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여러분, ‘호사다마’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성공이나 기쁨 뒤에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이 따를 수 있음을 경계하는 사자성어입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말씀과 기도로, 또 불같은 성령의 역사로 큰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성도들이 많아지고 유대인들조차 성도들과 교회를 칭송했습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모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예루살렘 초대교회에 갑자기 큰 환란이 닥쳤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복음을 전하다가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순교를 당하고, 이를 기점으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무자비한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성도들은 "무력에 무력으로 맞서지 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박해를 피해 뿔뿔이 흩어져야 했고(마 10:23),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존립조차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교회의 위기는 오히려 절망의 자리에서 새로운 희망을 품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흩어진 성도들은 좌절과 슬픔으로 주저앉지 않고, 오히려 가는 곳마다 복음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방인 선교’의 중심지가 되는 안디옥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1. 먼저, 19절 함께 읽습니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여기에서 ‘흩어지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디아스페이로 διασπείρω’라고 하는데, ‘흩어 뿌리다, 널리 퍼뜨리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디아스포라 유대인’ 이라는 말도 단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디아스포라는 ‘흩어 뿌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앗수르와 바벨론을 통해 세계 곳곳으로 흩으셨듯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 또한 유대교의 박해를 통해 세계 곳곳으로 흩으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초대교회 성도들을 흩으신 것은, 그들이 죄를 범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든 박해를 피해서 타국으로 흩어진 성도들은 매우 큰 고통을 받았을 것입니다. 자기 의지가 아니라 대적들의 박해 때문에 삶의 기반을 포기하고 난민처럼 타향으로 피신하여 살아가는 것은 그 자체가 고통이고, 괴로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 잘못 때문이라면 그래도 어떻게든 견딜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잘못한 것이 없었습니다. 단지 순전한 마음으로 예수를 믿고, 착하고 정직하게 산다는 이유로 이러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니 당시 성도들은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그런데 이들을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들의 발길이 닫는 곳마다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특히, 안디옥은 당시 로마 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는데, 그곳에 ‘세계 최초의 이방인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는 아시아와 유럽 대륙은 물론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하는 선교본부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소아시아와 유럽의 교회 대부분을 안디옥 교회가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놀라운 일은, 자발적인 결단과 용기로 복음을 전한 성도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환난을 피해 어쩔 수 없이 흩어진’ 성도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지만, 성도가 당해야 하는 고난은 억울한 면이 참으로 많습니다. 또, 그 고난이 주는 고통이 상상을 초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어떠하든지, 오늘 본문에서처럼 성도가 겪는 모든 고난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받는 고난 중에 무의미한 것은 없습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분명한 하나님의 크신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은 성도 개인을 위한 것일 수도 있고,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 중에 있는 분 계십니까? 억울한 환난을 당하고 있는 분 계십니까? 그것은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고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시면 반드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그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계획의 중심에 서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러한 믿음의 비밀을 받아들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20-21절 함께 읽습니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헬라인에게 주 예수를 전파’했다고 말씀하는데, 당시 헬라인들은 ‘헬라철학’이 상징하듯이 자신들의 지식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헬라어는 세계 공용어였고 신약성경도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신화’가 유명하듯이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수많은 우상들을 섬겼습니다.
그러한 그들이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이 함께하시매’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처럼, 아무리 불가능한 일이라도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시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고전 13:7, 빌 4:13, 딤후 2:10).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9:26에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19:26에 예수님께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일도 능히 다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9:23에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의 능력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앞에 놓여 있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의지해 모든 일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시면 반드시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보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여러분들이 바라는 것을 눈으로 보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히 11:1). 그것이 고난이든 불행이든 모든 상황 속에서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빌 4:13). 세상에는 안 되는 일은 없습니다. 다만 믿음이 없을 뿐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자기 죄를 하나님께 낱낱이 고백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결단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오늘, 믿음으로 하나님의 손이 함께하시는 기적을 이루기를 결단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22-24절 함께 읽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4장에 등장했던 바나바가 다시 등장합니다. 바나바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밭을 팔아 교회에 헌금한 헌신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처럼 '위로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24절에 바나바를 가리켜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소개하는데, 여기에서 ‘착하다 ἀγαθός’라는 말은 성품이 온화하다는 의미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고 공동체를 세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유대인이었음에도 이방인들이 구원받는 것에 대하여 아무런 편견 없이 받아들일 만큼 인격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훌륭한 인격이 결정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25절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그는 안디옥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자 자기 혼자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교만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겸손하게 동역자를 찾았습니다. 그것도 고향 다소에 가 있던 사울을 직접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목회하는 안디옥 교회로 초청하여 그와 함께 동역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울은 회심한 지 얼마 안 된 초신자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바나바는 초대교회의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교회의 목회자로 파송할 만큼 성도들로부터 인정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두 사람의 동역은 균형이 맞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바나바는 직접 사울을 찾아가 그를 동역자로 초빙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사울은 박해자의 멍에를 벗고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일 이러한 바나바의 배려가 없었다면 사울이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고 해도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바나바는 재능에 있어서는 사울에게 못미치는 인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품은 참으로 큰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직접적으로는 위대한 업적은 남기지 못했지만, 그러나 큰 인품으로 ‘사도 바울’로 불리우게 된 사울과 같은 사역자를 발탁함으로써 복음 전도에 큰 위업을 남겼습니다. 또한, 그는 마가와 같은 실패의 사람을 용납하여 돌봄으로, 그를 위대한 사역자로 거듭나게 했습니다. 마가는 성경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을 기록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성도는 재능만으로 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큰 인격으로 감화를 주어 사람을 변모시키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어떤 면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것 이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재능은 없어도 되지만 인격은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격언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큰 인격의 사람이 되려고 하기보다는 지식과 재능과 돈 많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모든 관심과 교육의 초점을 지식과 재능과 돈을 소유하는 것에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애굽 왕궁에서 모든 학문과 무술을 40년간 배운 모세도 광야의 훈련을 거쳐 위대한 인격자로 거듭난 후에야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재능 있고 돈 많은 사람보다는 인격이 큰 사람으로 거듭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특히, 26절에는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매우 인상 깊은 말씀이 있습니다. 함께 읽습니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이름을 붙인 것은 안디옥교회 성도들 스스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의 이방인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이방인이었고, 예수를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를 믿는 성도로서의 분명한 삶을 살았기에 그러한 별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분명한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안디옥 교회 성도들을 본받아,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를 통해, 이 시대의 안디옥 교회를 세우는 복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과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고 인내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무리 불가능한 일이라도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시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고난 중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게 하여 주옵소서. 안디옥 교회 성도들처럼 분명한 믿음의 삶을 살므로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여러분, ‘호사다마’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성공이나 기쁨 뒤에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이 따를 수 있음을 경계하는 사자성어입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말씀과 기도로, 또 불같은 성령의 역사로 큰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성도들이 많아지고 유대인들조차 성도들과 교회를 칭송했습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모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예루살렘 초대교회에 갑자기 큰 환란이 닥쳤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복음을 전하다가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순교를 당하고, 이를 기점으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무자비한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성도들은 "무력에 무력으로 맞서지 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박해를 피해 뿔뿔이 흩어져야 했고(마 10:23),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존립조차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교회의 위기는 오히려 절망의 자리에서 새로운 희망을 품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흩어진 성도들은 좌절과 슬픔으로 주저앉지 않고, 오히려 가는 곳마다 복음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방인 선교’의 중심지가 되는 안디옥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1. 먼저, 19절 함께 읽습니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여기에서 ‘흩어지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디아스페이로 διασπείρω’라고 하는데, ‘흩어 뿌리다, 널리 퍼뜨리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디아스포라 유대인’ 이라는 말도 단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디아스포라는 ‘흩어 뿌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앗수르와 바벨론을 통해 세계 곳곳으로 흩으셨듯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 또한 유대교의 박해를 통해 세계 곳곳으로 흩으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초대교회 성도들을 흩으신 것은, 그들이 죄를 범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든 박해를 피해서 타국으로 흩어진 성도들은 매우 큰 고통을 받았을 것입니다. 자기 의지가 아니라 대적들의 박해 때문에 삶의 기반을 포기하고 난민처럼 타향으로 피신하여 살아가는 것은 그 자체가 고통이고, 괴로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 잘못 때문이라면 그래도 어떻게든 견딜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잘못한 것이 없었습니다. 단지 순전한 마음으로 예수를 믿고, 착하고 정직하게 산다는 이유로 이러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니 당시 성도들은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그런데 이들을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들의 발길이 닫는 곳마다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특히, 안디옥은 당시 로마 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는데, 그곳에 ‘세계 최초의 이방인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는 아시아와 유럽 대륙은 물론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하는 선교본부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소아시아와 유럽의 교회 대부분을 안디옥 교회가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놀라운 일은, 자발적인 결단과 용기로 복음을 전한 성도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환난을 피해 어쩔 수 없이 흩어진’ 성도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지만, 성도가 당해야 하는 고난은 억울한 면이 참으로 많습니다. 또, 그 고난이 주는 고통이 상상을 초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어떠하든지, 오늘 본문에서처럼 성도가 겪는 모든 고난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받는 고난 중에 무의미한 것은 없습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분명한 하나님의 크신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은 성도 개인을 위한 것일 수도 있고,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 중에 있는 분 계십니까? 억울한 환난을 당하고 있는 분 계십니까? 그것은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고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시면 반드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그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계획의 중심에 서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러한 믿음의 비밀을 받아들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20-21절 함께 읽습니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헬라인에게 주 예수를 전파’했다고 말씀하는데, 당시 헬라인들은 ‘헬라철학’이 상징하듯이 자신들의 지식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헬라어는 세계 공용어였고 신약성경도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신화’가 유명하듯이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수많은 우상들을 섬겼습니다.
그러한 그들이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이 함께하시매’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처럼, 아무리 불가능한 일이라도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시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고전 13:7, 빌 4:13, 딤후 2:10).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9:26에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19:26에 예수님께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일도 능히 다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9:23에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의 능력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앞에 놓여 있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의지해 모든 일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시면 반드시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보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여러분들이 바라는 것을 눈으로 보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히 11:1). 그것이 고난이든 불행이든 모든 상황 속에서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빌 4:13). 세상에는 안 되는 일은 없습니다. 다만 믿음이 없을 뿐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자기 죄를 하나님께 낱낱이 고백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결단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오늘, 믿음으로 하나님의 손이 함께하시는 기적을 이루기를 결단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22-24절 함께 읽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4장에 등장했던 바나바가 다시 등장합니다. 바나바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밭을 팔아 교회에 헌금한 헌신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처럼 '위로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24절에 바나바를 가리켜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소개하는데, 여기에서 ‘착하다 ἀγαθός’라는 말은 성품이 온화하다는 의미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고 공동체를 세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유대인이었음에도 이방인들이 구원받는 것에 대하여 아무런 편견 없이 받아들일 만큼 인격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훌륭한 인격이 결정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25절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그는 안디옥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자 자기 혼자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교만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겸손하게 동역자를 찾았습니다. 그것도 고향 다소에 가 있던 사울을 직접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목회하는 안디옥 교회로 초청하여 그와 함께 동역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울은 회심한 지 얼마 안 된 초신자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바나바는 초대교회의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교회의 목회자로 파송할 만큼 성도들로부터 인정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두 사람의 동역은 균형이 맞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바나바는 직접 사울을 찾아가 그를 동역자로 초빙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사울은 박해자의 멍에를 벗고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일 이러한 바나바의 배려가 없었다면 사울이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고 해도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바나바는 재능에 있어서는 사울에게 못미치는 인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품은 참으로 큰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직접적으로는 위대한 업적은 남기지 못했지만, 그러나 큰 인품으로 ‘사도 바울’로 불리우게 된 사울과 같은 사역자를 발탁함으로써 복음 전도에 큰 위업을 남겼습니다. 또한, 그는 마가와 같은 실패의 사람을 용납하여 돌봄으로, 그를 위대한 사역자로 거듭나게 했습니다. 마가는 성경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을 기록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성도는 재능만으로 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큰 인격으로 감화를 주어 사람을 변모시키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어떤 면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것 이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재능은 없어도 되지만 인격은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격언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큰 인격의 사람이 되려고 하기보다는 지식과 재능과 돈 많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모든 관심과 교육의 초점을 지식과 재능과 돈을 소유하는 것에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애굽 왕궁에서 모든 학문과 무술을 40년간 배운 모세도 광야의 훈련을 거쳐 위대한 인격자로 거듭난 후에야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재능 있고 돈 많은 사람보다는 인격이 큰 사람으로 거듭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특히, 26절에는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매우 인상 깊은 말씀이 있습니다. 함께 읽습니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이름을 붙인 것은 안디옥교회 성도들 스스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의 이방인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이방인이었고, 예수를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를 믿는 성도로서의 분명한 삶을 살았기에 그러한 별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분명한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안디옥 교회 성도들을 본받아,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를 통해, 이 시대의 안디옥 교회를 세우는 복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과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고 인내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무리 불가능한 일이라도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시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고난 중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게 하여 주옵소서. 안디옥 교회 성도들처럼 분명한 믿음의 삶을 살므로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