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3.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4.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5. 이르되 내가 욥바 시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어 내 앞에까지 드리워지거늘
6.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7.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8. 내가 이르되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9.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하더라
10.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11. 마침 세 사람이 내가 유숙한 집 앞에 서 있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12.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13.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14.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오늘 말씀은 주보에 기록된 것처럼 사도행전 51번째 설교 본문입니다. 1년이 52주니까, 다음 주면 사도행전을 시작한 지 1년이 됩니다. 아이가 돌을 지나면 말을 하기 시작하고 걷기도 하는데, 여러분들도 사도행전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10장 말씀과 겹치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내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신 분들은 홈페이지에 기록된 주일 설교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유대인 출신 성도들의 비난 앞에서 취한 베드로의 자세에서 교훈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1-3절 함께 읽습니다.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베드로가 순회전도를 마치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할례자들이 베드로에게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식사를 했다고 비난했습니다. 여기서 ‘할례자’들이란 유대인 성도를 뜻합니다.
사실, 베드로 자신도 10:28에서 고백한 것처럼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을 ‘위법’이라 생각했었기에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증인이 될만한 유대인 성도 여섯 명과 함께 고넬료의 집을 방문했습니다(12절).
그러했기에 순회 전도를 마치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어느 때보다도 성도들이 ‘교회의 수장인 자신이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들어간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믿어주기를 간절히 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새롭게 받았기에 한편으로는 이를 속히 다른 성도들에게 전해주어야지 하는 들뜬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보인 반응은 다른 유대주의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냉정한 것이었습니다. 기독교를 박해하던 유대주의자들이나 할 수 있는 비난을 가장 가까운 성도들이 똑같이 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니 당시 베드로가 얼마나 서운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이라면 누구라도 겪을 수 있는 ‘모순적인 현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함께 하고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성도들이 우리를 믿고 이해하고 격려해 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실상은 그 반대일 경우가 많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반대에 앞서, 믿는 사람이 더 극렬하게 반대하고 비난하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러한 일의 일례로 ‘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욥이 고난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위로하기 위해 욥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욥의 가장 친한 친구’인 그들이 욥의 고난이 계속되자 오히려 욥을 정죄하고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실을 통해, 나를 위로해 줘야 할 신앙의 동료나 친구가 이해와 격려 대신 얼마든지 더 비난할 수도 있음을 기억하라고 교훈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해해 주지 않는 동료 성도들을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그러한 성도들의 모습을 보고 실망하여 신앙의 길과 사명의 길을 포기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가장 친한 성도들의 오해와 비난을 직면해서도 믿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보여준 성도의 바른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다른 동료 성도들의 반대가 있을 수 있음을 충분히 예견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여 슬기롭게 난관을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에게는 어떠한 관계의 어려움이 있습니까? 어떠한 오해와 편견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의 베드로를 통해 교훈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처럼 오해와 편견을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계기’로 삼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더 교훈을 받게 되는 것은, 당시 할례자들이 베드로를 비난하던 때는 베드로가 룻다와 욥바, 그리고 가이사랴로 이어지는 순회 전도의 일정을 마치고 막 돌아온 때였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무려 8년간 중풍병을 앓고 있던 애니야를 치유했습니다. 죽은 다비다를 다시 살렸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베드로와 함께하심을 충분히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인 고넬료를 방문하여 그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 사건은 선교의 장을 바꾸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할례받지 못한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구원받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 확정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구원의 조건으로 믿고 있던 할례가 구원과 무관하다는 것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사실이 진리로 확인된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오히려 예루살렘 성도들은 베드로를 뜨거운 마음으로 영접해야 했습니다. 그의 노고를 치하하며 베드로의 선교 보고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가장 먼저 들려온 말은 베드로에 대한 비난의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가 행한 위대한 일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작 중요한 사실을 빠뜨리고 모든 것 중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만을 확대해서 말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매우 억울했을 것입니다.
물론, 선민의식에 젖어있던 유대인 성도들이 이방인과 교제한 베드로를 비방한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1절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고델료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은 보고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를 무조건 비난하고 나선 것은 결코 정당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비난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억울해 합니까? 분노를 폭발합니까? 아닙니다. 그는 모함하려던 그들의 말에 일체 감정적인 동요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다가 억울하게 받는 고난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그 이전에도 복음을 전하다가 몇 차례나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가 보인 반응을 사도행전 5:41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당시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모함받고 고난받은 것을 억울해 하거나 분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기뻐하면서 감내했습니다. 왜입니까? 이러한 고난은 아무에게나 찾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들과 같이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만 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인내로써 잘 참아낼 때 비로소 하나님의 거룩한 일꾼의 반열에 들어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모함받고 고난받는 것을 억울해 해서는 안 됩니다. 분노해서도 안 됩니다. 도리어 모함받고 고난받는 것을 기뻐했던 믿음의 선배들과 같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고난을 복음을 전하는 통로로 삼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받고 있는 억울한 고난이 있습니까? 베드로처럼 지혜롭게 악을 선으로 갚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4절 이하의 말씀에서, 베드로는 자기를 비난하는 성도들에게 가이사랴에서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자기의 노고에 전혀 관심이 없는 성도들, 일단 정죄와 비난부터 시작하는 성도들…. 이 얼마나 기분이 나쁘고 서운한 순간입니까? 그럼에도 베드로는 기분 나빠하지 않고 자초지종을 차근차근 설명했습니다. 친절하게 그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설명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성숙한 믿음의 모습을 보이자, 18절 함께 읽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결국에는 예루살렘 성도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가 화를 내야 할 순간에 베푸는 친절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데 얼마만큼 큰 힘을 발휘하게 되는지 보게 됩니다.
우리가 친절하다는 것, 온유하다는 것은 단지 우리 성품과 관계된 것 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의와 관련이 깊습니다. 평소 공격적이고 적대적인 성향의 사람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온유하고 친근하게 변화됩니다. 그러하기에 만일, 참기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말을 친절하게 하며 온유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의 의에 가까이 와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예루살렘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고백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생명 얻는 회개’라는 말은 오직 회개하는 자에게만 구원이 주어짐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회개가 영원한 생명을 받는 관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감사가 임하고, 용서와 기쁨이 임하게 됩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의 관문을 통과하고 나면, 용서와 생명과 기쁨의 하나님 나라에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사도행전 3:19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회개를 얼마만큼 해야 할까요?
한 교부가 자기 제자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죽기 하루 전에는 회개하라” 그러자 제자들이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스승님, 자기가 죽을 날을 어떻게 알고 하루 전에 회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교부의 대답은 늘 똑같았다고 합니다. “죽기 하루 전에는 회개하라” 무슨 말입니까? 이 말씀은 언제 죽을지 모르니 늘 회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는 부끄러워하되, 죄를 회개하는 것은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 자체는 별로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늘 마음이 무겁습니다. 용서를 못 받으니 얼굴에 생기가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늘 회개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았으니 자신감이 생깁니다. 얼굴에 생기가 가득하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과 소망이 있으니 늘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이것이야말로 천국을 소유한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부터 매일, 회개의 관문을 통해 소망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를 널리 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구원받은 성도로서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선한 일을 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을 때, 칭찬이 아니라 오히려 애매한 고난을 받을 수도 있음을 가르쳐 주시니 감사하옵나이다. 그러할 때 베드로처럼 지혜롭게 상대방을 배려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대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화를 내야 할 순간에 베푸는 친절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게 됨을 늘 가슴 깊이 새기고 행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3.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4.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5. 이르되 내가 욥바 시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어 내 앞에까지 드리워지거늘
6.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7.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8. 내가 이르되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9.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하더라
10.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11. 마침 세 사람이 내가 유숙한 집 앞에 서 있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12.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13.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14.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오늘 말씀은 주보에 기록된 것처럼 사도행전 51번째 설교 본문입니다. 1년이 52주니까, 다음 주면 사도행전을 시작한 지 1년이 됩니다. 아이가 돌을 지나면 말을 하기 시작하고 걷기도 하는데, 여러분들도 사도행전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10장 말씀과 겹치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내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신 분들은 홈페이지에 기록된 주일 설교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유대인 출신 성도들의 비난 앞에서 취한 베드로의 자세에서 교훈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1-3절 함께 읽습니다.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베드로가 순회전도를 마치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할례자들이 베드로에게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식사를 했다고 비난했습니다. 여기서 ‘할례자’들이란 유대인 성도를 뜻합니다.
사실, 베드로 자신도 10:28에서 고백한 것처럼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을 ‘위법’이라 생각했었기에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증인이 될만한 유대인 성도 여섯 명과 함께 고넬료의 집을 방문했습니다(12절).
그러했기에 순회 전도를 마치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어느 때보다도 성도들이 ‘교회의 수장인 자신이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들어간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믿어주기를 간절히 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새롭게 받았기에 한편으로는 이를 속히 다른 성도들에게 전해주어야지 하는 들뜬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보인 반응은 다른 유대주의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냉정한 것이었습니다. 기독교를 박해하던 유대주의자들이나 할 수 있는 비난을 가장 가까운 성도들이 똑같이 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니 당시 베드로가 얼마나 서운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이라면 누구라도 겪을 수 있는 ‘모순적인 현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함께 하고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성도들이 우리를 믿고 이해하고 격려해 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실상은 그 반대일 경우가 많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반대에 앞서, 믿는 사람이 더 극렬하게 반대하고 비난하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러한 일의 일례로 ‘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욥이 고난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위로하기 위해 욥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욥의 가장 친한 친구’인 그들이 욥의 고난이 계속되자 오히려 욥을 정죄하고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실을 통해, 나를 위로해 줘야 할 신앙의 동료나 친구가 이해와 격려 대신 얼마든지 더 비난할 수도 있음을 기억하라고 교훈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해해 주지 않는 동료 성도들을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그러한 성도들의 모습을 보고 실망하여 신앙의 길과 사명의 길을 포기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가장 친한 성도들의 오해와 비난을 직면해서도 믿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보여준 성도의 바른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다른 동료 성도들의 반대가 있을 수 있음을 충분히 예견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여 슬기롭게 난관을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에게는 어떠한 관계의 어려움이 있습니까? 어떠한 오해와 편견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의 베드로를 통해 교훈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처럼 오해와 편견을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계기’로 삼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더 교훈을 받게 되는 것은, 당시 할례자들이 베드로를 비난하던 때는 베드로가 룻다와 욥바, 그리고 가이사랴로 이어지는 순회 전도의 일정을 마치고 막 돌아온 때였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무려 8년간 중풍병을 앓고 있던 애니야를 치유했습니다. 죽은 다비다를 다시 살렸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베드로와 함께하심을 충분히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인 고넬료를 방문하여 그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 사건은 선교의 장을 바꾸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할례받지 못한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구원받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 확정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구원의 조건으로 믿고 있던 할례가 구원과 무관하다는 것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사실이 진리로 확인된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오히려 예루살렘 성도들은 베드로를 뜨거운 마음으로 영접해야 했습니다. 그의 노고를 치하하며 베드로의 선교 보고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가장 먼저 들려온 말은 베드로에 대한 비난의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가 행한 위대한 일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작 중요한 사실을 빠뜨리고 모든 것 중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만을 확대해서 말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매우 억울했을 것입니다.
물론, 선민의식에 젖어있던 유대인 성도들이 이방인과 교제한 베드로를 비방한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1절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고델료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은 보고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를 무조건 비난하고 나선 것은 결코 정당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비난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억울해 합니까? 분노를 폭발합니까? 아닙니다. 그는 모함하려던 그들의 말에 일체 감정적인 동요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다가 억울하게 받는 고난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그 이전에도 복음을 전하다가 몇 차례나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가 보인 반응을 사도행전 5:41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당시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모함받고 고난받은 것을 억울해 하거나 분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기뻐하면서 감내했습니다. 왜입니까? 이러한 고난은 아무에게나 찾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들과 같이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만 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인내로써 잘 참아낼 때 비로소 하나님의 거룩한 일꾼의 반열에 들어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모함받고 고난받는 것을 억울해 해서는 안 됩니다. 분노해서도 안 됩니다. 도리어 모함받고 고난받는 것을 기뻐했던 믿음의 선배들과 같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고난을 복음을 전하는 통로로 삼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받고 있는 억울한 고난이 있습니까? 베드로처럼 지혜롭게 악을 선으로 갚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4절 이하의 말씀에서, 베드로는 자기를 비난하는 성도들에게 가이사랴에서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자기의 노고에 전혀 관심이 없는 성도들, 일단 정죄와 비난부터 시작하는 성도들…. 이 얼마나 기분이 나쁘고 서운한 순간입니까? 그럼에도 베드로는 기분 나빠하지 않고 자초지종을 차근차근 설명했습니다. 친절하게 그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설명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성숙한 믿음의 모습을 보이자, 18절 함께 읽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결국에는 예루살렘 성도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가 화를 내야 할 순간에 베푸는 친절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데 얼마만큼 큰 힘을 발휘하게 되는지 보게 됩니다.
우리가 친절하다는 것, 온유하다는 것은 단지 우리 성품과 관계된 것 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의와 관련이 깊습니다. 평소 공격적이고 적대적인 성향의 사람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온유하고 친근하게 변화됩니다. 그러하기에 만일, 참기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말을 친절하게 하며 온유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의 의에 가까이 와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예루살렘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고백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생명 얻는 회개’라는 말은 오직 회개하는 자에게만 구원이 주어짐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회개가 영원한 생명을 받는 관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감사가 임하고, 용서와 기쁨이 임하게 됩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의 관문을 통과하고 나면, 용서와 생명과 기쁨의 하나님 나라에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사도행전 3:19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회개를 얼마만큼 해야 할까요?
한 교부가 자기 제자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죽기 하루 전에는 회개하라” 그러자 제자들이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스승님, 자기가 죽을 날을 어떻게 알고 하루 전에 회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교부의 대답은 늘 똑같았다고 합니다. “죽기 하루 전에는 회개하라” 무슨 말입니까? 이 말씀은 언제 죽을지 모르니 늘 회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는 부끄러워하되, 죄를 회개하는 것은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 자체는 별로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늘 마음이 무겁습니다. 용서를 못 받으니 얼굴에 생기가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늘 회개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았으니 자신감이 생깁니다. 얼굴에 생기가 가득하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과 소망이 있으니 늘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이것이야말로 천국을 소유한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부터 매일, 회개의 관문을 통해 소망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를 널리 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구원받은 성도로서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선한 일을 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을 때, 칭찬이 아니라 오히려 애매한 고난을 받을 수도 있음을 가르쳐 주시니 감사하옵나이다. 그러할 때 베드로처럼 지혜롭게 상대방을 배려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대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화를 내야 할 순간에 베푸는 친절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게 됨을 늘 가슴 깊이 새기고 행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