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38.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39.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40.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41.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42. 하나님이 외면하사 그들을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 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43.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지금 우리는 5주째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복음을 대적하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역사를 언급하면서, 예수께서 누구이신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의 교훈 세 번째 시간으로 ‘우상 숭배’에 관한 말씀입니다.
1. 먼저, 37~38절 함께 읽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모세는 신명기 18:15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예언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의 식민지에서 자신들을 구원해줄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오실 것을 믿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세례 요한이 나타나자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모세가 오리라고 한 그 선지자입니까?”(요 1:21) 세례 요한이 아니라고 하니까 예수님에게도 똑같이 물었습니다(요 6:14, 요 7:20).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가 오리라고 예언한 선지자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며 모세가 오리라고 예언한 그 선지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유대인들에게 깨우쳐 주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모세의 삶은 많은 부분에서 예수님과 닮아 있습니다. 모세와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 낮아졌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많은 이적을 행했습니다. 모세는 율법으로, 예수님은 복음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전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도 닮았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모세의 삶을 언급하며 예수께서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언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스데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을 구원한 모세에게 한 행위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습니다. 39절 함께 읽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자기들을 구원해 준 모세에게 감사하고 순종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출애굽 직후부터, 걸핏하면 모세와 그를 세우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물이 조금 부족해도 원망했고, 먹을 것이 조금 부족해도 신세를 한탄했고, 심지어 하늘의 양식 ‘만나’를 먹으면서도 애굽의 음식보다 맛이 없다고 투덜거렸습니다(민 11:5).
스데반 집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처럼 원망하고 투덜거린 이유를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좀 더 쉽게 말하면 400년간 몸에 밴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몸은 애굽에서 벗어났지만, 마음은 여전히 애굽의 종살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걸핏하면 ‘애굽으로 돌아가자’ ‘애굽에서 노예로 살 때가 더 좋았다’고 소리쳤습니다(민14:3-4).
여러분, 하나님은 애굽의 압제에서 탄식하며 부르짖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애굽의 노예에서 그들을 구원해주셨습니다. 율법과 성막을 주시며 선민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몸에 배여있던 노예근성을 벗고 자유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도록 광야에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노예근성을 벗기기 위한 작은 훈련조차도 거부하며 자신들을 박해하고 노예로 삼은 애굽을 그리워하며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이 얼마나 배은망덕한 일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송두리째 저버리는 죄악이었습니다. 결국, 이렇게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한 출애굽 1세대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모두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하고 40년간을 광야에서 고생하며 죽어갔습니다.
여러분, 우리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죄와 죽음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안에 여전히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옛 본성의 찌꺼기’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난 성도라도 옛사람의 본성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닙니다. 그 옛사람의 본성은 예수님 재림하시고 우리가 장차 부활할 때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하기에 우리 성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자유인으로서의 삶의 자세를 훈련받아야 했듯이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옛사람의 본성과 싸우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신 하늘의 성품으로 옛사람의 본성을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도가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삶의 자세입니다. 만일, 이 일을 게을리하고 옛 본성대로 행하면 신앙의 성장은 멈추게 되고, 점점 퇴보하여 결국에는 이전보다 더 큰 타락에 빠지게 되고 맙니다. 이 모습을 빗대어, 믿지 않는 사람들을 ‘길 잃은 양’이라고 하고, 예수님을 믿되 옛 성품을 그대로 갖고 사는 성도들을 향해 ‘길 찾은 늑대’라고 말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 ‘옛사람의 본성’을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옛 본성에 굴복하며 ‘길 찾은 늑대’와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까? 철두철미하게 ‘옛사람의 본성’,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타락한 인간 본성을 경계하는 훈련을 하는 성도만이 구원을 지킬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날마다 내가 죽는 것만이 곧 내가 사는 길입니다(고전 15:31). 오늘, 길 찾은 늑대가 아니라, 복음의 일꾼으로서의 삶을 결단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40~41절 함께 읽습니다.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기 위해 시내산으로 올라간 40일을 기다리지 못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그들의 손으로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숭배했습니다(출 32:1-8). 금송아지 우상은 애굽인들이 숭배하던 소를 본떠 만든 것으로, 애굽인들은 이 우상 앞에서 일주일 동안 춤추고 노래하며, 난잡한 성행위를 하며 향락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인들의 풍습을 그대로 흉내 내어 금송아지를 경배하고, 춤추고, 노래하며 타락에 빠졌던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에 대하여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상이란 어떤 다른 종교에서 만들어 섬기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만들거나, 왜곡하여 경배하고 의지하는 것도 우상 숭배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유대 종교지도자들도 우상 숭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자신들의 이익을 따라 이것저것을 첨가하여 인간의 규례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보다 자신들이 만든 종교 규례를 신앙의 기반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성전 역시, 기도하는 곳이 아니라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고 있었습니다(마 21:12-13). 스데반은 이러한 유대인들의 실상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금송아지 우상 숭배를 빗대어 질책한 것입니다.
여러분, 스데반의 설교에서 보듯이 하나님을 자기의 생각에 따라 섬기는 것이 우상 숭배의 본질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따라 섬기고, 의지하는 행위가 우상 숭배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상 숭배에 깊이 빠져들게 되면 하나님은 점점 없어지고 사람이 만든 우상만 남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각종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우상 숭배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돈이 되었든, 건물이 되었든, 종교 규례가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그것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면 우상 숭배가 됩니다.
오늘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앙은 무엇을 구하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진정한 성도로서의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42절 함께 읽습니다.
“하나님이 외면하사 그들을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 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여기에서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이란 해와 달과 별을 우상으로 섬기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리고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란 아모스 5:25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 40년 동안 하나님께 아무 예물도 드리지 않았다고 질책하신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민수기 7장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물을 풍성히 드려 제사를 지냈고, 9장에 유월절에도 예물도 드렸습니다. 그 이후에도 아론을 통해 성막에서 제사가 드려졌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40년 동안 희생과 제물을 드린 일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의 제물에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앙과 감사가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참된 신앙과 감사함 없이 형식적으로 드리는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고 조롱하는 일로 여기십니다(사 1:10-15).
그리고 스데반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성전에서 매일 희생제물을 드렸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또한,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해 형식적으로 예물을 드릴 뿐이었습니다. 참된 신앙과 감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예물은 열납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가증히 여기심을 성경을 인용하여 깨우치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물은 성도들의 온전한 신앙과 그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입니다. 신앙이 없고 감사 없이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물은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한 예물은 오늘 본문의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삯꾼 목자들의 배만 불리는 것이 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를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에 금송아지 우상을 세우게 만듭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놓이게 만듭니다. 이어지는 43절은 이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은 아모스 5:27을 인용한 것으로,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할 당시 이스라엘은 신앙이 변질되어 극심한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암몬의 신 몰록과 앗수르의 우상 레판을 비롯하여 여러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여기서 몰록 숭배는 자기 자녀를 불에 태워 바치는 의식이 동반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악하고 잔인했겠습니까? 실로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바벨론을 통해 심판하여 망하게 하시고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습니다. 바벨론에서 70년간 포로 생활을 하며 자기들의 잘못을 뉘우치게 하셨습니다.
지금 스데반 집사가 이러한 이스라엘의 비극적인 역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유대인들 역시 신앙을 왜곡하고 우상 숭배에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입술로는 자비와 양선과 사랑을 외치면서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고, 이제는 그의 제자들까지 죽이려고 하는 악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당장 회개하지 않으면 바벨론으로 잡혀간 그들의 조상들과 같은 운명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매우 강력하게 경고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후 70년경,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된 로마 군대에 의해 나라가 완전히 망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죄 중에서 가장 무서운 죄는 우상 숭배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의 첫 번째, 두 번째 계명은 우상 숭배에 대한 것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면 예수님도, 진리도, 교회도 대적하는 자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온갖 우상이 만연한 이 땅에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까지도 타락한 이스라엘 민족처럼 하나님을 마치 우상처럼 숭배하게 되면 이 세상은 하나님께 긍휼 없는 심판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오늘, 스데반 집사의 충고를 가슴 깊이 품고 우상을 멀리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를 바르게 세워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스데반 집사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하고 계속 애굽에게, 우상에게로 마음을 빼앗긴 출애굽 1세대들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설교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바른 신앙을 잃어버린 오늘날 교회에 대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유대교인들의 우상 숭배를 기억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권능 안에 늘 거하는 복된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37.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38.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39.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40.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41.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42. 하나님이 외면하사 그들을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 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43.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지금 우리는 5주째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복음을 대적하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역사를 언급하면서, 예수께서 누구이신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의 교훈 세 번째 시간으로 ‘우상 숭배’에 관한 말씀입니다.
1. 먼저, 37~38절 함께 읽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모세는 신명기 18:15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예언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의 식민지에서 자신들을 구원해줄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오실 것을 믿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세례 요한이 나타나자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모세가 오리라고 한 그 선지자입니까?”(요 1:21) 세례 요한이 아니라고 하니까 예수님에게도 똑같이 물었습니다(요 6:14, 요 7:20).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가 오리라고 예언한 선지자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며 모세가 오리라고 예언한 그 선지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유대인들에게 깨우쳐 주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모세의 삶은 많은 부분에서 예수님과 닮아 있습니다. 모세와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 낮아졌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많은 이적을 행했습니다. 모세는 율법으로, 예수님은 복음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전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도 닮았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모세의 삶을 언급하며 예수께서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언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스데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을 구원한 모세에게 한 행위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습니다. 39절 함께 읽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자기들을 구원해 준 모세에게 감사하고 순종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출애굽 직후부터, 걸핏하면 모세와 그를 세우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물이 조금 부족해도 원망했고, 먹을 것이 조금 부족해도 신세를 한탄했고, 심지어 하늘의 양식 ‘만나’를 먹으면서도 애굽의 음식보다 맛이 없다고 투덜거렸습니다(민 11:5).
스데반 집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처럼 원망하고 투덜거린 이유를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좀 더 쉽게 말하면 400년간 몸에 밴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몸은 애굽에서 벗어났지만, 마음은 여전히 애굽의 종살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걸핏하면 ‘애굽으로 돌아가자’ ‘애굽에서 노예로 살 때가 더 좋았다’고 소리쳤습니다(민14:3-4).
여러분, 하나님은 애굽의 압제에서 탄식하며 부르짖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애굽의 노예에서 그들을 구원해주셨습니다. 율법과 성막을 주시며 선민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몸에 배여있던 노예근성을 벗고 자유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도록 광야에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노예근성을 벗기기 위한 작은 훈련조차도 거부하며 자신들을 박해하고 노예로 삼은 애굽을 그리워하며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이 얼마나 배은망덕한 일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송두리째 저버리는 죄악이었습니다. 결국, 이렇게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한 출애굽 1세대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모두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하고 40년간을 광야에서 고생하며 죽어갔습니다.
여러분, 우리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죄와 죽음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안에 여전히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옛 본성의 찌꺼기’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난 성도라도 옛사람의 본성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닙니다. 그 옛사람의 본성은 예수님 재림하시고 우리가 장차 부활할 때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하기에 우리 성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자유인으로서의 삶의 자세를 훈련받아야 했듯이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옛사람의 본성과 싸우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신 하늘의 성품으로 옛사람의 본성을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도가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삶의 자세입니다. 만일, 이 일을 게을리하고 옛 본성대로 행하면 신앙의 성장은 멈추게 되고, 점점 퇴보하여 결국에는 이전보다 더 큰 타락에 빠지게 되고 맙니다. 이 모습을 빗대어, 믿지 않는 사람들을 ‘길 잃은 양’이라고 하고, 예수님을 믿되 옛 성품을 그대로 갖고 사는 성도들을 향해 ‘길 찾은 늑대’라고 말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 ‘옛사람의 본성’을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옛 본성에 굴복하며 ‘길 찾은 늑대’와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까? 철두철미하게 ‘옛사람의 본성’,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타락한 인간 본성을 경계하는 훈련을 하는 성도만이 구원을 지킬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날마다 내가 죽는 것만이 곧 내가 사는 길입니다(고전 15:31). 오늘, 길 찾은 늑대가 아니라, 복음의 일꾼으로서의 삶을 결단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40~41절 함께 읽습니다.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기 위해 시내산으로 올라간 40일을 기다리지 못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그들의 손으로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숭배했습니다(출 32:1-8). 금송아지 우상은 애굽인들이 숭배하던 소를 본떠 만든 것으로, 애굽인들은 이 우상 앞에서 일주일 동안 춤추고 노래하며, 난잡한 성행위를 하며 향락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인들의 풍습을 그대로 흉내 내어 금송아지를 경배하고, 춤추고, 노래하며 타락에 빠졌던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에 대하여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상이란 어떤 다른 종교에서 만들어 섬기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만들거나, 왜곡하여 경배하고 의지하는 것도 우상 숭배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유대 종교지도자들도 우상 숭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자신들의 이익을 따라 이것저것을 첨가하여 인간의 규례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보다 자신들이 만든 종교 규례를 신앙의 기반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성전 역시, 기도하는 곳이 아니라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고 있었습니다(마 21:12-13). 스데반은 이러한 유대인들의 실상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금송아지 우상 숭배를 빗대어 질책한 것입니다.
여러분, 스데반의 설교에서 보듯이 하나님을 자기의 생각에 따라 섬기는 것이 우상 숭배의 본질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따라 섬기고, 의지하는 행위가 우상 숭배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상 숭배에 깊이 빠져들게 되면 하나님은 점점 없어지고 사람이 만든 우상만 남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각종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우상 숭배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돈이 되었든, 건물이 되었든, 종교 규례가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그것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면 우상 숭배가 됩니다.
오늘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앙은 무엇을 구하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진정한 성도로서의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42절 함께 읽습니다.
“하나님이 외면하사 그들을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 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여기에서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이란 해와 달과 별을 우상으로 섬기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리고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란 아모스 5:25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 40년 동안 하나님께 아무 예물도 드리지 않았다고 질책하신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민수기 7장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물을 풍성히 드려 제사를 지냈고, 9장에 유월절에도 예물도 드렸습니다. 그 이후에도 아론을 통해 성막에서 제사가 드려졌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40년 동안 희생과 제물을 드린 일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의 제물에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앙과 감사가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참된 신앙과 감사함 없이 형식적으로 드리는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고 조롱하는 일로 여기십니다(사 1:10-15).
그리고 스데반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성전에서 매일 희생제물을 드렸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또한,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해 형식적으로 예물을 드릴 뿐이었습니다. 참된 신앙과 감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예물은 열납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가증히 여기심을 성경을 인용하여 깨우치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물은 성도들의 온전한 신앙과 그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입니다. 신앙이 없고 감사 없이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물은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한 예물은 오늘 본문의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삯꾼 목자들의 배만 불리는 것이 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를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에 금송아지 우상을 세우게 만듭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놓이게 만듭니다. 이어지는 43절은 이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은 아모스 5:27을 인용한 것으로,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할 당시 이스라엘은 신앙이 변질되어 극심한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암몬의 신 몰록과 앗수르의 우상 레판을 비롯하여 여러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여기서 몰록 숭배는 자기 자녀를 불에 태워 바치는 의식이 동반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악하고 잔인했겠습니까? 실로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바벨론을 통해 심판하여 망하게 하시고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습니다. 바벨론에서 70년간 포로 생활을 하며 자기들의 잘못을 뉘우치게 하셨습니다.
지금 스데반 집사가 이러한 이스라엘의 비극적인 역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유대인들 역시 신앙을 왜곡하고 우상 숭배에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입술로는 자비와 양선과 사랑을 외치면서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고, 이제는 그의 제자들까지 죽이려고 하는 악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당장 회개하지 않으면 바벨론으로 잡혀간 그들의 조상들과 같은 운명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매우 강력하게 경고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후 70년경,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된 로마 군대에 의해 나라가 완전히 망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죄 중에서 가장 무서운 죄는 우상 숭배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의 첫 번째, 두 번째 계명은 우상 숭배에 대한 것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면 예수님도, 진리도, 교회도 대적하는 자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온갖 우상이 만연한 이 땅에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까지도 타락한 이스라엘 민족처럼 하나님을 마치 우상처럼 숭배하게 되면 이 세상은 하나님께 긍휼 없는 심판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오늘, 스데반 집사의 충고를 가슴 깊이 품고 우상을 멀리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를 바르게 세워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스데반 집사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하고 계속 애굽에게, 우상에게로 마음을 빼앗긴 출애굽 1세대들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설교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바른 신앙을 잃어버린 오늘날 교회에 대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유대교인들의 우상 숭배를 기억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권능 안에 늘 거하는 복된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