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7.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49.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51.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예화에,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계획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초대장을 보내고, 잔치할 시각이 되자 그들에게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니 오라”는 전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초대를 받은 한 사람은 “내가 밭을 샀는데, 거기 가봐야 하오”라며 거절했고, 또 한 사람은 “나는 소를 다섯 쌍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보러 가야 하오”라며 거절했고, 또 한 사람은 “내가 지금 막 결혼을 해서 갈 수가 없소”라며 거절했습니다. 이에 집주인이 화가 나서 종에게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초대하라”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런데도 빈자리가 있자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아무 사람이나 초대하여 내 집을 채우라 그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전에 초대했던 사람들은 하나도 영광스러운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초대를 거절한 이들이 놓쳐버린 영광스러운 자리를,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대신 채우고 넘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복음 선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예화의 성취였습니다. 복음은 선민인 유대인들이 받아야 할 하나님의 초대장이었지만, 그들이 거절하므로 그 초대장이 이방인에게로 넘어갔습니다. 그로 인해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여기던 사람들, 자신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소외되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복음의 새로운 주인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에 대한 실제적인 사례의 말씀입니다.
1. 먼저, 44절 함께 읽습니다.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의 한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고 난 후, 한 주간이 지나고 다음 안식일이 되자, 그 도시의 거의 모든 시민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자 회당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구원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세상의 풍속을 따르며 살던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구원의 소망이 전혀 없이, 우상을 섬기며 육신의 쾌락과 죄에 젖어 살던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설교를 듣던 그들 가운데, 양심의 가책을 받고 ‘상한 마음’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에게서 들은 복음에 대하여 한 주간 깊은 고민을 하다가, 바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다시 몰려왔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갈급한 심령들을 받아 주시고 그들에게 ‘비시디아 안디옥 교회’를 세우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비시디아 안디옥 교회는 선민이라 자처하던 유대인들에 의해 시작된 교회가 아니라, 삶의 상처와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살아가던 이름 없는 이방인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교회의 역사를 상고하면서, 인간의 어떤 열심이나 외적인 경건, 그리고 종교적인 열정이나 혈통보다도, 세상에서 악한 삶을 사는 것에 대하여 ‘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복음이 뿌리내리고 결실하기에 가장 좋은 토양’임을 알게 됩니다. ‘상한 마음(a broken heart)’이란 단순히 슬픔이나 실망감에 빠진 감정적인 상태를 넘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애통하며, 교만과 완악함을 버린 겸손하고 온유한 심령을 의미합니다(시 34:18, 51:17, 사 61:1). 이는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마음의 자세이며, 진정한 영적 회복과 구원의 시작점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유해야 할 믿음은 종교적인 열심과 외적인 경건을 갖추었다고 생각할 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의지에 대한 한계를 느끼고, 자신이 지은 죄의 심각함을 절감하고 상한 마음 가운데 있을 때, 코끝이 찡하도록 우리의 가슴에 와 닿게 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가정을 파멸 직전으로 몰아가고, 오랫동안 피땀으로 쌓아온 사업을 기반부터 뒤흔들고, 건강을 위협하는 것은 모두, 우리를 ‘복음 결실이 가능한 상한 마음’의 상태로 일구시려는 섭리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실수와 실패는 모두, 우리의 능력이 부족해서 비롯되는 것이기는 하나, 그 속에는 우리의 마음 밭을 ‘복음 결실이 가능한 상한 마음’으로 갈아엎으시려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와 의도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수와 실패로 인한 우리의 상한 마음은 저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주심의 ‘전조’입니다. 영적으로 점점 황폐해져 가는 우리 삶 속으로 적극적으로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개입하심의 신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 가지 세상의 일로 인한 실패와 상한 마음이 있는 분이 계신다면, 그 상황 속으로 적극적으로 개입해 들어오실 하나님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하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주어진 상황을 역전시키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45절 함께 읽습니다.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이방인들이 몰려오자, 유대인들은 시기심이 일어나 복음을 ‘반박’하고 ‘비방’했습니다. 반박했다는 말은 반대했다는 말이고, 비방했다는 말은 인격적으로 헐뜯고 조롱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은 본래부터 악한 이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비록 복음을 영접하지는 않았지만, 율법을 지킴으로 이방인들에 비해 도덕적으로 우월한 삶을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들의 마음에 시기심이 일어나자,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무고하게 헐뜯고 조롱하며 박해하는 ‘비인격적인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례는 우리 주변에서는 물론, 성경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인류 최초의 인간 아담의 아들 가인은 시기심에 사로잡혀 자기 동생을 살해하는 무서운 죄를 저질렀습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인 사울도 다윗에 대한 시기심에 사로잡혀 이유 없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가인과 사울은 그로 인해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시기심은 인격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그를 불행 가운데로 몰아세웁니다. 그래서 성경은 욥기 5:2에 ‘시기는 어리석은 자를 멸망으로 이끈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시기심을 버려야 합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큰 은혜를 누리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의 마음속에 시기심이 싹트지 않도록 예수님의 사랑과 겸손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진정한 성도는 다른 사람을 시기하지 않음을 기억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이어지는 46절 함께 읽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유대인들의 이처럼 거칠게 반발하자,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해진 이유는 ‘유대인들이 복음을 멸시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복음은 유대인들에게 먼저 전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선민이었기에 그것이 마땅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그렇게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방 지역에서 복음을 전해도 반드시 먼저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사랑과 은혜의 소중함을 몰랐습니다. 그 가치를 몰랐습니다. 외면했습니다. 아니, 외면한 정도가 아니라 배척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러한 행동을 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자기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외면하여도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자신들을 떠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자기들이 배척한다 해도 자기들의 주변 어딘가를 맴돌 뿐 다른 곳으로 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넘어갔습니다. 복음의 주도권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넘어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깨달아야 합니다. 은혜를 먼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받은 은혜를 지키는 것입니다. 사실, 은혜를 먼저 받는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하지만 이 먼저 받음이 우리를 교만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거룩한 은혜를 쉽게 생각합니다. 함부로 방치합니다. 그러나 은혜가 다른 사람보다 자기에게 먼저 임했다는 것은, 먼저 떠날 수도 있음을 말해 줍니다.
여러분, 우리 동양 문화권에서 장자가 바뀌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한 번 장자는 영원한 장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장자가 장자로서 마땅한 행실을 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이 장자권을 옮기셨습니다. 일례로, 이삭의 장자인 에서가 장자로서 마땅한 행실을 하지 못할 때 장자권은 쌍둥이 동생 야곱에게 넘어갔습니다. 야곱의 장자 르우벤이 장자로서 마땅한 행실을 하지 못할 때 그 장자권은 10단계를 뛰어넘어 요셉에게 넘어갔습니다. 사울이 왕으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못할 때 왕권마저 다윗에게 넘어갔습니다.
여러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혹시, 먼저 되는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우리는 모두 다, 먼저 된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입어 복음을 듣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칫 방심하면 나중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고 경고하셨습니다(마 19:30)
그리고 이에 대한 말씀이 48절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유대인들은 복음을 배척했지만, 이방인들은 복음을 듣고 기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에게 구원의 문을 활짝 여셨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은 복음을 기뻐하고 찬송하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차별없이 임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무엇을 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기뻐하고, 찬송하는 자에게 임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서 지키며 찬양하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의 축복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복음을 대적하며,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며 그 지역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러자 50-51절에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향했다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복음을 믿지 않고 대적하는 자에게 언제까지나 구원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끝까지 복음을 대적하면, 바울과 바나바처럼 다른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을 포기하고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위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분이 있다면 더 간절히 기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버리시지 않도록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믿지 않는 사람의 구원은 나의 관심과 사랑에 달려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만일, 오늘 본문의 유대인들이 내 가족 내 친구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소유해야 할 믿음은 종교적인 열심과 외적인 경건을 갖추었다고 생각할 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대한 한계를 느끼고, 자신이 지은 죄의 심각함을 절감하고 상한 마음 가운데 있을 때 다가 옴을 고백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상한 마음으로 믿음의 선한 삶을 사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를 통해, 어떤 경우에도 복음을 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7.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49.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51.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예화에,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계획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초대장을 보내고, 잔치할 시각이 되자 그들에게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니 오라”는 전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초대를 받은 한 사람은 “내가 밭을 샀는데, 거기 가봐야 하오”라며 거절했고, 또 한 사람은 “나는 소를 다섯 쌍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보러 가야 하오”라며 거절했고, 또 한 사람은 “내가 지금 막 결혼을 해서 갈 수가 없소”라며 거절했습니다. 이에 집주인이 화가 나서 종에게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초대하라”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런데도 빈자리가 있자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아무 사람이나 초대하여 내 집을 채우라 그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전에 초대했던 사람들은 하나도 영광스러운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초대를 거절한 이들이 놓쳐버린 영광스러운 자리를,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대신 채우고 넘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복음 선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예화의 성취였습니다. 복음은 선민인 유대인들이 받아야 할 하나님의 초대장이었지만, 그들이 거절하므로 그 초대장이 이방인에게로 넘어갔습니다. 그로 인해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여기던 사람들, 자신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소외되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복음의 새로운 주인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에 대한 실제적인 사례의 말씀입니다.
1. 먼저, 44절 함께 읽습니다.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의 한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고 난 후, 한 주간이 지나고 다음 안식일이 되자, 그 도시의 거의 모든 시민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자 회당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구원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세상의 풍속을 따르며 살던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구원의 소망이 전혀 없이, 우상을 섬기며 육신의 쾌락과 죄에 젖어 살던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설교를 듣던 그들 가운데, 양심의 가책을 받고 ‘상한 마음’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에게서 들은 복음에 대하여 한 주간 깊은 고민을 하다가, 바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다시 몰려왔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갈급한 심령들을 받아 주시고 그들에게 ‘비시디아 안디옥 교회’를 세우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비시디아 안디옥 교회는 선민이라 자처하던 유대인들에 의해 시작된 교회가 아니라, 삶의 상처와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살아가던 이름 없는 이방인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교회의 역사를 상고하면서, 인간의 어떤 열심이나 외적인 경건, 그리고 종교적인 열정이나 혈통보다도, 세상에서 악한 삶을 사는 것에 대하여 ‘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복음이 뿌리내리고 결실하기에 가장 좋은 토양’임을 알게 됩니다. ‘상한 마음(a broken heart)’이란 단순히 슬픔이나 실망감에 빠진 감정적인 상태를 넘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애통하며, 교만과 완악함을 버린 겸손하고 온유한 심령을 의미합니다(시 34:18, 51:17, 사 61:1). 이는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마음의 자세이며, 진정한 영적 회복과 구원의 시작점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유해야 할 믿음은 종교적인 열심과 외적인 경건을 갖추었다고 생각할 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의지에 대한 한계를 느끼고, 자신이 지은 죄의 심각함을 절감하고 상한 마음 가운데 있을 때, 코끝이 찡하도록 우리의 가슴에 와 닿게 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가정을 파멸 직전으로 몰아가고, 오랫동안 피땀으로 쌓아온 사업을 기반부터 뒤흔들고, 건강을 위협하는 것은 모두, 우리를 ‘복음 결실이 가능한 상한 마음’의 상태로 일구시려는 섭리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실수와 실패는 모두, 우리의 능력이 부족해서 비롯되는 것이기는 하나, 그 속에는 우리의 마음 밭을 ‘복음 결실이 가능한 상한 마음’으로 갈아엎으시려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와 의도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수와 실패로 인한 우리의 상한 마음은 저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주심의 ‘전조’입니다. 영적으로 점점 황폐해져 가는 우리 삶 속으로 적극적으로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개입하심의 신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 가지 세상의 일로 인한 실패와 상한 마음이 있는 분이 계신다면, 그 상황 속으로 적극적으로 개입해 들어오실 하나님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하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주어진 상황을 역전시키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45절 함께 읽습니다.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이방인들이 몰려오자, 유대인들은 시기심이 일어나 복음을 ‘반박’하고 ‘비방’했습니다. 반박했다는 말은 반대했다는 말이고, 비방했다는 말은 인격적으로 헐뜯고 조롱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은 본래부터 악한 이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비록 복음을 영접하지는 않았지만, 율법을 지킴으로 이방인들에 비해 도덕적으로 우월한 삶을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들의 마음에 시기심이 일어나자,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무고하게 헐뜯고 조롱하며 박해하는 ‘비인격적인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례는 우리 주변에서는 물론, 성경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인류 최초의 인간 아담의 아들 가인은 시기심에 사로잡혀 자기 동생을 살해하는 무서운 죄를 저질렀습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인 사울도 다윗에 대한 시기심에 사로잡혀 이유 없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가인과 사울은 그로 인해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시기심은 인격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그를 불행 가운데로 몰아세웁니다. 그래서 성경은 욥기 5:2에 ‘시기는 어리석은 자를 멸망으로 이끈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시기심을 버려야 합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큰 은혜를 누리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의 마음속에 시기심이 싹트지 않도록 예수님의 사랑과 겸손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진정한 성도는 다른 사람을 시기하지 않음을 기억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이어지는 46절 함께 읽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유대인들의 이처럼 거칠게 반발하자,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해진 이유는 ‘유대인들이 복음을 멸시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복음은 유대인들에게 먼저 전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선민이었기에 그것이 마땅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그렇게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방 지역에서 복음을 전해도 반드시 먼저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사랑과 은혜의 소중함을 몰랐습니다. 그 가치를 몰랐습니다. 외면했습니다. 아니, 외면한 정도가 아니라 배척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러한 행동을 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자기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외면하여도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자신들을 떠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자기들이 배척한다 해도 자기들의 주변 어딘가를 맴돌 뿐 다른 곳으로 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넘어갔습니다. 복음의 주도권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넘어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깨달아야 합니다. 은혜를 먼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받은 은혜를 지키는 것입니다. 사실, 은혜를 먼저 받는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하지만 이 먼저 받음이 우리를 교만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거룩한 은혜를 쉽게 생각합니다. 함부로 방치합니다. 그러나 은혜가 다른 사람보다 자기에게 먼저 임했다는 것은, 먼저 떠날 수도 있음을 말해 줍니다.
여러분, 우리 동양 문화권에서 장자가 바뀌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한 번 장자는 영원한 장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장자가 장자로서 마땅한 행실을 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이 장자권을 옮기셨습니다. 일례로, 이삭의 장자인 에서가 장자로서 마땅한 행실을 하지 못할 때 장자권은 쌍둥이 동생 야곱에게 넘어갔습니다. 야곱의 장자 르우벤이 장자로서 마땅한 행실을 하지 못할 때 그 장자권은 10단계를 뛰어넘어 요셉에게 넘어갔습니다. 사울이 왕으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못할 때 왕권마저 다윗에게 넘어갔습니다.
여러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혹시, 먼저 되는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우리는 모두 다, 먼저 된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입어 복음을 듣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칫 방심하면 나중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고 경고하셨습니다(마 19:30)
그리고 이에 대한 말씀이 48절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유대인들은 복음을 배척했지만, 이방인들은 복음을 듣고 기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에게 구원의 문을 활짝 여셨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은 복음을 기뻐하고 찬송하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차별없이 임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무엇을 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기뻐하고, 찬송하는 자에게 임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서 지키며 찬양하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의 축복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복음을 대적하며,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며 그 지역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러자 50-51절에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향했다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복음을 믿지 않고 대적하는 자에게 언제까지나 구원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끝까지 복음을 대적하면, 바울과 바나바처럼 다른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을 포기하고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위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분이 있다면 더 간절히 기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버리시지 않도록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믿지 않는 사람의 구원은 나의 관심과 사랑에 달려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만일, 오늘 본문의 유대인들이 내 가족 내 친구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소유해야 할 믿음은 종교적인 열심과 외적인 경건을 갖추었다고 생각할 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대한 한계를 느끼고, 자신이 지은 죄의 심각함을 절감하고 상한 마음 가운데 있을 때 다가 옴을 고백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상한 마음으로 믿음의 선한 삶을 사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를 통해, 어떤 경우에도 복음을 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