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2.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4.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6.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7.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스데반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 교회에 닥친 극심한 박해는 성도들을 세상 곳곳으로 흩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흩어짐은 불행의 씨앗이 아니라, 복음을 사마리아와 안디옥까지 전파하는 선교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도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극심한 박해는 바울과 바나바를 이고니온으로 피하게 했고, 이고니온에서도 극심한 박해가 있자 루스드라와 더베로 피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대적자들의 박해를 피하여 간 곳마다 그곳에 새로운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러한 복음 전파의 역사를 상고하면서, 바울과 바나바에게 그러했듯이 지금 우리의 삶에 다가온 고난과 역경, 심지어 믿음을 지키기 위해 받게 되는 불이익이나 박해까지도 우리에게 주어진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복음 전파를 위한 생명의 씨앗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 지금 여러분이 겪고 있는 고난의 자리를 도피처가 아닌 다음 사역을 준비하는 하나님의 새로운 인도하심임을 믿고, 어떤 환경에서도 기쁨으로 성도로서 마땅한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1. 먼저, 1절 함께 읽습니다.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지난 본문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자 유대인들이 큰 박해를 가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바울과 바나바가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자, 유대인들은 유대교를 믿던 귀부인들과 유력자들을 선동하면서까지 두 사도를 위협하므로 어쩔 수 없이 이고니온으로 피했습니다.
이쯤 되면, 자기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무리 소중한 일이라고 해도 지칠 만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서도 여전히 유대 회당을 먼저 찾았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았지만, 그러나 동족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유익이나 목숨보다도 진정으로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2절 함께 읽습니다.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우리의 상식에, 이렇게까지 자기 민족을 위해 정성을 들이면 하나님께서 감동하셔서 유대인들의 마음을 돌려주셔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아무리 노력해도, 유대인들은 변함없이 그들을 박해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합니까? 전도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교회로 데리고 오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에게까지도 끝까지 너그럽게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성도의 자세에 대해 마태복음 18장에 베드로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물었을 때,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을 거부하고 내게 해코지하더라도 그를 용서하고, 포기하지 말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눅 23:34).
여러분, 복음은 이러한 ‘용서의 정신’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복음 전도를 보내실 때, 예수님에 대해 배척만 일삼던 유대인들에게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6). 그런데 요즘에는 이러한 용서를 보기 힘듭니다. 복음 전하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쉽게 포기하고 미워하기까지 합니다. 심지어 원수 대하듯 합니다. 여러분, 진정한 믿음은 잘잘못을 따지는 충고보다는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하고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책망하고 바로잡으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관용함으로 용서하고, 인내심을 갖고 그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비난하기보다는,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어떻게 해서든지 구원하려고 힘쓰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용서를 배워야 합니다. 한 영혼 한 영혼에 대한 예수님의 관용과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한 다음에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유언처럼 주신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이 말씀을 항상 기억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요 13:34).
2. 이어지는 3절 함께 읽습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그런데 두 사도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와는 달리 이고니온에서는 ‘오래 있었다’라고 말씀합니다. ‘오래’라는 말은 ‘충분한 시간 동안’이라는 뜻입니다. 두 사도가 유대인들의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머문 것은 1절에 기록된 것처럼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두 사도는 이러한 새 성도들을 양육하기 위해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고 그들을 위해 오래 머물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양육은 사도 바울 선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는 에베소에서 2년(행 19:10), 고린도에서 1년 6개월(행 18:11), 수리아 안디옥에서는 1년을 머물며 새로운 성도들을 가르쳤습니다.
그가 이렇게 오래 머물며 성도들에게 복음을 가르침 것은 아무리 많은 사람을 전도한다고 할지라도 양육이 되지 않으면 작은 고난에 흩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일례로, 구약성경 출애굽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직접 목격하고 수많은 기적을 몸으로 체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모른 채 원망과 불평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불순종과 불신앙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양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쉐마’라고 불리는 신명기 6:4-9 말씀을 통해 후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라고 강하게 권고했습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신앙인은 기적을 체험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제대로 배워야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11장에서 수리아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이방인이었고 처음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었지만 바울과 바나바에게 집중적인 교육을 받고 난 후,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전 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복된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육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목회자는 열심히 가르치고, 성도들을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양육이 없는 성도는 뿌리 없는 나무와도 같습니다. 양육을 통해서 참된 성도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교회의 모든 교육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아모스 8:11에, 말세가 되면 기근이 있을 것인데, 그 기근은 양식이 없어서 주리는 기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데 힘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양육은 우리의 열심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3절 함께 읽습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게 하시니”
“사도들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라는 말씀은 사도들이 자신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복음을 전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셨습니다. 두 사도가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한 것은 하나님께서 도우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전도의 결실을 맺게 하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전도자가 힘있게 복음을 전할지라고 결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전도자의 몫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역할은 철저히 하나님의 몫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구원하실 자를 구원하시고, 감동시키실 자를 감동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자기의 언변으로 사람을 설득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월권입니다. 최고의 전도자 바울도 고린도전서 3장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으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이것이 전도자의 바른 생각이자 태도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라게 하시며 결실을 맺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 상대를 설득하려고 하지 말고, 그들이 복음을 듣고 더 자세하게 알기를 원할 때, 자신이 체험한 것을 그대로 가감없이 증언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시면, 때에 따라서 기적도 주시고 표적도 주셔서 구원의 열매 맺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에 대한 간증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4절 함께 읽습니다.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두 사도가 열심히 복음을 전하자, 온 시민이 모두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이렇게 두 패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복음이 가진 양면성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어떤 사람은 기뻐하며 받아들이지만, 어떤 사람은 오히려 분노하며 거부합니다. 복음은 세상에 구원과 평화를 주지만, 그것은 복음이 가진 성격의 한 일면일 뿐, 동시에 복음은 성도와 세상을 분리해 내는 다른 면도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고, 그로 인해 기쁨이 있고,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구원에서 완전히 멀어집니다. 복음은 그 수용 여부에 따라 사람의 운명을 완전히 달라지게 하는 특징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다툼이 일어납니다. 혼란이 일어납니다. 물론, 이러한 다툼과 혼란은 불신자들이 성도들을 폭력적으로 배척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복음을 전할 때 어쩔 수 없이 필연적으로 싸움에 휘말리게 되는데, 성경은 이러한 싸움을 ‘선한 싸움’이라고 표현합니다. 선한 싸움이란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세상의 타락한 가치관과 죄악된 생활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 싸움을 걸어 올 때, 그들을 대적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든 싸움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지 않으면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입니다.
그런데 두 사도는 유대인들이 점점 더 심한 박해를 가해 오자 6절에, 결국에는 루스드라와 더베로 피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도는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실망할 만하고, 한탄할 만한데도 그들은 조금도 좌절하지 않고 발길이 닫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어디에 있게 되든지, 비록 쫓겨나서 간 곳이라 할지라도 그곳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교지로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다 이렇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어디에 있든지 그 자리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교지’임을 믿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그곳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를 원하는 잃어버린 양이 있는 자리임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지금 여러분이 서 있는 그곳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복음의 일꾼으로 보내셨음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어린 양들을 믿음과 소망으로 구원해 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바울과 바나바의 삶을 통해 복음 전파의 여정에서 겪는 고난과 박해가 오히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속에서 선교의 기회가 될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또한, 포기하지 않는 사랑과 용서,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양육에 힘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깨달았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처럼 담대히 복음을 전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잃어버린 양들을 구원해 내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를 통해 가정과 일터, 그리고 이 나라 위에 어둠이 물러가고 생명의 빛이 밝혀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2.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4.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6.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7.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스데반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 교회에 닥친 극심한 박해는 성도들을 세상 곳곳으로 흩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흩어짐은 불행의 씨앗이 아니라, 복음을 사마리아와 안디옥까지 전파하는 선교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도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극심한 박해는 바울과 바나바를 이고니온으로 피하게 했고, 이고니온에서도 극심한 박해가 있자 루스드라와 더베로 피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대적자들의 박해를 피하여 간 곳마다 그곳에 새로운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러한 복음 전파의 역사를 상고하면서, 바울과 바나바에게 그러했듯이 지금 우리의 삶에 다가온 고난과 역경, 심지어 믿음을 지키기 위해 받게 되는 불이익이나 박해까지도 우리에게 주어진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복음 전파를 위한 생명의 씨앗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 지금 여러분이 겪고 있는 고난의 자리를 도피처가 아닌 다음 사역을 준비하는 하나님의 새로운 인도하심임을 믿고, 어떤 환경에서도 기쁨으로 성도로서 마땅한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1. 먼저, 1절 함께 읽습니다.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지난 본문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자 유대인들이 큰 박해를 가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바울과 바나바가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자, 유대인들은 유대교를 믿던 귀부인들과 유력자들을 선동하면서까지 두 사도를 위협하므로 어쩔 수 없이 이고니온으로 피했습니다.
이쯤 되면, 자기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무리 소중한 일이라고 해도 지칠 만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서도 여전히 유대 회당을 먼저 찾았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았지만, 그러나 동족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유익이나 목숨보다도 진정으로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2절 함께 읽습니다.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우리의 상식에, 이렇게까지 자기 민족을 위해 정성을 들이면 하나님께서 감동하셔서 유대인들의 마음을 돌려주셔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아무리 노력해도, 유대인들은 변함없이 그들을 박해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합니까? 전도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교회로 데리고 오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에게까지도 끝까지 너그럽게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성도의 자세에 대해 마태복음 18장에 베드로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물었을 때,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을 거부하고 내게 해코지하더라도 그를 용서하고, 포기하지 말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눅 23:34).
여러분, 복음은 이러한 ‘용서의 정신’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복음 전도를 보내실 때, 예수님에 대해 배척만 일삼던 유대인들에게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6). 그런데 요즘에는 이러한 용서를 보기 힘듭니다. 복음 전하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쉽게 포기하고 미워하기까지 합니다. 심지어 원수 대하듯 합니다. 여러분, 진정한 믿음은 잘잘못을 따지는 충고보다는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하고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책망하고 바로잡으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관용함으로 용서하고, 인내심을 갖고 그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비난하기보다는,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어떻게 해서든지 구원하려고 힘쓰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용서를 배워야 합니다. 한 영혼 한 영혼에 대한 예수님의 관용과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한 다음에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유언처럼 주신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이 말씀을 항상 기억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요 13:34).
2. 이어지는 3절 함께 읽습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그런데 두 사도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와는 달리 이고니온에서는 ‘오래 있었다’라고 말씀합니다. ‘오래’라는 말은 ‘충분한 시간 동안’이라는 뜻입니다. 두 사도가 유대인들의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머문 것은 1절에 기록된 것처럼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두 사도는 이러한 새 성도들을 양육하기 위해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고 그들을 위해 오래 머물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양육은 사도 바울 선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는 에베소에서 2년(행 19:10), 고린도에서 1년 6개월(행 18:11), 수리아 안디옥에서는 1년을 머물며 새로운 성도들을 가르쳤습니다.
그가 이렇게 오래 머물며 성도들에게 복음을 가르침 것은 아무리 많은 사람을 전도한다고 할지라도 양육이 되지 않으면 작은 고난에 흩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일례로, 구약성경 출애굽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직접 목격하고 수많은 기적을 몸으로 체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모른 채 원망과 불평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불순종과 불신앙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양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쉐마’라고 불리는 신명기 6:4-9 말씀을 통해 후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라고 강하게 권고했습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신앙인은 기적을 체험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제대로 배워야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11장에서 수리아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이방인이었고 처음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었지만 바울과 바나바에게 집중적인 교육을 받고 난 후,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전 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복된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육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목회자는 열심히 가르치고, 성도들을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양육이 없는 성도는 뿌리 없는 나무와도 같습니다. 양육을 통해서 참된 성도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교회의 모든 교육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아모스 8:11에, 말세가 되면 기근이 있을 것인데, 그 기근은 양식이 없어서 주리는 기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데 힘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양육은 우리의 열심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3절 함께 읽습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게 하시니”
“사도들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라는 말씀은 사도들이 자신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복음을 전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셨습니다. 두 사도가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한 것은 하나님께서 도우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전도의 결실을 맺게 하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전도자가 힘있게 복음을 전할지라고 결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전도자의 몫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역할은 철저히 하나님의 몫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구원하실 자를 구원하시고, 감동시키실 자를 감동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자기의 언변으로 사람을 설득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월권입니다. 최고의 전도자 바울도 고린도전서 3장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으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이것이 전도자의 바른 생각이자 태도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라게 하시며 결실을 맺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 상대를 설득하려고 하지 말고, 그들이 복음을 듣고 더 자세하게 알기를 원할 때, 자신이 체험한 것을 그대로 가감없이 증언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시면, 때에 따라서 기적도 주시고 표적도 주셔서 구원의 열매 맺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에 대한 간증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4절 함께 읽습니다.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두 사도가 열심히 복음을 전하자, 온 시민이 모두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이렇게 두 패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복음이 가진 양면성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어떤 사람은 기뻐하며 받아들이지만, 어떤 사람은 오히려 분노하며 거부합니다. 복음은 세상에 구원과 평화를 주지만, 그것은 복음이 가진 성격의 한 일면일 뿐, 동시에 복음은 성도와 세상을 분리해 내는 다른 면도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고, 그로 인해 기쁨이 있고,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구원에서 완전히 멀어집니다. 복음은 그 수용 여부에 따라 사람의 운명을 완전히 달라지게 하는 특징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다툼이 일어납니다. 혼란이 일어납니다. 물론, 이러한 다툼과 혼란은 불신자들이 성도들을 폭력적으로 배척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복음을 전할 때 어쩔 수 없이 필연적으로 싸움에 휘말리게 되는데, 성경은 이러한 싸움을 ‘선한 싸움’이라고 표현합니다. 선한 싸움이란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세상의 타락한 가치관과 죄악된 생활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 싸움을 걸어 올 때, 그들을 대적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든 싸움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지 않으면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입니다.
그런데 두 사도는 유대인들이 점점 더 심한 박해를 가해 오자 6절에, 결국에는 루스드라와 더베로 피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도는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실망할 만하고, 한탄할 만한데도 그들은 조금도 좌절하지 않고 발길이 닫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어디에 있게 되든지, 비록 쫓겨나서 간 곳이라 할지라도 그곳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교지로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다 이렇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어디에 있든지 그 자리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교지’임을 믿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그곳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를 원하는 잃어버린 양이 있는 자리임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지금 여러분이 서 있는 그곳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복음의 일꾼으로 보내셨음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어린 양들을 믿음과 소망으로 구원해 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바울과 바나바의 삶을 통해 복음 전파의 여정에서 겪는 고난과 박해가 오히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속에서 선교의 기회가 될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또한, 포기하지 않는 사랑과 용서,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양육에 힘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깨달았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처럼 담대히 복음을 전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잃어버린 양들을 구원해 내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를 통해 가정과 일터, 그리고 이 나라 위에 어둠이 물러가고 생명의 빛이 밝혀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