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23.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24.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25.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26. (상동)
27.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28.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29.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30. ○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31.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32.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33.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34. (없음)
35.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오늘 본문은 유대인 성도들과 이방인 성도들 사이에 생긴 논쟁의 결론 부분입니다. 이 문제는 단순한 종교의식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본질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는가, 아니면 예수님의 은혜에 우리의 어떤 행위가 더해져야 구원받는가”하는 매우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오랜 논쟁 끝에 사도들과 장로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다만 여기에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라는 권면을 덧붙였습니다. 이 권면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율법에 너무나도 익숙하여 그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유대인 성도들을 배려하며 공동체의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한 사랑의 실천이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구원은 오직 은혜로 주어지지만, 구원받은 성도는 거룩한 삶으로 응답해야 함을 결의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결의 사항을 이방 선교의 중심지였던 안디옥 교회에 전한 것에 대한 기록입니다.
1. 먼저, 22절 함께 읽습니다.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예루살렘 공의회는 회의하는 것에도 최선을 다했지만, 회의 결과를 공포하는 것에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들이 선택한 유다와 실라는 형제 중에 ‘인도자’였습니다. 인도자란 ‘지도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32절에 그들은 ‘선지자’로도 인정받던 자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가 회의 내용을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이 두 사람에게 전하도록 한 것은, ‘일의 마무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일을 여러 사람과 함께 공동으로 해보면, 일의 마무리를 끝까지 잘하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일례로, 교회에서 큰 행사를 해보면, 준비 기도회니 음식 준비니 하는 일에 힘을 다 빼고, 정작 온 힘을 기울여야 하는 예배에는 소홀히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봉사하느라 피곤함에 지쳐 예배 시간에 조는 사람들도 다수입니다.
여러분, 어떤 일이든지 마무리를 잘해야 합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도중에 주저앉습니다. 뒤끝이 좋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먼저는 교회에서 맡은 직분에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직장에서 맡은 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의 선한 삶도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내시기 바랍니다. 다니엘기도회 때 간증한 이창우 장로님의 고백처럼 ‘은혜라 쓰고 빚이라 읽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책임감이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를 통해 믿음을 지키고 온전한 복음을 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2. 이어지는 24절 함께 읽습니다.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예루살렘 공의회가 쓴 편지에는 ‘안디옥 교회에서 혼란을 일으킨 이들의 정체’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이긴 했지만, 사도들이나 예루살렘 교회에 의해 공식적으로 파송 받은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도, 예루살렘 교회를 대표할 수는 있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의 개인적인 의견을 예루살렘 교회 전체의 의견인 것처럼 주장하며 큰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자기의 생각을 마치 교회 전체의 의견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죄입니다. 자신이 비록 교회를 위해 큰 헌신을 했다고 해도, 자신의 의견을 마치 교회 전체의 의견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교회를 무너뜨리는 매우 위험한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며, 교회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직분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직분자는 자기 개인의 영광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직분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직분자는 자신의 견해나 권리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에 따라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25절에, 그러한 본을 보인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함께 읽습니다.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바나바와 바울에 대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라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 두사람을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 모두가 사랑한다고 공개적으로 표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바나바와 바울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도들에게 칭찬받는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러한 칭찬이 그 두 사람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겠습니까? 계속해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가진 그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신앙이 되었든지, 선교가 되었든지, 믿음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되었든지, 그것에 선한 열매를 맺어지기를 원한다면 격려와 지지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두 사도를 적극적으로 칭찬하고 격려하고 지지함으로써 자칫 약화될 수 있었던 선교가 다시 새 힘을 얻었듯이, 우리 또한 이러한 칭찬과 격려의 토대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 칭찬과 격려의 사람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3. 이어지는 28절 함께 읽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예루살렘 공의회는 모든 결론을 내린 주체를 ‘성령과 우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영적인 원리가 됩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 아무리 헌신된 자들이고 신중한 이들이었다고 할지라도 성령의 역사가 없었다면 올바른 결론을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성령께서 아무리 강력하게 역사할지라도 초대교회 지도자들의 순종이 없었다면 그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과 성도 간의 교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여러분, 성령께서는 우리 성도의 삶에 적극 개입하시고 주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은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겸손한 마음으로 듣고, 순종함으로써 응답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에베소서 4:30에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새번역성경). 우리가 성령의 음성을 외면하면 성령께서 마음 아파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 5:19에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의 제사장에게 저녁부터 아침까지 성막의 등불이 꺼지지 않게 할 의무가 있었듯이, 우리에게도 성령의 불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출 27:21). 우리 성도들은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기에, 구약 성막의 등불이 꺼지지 않은 것처럼 우리 안에서 성령의 역사가 꺼지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때 우리나라에 성령의 역사가 불길과 같이 타올랐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성령의 역사를 보기 힘듭니다. 왜 이런 결과가 일어났습니까? 어디에 문제가 있습니까? 성령께 문제가 있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성령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령께 문제가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신경 쓰고 돌아봐야 할 너무나도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바쁘게 살아갑니다. 바쁜 것을 자랑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토록 바쁜 이유가 혹시 더 잘 먹고 더 편히 쉬기 위한 것은 않습니까? 그리고 일을 마친 후에, 남은 시간을 오락과 유흥에 소모하느라, 정작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일 시간과 여유를 스스로 만들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우리는 과감히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다시 서야 합니다.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성령과 역동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거기에 성도가 살길이 있습니다.
특히,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에서 ‘옳은 줄 알았노니’라는 말은 ‘깨닫게 되었노니’라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번 사건을 통해 이전에 몰랐던 새로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들은 사도들과 교회 지도자들입니다. 이들 가운데 대다수는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그 어떤 사람들보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다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주어진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하나씩 하나씩 깨달아 가고 알아가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까? 왜 날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까? 왜 날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겸손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 알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확하게 말하면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것을 인정하십니까? 예수 좀 오래 믿었다고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착각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직분이 높다고 해서 남을 판단하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가르치려는 입보다는 듣는 귀가 열려있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오류를 범할 가능성을 줄이고 바른 믿음을 세워 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호세아 6:3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자. 힘써 하나님을 알자.”라고 충고합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신다고 하나님의 뜻을 저절로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에 힘쓰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할 때 조금씩 조금씩 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들을 통해 하나님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 알아야 할 것이 더욱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이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점점 더 겸손하게 됩니다. 겸손은 우리가 노력함으로써 가질 수 있는 성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할 때 저절로 맺혀지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우리 교회의 표어처럼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기에 더욱 힘쓰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지키기에 더욱 힘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의 사명을 감당할 때 마무리가 중요함을 가슴에 깊이 새깁니다. 또한, 책망보다는 칭찬과 격려가 더욱 큰 은혜를 이끔을 깨닫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로 날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기에 힘쓰게 하셔서 성령의 역사가 없다고 하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뜻을 전하는 선지자로서 성령의 역사를 나타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2.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23.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24.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25.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26. (상동)
27.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28.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29.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30. ○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31.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32.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33.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34. (없음)
35.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오늘 본문은 유대인 성도들과 이방인 성도들 사이에 생긴 논쟁의 결론 부분입니다. 이 문제는 단순한 종교의식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본질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는가, 아니면 예수님의 은혜에 우리의 어떤 행위가 더해져야 구원받는가”하는 매우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오랜 논쟁 끝에 사도들과 장로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다만 여기에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라는 권면을 덧붙였습니다. 이 권면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율법에 너무나도 익숙하여 그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유대인 성도들을 배려하며 공동체의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한 사랑의 실천이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구원은 오직 은혜로 주어지지만, 구원받은 성도는 거룩한 삶으로 응답해야 함을 결의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결의 사항을 이방 선교의 중심지였던 안디옥 교회에 전한 것에 대한 기록입니다.
1. 먼저, 22절 함께 읽습니다.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예루살렘 공의회는 회의하는 것에도 최선을 다했지만, 회의 결과를 공포하는 것에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들이 선택한 유다와 실라는 형제 중에 ‘인도자’였습니다. 인도자란 ‘지도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32절에 그들은 ‘선지자’로도 인정받던 자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가 회의 내용을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이 두 사람에게 전하도록 한 것은, ‘일의 마무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일을 여러 사람과 함께 공동으로 해보면, 일의 마무리를 끝까지 잘하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일례로, 교회에서 큰 행사를 해보면, 준비 기도회니 음식 준비니 하는 일에 힘을 다 빼고, 정작 온 힘을 기울여야 하는 예배에는 소홀히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봉사하느라 피곤함에 지쳐 예배 시간에 조는 사람들도 다수입니다.
여러분, 어떤 일이든지 마무리를 잘해야 합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도중에 주저앉습니다. 뒤끝이 좋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먼저는 교회에서 맡은 직분에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직장에서 맡은 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의 선한 삶도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내시기 바랍니다. 다니엘기도회 때 간증한 이창우 장로님의 고백처럼 ‘은혜라 쓰고 빚이라 읽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책임감이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를 통해 믿음을 지키고 온전한 복음을 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2. 이어지는 24절 함께 읽습니다.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예루살렘 공의회가 쓴 편지에는 ‘안디옥 교회에서 혼란을 일으킨 이들의 정체’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이긴 했지만, 사도들이나 예루살렘 교회에 의해 공식적으로 파송 받은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도, 예루살렘 교회를 대표할 수는 있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의 개인적인 의견을 예루살렘 교회 전체의 의견인 것처럼 주장하며 큰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자기의 생각을 마치 교회 전체의 의견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죄입니다. 자신이 비록 교회를 위해 큰 헌신을 했다고 해도, 자신의 의견을 마치 교회 전체의 의견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교회를 무너뜨리는 매우 위험한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며, 교회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직분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직분자는 자기 개인의 영광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직분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직분자는 자신의 견해나 권리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에 따라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25절에, 그러한 본을 보인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함께 읽습니다.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바나바와 바울에 대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라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 두사람을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 모두가 사랑한다고 공개적으로 표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바나바와 바울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도들에게 칭찬받는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러한 칭찬이 그 두 사람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겠습니까? 계속해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가진 그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신앙이 되었든지, 선교가 되었든지, 믿음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되었든지, 그것에 선한 열매를 맺어지기를 원한다면 격려와 지지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두 사도를 적극적으로 칭찬하고 격려하고 지지함으로써 자칫 약화될 수 있었던 선교가 다시 새 힘을 얻었듯이, 우리 또한 이러한 칭찬과 격려의 토대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 칭찬과 격려의 사람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3. 이어지는 28절 함께 읽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예루살렘 공의회는 모든 결론을 내린 주체를 ‘성령과 우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영적인 원리가 됩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 아무리 헌신된 자들이고 신중한 이들이었다고 할지라도 성령의 역사가 없었다면 올바른 결론을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성령께서 아무리 강력하게 역사할지라도 초대교회 지도자들의 순종이 없었다면 그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과 성도 간의 교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여러분, 성령께서는 우리 성도의 삶에 적극 개입하시고 주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은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겸손한 마음으로 듣고, 순종함으로써 응답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에베소서 4:30에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새번역성경). 우리가 성령의 음성을 외면하면 성령께서 마음 아파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 5:19에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의 제사장에게 저녁부터 아침까지 성막의 등불이 꺼지지 않게 할 의무가 있었듯이, 우리에게도 성령의 불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출 27:21). 우리 성도들은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기에, 구약 성막의 등불이 꺼지지 않은 것처럼 우리 안에서 성령의 역사가 꺼지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때 우리나라에 성령의 역사가 불길과 같이 타올랐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성령의 역사를 보기 힘듭니다. 왜 이런 결과가 일어났습니까? 어디에 문제가 있습니까? 성령께 문제가 있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성령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령께 문제가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신경 쓰고 돌아봐야 할 너무나도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바쁘게 살아갑니다. 바쁜 것을 자랑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토록 바쁜 이유가 혹시 더 잘 먹고 더 편히 쉬기 위한 것은 않습니까? 그리고 일을 마친 후에, 남은 시간을 오락과 유흥에 소모하느라, 정작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일 시간과 여유를 스스로 만들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우리는 과감히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다시 서야 합니다.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성령과 역동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거기에 성도가 살길이 있습니다.
특히,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에서 ‘옳은 줄 알았노니’라는 말은 ‘깨닫게 되었노니’라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번 사건을 통해 이전에 몰랐던 새로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들은 사도들과 교회 지도자들입니다. 이들 가운데 대다수는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그 어떤 사람들보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다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주어진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하나씩 하나씩 깨달아 가고 알아가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까? 왜 날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까? 왜 날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겸손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 알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확하게 말하면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것을 인정하십니까? 예수 좀 오래 믿었다고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착각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직분이 높다고 해서 남을 판단하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가르치려는 입보다는 듣는 귀가 열려있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오류를 범할 가능성을 줄이고 바른 믿음을 세워 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호세아 6:3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자. 힘써 하나님을 알자.”라고 충고합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신다고 하나님의 뜻을 저절로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에 힘쓰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할 때 조금씩 조금씩 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들을 통해 하나님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 알아야 할 것이 더욱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이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점점 더 겸손하게 됩니다. 겸손은 우리가 노력함으로써 가질 수 있는 성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할 때 저절로 맺혀지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우리 교회의 표어처럼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기에 더욱 힘쓰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지키기에 더욱 힘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의 사명을 감당할 때 마무리가 중요함을 가슴에 깊이 새깁니다. 또한, 책망보다는 칭찬과 격려가 더욱 큰 은혜를 이끔을 깨닫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로 날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기에 힘쓰게 하셔서 성령의 역사가 없다고 하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뜻을 전하는 선지자로서 성령의 역사를 나타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