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어느 과학자가 물 한 컵을 들고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물은 우리 인간에게 꼭 필요한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 있는 물입니다. 누구든지 마시면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과학자는 그 물에 검은색의 물을 한 방울 떨어뜨렸습니다. 순식간에 맑은 물이 탁해졌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이 한 방울이, 이 물 전체를 마실 수 없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복음도 그렇습니다. 복음에 인간의 조건이 단 한 방울이라도 섞이는 순간, 그 복음은 더이상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단순한 진리에 율법이나 행위가 더해지는 순간, 복음의 순수함은 사라지고 생명력은 흐려집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러한 복음의 순수함을 지키려는 초대교회의 논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약 2년 동안의 1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 유대로부터 온 유대교 출신 성도들이 “이방인도 율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침으로, 바울과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대교 신앙은, 구약 성경의 본래 의도보다는 민족주의적 관점과 인간의 전통이 섞여 율법주의적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외식적인 신앙을 날카롭게 지적하셨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는 “구원은 오직 유대인에게만 한정되어 있다”는 잘못된 ‘유대 선민사상’을 가진 성도들이 적지 않게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하기 위한 의무조항이었던 할례를 이방인 성도에게도 그대로 적용하여 할례를 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다 부정하다고 간주함으로써 더욱 큰 갈등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특히, 이 문제는 이미 11장에서 고넬료의 회심 사건을 두고 정리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의 본격적인 전도 여행으로 많은 이방인이 교회로 들어오자, 이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입니다. 결국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라고 선포한 바울과 여전히 “율법을 지키는 것이 구원의 필수 조건”이라고 내세우는 유대교 출신 성도들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벌어졌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되자, 그들은 사도들이 있는 예루살렘 교회에 이 문제의 판단을 구하기로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 중대한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리게 된 배경입니다.
1. 먼저, 1절 함께 읽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교회 역사에는 복음의 본질을 지키기 위한 싸움들이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계속되어왔습니다. 초대교회에서도, 종교개혁 시대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복음의 본질을 흔드는 시도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중에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가 맞닥뜨린 최초의 위기였습니다.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는데, 그들도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이 논쟁은 단순한 신앙 의식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본질’, 곧 믿음으로 구원받는지, 행위로 구원받는지를 결정하는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1절의 유대에서 온 ‘어떤 사람들’은 갈라디아서 2:12에 의하면 자기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야고보가 보내서 온 것으로 자처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야고보는 그들을 보낸 일이 없다고 분명하게 밝혔습니다(행 15:24).
그래서 성경은 갈라디아서 2:4에서 그들을 가리켜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라고 했습니다. 거짓 형제란 겉으로는 신앙인처럼 보이지만, 복음의 본질을 왜곡하는 자들을 뜻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그러한 거짓 형제들로 인해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진리가 위협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순간 교회는 성경에 등장하는 갈라디아 교회처럼 ‘다른 복음’에 속아 타락과 부패에 빠지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처럼 인간의 자랑과 교만만이 가득하게 되고 서로 경쟁하며 분열하게 됩니다.
이처럼, 교회를 흔들고 무너뜨리는 것은 세상의 박해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복음을 왜곡하는 거짓 형제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신약성경의 대부분이 이러한 자들을 경계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많은 성도들은 교회 안의 문제보다 세상의 박해를 교회의 가장 큰 위협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정권이 들어서느냐? 이슬람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느냐? 동성애가 허용되느냐? 교회가 세금을 내느냐?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박해가 교회의 위험 요소인 것은 사실이지만, 세상의 박해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교회의 존립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세상의 박해는 오히려 교회의 체질을 강화시켜 더욱 교회가 부흥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성경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나 헤롯왕이 교회를 박해할 때 교회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교회가 망했습니까? 아닙니다. 박해로 인해 잠시 위축되기는 했지만, 곧 더욱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그에 비해, 성경의 서신서에는 교회에 몰래 들어온 영지주의자, 신비주의자, 유대주의자, 거짓 형제들이 복음을 왜곡하여 교회를 송두리째 타락하게 하고 무너지게 한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많은 교회가 신학적인 문제로 분쟁을 겪고 있고, 교계 차원에서 볼 때도 이단들로 인하여 교회들이 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외적으로 볼 때, 아무리 규모가 큰 교회라고 할지라도 바른 복음의 진리 위에 서 있지 못하면, 마치 모래 위에 세운 성과 같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세상을 향해 언제나 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누구든지 와서 예배드리고, 성도로 등록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탄의 미혹에 빠진 자들도 우리의 눈을 속이고 교회 안으로 가만히 들어와 얼마든지 성도 행세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거짓 형제들’을 분별해 내고 그들이 교회를 분열시키지 못하도록 온전한 믿음 위에 굳건히 서야 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2. 이어지는 2절 상반절에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과 격렬하게 논쟁했습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다투고 논쟁하는 일을 자제하는 사람이었지만(딤전 1:4) 그런데도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주의자들과 ‘적지 않게’ 다투고 논쟁했습니다. 그런데 그러고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그 문제를 예루살렘 교회에 의뢰하기로 했습니다. 이로써 ‘제1차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평소 이해하고 양보하기를 잘하던 바울이 왜 이번 일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고 그렇게 강하게 다투고 논쟁한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의 주장이 ‘신앙의 뿌리’를 흔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양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세상 사람들과도 화평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물며 성도들 사이에서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내가 손해보고 이해하면 화평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양보하는 것은 성도의 기본자세입니다. 그러할 경우, 져주는 것이 온전한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을 지키는 것과 관련될 때에는 달라야 합니다. 그때에는 절대 양보하면 안 됩니다. 타협해서도 안 됩니다. 다투어야 할지라도 피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영혼 구원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일이기에 결코 양보나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일례로,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도 공생애 3년 동안 바리새인들과는 첨예하게 대립하셨습니다. 신앙에 관한 것은 양보하지 않으셨습니다. 왜입니까? 그들이 진리를 왜곡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양보할지라도 신앙을 왜곡하는 일에 대해서는 양보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주위를 보면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짓 신앙에 속아 이단의 길로 가고 있습니까?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바른 신앙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또 복음의 삶을 올바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알고 복음 위에 바로 서면, 결코 이단이 우리를 위협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부분에 대해서도 스스로를 돌아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그런데 여러분, 사람은 쉽게 설득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지식이 많을수록 자기의 생각이나 주장을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기 나름의 생각과 사상을 끝까지 고수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할례를 주장한 유대교 출신 성도들도 그러했습니다. 5절에 의하면, 그들 중 일부는 유대교에서도 가장 보수적이고 열성적이었던 바리새파 출신이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의 생각이 예수님을 믿는 열심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열심이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열심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아무리 조리 있게 설득을 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마지막 조치를 취했습니다.
2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이방인들의 할례 문제에 대한 결론이 나지 않자, 바울과 바나바는 이 문제를 예루살렘 교회에 맡기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보면 이 결정은 바울과 바나바 입장에서는 매우 불리한 결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유대교들의 본거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는 이 문제를 예루살렘 교회에 맡기기로 한 것은 거짓 형제들의 교묘한 술수였을 수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 야고보 같은 사도들이 누구입니까? 모두 유대인들입니다. 사람은 본래 자기편에 유리하게 판단하기 쉽습니다. 정황상으로는 바울과 바나바가 불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조금도 꺼려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문제를 일으킨 것이 예루살렘이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곳도 예루살렘이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안디옥에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가야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의 문제이든 신앙의 문제이든, 답이 문제 안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의 한 예로, 다니엘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다른 신하들의 모함을 받아 사자 굴에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억울합니다. 두렵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자 굴에 들어가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자 굴이 문제였지만, 문제의 해결도 사자 굴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사자 굴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해결을 보았습니다. 모든 문제가 사자 굴에서 일거에 해결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문제가 어디서 해결됩니까? 예루살렘에서 해결되었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에게 무슨 문제가 있든 문제를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꺼이 문제 안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문제에 온몸으로 부딪치고, 그 문제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살 길은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문제 해결의 길을 그 문제 안에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모든 문제를 믿음 안에서 직접 부딪힘으로, 그 문제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영적인 문제를 개인의 영성이나 능력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교회 공동체’의 공식적인 권위와 회의를 통해 해결하려 했던 바울을 본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초대교회가 복음의 본질을 지켰던 것처럼, 우리 교회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굳게 서게 하옵소서. 율법과 행위의 짐을 내려놓고, 오직 은혜로 자유하게 하신 예수님을 본받게 하옵소서.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 위에 서게 하시고, 우리 교회가 복음으로 기뻐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어느 과학자가 물 한 컵을 들고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물은 우리 인간에게 꼭 필요한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 있는 물입니다. 누구든지 마시면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과학자는 그 물에 검은색의 물을 한 방울 떨어뜨렸습니다. 순식간에 맑은 물이 탁해졌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이 한 방울이, 이 물 전체를 마실 수 없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복음도 그렇습니다. 복음에 인간의 조건이 단 한 방울이라도 섞이는 순간, 그 복음은 더이상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단순한 진리에 율법이나 행위가 더해지는 순간, 복음의 순수함은 사라지고 생명력은 흐려집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러한 복음의 순수함을 지키려는 초대교회의 논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약 2년 동안의 1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 유대로부터 온 유대교 출신 성도들이 “이방인도 율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침으로, 바울과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대교 신앙은, 구약 성경의 본래 의도보다는 민족주의적 관점과 인간의 전통이 섞여 율법주의적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외식적인 신앙을 날카롭게 지적하셨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는 “구원은 오직 유대인에게만 한정되어 있다”는 잘못된 ‘유대 선민사상’을 가진 성도들이 적지 않게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하기 위한 의무조항이었던 할례를 이방인 성도에게도 그대로 적용하여 할례를 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다 부정하다고 간주함으로써 더욱 큰 갈등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특히, 이 문제는 이미 11장에서 고넬료의 회심 사건을 두고 정리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의 본격적인 전도 여행으로 많은 이방인이 교회로 들어오자, 이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입니다. 결국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라고 선포한 바울과 여전히 “율법을 지키는 것이 구원의 필수 조건”이라고 내세우는 유대교 출신 성도들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벌어졌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되자, 그들은 사도들이 있는 예루살렘 교회에 이 문제의 판단을 구하기로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 중대한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리게 된 배경입니다.
1. 먼저, 1절 함께 읽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교회 역사에는 복음의 본질을 지키기 위한 싸움들이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계속되어왔습니다. 초대교회에서도, 종교개혁 시대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복음의 본질을 흔드는 시도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중에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가 맞닥뜨린 최초의 위기였습니다.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는데, 그들도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이 논쟁은 단순한 신앙 의식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본질’, 곧 믿음으로 구원받는지, 행위로 구원받는지를 결정하는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1절의 유대에서 온 ‘어떤 사람들’은 갈라디아서 2:12에 의하면 자기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야고보가 보내서 온 것으로 자처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야고보는 그들을 보낸 일이 없다고 분명하게 밝혔습니다(행 15:24).
그래서 성경은 갈라디아서 2:4에서 그들을 가리켜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라고 했습니다. 거짓 형제란 겉으로는 신앙인처럼 보이지만, 복음의 본질을 왜곡하는 자들을 뜻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그러한 거짓 형제들로 인해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진리가 위협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순간 교회는 성경에 등장하는 갈라디아 교회처럼 ‘다른 복음’에 속아 타락과 부패에 빠지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처럼 인간의 자랑과 교만만이 가득하게 되고 서로 경쟁하며 분열하게 됩니다.
이처럼, 교회를 흔들고 무너뜨리는 것은 세상의 박해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복음을 왜곡하는 거짓 형제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신약성경의 대부분이 이러한 자들을 경계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많은 성도들은 교회 안의 문제보다 세상의 박해를 교회의 가장 큰 위협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정권이 들어서느냐? 이슬람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느냐? 동성애가 허용되느냐? 교회가 세금을 내느냐?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박해가 교회의 위험 요소인 것은 사실이지만, 세상의 박해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교회의 존립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세상의 박해는 오히려 교회의 체질을 강화시켜 더욱 교회가 부흥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성경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나 헤롯왕이 교회를 박해할 때 교회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교회가 망했습니까? 아닙니다. 박해로 인해 잠시 위축되기는 했지만, 곧 더욱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그에 비해, 성경의 서신서에는 교회에 몰래 들어온 영지주의자, 신비주의자, 유대주의자, 거짓 형제들이 복음을 왜곡하여 교회를 송두리째 타락하게 하고 무너지게 한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많은 교회가 신학적인 문제로 분쟁을 겪고 있고, 교계 차원에서 볼 때도 이단들로 인하여 교회들이 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외적으로 볼 때, 아무리 규모가 큰 교회라고 할지라도 바른 복음의 진리 위에 서 있지 못하면, 마치 모래 위에 세운 성과 같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세상을 향해 언제나 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누구든지 와서 예배드리고, 성도로 등록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탄의 미혹에 빠진 자들도 우리의 눈을 속이고 교회 안으로 가만히 들어와 얼마든지 성도 행세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거짓 형제들’을 분별해 내고 그들이 교회를 분열시키지 못하도록 온전한 믿음 위에 굳건히 서야 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2. 이어지는 2절 상반절에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과 격렬하게 논쟁했습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다투고 논쟁하는 일을 자제하는 사람이었지만(딤전 1:4) 그런데도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주의자들과 ‘적지 않게’ 다투고 논쟁했습니다. 그런데 그러고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그 문제를 예루살렘 교회에 의뢰하기로 했습니다. 이로써 ‘제1차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평소 이해하고 양보하기를 잘하던 바울이 왜 이번 일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고 그렇게 강하게 다투고 논쟁한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의 주장이 ‘신앙의 뿌리’를 흔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양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세상 사람들과도 화평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물며 성도들 사이에서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내가 손해보고 이해하면 화평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양보하는 것은 성도의 기본자세입니다. 그러할 경우, 져주는 것이 온전한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을 지키는 것과 관련될 때에는 달라야 합니다. 그때에는 절대 양보하면 안 됩니다. 타협해서도 안 됩니다. 다투어야 할지라도 피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영혼 구원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일이기에 결코 양보나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일례로,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도 공생애 3년 동안 바리새인들과는 첨예하게 대립하셨습니다. 신앙에 관한 것은 양보하지 않으셨습니다. 왜입니까? 그들이 진리를 왜곡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양보할지라도 신앙을 왜곡하는 일에 대해서는 양보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주위를 보면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짓 신앙에 속아 이단의 길로 가고 있습니까?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바른 신앙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또 복음의 삶을 올바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알고 복음 위에 바로 서면, 결코 이단이 우리를 위협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부분에 대해서도 스스로를 돌아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그런데 여러분, 사람은 쉽게 설득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지식이 많을수록 자기의 생각이나 주장을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기 나름의 생각과 사상을 끝까지 고수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할례를 주장한 유대교 출신 성도들도 그러했습니다. 5절에 의하면, 그들 중 일부는 유대교에서도 가장 보수적이고 열성적이었던 바리새파 출신이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의 생각이 예수님을 믿는 열심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열심이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열심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아무리 조리 있게 설득을 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마지막 조치를 취했습니다.
2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이방인들의 할례 문제에 대한 결론이 나지 않자, 바울과 바나바는 이 문제를 예루살렘 교회에 맡기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보면 이 결정은 바울과 바나바 입장에서는 매우 불리한 결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유대교들의 본거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는 이 문제를 예루살렘 교회에 맡기기로 한 것은 거짓 형제들의 교묘한 술수였을 수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 야고보 같은 사도들이 누구입니까? 모두 유대인들입니다. 사람은 본래 자기편에 유리하게 판단하기 쉽습니다. 정황상으로는 바울과 바나바가 불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조금도 꺼려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문제를 일으킨 것이 예루살렘이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곳도 예루살렘이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안디옥에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가야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의 문제이든 신앙의 문제이든, 답이 문제 안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의 한 예로, 다니엘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다른 신하들의 모함을 받아 사자 굴에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억울합니다. 두렵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자 굴에 들어가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자 굴이 문제였지만, 문제의 해결도 사자 굴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사자 굴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해결을 보았습니다. 모든 문제가 사자 굴에서 일거에 해결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문제가 어디서 해결됩니까? 예루살렘에서 해결되었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에게 무슨 문제가 있든 문제를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꺼이 문제 안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문제에 온몸으로 부딪치고, 그 문제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살 길은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문제 해결의 길을 그 문제 안에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모든 문제를 믿음 안에서 직접 부딪힘으로, 그 문제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영적인 문제를 개인의 영성이나 능력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교회 공동체’의 공식적인 권위와 회의를 통해 해결하려 했던 바울을 본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초대교회가 복음의 본질을 지켰던 것처럼, 우리 교회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굳게 서게 하옵소서. 율법과 행위의 짐을 내려놓고, 오직 은혜로 자유하게 하신 예수님을 본받게 하옵소서.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 위에 서게 하시고, 우리 교회가 복음으로 기뻐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