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지난 시간에 우리는 ‘고난 중에도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부터 시작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박해를 피해 이방 땅으로 흩어진 성도들이 좌절하고 실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을 굳게 하고 복음을 전함으로써 로마 제국의 3대 도시인 안디옥에 이방인 중심의 교회가 세워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에 대하여 상고했습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사울의 헌신으로 크게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부흥한 안디옥 교회가 큰 흉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준 아름다운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기독교 공동체의 본질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먼저, 27절 함께 읽습니다.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안디옥 교회가 부흥했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에 있던 선지자들이 안디옥을 방문했습니다. 선지자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인 구약시대에 많이 활동했는데, 그들은 꿈이나 환상을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아모스 3:7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라고 말씀하고 있고, 호세아 12:10에는 "내가 여러 선지자에게 말하였고 이상을 많이 보였으며 선지자들을 통하여 비유를 베풀었노라"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선지자들은 하나님과 늘 교제하며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세상에 전하는 전령과도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은 미래를 점치거나 앞날을 예언하는 일보다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백성들에게 전하고, 타락한 백성들을 일깨워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도록 경고하며, 회개와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선지자를 히브리어로 ‘나비 נָבִיא’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문자적인 뜻은 ‘입’입니다. 이러한 선지자라는 이름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를 ‘더하거나 빼지 않고 주신 말씀을 그대로’ 전해야 하는 그들의 사명을 강조하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모세를 선지자로 소개하고 있지만(신 18:18), 정식적인 선지자로서의 직무는 사무엘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을 비롯한 16명의 선지자들이 기록한 17권의 하나님의 계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도 구약의 선지자와 같은 사명을 감당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세례 요한과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가보, 그리고 13:1에 보시면 바나바와 바울도 선지자입니다. 15:32에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입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도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2:28과 에베소서 4:11에 교회에서의 직분의 종류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에 선지자의 직분이 소개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선지자 중의 선지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모두가 하나님의 계시를 그대로 우리에게 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이후 신약성경이 기록된 후에는 구약에서의 선지자로서의 직책은 더이상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계시가 완성되었고, 그것을 기록하고 해석한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본문을 비롯한 신약성경 곳곳에 선지자들이 등장하는 것은 당시에는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에 의해 신약성경 27권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목사는 자기가 선지자라고 하는데, 목사는 구약시대의 선지자와 같은 직분이 아닙니다. 목사는 새로운 계시를 받아 전하는 직분이 아니라, ‘완성된 계시인 성경’을 전하고 가르치는 직분입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계시를 받던 구약의 선지자와는 달리 이미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성령의 조명을 받아 해석하고 전하는 직분입니다. 선지자적인 역할은 하지만 구약의 선지자들과는 전혀 다른 직분입니다. 예배를 집례하고 교회를 섬긴다는 점에서 제사장의 직분과 성도들을 가르친다는 점에서 교사로서의 직분이 더 주된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선지자라면서 성경에 기록된 말씀 이외의 것을 예언하는 자들은 모두가 다 이단들입니다. 실제로 2천여 년 교회의 역사에는 수많은 이단들이 등장했고, 지금 이 시대에도 수많은 이단들이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지난 통계를 기준으로 추산을 하면, 2025년 현재에도 전 세계적으로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예수 그리스도 또는 유사한 신적 존재라고 주장하고 있고, 우리나라에도 자신을 ‘재림 예수’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50명이 넘는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자처하는 사람도 20여 명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들을 무엇으로 분별할 수 있습니까?
성경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워야 하는 것은 바로 이에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이단의 미혹에 쉽게 넘어가게 됩니다.
일례로, 아이들이 집에 있는 몸에 이롭고 맛있는 음식보다 길거리에서 파는 불량식품을 더 좋아하는 것은, 그것들이 엄마가 만들어 주는 음식보다 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도 이단들의 미혹도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들의 탐욕을 채워주는 거짓말을 더한 것이기에, 듣는 사람은 누구라도 미혹 당하기가 쉽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누구든지 고난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단들은 예수님께서 모든 고난을 다 졌으므로 우리는 누리기만 하면 된다고 미혹합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는데, 이단들은 그러한 자들은 상대도 하지 말고, 심지어 자기의 믿음을 반대하면 부모 가족이라도 버리고 교회에만 충성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이러한 이단의 미혹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우리의 가족, 친구, 이웃이 이단에 미혹되지 않도록 예수님을 믿는 삶이 어떤 삶인지 분명하고 똑똑하게 증거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들이 이단의 미혹에 걸려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품에 안길 수 있게 됩니다. 오늘, 성도로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우리의 가족, 친구, 이웃이 이단의 미혹에 빠지지 않도록 분명한 믿음의 본을 보이기를 결단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28절 함께 읽습니다.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라고 말씀하듯이,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예언하는 사람입니다.
아가보가 “천하에 큰 흉년 들리라”고 예언했는데, 기록에 의하면 실제로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4년간 흉년이 거듭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흉년으로 인해 가장 큰 어려움을 겪은 곳은 예루살렘 교회였습니다. 왜냐하면,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박해로 사도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방 땅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그로 인해 헌금이 매우 적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모든 교회의 ‘모교회’였습니다. 상식적으로 모교회라면 그래도 가장 안정되고, 세계 곳곳에 세워진 교회들을 살피고 도울 수 있는 재력이 있어야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교회들은 어려울지라도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 만큼은 부흥하고 축복을 받아야 은혜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히려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다른 지역 교회들은 큰 문제가 없는데 예루살렘 교회만 심한 기근을 겪은 것은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책망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이로 인하여 고린도와 마게도냐, 갈라디아와 로마 교회 등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헌금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예루살렘 교회는 세계 모든 교회의 모교회라는 사실이 확고해졌습니다. 그리고 세계 모든 교회는 주 안에서 하나라는 개념이 생겨났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성도가 겪게 되는 고난의 일들이 하나님의 징계가 아니라 은혜의 통로임을 체험하게 되는 것은, 오늘 본문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도 늘 경험하는 일입니다. 예기치 못한 고난의 일을 통해 평소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와 사랑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는 동기가 되고,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는 신앙의 성장이 이루게 됩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같이 가난 속에서도 성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더 풍요함을 경험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에게 다가오는 억울한 일들과 고난의 일들은,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의 한 방편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자기에게 오는 시련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시련으로 인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무조건 그 시련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해서도 안 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고난의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그것을 없애 달라고 간구하는 대신 그러한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도 고난의 일 앞에서 이 같은 믿음의 자세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 고난이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임을 믿고, 고난 가운데서도 인내하며 감사하며 믿음을 지키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29-30절 함께 읽습니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기근으로 고통당하는 형제들을 돕기 위한 부조를 하되 각각 자기의 힘대로 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헌신의 원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선행을 베풀 때 각기 자신이 가진 능력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동일하게 내면 그것이 공평이고, 누구 한 사람이 많이 내면 그가 많이 헌신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많은 헌금을 한 사람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헌금을 많이 드리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서 최선의 것을 드릴 때 그것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헌신이며 헌금의 원리에도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이에 대하여 강조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1장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 마침 헌금함 앞에서 헌금하는 사람들을 지켜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 부자들은 사람들에게 보라는 듯이 큰 금액의 헌금을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를 지켜보면서 주눅이 들었습니다. 그때, 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δύο λεπτόν’을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렙돈은 ‘작다’는 뜻으로 당시 화폐의 최소단위로 구리동전이었습니다. 당시 참새 두 마리의 값이 ‘한 앗사리온 ἀσσάριον’이었는데, 두 렙돈은 그것의 1/4 금액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두 렙돈은 매우 적은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보시고 “어느 부자보다 이 여인이 많이 넣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부자들은 많은 가운데 지극히 일부를 드렸지만, 과부는 없는 가운데 그 모든 것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헌신할 때에는 반드시 이 ‘힘대로’의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힘이 없는데도 자기 체면이나 순간적인 감정에 이끌려 힘에 지나치게 헌금하는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반대로 드릴 여력이 있는데도 아까운 마음에 인색하게 드리면 그것 역시 우리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지 않습니다.
구약시대에도 부자의 경우에는 염소나 어린 양으로 제사드릴 수 있도록 하셨지만, 가난한 사람은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로 제사드릴 수 있도록 규정했습니다(레 5:7). 이것은 하나님은 무조건 많이 내는 자를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심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무조건 많이 내는 자를 칭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기의 능력에 따라 정성껏 드리는 헌금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교회에 대한 봉사나 헌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아 너무 지나치지 않게, 또 부족하지도 않게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봉헌하고 교회에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난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그런데도 성도에게 헌금을 하라고 명하신 것은 복을 주실 명분을 얻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난한 사람을 돕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그 선행을 통해 마음껏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이를 믿고 정직한 봉헌에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지금 이 시대에 선지자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상고하며 그 뜻대로 살기를 힘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임을 기억하며, 회개하며 주 앞에 섭니다. 저희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이 시대의 선지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하나님께 드릴 때 과분하게 또는 인색함으로 드리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참된 헌신을 기쁨으로 드리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지난 시간에 우리는 ‘고난 중에도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부터 시작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박해를 피해 이방 땅으로 흩어진 성도들이 좌절하고 실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을 굳게 하고 복음을 전함으로써 로마 제국의 3대 도시인 안디옥에 이방인 중심의 교회가 세워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에 대하여 상고했습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사울의 헌신으로 크게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부흥한 안디옥 교회가 큰 흉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준 아름다운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기독교 공동체의 본질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먼저, 27절 함께 읽습니다.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안디옥 교회가 부흥했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에 있던 선지자들이 안디옥을 방문했습니다. 선지자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인 구약시대에 많이 활동했는데, 그들은 꿈이나 환상을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아모스 3:7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라고 말씀하고 있고, 호세아 12:10에는 "내가 여러 선지자에게 말하였고 이상을 많이 보였으며 선지자들을 통하여 비유를 베풀었노라"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선지자들은 하나님과 늘 교제하며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세상에 전하는 전령과도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은 미래를 점치거나 앞날을 예언하는 일보다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백성들에게 전하고, 타락한 백성들을 일깨워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도록 경고하며, 회개와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선지자를 히브리어로 ‘나비 נָבִיא’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문자적인 뜻은 ‘입’입니다. 이러한 선지자라는 이름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를 ‘더하거나 빼지 않고 주신 말씀을 그대로’ 전해야 하는 그들의 사명을 강조하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모세를 선지자로 소개하고 있지만(신 18:18), 정식적인 선지자로서의 직무는 사무엘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을 비롯한 16명의 선지자들이 기록한 17권의 하나님의 계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도 구약의 선지자와 같은 사명을 감당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세례 요한과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가보, 그리고 13:1에 보시면 바나바와 바울도 선지자입니다. 15:32에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입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도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2:28과 에베소서 4:11에 교회에서의 직분의 종류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에 선지자의 직분이 소개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선지자 중의 선지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모두가 하나님의 계시를 그대로 우리에게 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이후 신약성경이 기록된 후에는 구약에서의 선지자로서의 직책은 더이상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계시가 완성되었고, 그것을 기록하고 해석한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본문을 비롯한 신약성경 곳곳에 선지자들이 등장하는 것은 당시에는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에 의해 신약성경 27권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목사는 자기가 선지자라고 하는데, 목사는 구약시대의 선지자와 같은 직분이 아닙니다. 목사는 새로운 계시를 받아 전하는 직분이 아니라, ‘완성된 계시인 성경’을 전하고 가르치는 직분입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계시를 받던 구약의 선지자와는 달리 이미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성령의 조명을 받아 해석하고 전하는 직분입니다. 선지자적인 역할은 하지만 구약의 선지자들과는 전혀 다른 직분입니다. 예배를 집례하고 교회를 섬긴다는 점에서 제사장의 직분과 성도들을 가르친다는 점에서 교사로서의 직분이 더 주된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선지자라면서 성경에 기록된 말씀 이외의 것을 예언하는 자들은 모두가 다 이단들입니다. 실제로 2천여 년 교회의 역사에는 수많은 이단들이 등장했고, 지금 이 시대에도 수많은 이단들이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지난 통계를 기준으로 추산을 하면, 2025년 현재에도 전 세계적으로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예수 그리스도 또는 유사한 신적 존재라고 주장하고 있고, 우리나라에도 자신을 ‘재림 예수’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50명이 넘는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자처하는 사람도 20여 명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들을 무엇으로 분별할 수 있습니까?
성경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워야 하는 것은 바로 이에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이단의 미혹에 쉽게 넘어가게 됩니다.
일례로, 아이들이 집에 있는 몸에 이롭고 맛있는 음식보다 길거리에서 파는 불량식품을 더 좋아하는 것은, 그것들이 엄마가 만들어 주는 음식보다 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도 이단들의 미혹도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들의 탐욕을 채워주는 거짓말을 더한 것이기에, 듣는 사람은 누구라도 미혹 당하기가 쉽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누구든지 고난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단들은 예수님께서 모든 고난을 다 졌으므로 우리는 누리기만 하면 된다고 미혹합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는데, 이단들은 그러한 자들은 상대도 하지 말고, 심지어 자기의 믿음을 반대하면 부모 가족이라도 버리고 교회에만 충성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이러한 이단의 미혹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우리의 가족, 친구, 이웃이 이단에 미혹되지 않도록 예수님을 믿는 삶이 어떤 삶인지 분명하고 똑똑하게 증거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들이 이단의 미혹에 걸려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품에 안길 수 있게 됩니다. 오늘, 성도로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우리의 가족, 친구, 이웃이 이단의 미혹에 빠지지 않도록 분명한 믿음의 본을 보이기를 결단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28절 함께 읽습니다.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라고 말씀하듯이,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예언하는 사람입니다.
아가보가 “천하에 큰 흉년 들리라”고 예언했는데, 기록에 의하면 실제로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4년간 흉년이 거듭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흉년으로 인해 가장 큰 어려움을 겪은 곳은 예루살렘 교회였습니다. 왜냐하면,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박해로 사도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방 땅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그로 인해 헌금이 매우 적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모든 교회의 ‘모교회’였습니다. 상식적으로 모교회라면 그래도 가장 안정되고, 세계 곳곳에 세워진 교회들을 살피고 도울 수 있는 재력이 있어야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교회들은 어려울지라도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 만큼은 부흥하고 축복을 받아야 은혜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히려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다른 지역 교회들은 큰 문제가 없는데 예루살렘 교회만 심한 기근을 겪은 것은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책망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이로 인하여 고린도와 마게도냐, 갈라디아와 로마 교회 등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헌금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예루살렘 교회는 세계 모든 교회의 모교회라는 사실이 확고해졌습니다. 그리고 세계 모든 교회는 주 안에서 하나라는 개념이 생겨났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성도가 겪게 되는 고난의 일들이 하나님의 징계가 아니라 은혜의 통로임을 체험하게 되는 것은, 오늘 본문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도 늘 경험하는 일입니다. 예기치 못한 고난의 일을 통해 평소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와 사랑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는 동기가 되고,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는 신앙의 성장이 이루게 됩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같이 가난 속에서도 성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더 풍요함을 경험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에게 다가오는 억울한 일들과 고난의 일들은,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의 한 방편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자기에게 오는 시련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시련으로 인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무조건 그 시련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해서도 안 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고난의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그것을 없애 달라고 간구하는 대신 그러한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도 고난의 일 앞에서 이 같은 믿음의 자세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 고난이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임을 믿고, 고난 가운데서도 인내하며 감사하며 믿음을 지키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29-30절 함께 읽습니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기근으로 고통당하는 형제들을 돕기 위한 부조를 하되 각각 자기의 힘대로 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헌신의 원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선행을 베풀 때 각기 자신이 가진 능력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동일하게 내면 그것이 공평이고, 누구 한 사람이 많이 내면 그가 많이 헌신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많은 헌금을 한 사람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헌금을 많이 드리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서 최선의 것을 드릴 때 그것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헌신이며 헌금의 원리에도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이에 대하여 강조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1장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 마침 헌금함 앞에서 헌금하는 사람들을 지켜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 부자들은 사람들에게 보라는 듯이 큰 금액의 헌금을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를 지켜보면서 주눅이 들었습니다. 그때, 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δύο λεπτόν’을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렙돈은 ‘작다’는 뜻으로 당시 화폐의 최소단위로 구리동전이었습니다. 당시 참새 두 마리의 값이 ‘한 앗사리온 ἀσσάριον’이었는데, 두 렙돈은 그것의 1/4 금액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두 렙돈은 매우 적은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보시고 “어느 부자보다 이 여인이 많이 넣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부자들은 많은 가운데 지극히 일부를 드렸지만, 과부는 없는 가운데 그 모든 것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헌신할 때에는 반드시 이 ‘힘대로’의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힘이 없는데도 자기 체면이나 순간적인 감정에 이끌려 힘에 지나치게 헌금하는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반대로 드릴 여력이 있는데도 아까운 마음에 인색하게 드리면 그것 역시 우리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지 않습니다.
구약시대에도 부자의 경우에는 염소나 어린 양으로 제사드릴 수 있도록 하셨지만, 가난한 사람은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로 제사드릴 수 있도록 규정했습니다(레 5:7). 이것은 하나님은 무조건 많이 내는 자를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심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무조건 많이 내는 자를 칭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기의 능력에 따라 정성껏 드리는 헌금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교회에 대한 봉사나 헌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아 너무 지나치지 않게, 또 부족하지도 않게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봉헌하고 교회에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난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그런데도 성도에게 헌금을 하라고 명하신 것은 복을 주실 명분을 얻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난한 사람을 돕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그 선행을 통해 마음껏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이를 믿고 정직한 봉헌에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지금 이 시대에 선지자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상고하며 그 뜻대로 살기를 힘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임을 기억하며, 회개하며 주 앞에 섭니다. 저희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이 시대의 선지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하나님께 드릴 때 과분하게 또는 인색함으로 드리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참된 헌신을 기쁨으로 드리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