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오늘 말씀을 상고하기 전에 지난 본문을 상기하면, 예수님을 대적하던 ‘사울’이 구원받고 복음의 일꾼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선택과 의지와 노력으로 인함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사울뿐만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모든 믿음의 사람들 또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지 않고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일꾼이 된 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16에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스스로의 결단으로 복음의 일꾼이 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복음의 일꾼은 하나님께서 친히 부르십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께서 부르셨기에 구원받았고, 또한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딤후 1:9). 이러한 부르심을 신학적인 용어로 ‘소명’이라고 합니다. 소명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대장입니다. 그래서 소명을 인식하는 성도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왜 부르셨는지, 하나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하는 삶은 어떠한 삶인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또 질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질문을 통해서 얻게 되는 답은 ‘복음의 일꾼’으로서의 삶입니다. 오늘도 사울의 삶을 상고하면서 복음의 일꾼으로 여러분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먼저 23절에 ‘여러 날이 지나매’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여러 날’은 19절의 ‘며칠’과는 다른 표현입니다. ‘충분히 많은 날’을 뜻합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여기에서의 여러 날은 짧은 기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기간을 가리킨다고 보고, 이 기간은 갈라디아서 1:17-18에 기록된 사울이 다메섹을 떠나 아라비아로 가서 지낸 3년의 영적인 훈련 기간을 의미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25절의 ‘그의 제자’라는 표현에서도 사울이 회심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을 짐작하게 됩니다. 회심한 지 며칠밖에 되지 않은 사울에게 어떻게 제자들이 있겠습니까? 제자들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시간이 지났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사울은 15절과 16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복음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선택된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그러하기에 그가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통하여 영적으로 충만해지기 위해 아라비아 사막에 가서 3년 동안 깊은 기도와 영적 체험의 시간을 가진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 누구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한 공부와 훈련과 연단을 받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의 일꾼이 되는 것은 결심과 결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감당할 수 있는 사명입니다.
그러하기에 사울이 가졌던 3년간의 내적 충만의 시간은 우리를 포함한 모든 성도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역을 시작하기에 앞서 반드시 하나님께서 누구신지를 배우는 일과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기회를 충분히 가져야 합니다. 그를 통해 영적으로 충만한 상태가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오늘날 많은 하나님의 일꾼들은 지나치게 외적인 사역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수많은 ‘사역’을 따라다니기에 바빠서 영적으로 충만해질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일은 많이 한 것 같은데 성과가 없습니다. 열심히 헌신한 것 같기는 한데 사역의 기쁨이 없고 열매도 매우 부실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기도해야 할 시간에 깨어 기도하지 않은 제자들이 실패자가 된 것 같이, 자신도 자라지 못하고, 다른 사람도 성장시키지 못한 채, 항상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배인 ‘마틴 루터’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너무나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날마다 세 시간을 기도로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종교개혁이라는 그의 사역의 열매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한 영적인 충만에서 비롯되었음을 고백한 말입니다.
여러분들도 맡겨진 사역을 기쁨으로 감당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역을 감당하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지혜로운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를 통해 영적인 충만을 받아 기쁨으로 복음의 일꾼으로서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그런데 계속해서 본문을 보시면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사울은 회심하여 예수님을 믿은 이후, 그 누구보다도 강하게 복음을 증언함으로써 많은 유대인을 성도가 되게 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사울을 더이상 살려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사울을 죽이려고 공모했습니다. 이로써 예전에는 그 누구보다도 사울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유대인들이 이제는 가장 적대적이고 위험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24절에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사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의 계교는 수포가 되었고, 사울은 목숨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사울을 죽이려던 유대인들의 계교는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통해 예수님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게 하려는 계획을 갖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이상,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치밀하게 계획하고, 아무리 많은 수단을 동원해도 하나님의 계획을 무산시킬 세력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많은 사례를 통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노예로 삼기를 원했지만 하나님께서 보이신 10번의 재앙으로 인해 이스라엘 자손들을 놓아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압 왕 발락은 브올의 아들 발람을 통해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하려고 3번이나 시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민 22-24장). 아각사람 하만은 페르시아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을 몰살시키려고 갖은 수단을 동원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오히려 자신이 죽임을 당했습니다(에 3-9장).
그리고 이러한 성경의 증언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됩니다. 왜냐하면, 비록 이 땅의 모든 일이 겉으로 보기에는 악인의 계교대로 이루어지는 것 같고, 또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회복과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과 모든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악인의 계교가 아무리 기발하고 그럴싸하게 보일지라도 그 계교를 따르거나 동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진리를 따라서 정의롭게 성도로서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이어지는 본문에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이라고 말씀합니다.
사울을 죽이기로 공모한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기 위하여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켰습니다. 그러나 25절 함께 읽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그들의 계교를 알고 있었던 사울의 제자들이 밤중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 아래로 달아 내림으로써 사울은 생명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에게 있어서는 오늘 본문의 죽음의 고비는 그리 특별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후로 일평생 동안 이보다 훨씬 더 위태로운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와 은혜로 그 모든 죽음의 고비들을 넘겼습니다(고후 11:23-27).
그렇다면, 사울이 이처럼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겪으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남들은 한 번도 넘기기 어려운 죽음의 고비를 수차례나 맞닥뜨린 그를 계속하여 구원해 주셨던 것일까요?
그것은 그에게 ‘아직 완수해야 할 사명’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유럽에까지 전해야 하는 사명이 그에게 남아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 모든 위기와 환난 속에서 지키시고 보호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사명을 완수한 후에 로마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순교했습니다.
여러분,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 땅에서 행해야 할 사명이 남아 있는 자들을 그냥 죽도록 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들이 맡겨진 사명을 다 이루기까지 보호하고 지켜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해서 항상 위기에서 구출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야고보 같은 경우에는 헤롯에 의해 일찍 순교를 당했습니다(행 12:2).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이 야고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야고보는 순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린 것입니다. 말하자면 야고보에게는 순교가 일종의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복음의 일꾼에게 아직 사명이 남아 있다면 어떤 순간, 어떤 상황에서도 그를 보호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프리카 선교사 리빙스턴은 “사람은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까지 결코 죽지 않는다”라고 고백하며 아프리카 오지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성공적으로 감당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사명이 남아 있는 한, 그래서 우리가 그 사명을 위하여 살아가는 한 죽음까지도 우리를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오늘, 이 믿음을 붙들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두려움 없이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그 누구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훈련과 연단을 받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또한, 이 땅의 모든 일이 겉으로 보기에는 악인의 계교대로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감을 믿습니다. 사명이 있는 자는 결코 죽지 않음을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사명자로서의 삶을 신실히 살아가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오늘 말씀을 상고하기 전에 지난 본문을 상기하면, 예수님을 대적하던 ‘사울’이 구원받고 복음의 일꾼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선택과 의지와 노력으로 인함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사울뿐만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모든 믿음의 사람들 또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지 않고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일꾼이 된 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16에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스스로의 결단으로 복음의 일꾼이 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복음의 일꾼은 하나님께서 친히 부르십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께서 부르셨기에 구원받았고, 또한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딤후 1:9). 이러한 부르심을 신학적인 용어로 ‘소명’이라고 합니다. 소명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대장입니다. 그래서 소명을 인식하는 성도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왜 부르셨는지, 하나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하는 삶은 어떠한 삶인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또 질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질문을 통해서 얻게 되는 답은 ‘복음의 일꾼’으로서의 삶입니다. 오늘도 사울의 삶을 상고하면서 복음의 일꾼으로 여러분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먼저 23절에 ‘여러 날이 지나매’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여러 날’은 19절의 ‘며칠’과는 다른 표현입니다. ‘충분히 많은 날’을 뜻합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여기에서의 여러 날은 짧은 기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기간을 가리킨다고 보고, 이 기간은 갈라디아서 1:17-18에 기록된 사울이 다메섹을 떠나 아라비아로 가서 지낸 3년의 영적인 훈련 기간을 의미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25절의 ‘그의 제자’라는 표현에서도 사울이 회심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을 짐작하게 됩니다. 회심한 지 며칠밖에 되지 않은 사울에게 어떻게 제자들이 있겠습니까? 제자들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시간이 지났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사울은 15절과 16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복음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선택된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그러하기에 그가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통하여 영적으로 충만해지기 위해 아라비아 사막에 가서 3년 동안 깊은 기도와 영적 체험의 시간을 가진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 누구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한 공부와 훈련과 연단을 받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의 일꾼이 되는 것은 결심과 결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감당할 수 있는 사명입니다.
그러하기에 사울이 가졌던 3년간의 내적 충만의 시간은 우리를 포함한 모든 성도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역을 시작하기에 앞서 반드시 하나님께서 누구신지를 배우는 일과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기회를 충분히 가져야 합니다. 그를 통해 영적으로 충만한 상태가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오늘날 많은 하나님의 일꾼들은 지나치게 외적인 사역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수많은 ‘사역’을 따라다니기에 바빠서 영적으로 충만해질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일은 많이 한 것 같은데 성과가 없습니다. 열심히 헌신한 것 같기는 한데 사역의 기쁨이 없고 열매도 매우 부실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기도해야 할 시간에 깨어 기도하지 않은 제자들이 실패자가 된 것 같이, 자신도 자라지 못하고, 다른 사람도 성장시키지 못한 채, 항상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배인 ‘마틴 루터’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너무나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날마다 세 시간을 기도로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종교개혁이라는 그의 사역의 열매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한 영적인 충만에서 비롯되었음을 고백한 말입니다.
여러분들도 맡겨진 사역을 기쁨으로 감당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역을 감당하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지혜로운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를 통해 영적인 충만을 받아 기쁨으로 복음의 일꾼으로서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그런데 계속해서 본문을 보시면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사울은 회심하여 예수님을 믿은 이후, 그 누구보다도 강하게 복음을 증언함으로써 많은 유대인을 성도가 되게 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사울을 더이상 살려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사울을 죽이려고 공모했습니다. 이로써 예전에는 그 누구보다도 사울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유대인들이 이제는 가장 적대적이고 위험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24절에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사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의 계교는 수포가 되었고, 사울은 목숨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사울을 죽이려던 유대인들의 계교는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통해 예수님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게 하려는 계획을 갖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이상,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치밀하게 계획하고, 아무리 많은 수단을 동원해도 하나님의 계획을 무산시킬 세력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많은 사례를 통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노예로 삼기를 원했지만 하나님께서 보이신 10번의 재앙으로 인해 이스라엘 자손들을 놓아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압 왕 발락은 브올의 아들 발람을 통해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하려고 3번이나 시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민 22-24장). 아각사람 하만은 페르시아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을 몰살시키려고 갖은 수단을 동원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오히려 자신이 죽임을 당했습니다(에 3-9장).
그리고 이러한 성경의 증언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됩니다. 왜냐하면, 비록 이 땅의 모든 일이 겉으로 보기에는 악인의 계교대로 이루어지는 것 같고, 또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회복과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과 모든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악인의 계교가 아무리 기발하고 그럴싸하게 보일지라도 그 계교를 따르거나 동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진리를 따라서 정의롭게 성도로서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이어지는 본문에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이라고 말씀합니다.
사울을 죽이기로 공모한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기 위하여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켰습니다. 그러나 25절 함께 읽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그들의 계교를 알고 있었던 사울의 제자들이 밤중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 아래로 달아 내림으로써 사울은 생명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에게 있어서는 오늘 본문의 죽음의 고비는 그리 특별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후로 일평생 동안 이보다 훨씬 더 위태로운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와 은혜로 그 모든 죽음의 고비들을 넘겼습니다(고후 11:23-27).
그렇다면, 사울이 이처럼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겪으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남들은 한 번도 넘기기 어려운 죽음의 고비를 수차례나 맞닥뜨린 그를 계속하여 구원해 주셨던 것일까요?
그것은 그에게 ‘아직 완수해야 할 사명’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유럽에까지 전해야 하는 사명이 그에게 남아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 모든 위기와 환난 속에서 지키시고 보호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사명을 완수한 후에 로마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순교했습니다.
여러분,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 땅에서 행해야 할 사명이 남아 있는 자들을 그냥 죽도록 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들이 맡겨진 사명을 다 이루기까지 보호하고 지켜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해서 항상 위기에서 구출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야고보 같은 경우에는 헤롯에 의해 일찍 순교를 당했습니다(행 12:2).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이 야고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야고보는 순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린 것입니다. 말하자면 야고보에게는 순교가 일종의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복음의 일꾼에게 아직 사명이 남아 있다면 어떤 순간, 어떤 상황에서도 그를 보호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프리카 선교사 리빙스턴은 “사람은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까지 결코 죽지 않는다”라고 고백하며 아프리카 오지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성공적으로 감당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사명이 남아 있는 한, 그래서 우리가 그 사명을 위하여 살아가는 한 죽음까지도 우리를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오늘, 이 믿음을 붙들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두려움 없이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그 누구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훈련과 연단을 받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또한, 이 땅의 모든 일이 겉으로 보기에는 악인의 계교대로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감을 믿습니다. 사명이 있는 자는 결코 죽지 않음을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사명자로서의 삶을 신실히 살아가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