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어느 빵장수가 있었는데, 그는 가난한 농부로부터 매일 버터를 납품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납품되는 버터가 정량보다 조금 모자라 보였습니다. 그래서 며칠을 두고 저울로 달아 보니, 예측대로 정량 미달이었습니다.
화가 난 빵장수는 버터를 납품하는 농부를 법정에 고소했습니다. 그런데 버터를 공급했던 농부는 너무 가난해서 집에 저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빵장수가 버터값으로 지불한 1kg짜리 빵의 무게에 맞추어서 버터를 납품하고 있었습니다. 판사는 저울을 가져오게 해서 빵장수가 납품한 빵의 무게를 달아보았습니다. 그런데 1kg이 되지 않았습니다. 빵장수는 이익을 더 남기기 위해 1kg짜리 빵의 무게를 조금 줄여 팔고 있었던 것입니다. 농부는 그것도 모르고 빵장수가 준 빵의 무게에 맞추어서 버터를 만들었으니 당연히 버터가 함량 미달이 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벌은 빵장수가 치러야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자기는 괜찮고 남은 안된다는 이기적인 삶을 살면, 결국 대가를 치르고야 만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당시 유대 땅에는 이 빵장수와 같은 사람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민임을 자처하고 자랑했으나 잘못된 전통과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뜻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롬 2:28-29). 방금 예화로 들려드린 빵장수처럼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사람들을 속이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악과 위선에 물들자, 그들은 성경에 계시된 대로 그리스도께서 오셨음에도 교만과 영적인 무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기들의 죄를 숨기려고 폭력적으로 배척하고, 법정에 거짓으로 고소하여, 끝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악한 죄를 범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이러한 유대인들의 악함을 강하게 책망함으로써 설교를 맺고 있습니다.
1. 먼저, 51절 함께 읽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목이 곧다’라는 말은 ‘완고하고 교만’하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말을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을 가리킬 때와 하나님을 거역하는 불순종를 가리킬 때, 그리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돌이키지 않는 악한 교만을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신 31:27, 왕하 17:14, 대하 36:13). 스데반이 유대인들을 향해 ‘목이 곧다’라고 말한 것은 그들의 행위가 이 세 가지 모두에 해당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회개를 외치는 세례 요한을 죽이고, 세례 요한이 증언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죽이려고 거짓 증인을 세워 재판을 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참으로 불신앙과 불순종과 악한 교만으로 가득 찬 뻔뻔하고 목이 곧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목이 곧은 자들이 된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무지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항상 읽던 구약성경에는 이렇게 ‘목이 곧은 자들’, 즉 교만하여 하나님과 진리의 말씀을 대적하는 자들은 반드시 망하게 됨을 반복하여 교훈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출애굽 제1세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이 곧아 모세와 하나님께 불순종하다가 광야에서 엎드려져 죽었습니다. 또, 목이 곧아 선지자들의 말에 순종하지 않던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사람들도 결국에는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하고, 이방 땅에서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포로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교훈을 귀가 닳도록 들었을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과 똑같이 목이 곧아 성령을 거스르는 삶을 살았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순종하며 사는 것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분명하게 교훈합니다. 결국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처럼 멸망하여 온 세계 각지로 흩어져야만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유대인들처럼 목이 곧아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에스겔 11:19-20에서 말씀합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곧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성령님을 마음에 영접하면, 죄와 탐욕으로 인해 굳은 마음, 돌 같은 마음, 완고한 교만으로 살았던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탐욕을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의로운 마음, 착한 마음, 부드러운 마음, 겸손한 마음으로 회복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내 힘으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와 탐욕을 버리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진정한 변화는 내 의지와 노력으로 바뀌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꿇고 성령으로 충만할 때 가능하게 됩니다.
2) 특히, 스데반 집사는 유대인들을 향해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꾸짖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그와 그 후손들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명하셨습니다. ‘할례’는 남자의 성기 포피 일부를 베어내는 의식으로 마음의 더러운 것을 베어 버리고 순수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언약의 의미를 가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할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으셨습니다(눅 2:21).
그러나 진정한 할례는 마음의 할례에 있습니다. 육체에 행하는 할례는 마음의 할례에 대한 증표로서의 상징적인 의식이라고 성경은 여러 곳에서 말씀합니다. 그중의 한 부분인 신명기 30:6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할례를 받고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교만하게 행했습니다. 하나님을 마치 우상을 섬기듯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재차 경고하셨습니다. 예레미야 4:4 말씀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마음에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악행에 빠지게 되고 하나님의 분노 앞에 서게 된다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는 의식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신이 중요합니다. 할례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로마서 2:29에도 할례는 오직 마음에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나는 과연 육신뿐만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받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마음의 할례’를 고백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3) 그리고 스데반은, 여기에 더하여 마음뿐만 아니라 ‘귀’에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라는 예레미야 6:10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귀에 할례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성경 말씀도, 예수님 말씀도, 스데반이 전하는 진리도 전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귀에 할례받지 못한 자들이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귀에 세상 소리만 들리고 하나님 말씀이 들리지 않는 자들은 거듭난 성도가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알아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가 귀에 할례를 받은 성도입니다. 어떻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수 있는 듣는 귀가 있습니까?
오늘, 나는 과연 마음과 귀에 성령으로 할례를 받은 사람인지 스스로를 살피는 지혜로운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52절 함께 읽습니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과거 유대인들의 조상들은 자신들의 탐욕과 우상 숭배의 죄를 돌이키고 언약의 백성답게 의로운 삶으로 돌아오라고 경고하는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죽였습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다 죽어갔습니다(느 9:26, 렘 2:30). 그런데 그러한 사실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도 그리스도가 오시리라 예고한 세례 요한을 죽였습니다. 또한, 세례 요한의 예고대로 오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고 예수님의 제자인 스데반을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를 박해하거나 죽이는 자들은 하나님께 싸움을 거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과 원수지간이 되도록 만드는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선민이라고 자처했습니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죽이고, 거역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아들마저 죽이는 큰 죄를 범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러한 행동으로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복음의 주도권을 스스로 이방 세계 사람들에게 넘겨주게 되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지금 이 시대 이스라엘의 기독교 인구 비율은 1.9%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것도 75.8%가 아랍계라고 합니다(뉴스제이).
이를 통해 우리가 받게 되는 교훈은 인생에 있어 가장 큰 불행은 하나님의 뜻에 마음과 귀를 막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 이 시대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마음과 귀를 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53절 함께 읽습니다.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율법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에게 친히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자기 민족만 율법을 받은 것에 대해 큰 긍지와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스데반을 재판하는 유대인 중에는 율법 학자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평소에 모세의 제자라고 자처하며 늘 율법을 연구하고 율법의 뜻을 해석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을 받은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세세하게 연구는 잘했으나, 율법을 본뜻과 달리 인위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자기들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임의로 해석하고 뜯어고쳤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들은 율법에 계시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율법과 제사법과 찬송시와 선민의 역사와 인류의 종말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윤리적인 교훈도 풍성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가장 큰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누구나 정독하면 알게 됩니다. 율법의 제사 제도는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모형이자 계시입니다(히 10:1-12). 또, 예언서와 시편에는 장차 고난의 종으로 오실 그리스도가 매우 많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성경을 인간의 정욕과 생각으로 대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기복주의 말씀은 부각시키고, 자신들의 희생이나 헌신이 요구되는 부분은 소홀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려고 성경의 예언대로 오신 그리스도를 박해하고 죽음에까지 내몰았습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세 번 질문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양을 치고,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어린 양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들을 사랑하고 섬기고 세우는 것입니다. 나의 양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양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양, 내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악한 자들도 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눅 6:32, 마 5:46, 마 7:11)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양이 아니라, 자신의 양들만 사랑했습니다. 자신의 것에 몰두하다 보니 하나님의 뜻을 배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사야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 같이 그들이 수많은 제물로 제사를 드려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고, 기도를 해도 듣지 않으신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더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든 금송아지를 하나님으로 섬겼습니다. 그래서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받지 못한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언제 우리에게 종교 생활을 열심히 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오직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의 양을 치고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른 믿음은 바로 이 말씀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마음과 귀에 할례받은 증거가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 누가 예수님의 양입니까? 이 질문에 마음과 귀를 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어린 양을 치고 먹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일곱 번에 걸쳐 스데반의 설교를 상고했습니다. 이 모든 역사를 남의 이야기로 듣는 것이 아니라 삶의 교훈으로 삼게 하여 주옵소서.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유대인들을 반면교사 삼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 충만받아 부드러운 하나님의 사람, 예수님의 양을 치고 먹이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어느 빵장수가 있었는데, 그는 가난한 농부로부터 매일 버터를 납품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납품되는 버터가 정량보다 조금 모자라 보였습니다. 그래서 며칠을 두고 저울로 달아 보니, 예측대로 정량 미달이었습니다.
화가 난 빵장수는 버터를 납품하는 농부를 법정에 고소했습니다. 그런데 버터를 공급했던 농부는 너무 가난해서 집에 저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빵장수가 버터값으로 지불한 1kg짜리 빵의 무게에 맞추어서 버터를 납품하고 있었습니다. 판사는 저울을 가져오게 해서 빵장수가 납품한 빵의 무게를 달아보았습니다. 그런데 1kg이 되지 않았습니다. 빵장수는 이익을 더 남기기 위해 1kg짜리 빵의 무게를 조금 줄여 팔고 있었던 것입니다. 농부는 그것도 모르고 빵장수가 준 빵의 무게에 맞추어서 버터를 만들었으니 당연히 버터가 함량 미달이 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벌은 빵장수가 치러야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자기는 괜찮고 남은 안된다는 이기적인 삶을 살면, 결국 대가를 치르고야 만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당시 유대 땅에는 이 빵장수와 같은 사람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민임을 자처하고 자랑했으나 잘못된 전통과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뜻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롬 2:28-29). 방금 예화로 들려드린 빵장수처럼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사람들을 속이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악과 위선에 물들자, 그들은 성경에 계시된 대로 그리스도께서 오셨음에도 교만과 영적인 무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기들의 죄를 숨기려고 폭력적으로 배척하고, 법정에 거짓으로 고소하여, 끝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악한 죄를 범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이러한 유대인들의 악함을 강하게 책망함으로써 설교를 맺고 있습니다.
1. 먼저, 51절 함께 읽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목이 곧다’라는 말은 ‘완고하고 교만’하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말을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을 가리킬 때와 하나님을 거역하는 불순종를 가리킬 때, 그리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돌이키지 않는 악한 교만을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신 31:27, 왕하 17:14, 대하 36:13). 스데반이 유대인들을 향해 ‘목이 곧다’라고 말한 것은 그들의 행위가 이 세 가지 모두에 해당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회개를 외치는 세례 요한을 죽이고, 세례 요한이 증언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죽이려고 거짓 증인을 세워 재판을 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참으로 불신앙과 불순종과 악한 교만으로 가득 찬 뻔뻔하고 목이 곧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목이 곧은 자들이 된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무지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항상 읽던 구약성경에는 이렇게 ‘목이 곧은 자들’, 즉 교만하여 하나님과 진리의 말씀을 대적하는 자들은 반드시 망하게 됨을 반복하여 교훈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출애굽 제1세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이 곧아 모세와 하나님께 불순종하다가 광야에서 엎드려져 죽었습니다. 또, 목이 곧아 선지자들의 말에 순종하지 않던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사람들도 결국에는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하고, 이방 땅에서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포로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교훈을 귀가 닳도록 들었을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과 똑같이 목이 곧아 성령을 거스르는 삶을 살았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순종하며 사는 것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분명하게 교훈합니다. 결국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처럼 멸망하여 온 세계 각지로 흩어져야만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유대인들처럼 목이 곧아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에스겔 11:19-20에서 말씀합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곧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성령님을 마음에 영접하면, 죄와 탐욕으로 인해 굳은 마음, 돌 같은 마음, 완고한 교만으로 살았던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탐욕을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의로운 마음, 착한 마음, 부드러운 마음, 겸손한 마음으로 회복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내 힘으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와 탐욕을 버리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진정한 변화는 내 의지와 노력으로 바뀌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꿇고 성령으로 충만할 때 가능하게 됩니다.
2) 특히, 스데반 집사는 유대인들을 향해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꾸짖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그와 그 후손들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명하셨습니다. ‘할례’는 남자의 성기 포피 일부를 베어내는 의식으로 마음의 더러운 것을 베어 버리고 순수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언약의 의미를 가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할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으셨습니다(눅 2:21).
그러나 진정한 할례는 마음의 할례에 있습니다. 육체에 행하는 할례는 마음의 할례에 대한 증표로서의 상징적인 의식이라고 성경은 여러 곳에서 말씀합니다. 그중의 한 부분인 신명기 30:6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할례를 받고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교만하게 행했습니다. 하나님을 마치 우상을 섬기듯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재차 경고하셨습니다. 예레미야 4:4 말씀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마음에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악행에 빠지게 되고 하나님의 분노 앞에 서게 된다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는 의식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신이 중요합니다. 할례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로마서 2:29에도 할례는 오직 마음에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나는 과연 육신뿐만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받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마음의 할례’를 고백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3) 그리고 스데반은, 여기에 더하여 마음뿐만 아니라 ‘귀’에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라는 예레미야 6:10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귀에 할례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성경 말씀도, 예수님 말씀도, 스데반이 전하는 진리도 전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귀에 할례받지 못한 자들이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귀에 세상 소리만 들리고 하나님 말씀이 들리지 않는 자들은 거듭난 성도가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알아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가 귀에 할례를 받은 성도입니다. 어떻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수 있는 듣는 귀가 있습니까?
오늘, 나는 과연 마음과 귀에 성령으로 할례를 받은 사람인지 스스로를 살피는 지혜로운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52절 함께 읽습니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과거 유대인들의 조상들은 자신들의 탐욕과 우상 숭배의 죄를 돌이키고 언약의 백성답게 의로운 삶으로 돌아오라고 경고하는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죽였습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다 죽어갔습니다(느 9:26, 렘 2:30). 그런데 그러한 사실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도 그리스도가 오시리라 예고한 세례 요한을 죽였습니다. 또한, 세례 요한의 예고대로 오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고 예수님의 제자인 스데반을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를 박해하거나 죽이는 자들은 하나님께 싸움을 거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과 원수지간이 되도록 만드는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선민이라고 자처했습니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죽이고, 거역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아들마저 죽이는 큰 죄를 범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러한 행동으로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복음의 주도권을 스스로 이방 세계 사람들에게 넘겨주게 되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지금 이 시대 이스라엘의 기독교 인구 비율은 1.9%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것도 75.8%가 아랍계라고 합니다(뉴스제이).
이를 통해 우리가 받게 되는 교훈은 인생에 있어 가장 큰 불행은 하나님의 뜻에 마음과 귀를 막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 이 시대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마음과 귀를 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53절 함께 읽습니다.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율법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에게 친히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자기 민족만 율법을 받은 것에 대해 큰 긍지와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스데반을 재판하는 유대인 중에는 율법 학자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평소에 모세의 제자라고 자처하며 늘 율법을 연구하고 율법의 뜻을 해석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을 받은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세세하게 연구는 잘했으나, 율법을 본뜻과 달리 인위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자기들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임의로 해석하고 뜯어고쳤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들은 율법에 계시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율법과 제사법과 찬송시와 선민의 역사와 인류의 종말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윤리적인 교훈도 풍성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가장 큰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누구나 정독하면 알게 됩니다. 율법의 제사 제도는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모형이자 계시입니다(히 10:1-12). 또, 예언서와 시편에는 장차 고난의 종으로 오실 그리스도가 매우 많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성경을 인간의 정욕과 생각으로 대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기복주의 말씀은 부각시키고, 자신들의 희생이나 헌신이 요구되는 부분은 소홀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려고 성경의 예언대로 오신 그리스도를 박해하고 죽음에까지 내몰았습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세 번 질문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양을 치고,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어린 양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들을 사랑하고 섬기고 세우는 것입니다. 나의 양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양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양, 내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악한 자들도 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눅 6:32, 마 5:46, 마 7:11)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양이 아니라, 자신의 양들만 사랑했습니다. 자신의 것에 몰두하다 보니 하나님의 뜻을 배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사야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 같이 그들이 수많은 제물로 제사를 드려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고, 기도를 해도 듣지 않으신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더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든 금송아지를 하나님으로 섬겼습니다. 그래서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받지 못한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언제 우리에게 종교 생활을 열심히 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오직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의 양을 치고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른 믿음은 바로 이 말씀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마음과 귀에 할례받은 증거가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 누가 예수님의 양입니까? 이 질문에 마음과 귀를 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어린 양을 치고 먹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일곱 번에 걸쳐 스데반의 설교를 상고했습니다. 이 모든 역사를 남의 이야기로 듣는 것이 아니라 삶의 교훈으로 삼게 하여 주옵소서.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유대인들을 반면교사 삼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 충만받아 부드러운 하나님의 사람, 예수님의 양을 치고 먹이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