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6.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
7.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8. 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10.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11.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12.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
사도행전 1-12장까지는 교회의 시작과 유대 땅으로의 복음 전파에 대하여, 13장부터는 유대 땅에서 머물던 복음이 세계로 전해지게 된 것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시작점은 성도들의 열정이나 결단이나 계획이 아닌, 금식하며 기도하던 안디옥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응답하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나바와 사울에게는 선교사라는 사명을 주셨고, 안디옥 교회 성도들에게는 이 두 사람이 선교를 잘할 수 있도록 영적으로 물적으로 그들을 지원해야 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바나바와 사울, 그리고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받은 이 사명은 그들에게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성경은 이 일을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에 이 일을 기록한 것은 그들이 받은 이 사명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에게 똑같이 주어진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 중에서 특정한 몇몇 성도는 바나바와 사울처럼 먼 곳으로 파송되어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받았는가 하면, 대다수의 성도들은 그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도우며 가까운 지역사회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먼 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는 우리 성도들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믿음’은 어떠한 믿음이며, 복음을 전할 때 ‘어떠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복음이 전해지게 되는지 배워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각자의 삶과 교회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가슴 깊이 품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돌아보고 다짐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1. 먼저 4절 함께 읽습니다.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바나바와 사울은 복음을 어디에서 어떻게 전할 것인지를 자신들이 정하지 않고,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선교지로 떠났습니다. 그들은 첫걸음부터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움직였습니다. 이는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또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 등의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시고 지시하심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자기 뜻대로 계획하고 움직인다면, 우리는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존재이기에 그 일은 분명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내 뜻과 내 생각대로, 굳게 결심하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무엇이든지 다 될 것 같지만, 사실은 바로 거기에 실패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믿음’은 항상 마음 문을 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믿음입니다. 그러한 믿음의 자세를 가질 때 바나바와 사울이 선교여행을 무사히 잘 마쳤듯이, 우리도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5절 함께 읽습니다.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바나바와 사울은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았기에 당연히 가정 먼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민족에 대한 애정을 떨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동족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뜨거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자기 민족이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되는 안타까운 현실을 그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다는 절박한 심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을 전하는 자신들을 유대인들이 박해할 것이 뻔했지만 그럼에도 가장 먼저 유대인의 여러 회당으로 발걸음을 향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아무리 자신이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았다 하더라도 자기 민족은 멸망하도록 버려두고 이방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한다면 그것이 말이 되는 것이겠습니까? 어찌 그것을 복음이라, 사랑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은 혈연과 민족을 초월하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도행전 1:8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가장 가까운 예루살렘부터 점차적으로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또, 디모데전서 5:8에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또하나의 믿음의 자세’는 손쉬운 상대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구원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이전에도 계속해서 기도해 오셨겠지만, 오늘 주신 말씀을 가슴 깊이 품고, 골방에 들어가 가장 가까운 이들의 구원을 위해 금식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6절 함께 읽습니다.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
오늘 본문은 이방인 선교 현장에 대한 사실상의 첫 기록입니다. ‘바보에 이르러’라고 말씀하는데, ‘바보 Πάφος’는 구브로 섬의 수도이자 로마 총독 관저가 있던 항구 도시입니다. 그곳에는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Ἀφροδίτη’의 신전이 있었는데, 아프로디테는 사랑과 미, 쾌락, 다산의 여신이었기 때문에 성적인 타락을 동반했습니다. 4세기 교부 ‘아타나시우스’는 아프로디테의 신전을 가리켜 ‘색욕의 종교’라고까지 말했습니다(이교도 반박 9장). 그리고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구브로 섬의 수도 바보에 사는 사람들은 색욕의 종교의 유혹만이 아니라,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바예수에 의해 이중으로 미혹 당하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이방 땅으로 복음을 전하러 갔더니 ‘어떠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곳은 성적으로 매우 타락한 도시였고, 또 모든 사람들이 ‘유대인 거짓 선지자’의 마술에 미혹 당하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선교를 갔더니 그곳은 선교가 거의 불가능한 땅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바보에서 바나바와 사울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갈급한 심령을 만나게 됩니다. 7절 함께 읽습니다.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신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로마 귀족 계급의 개종이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더욱이 바나바와 사울이 전한 예수는 유대 땅에 주둔한 로마 총독 빌라도에 의해 가장 흉악한 죄인들에게만 선고하는 십자가형을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전통 종교와 질서를 위협하는 불법적이고 위험한, 유대교에서 파생된 ‘미신’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로마 총독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금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기 위해 바나바와 사울을 초청했습니다. 그것도 바나바나 사울이 먼저 청한 것도 아닙니다. 총독 서기오 바울이 먼저 그들을 청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참으로 기적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복음 전파는 기적입니다. 기적이 아니면 복음 이 전해질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전해 보면, 순순히 받아들일 것 같은 사람은 끝끝내 거절하는가 하면, 전혀 받아들일 것 같지 않은 사람은 순순히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복음을 전하면 전할수록 복음의 결실은 우리의 예상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과 역사에 의해 결실을 맺음을 반복하여 경험하게 됩니다. 퇴비 더미 속에서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듯이, 타락하고 부패한 곳에서도 얼마든지 결실을 맺음을 수없이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 섣부른 판단을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복음 전도에서 금기 사항이 있다면, 인간적인 판단이나 생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는 곳에 가면 됩니다. 총독 서기오 바울과 같이 심령이 갈급한 영혼이 부르는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면 됩니다.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곳에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작정한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라”고 말씀하시는 곳은 어디인지 깊이 돌아보고, 복음의 귀한 열매를 맺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8절 함께 읽습니다.
“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마술사 ‘엘루마’는 바나바와 사울을 대적하며 총독이 예수를 믿지 못하게 방해했습니다. 그런데 이 마술사 엘루마의 이름은 ‘바예수’였습니다. 이는 ‘구원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엘루마는 자신이 구원의 아들인 것처럼 행세했습니다. 자신을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앞에 성령 충만한 진짜 ‘구원의 아들’이 나타나게 되자 그 실체가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참고로, 9절에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 표현은 사도행전 전체의 흐름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바울은 사울의 로마식 이름입니다. 바울은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히브리식 이름 ‘사울’과 함께 로마식 이름 ‘바울’도 가지고 있었습니다(행 22:28). 이 이름은 당시 로마 제국 전역에서 통용되던 이름으로, 이방인에게 훨씬 더 친숙하고 접근하기 쉬운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사울이 활동하는 무대는 이방 땅이므로, 여기서부터는 히브리 이름인 사울을 사용하지 않고, 로마식 이름인 바울을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었다는 둥, 무슨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활동 지역에 따라 사울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바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계속해서 본문을 보면, 성령 충만한 바울이 엘루마를 바라보며 10절에 그의 가면을 벗기고 실체를 밝혔습니다. 함께 읽습니다.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여러분, 실제로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하는 사탄 마귀가 광명의 천사인 것처럼 우리 곁에 있을 수 있습니다.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이면서, 겉으로는 선한 목자와 같이, 순결한 양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가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신 바짝 차리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탄의 위장술에 속아 이단에 빠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사이비 이단이니 경계하라고 아무리 외쳐도 넘어가는 사람은 또 넘어갑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바울과 같이 성령 충만하여 이 땅의 모든 속이는 자들의 정체를 밝히 드러내는 세상의 빛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빛이 되기에 어둠을 물러가고, 악은 저절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1절 함께 읽습니다.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마술사 엘루마는 바울이 명령하자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교회를 박해하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눈이 멀고 그를 통해 믿음의 사람이 되었었기에, 마술사 엘루마에게도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얼마 동안’이라는 표현이 바로 이를 나타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이 징계를 통해 “돌아서서 회개하라”라는 그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돌아섰는지에 대해서 본문은 침묵합니다. 이것은 여운입니다. 우리를 향한 지혜의 주문입니다.
여러분, 지혜 있는 자는 실수를 전혀 하지 않는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허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책망받을 일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실수하고 죄를 짓습니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자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책망을 들을 때에 듣고 돌아서는 자입니다. 때로 큰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매를 맞을 수 있습니다. 인간인 이상 그럴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징계 앞에서 “그가 돌아서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짓고 하나님께 매를 맞았어도 돌아서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설 줄 모르는 ‘목이 곧은 백성’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 앞에 선 ‘세 사람’을 보았습니다. 거짓된 세상 속에서 살면서도 진리를 갈망하던 구도자 ‘총독 서기오 바울’과 진리를 왜곡함으로써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던 거짓 선지자 ‘마술사 엘루마’, 그리고 진리를 전하던 성령 충만한 ‘바나바와 바울’.
오늘 이 시간, 우리 자신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선 사람입니까? 영적인 갈증 속에 있는 서기오 바울입니까?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 이익을 채우려는 엘루마의 모습은 없습니까? 오직 성령 충만하여 사람을 살리고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바나바와 바울과 같은 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성도 중에는 먼 곳으로 나아가 복음을 직접 전해야 하는 사명을 받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하며 그들을 도우는 사명을 받은 사람도 있음을 깨닫습니다. 어느 사명을 받았든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빛과 소금된 삶을 사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내 생각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마술사 엘루마에게 미혹당하던 서기오 바울을 건져낸 바울처럼 이 땅의 구도자들을 이단의 미혹에서 건져내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6.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
7.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8. 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10.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11.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12.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
사도행전 1-12장까지는 교회의 시작과 유대 땅으로의 복음 전파에 대하여, 13장부터는 유대 땅에서 머물던 복음이 세계로 전해지게 된 것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시작점은 성도들의 열정이나 결단이나 계획이 아닌, 금식하며 기도하던 안디옥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응답하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나바와 사울에게는 선교사라는 사명을 주셨고, 안디옥 교회 성도들에게는 이 두 사람이 선교를 잘할 수 있도록 영적으로 물적으로 그들을 지원해야 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바나바와 사울, 그리고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받은 이 사명은 그들에게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성경은 이 일을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에 이 일을 기록한 것은 그들이 받은 이 사명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에게 똑같이 주어진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 중에서 특정한 몇몇 성도는 바나바와 사울처럼 먼 곳으로 파송되어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받았는가 하면, 대다수의 성도들은 그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도우며 가까운 지역사회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먼 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는 우리 성도들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믿음’은 어떠한 믿음이며, 복음을 전할 때 ‘어떠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복음이 전해지게 되는지 배워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각자의 삶과 교회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가슴 깊이 품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돌아보고 다짐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1. 먼저 4절 함께 읽습니다.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바나바와 사울은 복음을 어디에서 어떻게 전할 것인지를 자신들이 정하지 않고,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선교지로 떠났습니다. 그들은 첫걸음부터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움직였습니다. 이는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또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 등의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시고 지시하심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자기 뜻대로 계획하고 움직인다면, 우리는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존재이기에 그 일은 분명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내 뜻과 내 생각대로, 굳게 결심하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무엇이든지 다 될 것 같지만, 사실은 바로 거기에 실패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믿음’은 항상 마음 문을 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믿음입니다. 그러한 믿음의 자세를 가질 때 바나바와 사울이 선교여행을 무사히 잘 마쳤듯이, 우리도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5절 함께 읽습니다.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바나바와 사울은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았기에 당연히 가정 먼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민족에 대한 애정을 떨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동족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뜨거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자기 민족이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되는 안타까운 현실을 그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다는 절박한 심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을 전하는 자신들을 유대인들이 박해할 것이 뻔했지만 그럼에도 가장 먼저 유대인의 여러 회당으로 발걸음을 향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아무리 자신이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았다 하더라도 자기 민족은 멸망하도록 버려두고 이방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한다면 그것이 말이 되는 것이겠습니까? 어찌 그것을 복음이라, 사랑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은 혈연과 민족을 초월하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도행전 1:8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가장 가까운 예루살렘부터 점차적으로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또, 디모데전서 5:8에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또하나의 믿음의 자세’는 손쉬운 상대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구원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이전에도 계속해서 기도해 오셨겠지만, 오늘 주신 말씀을 가슴 깊이 품고, 골방에 들어가 가장 가까운 이들의 구원을 위해 금식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6절 함께 읽습니다.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
오늘 본문은 이방인 선교 현장에 대한 사실상의 첫 기록입니다. ‘바보에 이르러’라고 말씀하는데, ‘바보 Πάφος’는 구브로 섬의 수도이자 로마 총독 관저가 있던 항구 도시입니다. 그곳에는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Ἀφροδίτη’의 신전이 있었는데, 아프로디테는 사랑과 미, 쾌락, 다산의 여신이었기 때문에 성적인 타락을 동반했습니다. 4세기 교부 ‘아타나시우스’는 아프로디테의 신전을 가리켜 ‘색욕의 종교’라고까지 말했습니다(이교도 반박 9장). 그리고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구브로 섬의 수도 바보에 사는 사람들은 색욕의 종교의 유혹만이 아니라,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바예수에 의해 이중으로 미혹 당하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이방 땅으로 복음을 전하러 갔더니 ‘어떠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곳은 성적으로 매우 타락한 도시였고, 또 모든 사람들이 ‘유대인 거짓 선지자’의 마술에 미혹 당하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선교를 갔더니 그곳은 선교가 거의 불가능한 땅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바보에서 바나바와 사울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갈급한 심령을 만나게 됩니다. 7절 함께 읽습니다.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신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로마 귀족 계급의 개종이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더욱이 바나바와 사울이 전한 예수는 유대 땅에 주둔한 로마 총독 빌라도에 의해 가장 흉악한 죄인들에게만 선고하는 십자가형을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전통 종교와 질서를 위협하는 불법적이고 위험한, 유대교에서 파생된 ‘미신’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로마 총독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금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기 위해 바나바와 사울을 초청했습니다. 그것도 바나바나 사울이 먼저 청한 것도 아닙니다. 총독 서기오 바울이 먼저 그들을 청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참으로 기적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복음 전파는 기적입니다. 기적이 아니면 복음 이 전해질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전해 보면, 순순히 받아들일 것 같은 사람은 끝끝내 거절하는가 하면, 전혀 받아들일 것 같지 않은 사람은 순순히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복음을 전하면 전할수록 복음의 결실은 우리의 예상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과 역사에 의해 결실을 맺음을 반복하여 경험하게 됩니다. 퇴비 더미 속에서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듯이, 타락하고 부패한 곳에서도 얼마든지 결실을 맺음을 수없이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 섣부른 판단을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복음 전도에서 금기 사항이 있다면, 인간적인 판단이나 생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는 곳에 가면 됩니다. 총독 서기오 바울과 같이 심령이 갈급한 영혼이 부르는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면 됩니다.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곳에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작정한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라”고 말씀하시는 곳은 어디인지 깊이 돌아보고, 복음의 귀한 열매를 맺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8절 함께 읽습니다.
“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마술사 ‘엘루마’는 바나바와 사울을 대적하며 총독이 예수를 믿지 못하게 방해했습니다. 그런데 이 마술사 엘루마의 이름은 ‘바예수’였습니다. 이는 ‘구원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엘루마는 자신이 구원의 아들인 것처럼 행세했습니다. 자신을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앞에 성령 충만한 진짜 ‘구원의 아들’이 나타나게 되자 그 실체가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참고로, 9절에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 표현은 사도행전 전체의 흐름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바울은 사울의 로마식 이름입니다. 바울은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히브리식 이름 ‘사울’과 함께 로마식 이름 ‘바울’도 가지고 있었습니다(행 22:28). 이 이름은 당시 로마 제국 전역에서 통용되던 이름으로, 이방인에게 훨씬 더 친숙하고 접근하기 쉬운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사울이 활동하는 무대는 이방 땅이므로, 여기서부터는 히브리 이름인 사울을 사용하지 않고, 로마식 이름인 바울을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었다는 둥, 무슨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활동 지역에 따라 사울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바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계속해서 본문을 보면, 성령 충만한 바울이 엘루마를 바라보며 10절에 그의 가면을 벗기고 실체를 밝혔습니다. 함께 읽습니다.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여러분, 실제로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하는 사탄 마귀가 광명의 천사인 것처럼 우리 곁에 있을 수 있습니다.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이면서, 겉으로는 선한 목자와 같이, 순결한 양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가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신 바짝 차리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탄의 위장술에 속아 이단에 빠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사이비 이단이니 경계하라고 아무리 외쳐도 넘어가는 사람은 또 넘어갑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바울과 같이 성령 충만하여 이 땅의 모든 속이는 자들의 정체를 밝히 드러내는 세상의 빛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빛이 되기에 어둠을 물러가고, 악은 저절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1절 함께 읽습니다.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마술사 엘루마는 바울이 명령하자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교회를 박해하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눈이 멀고 그를 통해 믿음의 사람이 되었었기에, 마술사 엘루마에게도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얼마 동안’이라는 표현이 바로 이를 나타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이 징계를 통해 “돌아서서 회개하라”라는 그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돌아섰는지에 대해서 본문은 침묵합니다. 이것은 여운입니다. 우리를 향한 지혜의 주문입니다.
여러분, 지혜 있는 자는 실수를 전혀 하지 않는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허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책망받을 일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실수하고 죄를 짓습니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자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책망을 들을 때에 듣고 돌아서는 자입니다. 때로 큰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매를 맞을 수 있습니다. 인간인 이상 그럴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징계 앞에서 “그가 돌아서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짓고 하나님께 매를 맞았어도 돌아서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설 줄 모르는 ‘목이 곧은 백성’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 앞에 선 ‘세 사람’을 보았습니다. 거짓된 세상 속에서 살면서도 진리를 갈망하던 구도자 ‘총독 서기오 바울’과 진리를 왜곡함으로써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던 거짓 선지자 ‘마술사 엘루마’, 그리고 진리를 전하던 성령 충만한 ‘바나바와 바울’.
오늘 이 시간, 우리 자신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선 사람입니까? 영적인 갈증 속에 있는 서기오 바울입니까?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 이익을 채우려는 엘루마의 모습은 없습니까? 오직 성령 충만하여 사람을 살리고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바나바와 바울과 같은 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성도 중에는 먼 곳으로 나아가 복음을 직접 전해야 하는 사명을 받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하며 그들을 도우는 사명을 받은 사람도 있음을 깨닫습니다. 어느 사명을 받았든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빛과 소금된 삶을 사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내 생각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마술사 엘루마에게 미혹당하던 서기오 바울을 건져낸 바울처럼 이 땅의 구도자들을 이단의 미혹에서 건져내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