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33. 머리에서 마음으로 (요 7:53-8:11)

우인택 목사
2022-10-02
조회수 2019

53.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올해 설악산의 첫 단풍이 9월 26일이고, 절정이 10월 21일이라고 하는데, 여러분, 여행 좋아하세요?
여러분이 가장 멀리까지 여행한 곳은 어디입니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 나라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르헨티나’입니다.
순수 비행 시간만 해도 22시간이 넘는데, 항속거리가 너무 멀어 직항이 없어서 대기시간을 포함하면 26시간이 넘는다고 합니다.
저는 가장 멀리 여행한 곳이 미국 뉴욕이었는데, 무려 16시간동안 비행기를 탔었습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여행하는 그 날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보통, 인생에서 가장 긴 여행이 있다면, 그것은 ‘머리에서 마음에 이르는 여행’이라고들 합니다.
머리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마음에 닿게 함으로써 몸이 움직여야 하는데, 그것이 잘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오늘 본문은 이 문제에 대한 바른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 먼저, 1절에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베푸시기 전이나 후에 종종 홀로 산으로 가셨습니다(막 6:46, 눅 6:12).
이처럼 무리를 떠나 홀로 산으로 가신 이유는 머릿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품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음’을 헬라어로 ‘카르디아 Kαρδία’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영적생명의 중심자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신약성경에 239번 사용).
우리의 마음이 ‘영적생명의 중심자리’인데, 예수님은 머리로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생명의 중심자리’인 마음으로 옮겨가기 위해 늘 기도에 힘썼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기도하셨습니다.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실 때에는 40일동안 금식기도를 하셨고, 크고 작은 기적을 나타내시고 난 후에는 꼭 기도하러 홀로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는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함께 간 제자들은 피곤에 젖어 깨어 기도하지 못하고 모두가 다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스승이신 예수님은 제자들보다 얼마나 더 피곤하셨겠습니까?
그러하신데도 예수님은 힘을 내어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눅 22:44).

여러분,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도 머릿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품기 위해 이와 같은 많은 기도가 필요하셨다면, 한낱 범인인 우리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지난 성경공부시간에 언급한 적이 있지만, “나도 한때는 선교회 회장을 했습니다.” “청년부 회장을 했습니다”, “새벽기도도 빠지지 않고 나갔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지금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 내가 무엇으로 봉사하느냐”, “어떤 선한 일을 하고 있느냐”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머리로 깨달은 말씀이 ‘영적생명의 중심자리’인 마음으로 믿어지도록, 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를 진리로부터 멀어지도록 미혹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탄의 미혹에 넘어가서 죄를 짓는 자는 모두 다 죄의 종이 됩니다.
죄의 종은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거할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이는 결코 바른 믿음을 소유할 수 없고,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가 방금 읽은 본문에는 죄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들의 적나라한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간음 중에 잡혀온 여자를 통해서는 죄에 빠진 무기력한 한 인간의 모습을, 종교인들을 통해서는 같은 죄에 빠진 인간이면서도 간교하고 비판적이며, 자기 의를 내세우는 위선적인 인간의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통해서는 타락한 권력에 분별력 없이 동조하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람들 중에서 단 한 사람에게서도, 심지어 종교인들에게서조차 죄의 어둠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이 사건은 “어두운 죄에 빠져 진리를 잃어버린 인간들과 예수님의 용서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에는 이러한 사람의 죄성을 고발하는 글이 있습니다.
“어린아이에 있어 순결한 것은 그 겉모습의 여림이지 그 마음이 아닙니다. 일찍이 나는 어린아이가 질투하는 것을 목격하고 체험했습니다. 아직 말도 할 줄 모르는 갓난아기가 다른 아이가 제 어미젖을 먹는 것을 보자 눈을 부라리며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엄마가 젖이 많이 나와 자기가 먹고도 넘쳐흐르고 있어, 한 가닥 젖줄로 목숨을 이어가는 다른 아이에게 그것을 조금 나눠주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일이 어찌 죄스럽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어리고 순진해 보이는 갓난아이들도 고약한 욕심과 죄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순진하게 보이는 것은 외모뿐이지, 그 마음 상태는 이미 죄로 오염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자신은 이미 배가 부를 만큼 먹고 난 뒤였음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배고픈 다른 아이에게 젖을 나눠주는 것을 못 참는 아이의 모습은 바로, ‘모든 인간이 죄인’임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라는 지적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하십니까?
“나는 다릅니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거듭난 성도로서 이와 다른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2.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구절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모두가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모였지만, 저녁이 되자 7:53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홀로 버려두고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갔다”라고 기록합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목숨을 걸고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왔는데, 그러나 해가 지기 무섭게 그들은 모두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말씀에 감동받은 수많은 사람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초막절이면 날씨가 많이 차가울 때인데, 그 누구도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홀로 예루살렘에 오셔서 머물 곳이 없었을 것인데, 모두가 예수님을 버려두고 각자 자기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참 이기적인 모습들 아닙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머리로만 이해하고 머리로만 감동을 받았지 ‘영적생명의 중심자리’인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공모자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홀로 감람산에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자기들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그들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기도를 힘입어 어김없이, 또다시 인정머리 없는 백성들 앞에 나아와 가르치셨습니다.

2절의 백성들은 누구입니까?
어제 저녁에 예수님이 저녁을 드시든, 어디서 주무시건, 나 몰라라 하고 돌아가 버렸던 자들,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나무라지 않고 다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3. 그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예수께 옵니다.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체포할 증거를 만들고자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러한 음모가 구체화된 것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4-5절 함께 읽습니다.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우리가 18과 성경공부를 할 때 살펴보았던 것처럼, 그들은 간음한 여인의 재판을 예수님께 의뢰할 어떠한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에게로 데리고 온 것은 예수님을 궁지에 빠뜨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느 쪽으로 대답해도 그 대답에 시비를 걸 수 있는 아주 교묘한 질문을 예수님에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일 “간음한 여인을 놓아주라” 하면 율법의 권위를 무시한 사람이 되고, 반면에 율법대로 “돌로 치라” 하면 사적인 사형을 금지한 로마법에 범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평소 “사랑하라” 가르치셨는데 자기가 말한 대로 행하지 않는 거짓 선생으로 공격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속셈을 아셨지만 바로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교활함에 대하여 항의하거나 몸싸움을 벌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그냥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지 않고 계속 땅에 글을 쓰고 있자, 그들은 대답하기를 요구하며 다그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마지못해 일어나서 대답합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혀 땅바닥에 무엇인가 계속 쓰셨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돌을 들고 있는 사람들과 여인의 양심을 자극합니다.
그때 놀라운 반응이 나타납니다.
기세등등하게 몰려왔던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부터 시작해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다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예수님의 지혜로운 대답은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여인을 살리셨고, 예수님 자신도 유대인들의 올무에 걸리지 않고 벗어나게 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여인만 남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떠난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묻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없다고 대답하자 그때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리고 값없이 용서받은 우리의 삶의 자세입니다.
여러분, 죄인이 죄인을 심판할 수 있습니까?
율법을 어긴 사람이 율법을 어긴 다른 사람을 심판할 수 있습니까?
율법으로 심판 할 수 있는 사람은 율법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사람입니다.
율법에 빚지거나 흠이 없는, 죄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에서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고 옳고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율법의 기능은 죄지은 자를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죄를 지으면 징계를 받으니 죄를 짓지 말라고 주신 것입니다.
율법의 첫째 존재 목적은 죄를 짓지 않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혹 실수로 죄를 지었더라도 돌이켜 회개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신 것은, 당시 심판의 도구로 왜곡되었던 율법의 본래 기능의 회복을 선언하신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본래 타인의 죄를 정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돌아보라고 주신 것임을 상기시키신 것입니다.
여러분, 율법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여 심판자가 되면 ‘죄의 자녀’가 됩니다.
율법을 나 자신에게 적용하여 회개하는 자가 되면 ‘의의 자녀’가 됩니다.

더욱이, 오늘 본문에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율법을 이용하여 악을 저질렀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율법을 머리로만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기능만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심판자가 되었고, 죄의 자녀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유대인들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머리에서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시기 위해 감람산으로 가셨듯이, 우리도 머리로 이해한 이 모든 교훈들을 마음에 담기 위해 하나님과의 은밀한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머리로 이해한 이 교훈을 마음으로 적용할 때, 그것이 바로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설교 서두에도 말씀드렸지만 ‘마음’이라는 헬라어 ‘카르디아’는 ‘영적생명의 중심자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적생명의 중심자리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간음과 정죄의 문제라기보다는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느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마다 늘 홀로 감람산에 가셨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머리에서 마음으로’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음으로 ‘영적생명의 중심자리’인 마음속에 생명의 말씀을 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음행한 여자와 그녀를 정죄한 사람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만 이해했지 마음으로 깨닫지 못했기에 자신들이 큰 죄 가운데 있었음에도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하나님을 마음으로 믿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가슴이 뛰고, 우리의 삶의 호흡에 새 생명이 있게 하시고 기쁨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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