님이 나를 용서하신 것 같이 그들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그들의 구원을 위해 나의 권리를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또는 그러한 간증이 있습니까?
여러분, 성경이 강조하여 가르치듯이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고는 예수님과 함께 부활할 수 없습니다. 죽지 않고 어떻게 부활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우리들도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복음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5:44-45 말씀입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이 같이 한 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산상변모주일인 오늘, 자신의 믿음을 다시 점검하고 예수님의 이러하신 교훈에 기꺼이 마음 문을 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놓치는 순간 우리 또한 언제든지 사울과 같이 하나님을 위한다면서 오히려 교회를 박해하는 자가 될 수 있음을 상고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으로 사는 삶에는 시험이 올 수밖에 없고, 그러한 시험을 이겨내는 방법은 오직 성령 충만하여 예수님의 마음을 가짐으로써 오히려 박해자들의 영혼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이 모든 교훈의 말씀을 삶의 지혜와 능력으로 삼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우리는 지금, 작년 7월부터 시작하여 33번째 사도행전을 살펴보고 있는데 지난주에 사도행전 1부가 끝이 났습니다.
사도행전은 크게 3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부는 1-7장까지로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부터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시작과 성장 과정에 대하여, 2부는 8-12장까지로 복음이 예루살렘이라는 제한된 지역의 틀을 벗어나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팔레스타인 전역까지 확장된 사실에 대하여, 3부는 13-28장까지로 사도 바울의 전도사역을 통해 복음이 지역적으로 확장될 뿐만 아니라, 그 대상이 이방인에게까지, 로마에까지 확장되는 역사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본문으로부터 시작되는 2부에는 유대인 중심의 선교를 기록한 1부와 본격적인 이방인 중심의 선교를 기록한 3부를 이어주는 과도기적 사건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먼저, 1절에
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말씀합니다.
사울은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되기 전에 불리던 옛 이름으로 이스라엘 초대 왕의 이름과 같습니다. 이름의 뜻은 ‘요청하다, 바라다’ 곧, ‘희망’이라는 의미를 지녔는데, 그러나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다가 아들들과 함께 희망 없이 죽임을 당한 것처럼 ‘청년 사울’도 예수님을 믿기 전까지는 희망 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도 희망이 없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무런 희망을 주지 못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었고, 또 당대의 석학으로 불리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하고, 율법에도 열심이었지만, 정작 하나님의 뜻에 무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실한 종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가담했고, 교회를 박해하는 일에 누구보다도 열심이었습니다(3절). 그는 그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에 대하여 열심이던 사울이 왜 이러한 오류를 범했을까요?
그것은 ‘영적인 무지’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훗날 디모데전서 1:13에서 자신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전에 교회를 박해한 것은 “알지 못하고 행하였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영적으로 무지하게 되면 먼저는 자기 자신에게 가장 큰 해를 끼치고, 더 나아가서 타인들에게도 악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무지에 빠지지 않기 위해 날마다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깨닫기 위해 기도하고, 깨달은 말씀에 순종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선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놓치고 영적인 무지에 빠지는 순간, 우리 또한 언제든지 사울과 같이 하나님을 위한다면서 오히려 교회를 박해하는 자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2)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을 계속해서 보면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일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미리 예고하신 일의 성취였습니다. 요한복음 16:2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이 말씀처럼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스데반 사건을 기점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목하에 교회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성도들에게 큰 박해를 가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제외한 모든 성도들은 박해를 견딜수가 없어서 예루살렘을 떠나 피신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볼 때, 유대인들이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누구를 먼저 체포해야 했겠습니까? 교회의 지도자들인 사도들이었을 것입니다(행 4-5장).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어떤 모임이든 지도자가 사라지게 될 때 가장 큰 타격을 입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만일, 사도들마저 예루살렘을 떠났다면 예루살렘 교회는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사도들이 순교를 각오하고 교회를 지킨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양과 목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삯꾼 목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큰 박해 앞에서 목숨을 걸고 교회를 지켰습니다.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은 사도들의 이 자세를 본받아야 합니다. 교회 지도자는 자신의 안위보다 교회와 성도들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 지도자가 자기 안위만 생각한다면 그는 거짓 목자입니다. 교회 지도자는 교회에 분란이 일어나고 위기가 닥쳐도 자기의 맡은 직분에 흔들리지 말고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3) 그런데 여러분, 1절 마지막 부분에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어디서 들어본 말씀 같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언이 되리라”(행 1:8) 이 말씀대로, 비록 자발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성도들은 유대 전역과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여러분,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초대교회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큰 박해를 가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 땅 여러 곳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표면적으로만 보면 교회가 와해된 것 같고, 또 큰 위기에 직면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온 세계에 교회를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성도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세계 각지로 흩어진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교회가 사라졌습니까? 아닙니다. 교회는 이 사건을 계기로 오히려 더욱 확장되었습니다. 각지로 흩어진 성도들이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움으로 예루살렘에만 머물던 복음이 온 세계에 전해졌습니다.
이처럼 성도의 삶에는 우연이 없습니다. 없었으면 좋았을 것 같은 일은 없습니다. 모든 사건, 기쁨, 은혜, 형통뿐만아니라, 고난, 실패, 아픔의 일들까지도 그 안에는 하나님의 뜻과 사랑과 은혜가 깃들어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어려움이 왔다고 실망할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를 통해 오늘 본문의 사도들처럼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언하는 간증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2절 함께 읽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여기에서의 ‘경건한 사람들 ἄνδρες εὐλαβεῖς’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여러 곳에서 이 단어를 유대인으로서 율법에 충실했던 사람들을 가리킬 때 사용했습니다(눅 2:25, 행 2:5, 행 8:2, 행 22:12).
그러므로 스데반의 장례를 치러준 이들은 성도들이 아닌 일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이단으로 처형한 스데반의 시신을 잘 거두어 장례식을 치러주고 또한,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했습니다.
여러분, 참으로 놀라운 일 아닙니까?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유죄판결을 받아 돌에 맞아 사형당한 죄인을 위해 장례를 치르는 것과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을 매우 엄히 금했었습니다. 그럼에도 경건한 유대인들은 자신에게 불이익이 닥칠 것을 알면서도 스데반의 장례를 치르고 진심으로 슬퍼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평소에 그만큼 스데반을 존경하고 아끼고 사랑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누가 이웃들에게 존경받고 사랑을 받습니까?
돈 많은 자입니까? 권세 있는 자입니까? 아닙니다. 돈이 없고, 권세가 없어도 최선을 다해 이웃에게 선을 베풀고 덕을 행한 자가 이웃의 사랑을 받습니다. 스데반은 신앙생활만 잘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이웃에게도 사랑과 구제와 덕을 풍성하게 베푸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이처럼 맺혀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습니까?
만일 우리가 죽어 장례를 치른다면,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겠습니까? 자신의 장례식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가족과 가까운 동료나 친지들이 슬퍼할 것입니다. 목회자와 성도들도 애도를 표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웃들도 우리의 죽음을 슬퍼할까요?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만 사랑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내가 사는 지역사회에서도 이웃들에게 아낌받고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이야말로 참된 성도의 삶입니다. 오늘, 나는 과연 이웃들에게 어떤 존재로 인식되고 있는가? 스스로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스데반과 같이 이웃들에게 칭찬받고 존경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3절 함께 읽습니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당시 유대인들은 기독교를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단으로 정죄하고 재산을 몰수하고 유대교 공동체에서 추방했습니다. 심할 경우에는 사형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의 사울은 이러한 유대교의 기독교 말살 정책의 선봉에 섰습니다. 이로써 성도들은 유대교인들의 눈에 띄면 체포당하고, 재산을 빼앗기고, 사형까지 당하는 위기를 맞았습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본문에 ‘잔멸할새 ἐλυμαίνετο’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는 ‘마치 멧돼지가 포도원을 마구 부수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시 80:13). 그래서 이 단어는 ‘모욕을 주다, 더럽히다, 파괴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사울이 이렇게 교회를 모욕하고, 더럽히고, 파괴하려고 할 때 성도들은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그들은 무력으로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법에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그들의 박해를 감내하거나 아니면 오늘 본문에 기록된 것처럼 그들을 피해 흩어졌습니다.
당시 초대교회에는 수만 명의 성도가 있었고, 그들에게는 놀라운 기적들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었습니다(행 6:7, 21:20). 마음만 먹으면 법으로나 무력으로나 충분히 대항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성도들은 대항하지 않고 순순히 체포당하고 피하고 흩어졌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그러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죽은 자도 살리시는 놀라운 권능을 가지신 분이셨지만, 유대인들의 모든 박해를 순순히 다 받으시고 목숨까지 내려놓으셨습니다. 왜입니까? 악한 그들이었지만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까지도 구원하시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8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래서 스데반도 예수님을 본받아 자신의 목숨보다 자기를 죽이려던 유대인들의 영혼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복음을 끝까지 전했고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순교했습니다. 스데반뿐만 아나라 사도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제자, 사도 바울, 그리고 수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본받아 자신을 박해하는 자들을 용서하고 그들도 구원받기를 기도하며 죽어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정말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나에게 악한 행동을 하는 자들을 볼 때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깁니까? 예수님이 나를 용서하신 것 같이 그들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그들의 구원을 위해 나의 권리를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또는 그러한 간증이 있습니까?
여러분, 성경이 강조하여 가르치듯이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고는 예수님과 함께 부활할 수 없습니다. 죽지 않고 어떻게 부활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우리들도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복음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5:44-45 말씀입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이 같이 한 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산상변모주일인 오늘, 자신의 믿음을 다시 점검하고 예수님의 이러하신 교훈에 기꺼이 마음 문을 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놓치는 순간 우리 또한 언제든지 사울과 같이 하나님을 위한다면서 오히려 교회를 박해하는 자가 될 수 있음을 상고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으로 사는 삶에는 시험이 올 수밖에 없고, 그러한 시험을 이겨내는 방법은 오직 성령 충만하여 예수님의 마음을 가짐으로써 오히려 박해자들의 영혼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이 모든 교훈의 말씀을 삶의 지혜와 능력으로 삼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