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43. 죽은 다비다를 다시 살린 베드로 (행 9:36-43)

우인택 목사
2025-05-18
조회수 878

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38.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39.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42.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43.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1983년부터 우리교단은 청년세대의 위상을 높이고 기독 청년들이 시대적·선교사적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5월 셋째 주일을 ‘청년주일’로 지정했습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청년들은 그 시대의 아픔을 대변하고 교회의 발전에 기여하며 새로움의 주역을 담당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처음 선교사로 온 사람들도 거의가 다 청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청년들은 여러 가지 문제와 한계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교회 내 청년들은 점점 더 감소하고 있고, 청년들의 연합 활동도 크게 위축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업의 채용인원 축소와 경제 활동의 감소로 인해 사회속에서 청년들이 설 자리가 점점 더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청년주일을 맞이하여 현실의 장벽에 부딪혀 상처 입고, 방황하고, 길을 잃은 청년들에게 기도와 물질로써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우리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여러분 모두 힘써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임사체험’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임사체험이란 임상적으로 죽음을 판정받았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다시 살아난 사람이 그때 겪은 체험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리고 임사체험을 경험한 대부분의 사람은 이전에 종교적 믿음이라든가 어떤 영적인 경험이 전혀 없었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그들의 증언은 자신의 임사체험이 종교적인 상상의 산물이 아님을 강조하고 싶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과학자들은 이 현상을 뇌의 생리적인 반응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하지만, 여전히 완전히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임사체험 연구는 1975년 미국의 레이몬드 무디 교수가 ‘삶 이후의 삶 Life After Life’이라는 책을 간행한 이후 연구가 활발해 지고 있고, 국제임사체험학회까지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임사체험자의 증언은 조금씩 차이를 보이지만, 대체로 3가지 공통적인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육신으로부터 영혼이 벗어나 자기의 육신을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체험을 했다고 합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육신과 영혼의 분리인 것임을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칠흑처럼 어두운 터널 같은 곳을 통과한 후 밝은 빛이 있는 광장에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셋째는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순식간에 파노라마처럼 되돌아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을 한 그들은 대부분 삶이 크게 바뀌었다고 합니다. 선한 삶, 이웃을 돕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성경의 가르침과 비슷한 점이 있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사후세계와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지만, 그들이 믿지 않는다고 사후세계가 없어지고 하나님의 심판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다비다에 대한 말씀을 상고하며, 장차 여러분들이 소유하게 될 하나님의 나라를 더욱 확신하며 소망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먼저, 36-37절 함께 읽습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욥바’는 예루살렘에서 50km 정도 떨어진 항구도시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 레바논에서 벌목한 목재를 배로 실어 나른 곳이 욥바였고, 요나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려고 도망할 때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탄 곳도 욥바입니다(대하 2:11-16, 욘 1:3).

욥바에 선행과 구제를 많이 함으로 사람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던 여제자 ‘다비다 Ταβιθά 사슴’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녀가 그만 병이 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37절에 ‘죽은 그녀의 시체를 씻었다’라는 것은 그녀가 ‘가사’상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완전히 ‘사망’했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함께 있던 제자들은 다비다를 장사하지 않고 38절 함께 읽습니다.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그들이 이처럼 베드로에게 ‘지체하지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한 것은 베드로가 죽은 다비다를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죽은 사람을 살린다는 소망을 갖는다는 것은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매우 허황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과 나인 성 과부의 아들, 그리고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중풍병자를 치유한 베드로가 죽은 다비다도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갖고 그에게 속히 사람을 보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러한 믿음의 소망으로 인해 죽은 다비다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소망은 하나님의 기적을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일꾼들에게 믿음의 소망을 주심으로 그들을 통해 성령의 역사를 이루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히브리서 11:1-2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자비와 은혜를 바라는 마음, 곧 믿음의 소망을 주시고, 그 믿음의 소망을 힘입어 기적을 일으키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소망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기적의 마중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운 여름날에 펌프에 마중물을 넣고 펌프질을 하면 곧 시원한 냉수를 마실 수 있게 되듯이, 우리가 믿음의 소망을 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소원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그에 합당한 것으로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믿음의 소망을 두고, 그 일을 이루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여러분의 간절한 소원을 아뢰시기 바랍니다. 그를 통해 기적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39절 함께 읽습니다.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베드로가 욥바에 도착해서 다비다가 누워 있는 다락방에 올라갔을 때, 그곳에 모인 과부들이 울면서 그녀가 살아있을 때 자신들에게 지어준 속옷과 겉옷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와 같은 과부들의 행동은 우리에게 다비다의 삶을 선명하게 보게 합니다. 다비다는 많은 사람이 그녀의 죽음을 진심으로 아파하며 애도할 만큼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산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여기에서 ‘죽음이 가진 또 다른 한 면’을 보게 됩니다. 죽음은 한 인간이 이 땅에서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가장 정확한 평가를 내리는 성적표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어떠한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서 죽음의 의미가 상반되게 나타나게 됩니다.

만일, 다비다처럼 이웃에게 은혜와 덕을 끼치며 선한 삶을 살았다면, 그 사람의 죽음은 많은 사람을 애통하게 만드는 슬픈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만 끼치는 삶을 살았다면, 그 사람의 죽음은 많은 사람을 환호하게 만드는 ‘잘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의 일례로,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가 죽었을 때, 백성들은 무려 40일 동안이나 진심으로 슬퍼하며 애도했습니다. 반면, 북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죽었을 때, 백성들은 슬퍼하기는커녕 누구 하나 그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시체는 개들에 의해 유린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잠언 11:10에서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의인에게는 형통과 장수가 있기를 바라고, 악인에는 패망과 죽음이 찾아오기를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은 과연 여러분의 생이 끝났을 때 어떠한 성적표를 받기 원하십니까? 죽어도 애통해할 자가 없는, 오히려 모든 사람이 그 죽음을 기뻐하는 낙제 성적표를 받으시기 원하십니까? 아니면, 모든 사람이 안타까워하며 애통해하는,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이후에도 그리워하는 좋은 성적표를 받기 원하십니까? 당연히 모든 사람으로 여러분의 죽음을 애통해하게 하는 좋은 성적표를 받기 원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다비다처럼 선행과 구제하는 의로운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고 사랑을 베푸는 아름다운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과 모든 사람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인생의 성적표를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40절 함께 읽습니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가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혼자 기도한 것은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 다른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시기 위해 그리하셨던 것을 본받은 것으로 보입니다(막 5:37-42). 그리고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 “소녀야 일어나라, 달리다굼 ταλιθά κοῦμι” 하셨던 것처럼 베드로도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다비다야 일어나라”하고 말했습니다. “다비아야 일어나라”를 아람어로 표현한다면 “다비다굼 Ταβιθά κοῦμι”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다비다가 이렇게 큰 은혜를 입은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큰 이유는 그녀가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욥바의 성도들이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여 그녀가 다시 살아나기를 바랐으며, 또한 하나님께서도 다비다의 이러한 삶을 기뻐하셨음을 ‘자연의 법칙을 넘어서면서까지’ 그녀를 다시 살리심으로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이웃에게 은혜를 베푼 자들이 받게 됩니다. 자기만 알고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8장에서 악한 관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한 관원이 있었는데, 그 관원은 왕으로부터 도저히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탕감받습니다. 그야말로 말할 수 없는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그는 자기에게 작은 빚을 진 동료가 빚을 갚지 않는다고 멱살을 잡으며 윽박질렀습니다. 빚진 동료가 시간을 조금만 더 주면 반드시 빚을 갚겠다고 사정하며 부탁하는데도 매정하게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곧 왕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악한 관원은 탕감받은 모든 은혜를 다시 다 빼앗기고 자신이 진 모든 빚을 갚기까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은혜를 베풀지 않은 결과로 이미 받은 은혜까지도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참으로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만일,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조건 없이 모든 죄를 탕감받고 구원받은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 곧 우리에게 죄를 지은 자와 주위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지 않고 오직 자기만을 위하여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이상 은혜를 베풀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미 받은 은혜까지도 다시 빼앗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에게 관용을 베풀고 은혜를 끼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직 나만 알고, 내 것만 챙기는 사람이 아니라, 이웃도 생각할 줄 알고 그들을 위하여 희생할 줄도 아는 그런 선한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넘치는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베드로는 룻다와 욥바에서 두 가지 큰 기적을 행했습니다. 중풍병자를 치유하고,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사역을 보는 듯합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믿는 자는 예수님이 하신 것과 같은 능력을 행하게 될 것이라고 요한복음 14:12에서 친히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이 제자들의 믿음과 베드로의 믿음이 합력하여 성취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35절의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과 42절의 온 욥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베드로나 사도들이 행한 기적이 왜 오늘날에는 나타나지 않을까요? 요즘에는 왜 이러한 기적을 보기가 힘들어졌을까요? 그것은 현재는 초대교회 시대처럼 복음과 교회의 급속한 확장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욥바의 성도들과 베드로 같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믿음만 있다면 오늘날에도 기적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그 능력이나 역사하심이 변함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 먼저는 다비다의 믿음과 욥바 성도들의 믿음을 가지시고, 더 나아가 베드로가 가진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를 통해 이웃 사람들을 예수님의 품에 안기는 복된 복음의 일꾼들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베드로가 예루살렘 지역에만 머물러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갈 수 있는 먼 곳까지 나아가 복음을 전한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니 중풍병자가 치유받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저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에 온전히 순종함으로 이웃 사람들을 돕고, 살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복된 복음의 일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성령의 기적으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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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마을금고 / 동탄영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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