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67. 선지자적인 안목을 가집시다 (행 15:12-21)

우인택 목사
2025-11-02
조회수 310

12.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13.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19.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21.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오늘 본문은 지난 주일 본문에 이어서 초대교회가 역사상 가장 큰 전환점이자 위기를 극복했던 순간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이방 세계로 폭발적으로 퍼져나가던 때, “이방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들도 우리처럼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라고 하는 믿음의 근본이 되는 질문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로, 유대교 출신 성도들과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팀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처음으로 ‘다름’을 경험한 순간이었습니다. “신앙의 배경이 다르고,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였을 때,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가 될 수 있느냐?”라는 중대한 갈림길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과 장로들이 예루살렘 교회에 모여 성경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하여 충분한 논의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격렬한 논쟁 끝에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내고 19~20절에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인간의 그 어떤 공로도 배제한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음을 확정했습니다. 그를 통해 흩어졌던 마음을 ‘예수님의 은혜의 복음’으로 하나가 되게 했었습니다.

당시 내렸던 결론에 대한 말씀은 지난 주일에 충분히 상고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은 어떠한 삶인지?’,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어떠한 변화를 이루게 되는지?’, ‘선지자로서의 성도의 삶이란 어떠한 삶인지?’, 이 세 가지를 함께 나누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먼저, 12절 함께 읽습니다.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여기에서 ‘가만히 있어 ἐσίγησεν’라는 말은 단순히 조용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주장을 그치고 침묵했다’, ‘논쟁을 멈추고 마음을 가라앉혔다’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주장과 논쟁을 멈추고 하나님의 뜻 앞에서 침묵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집중하게 된 것은 바나바와 바울이 자신들의 성취를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대하여 증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자신들의 생각이나 지식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논리적으로 설득할 자신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자기주장을 하면, 지금까지 참고 들어온 모든 수고가 허사가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논쟁이 다시 처음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나바와 바울은 오직 자신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만을 간증했습니다. 자신들은 단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통로였다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교회 안의 모든 논쟁과 다툼을 멈추게 하는 힘은 바로 ‘하나님이 하신 일’을 함께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 논리, 내 지식, 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한마음 한뜻으로 바라볼 때, 우리의 입은 잠잠해지고(ἐσίγησεν), 우리의 마음은 주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서도 세대 간의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신앙의 강조점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역을 바라보는 관점에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 그리고 그 앞에서 잠잠히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마음을 모을 때, 교회는 비로소 하나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더욱 힘쓰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에 귀를 기울이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를 통해, 바나바와 바울처럼 간증의 주인공이 되어, 분열된 마음을 주 안에서 하나로 이끄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13절 함께 읽습니다.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갑자기 의외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의 권위 있는 모습은 베드로를 능가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혹 그가 사도 야고보가 아닌가?”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도 야고보는 이미 순교했습니다(행 12:2).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야고보는 사도 야고보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야고보는 누구일까요? 성경 갈라디아서 1:19에 의하면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입니다. 그리고 그는 교회 최초의 공의회를 주재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인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바르게 확립할 수 있는 정통한 성경 지식을 바탕으로 권위 있게 회의를 이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이렇게 신앙과 인격을 부족함 없이 갖춘 훌륭한 그릇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 예수님을 박해하던 유대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예수님을 힘들게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 생전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요 7:5). 심지어 예수님을 미친 사람으로까지 취급했습니다(막 3:21).

그런데 그런 그가 어떻게 이처럼 변화되었을까요? 누가 이런 변화를 일으켰습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에 개인적으로 야고보를 만나 주셨습니다(고전 15:7). 야고보는 그 이후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기둥과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갈 2:9).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다 변하게 됩니다.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 변화의 폭이 워낙 넓고 크기 때문에 누구도 예측할 수 없게 변화됩니다.

여러분, ‘세리장 삭개오’며, ‘세리 마태’, ‘박해자 사울’, ‘방탕아 어거스틴’, ‘깡패 이기풍’ 등 그들이 변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변하더라도 그렇게까지 변하리라고 누가 꿈이라도 꿨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서 변화는 ‘전혀 예측 불가능한 변화’입니다. 그 변화의 폭은 무한합니다. 강도, 살인자도 예수님을 만나면 얼마든지 성자로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쉽게 사람을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누구라도 변화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지탄받는 사람에게도, 악한 죄를 지은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지은 죄가 클수록, 그래서 변화의 폭이 클수록 주를 위한 헌신과 봉사의 크기도 큼을 우리는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 무수히 확인하게 됩니다. 이를 기억하고 오늘부터 한 사람에게라도 더 복음을 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3. 이어지는 14절 함께 읽습니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여기에서의 ‘시므온’은 베드로의 본명입니다. 야고보는 베드로가 간증한 고넬료 구원 사건을 언급한 후, 이어지는 15-18절에 이러한 이방인 구원은 구약시대의 ‘선지자’ 아모스가 이미 예언한 일의 성취라고 말했습니다.

‘선지자’는 적게는 수개월에서, 많게는 수백 년 앞을 내다보고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예언하는 직분입니다. 아모스는 예수님이 오시기 800년 전의 선지자입니다. 그러한 그가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실 일을 미리 예언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선지자 직분을 갖지 않았으면서도 선지자처럼 살다 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 대표적 인물입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보다 무려 2천여 년 전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예수님의 시대를 보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8:56에서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가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를 가리켜 ‘선지자’라고 칭합니다(창 20:7). 왜 그렇습니까? 선지자라는 직분을 갖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선지자적인 안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선지자적인 안목으로 자신의 후손에서 나실 예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난의 삶, 나그네로 유리하는 삶 가운데서도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러한 인물이 또 있습니다. 다윗 왕입니다. 다윗 역시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지는 않았지만, 성경은 그를 가리켜 ‘선지자’라고 합니다(행 2:30). 그 역시 예수님을 미리 보고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비록 공식적인 선지자 직분을 받지 않았을지라도 선지자의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를 선지자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면에서 보면 우리 성도들 또한 ‘장차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자들이기에 선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들이 하던 사역이 우리 성도들에게 넘겨진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성도들은 선지자적인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지자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의 평안을 소유하게 됩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백 년, 이백 년, 천년 앞을 내다보며 사는 사람이 바로 앞에서 일어나는 작은 고난에, 시험에, 행복과 불행에 요동하겠습니까? 눈앞의 ‘일희일비’로 믿음이 흔들리겠습니까?

그러므로 선지자적인 믿음의 안목을 가진 사람은 아브라함이 이천 년 앞을 내다보며 즐거워했듯이 즐겁게 믿음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선지자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은 몸은 현재에 살지만, 마음은 늘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봅니다. 썩을 육체의 쾌락을 위해 살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삽니다. 율법의 무거운 짐이 아니라 은혜의 복음을 붙잡고 살아갑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교회든 가는 곳마다 그곳을 사랑의 공동체가 되게 합니다.

그래서 선지자적인 안목을 갖고 사는 사람은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하는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선지자적인 안목을 갖게 합니다. 그들에게 이 땅의 썩어질 것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유산으로 물려주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선지자적인 안목으로 가정과 직장과 교회를 든든히 세워 가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복음의 일꾼으로서 서 있는 곳마다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선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에 따라 일희일비하며 살아가지만,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선지자적인 안목을 갖고 살아가야 함을 깨닫습니다. 저희에게 성령의 권능 부어주셔서 이 시대의 선지자로서,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하나님 자녀로서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함께하여 주옵소서. 복음의 원칙을 굳게 지키되, 연약한 지체를 사랑으로 ‘배려’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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