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2.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3.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나이다
4.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5.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6.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7.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
8.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9.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12.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베스도를 통해 법과 여론, 양심과 체면, 공의와 자신의 이익 사이에서 저울질하는 ‘진리를 모르는 법의 한계’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늪에 빠진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늪 밖에 있는 누군가’가 도와줘야 하듯이, 죄에 빠진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가 없는 다른 존재’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에 대하여 상고했습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물질과 권력으로 성도들을 압도하고 주눅 들게 만들려 하지만, 우리 마음에 살아계신 예수님의 복음이 있다면 바울처럼 세상의 어떤 권력자 앞에서도 비굴해질 이유가 없고, 오히려 우리의 삶을 가로막는 그러한 ‘모순의 자리’를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사명의 자리’로 바꿀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다섯 번째 변론으로 최후변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먼저, 2절 함께 읽습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여기에서 ‘다행히’라고 번역된 헬라어 ‘마카리오스 μακάριος’는 ‘축복된, 행복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지금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복음’에 대하여 해명하게 된 것을 “매우 큰 축복으로 여깁니다”라고 말한 것이 됩니다. 더욱이 이 단어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의 8복의 ‘복 μακάριος’과 같은 단어입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복음에 대하여 해명하게 된 것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큰 축복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바울이 당하고 있는 상황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는 도덕적인 타락과 근친상간의 죄악으로 백성들로부터 부도덕한 인물로 비난을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에 반해 바울은 정직하고 겸손하며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거룩한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누가 피고이고 누가 재판관이어야 합니까? 당연히 아그립바 왕이 피고요, 바울이 재판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상황은 정반대입니다. 더욱이 아그립바는 바울에게 변론할 기회를 주면서 마치 큰 은혜를 베풀며 허락하는 듯 교만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이러한 상황을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그립바 왕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왔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의 풍속과 성경의 전통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아그립바 왕에게 직접 복음에 대하여 증언할 수 있게 된 이 순간을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복된 시간, 은혜의 시간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참으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바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환경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상황이 억울하고 답답할지라도, 믿음의 눈을 들어 그 환경 너머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았습니다. 억울한 감옥의 자리, 오해받는 비난의 자리를 불평으로 신세 한탄하며 허송세월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자리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의 자리로 받아들였습니다.
여러분, 바울의 이러한 마음이 이해가 되십니까? 더 나아가 바울이 느끼는 이러한 행복을 경험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 행복을 맛보아야 참 성도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일을 시도해 보면,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이 일이 딱딱한 의무가 아닌 가장 행복한 일임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 바울의 이 마음을 품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3절부터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하여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 간증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먼저 5절에, 자신이 유대교에서도 가장 엄격한 종파인 ‘바리새파’에 속하였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라는 말은 곧 “나는 율법적으로 흠이 없다”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또한, 그는 오늘 본문뿐만 아니라 빌립보서 3:6에서도 자신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구원은 율법의 의로 흠이 없어서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 아무리 흠이 없는 것 같아도 결국에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구원받으려면 반드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죄 사함과 의롭게 하심이 없다면, 그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거룩한 척해도 그것은 겉모양일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36에 이어 7~9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내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그러므로 여러분,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훌륭하게 갖춘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가 행한 모든 선한 일은 자신에게 악한 영향력을 끼치게 될 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하지 않는 모든 일은 그 자신에게도, 그가 속한 사회에서도 부정적으로 작용할 뿐입니다.
우리가 우리 사회를 냉정히 살펴보면, 많이 배우지 못해서 문제입니까? 높은 위치에 올라서지 못해서 문제입니까? 그렇다면 왜 그렇게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이 문제를 일으킵니까? 부정부패의 근원적인 원인 제공자들은 다 많이 가진 기득권자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일 그들에게 예수님이 있다면 어떨까요?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운 다음에 지식을 쌓고, 그런 다음에 높은 자리에 오른다면 어떨까요? 오늘날 같은 사회 혼란이 있겠습니까? 그 높은 자리에서 아무런 죄의식 없이 사회에 해를 끼치는 그런 범죄를 자행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문제는 예수입니다. 그에게 예수가 있는가, 없는가가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기초가 된 사람만이 모두를 위하는 선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곱 귀신에 들려 정신적, 육체적으로 심각한 고통 속에서 살아가던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를 만난 후에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을 행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라의 반역자라고 손가락질을 받던 세리 마태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는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교회와 성도들 박해하던 율법주의자 사울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위대한 복음의 사도가 되었고, 갈릴리의 시골의 어부 시몬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한 번의 설교로 삼천 명의 사람을 변화시키는 교회의 반석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무장할 때, 그의 삶은 복의 통로가 되고, 사회와 국가에도 선한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제라도 세상의 지식을 배우기 전에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깊이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를 여러분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자녀들에게도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에게 세상의 학문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을 가르치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은혜, 사랑, 영광이 그들의 삶에서도 증거되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더욱 예수님을 알기에 힘쓰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를 통해 사람을 살리고 여러분의 가정과 이웃에게 화평을 선물하는 복음의 일꾼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마지막으로 9~12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회심하기 전에 지은 죄에 대하여 고백합니다.
이것은 22장에 이은 두 번째 고백입니다. 9장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건기록까지 합하면 똑같은 고백을 세 번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실 되도록 숨기고 싶을 자신의 과거 범죄 사실을 바울은 왜 이렇게 반복하여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있습니까? 또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왜 굳이 이것을 세 차례나 거듭하여 기록하고 있습니까?
이는 자기 죄에 대한 솔직한 고백은 고백하는 그 사람의 영혼을 소생하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죄를 짓고 은밀히 숨기면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까? 죄를 숨겼기 때문에 그 마음에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올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죄를 숨기면 보이지 않는 가운데 그 영혼이 병들어갑니다. 작은 죄라도 누구를 속이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괴롭게 됩니다. 그 죄를 숨기기 위해 계속해서 거짓말을 해야 하므로 더 많은 죄를 짓게 되고 더욱 괴로워집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오히려 죄가 밝혀졌을 때 “속이 시원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어보면 매우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죄는 숨길수록 편한 것이 아니라, 자백하고 공개할수록 마음이 편하고, 그 영혼이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도 시편 32:3-4에서 자신이 죄를 고백하지 않고 숨겼을 때, ‘뼈가 마르는 고통’ 속에서 지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다윗의 이 마음이 이해되십니까? 천하에 없는 사람이라도 일단 죄를 범하고 깊이 숨기려 하면 그 마음의 고통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그 죄책을 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이들도 생겨납니다.
하지만 반대로 큰 죄를 지었을지라도 그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게 되면 어떻습니까? 때로는 큰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괴롭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창피합니다. 하지만 괴롭고 부끄럽고 창피한 것을 넘어서서 세상에 그렇게 마음 편하고 행복한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이어지는 시편 32:5절에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라며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자기 죄에 대한 고백은 죄를 숨김으로써 오는 모든 마음의 고통과 괴로움을 치유하는 신기한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야고보서 5:16에서 “서로 죄를 고백하라”라고 가르칩니다. 이는 성경뿐만 아니라 현대 정신의학에서도 마음에 숨긴 죄나 억압된 감정을 숨김없이 말하는 데서 마음의 병이 치유될 수 있다고 합니다. 단 한 번이 아닌 여러 번 반복할수록 영혼은 더 건강하게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까? 또, 사람들에게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받으려고 합니까? 그런데 혹시,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용서받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더 많은 죄를 짓고 있지는 않습니까? 더 많은 오해와 담을 쌓음으로써 여러분의 영혼이 병들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부터, 하나님 앞이든 사람 앞이든 자기의 죄를 솔직히 고백함으로써 죄를 용서받음은 물론, 몸과 마음의 건강까지 회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교회와 성도들을 박해하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는 어찌하든지 한사람이라도 더 사랑하고 살리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희도 예수님을 가슴 깊이 영접함으로 사람을 살리되, 자신을 박해하고 멸시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예수님의 구원을 전하는 복음의 일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2.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3.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나이다
4.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5.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6.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7.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
8.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9.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12.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베스도를 통해 법과 여론, 양심과 체면, 공의와 자신의 이익 사이에서 저울질하는 ‘진리를 모르는 법의 한계’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늪에 빠진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늪 밖에 있는 누군가’가 도와줘야 하듯이, 죄에 빠진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가 없는 다른 존재’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에 대하여 상고했습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물질과 권력으로 성도들을 압도하고 주눅 들게 만들려 하지만, 우리 마음에 살아계신 예수님의 복음이 있다면 바울처럼 세상의 어떤 권력자 앞에서도 비굴해질 이유가 없고, 오히려 우리의 삶을 가로막는 그러한 ‘모순의 자리’를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사명의 자리’로 바꿀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다섯 번째 변론으로 최후변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먼저, 2절 함께 읽습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여기에서 ‘다행히’라고 번역된 헬라어 ‘마카리오스 μακάριος’는 ‘축복된, 행복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지금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복음’에 대하여 해명하게 된 것을 “매우 큰 축복으로 여깁니다”라고 말한 것이 됩니다. 더욱이 이 단어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의 8복의 ‘복 μακάριος’과 같은 단어입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복음에 대하여 해명하게 된 것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큰 축복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바울이 당하고 있는 상황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는 도덕적인 타락과 근친상간의 죄악으로 백성들로부터 부도덕한 인물로 비난을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에 반해 바울은 정직하고 겸손하며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거룩한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누가 피고이고 누가 재판관이어야 합니까? 당연히 아그립바 왕이 피고요, 바울이 재판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상황은 정반대입니다. 더욱이 아그립바는 바울에게 변론할 기회를 주면서 마치 큰 은혜를 베풀며 허락하는 듯 교만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이러한 상황을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그립바 왕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왔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의 풍속과 성경의 전통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아그립바 왕에게 직접 복음에 대하여 증언할 수 있게 된 이 순간을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복된 시간, 은혜의 시간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참으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바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환경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상황이 억울하고 답답할지라도, 믿음의 눈을 들어 그 환경 너머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았습니다. 억울한 감옥의 자리, 오해받는 비난의 자리를 불평으로 신세 한탄하며 허송세월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자리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의 자리로 받아들였습니다.
여러분, 바울의 이러한 마음이 이해가 되십니까? 더 나아가 바울이 느끼는 이러한 행복을 경험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 행복을 맛보아야 참 성도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일을 시도해 보면,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이 일이 딱딱한 의무가 아닌 가장 행복한 일임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 바울의 이 마음을 품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3절부터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하여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 간증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먼저 5절에, 자신이 유대교에서도 가장 엄격한 종파인 ‘바리새파’에 속하였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라는 말은 곧 “나는 율법적으로 흠이 없다”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또한, 그는 오늘 본문뿐만 아니라 빌립보서 3:6에서도 자신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구원은 율법의 의로 흠이 없어서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 아무리 흠이 없는 것 같아도 결국에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구원받으려면 반드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죄 사함과 의롭게 하심이 없다면, 그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거룩한 척해도 그것은 겉모양일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36에 이어 7~9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내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그러므로 여러분,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훌륭하게 갖춘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가 행한 모든 선한 일은 자신에게 악한 영향력을 끼치게 될 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하지 않는 모든 일은 그 자신에게도, 그가 속한 사회에서도 부정적으로 작용할 뿐입니다.
우리가 우리 사회를 냉정히 살펴보면, 많이 배우지 못해서 문제입니까? 높은 위치에 올라서지 못해서 문제입니까? 그렇다면 왜 그렇게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이 문제를 일으킵니까? 부정부패의 근원적인 원인 제공자들은 다 많이 가진 기득권자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일 그들에게 예수님이 있다면 어떨까요?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운 다음에 지식을 쌓고, 그런 다음에 높은 자리에 오른다면 어떨까요? 오늘날 같은 사회 혼란이 있겠습니까? 그 높은 자리에서 아무런 죄의식 없이 사회에 해를 끼치는 그런 범죄를 자행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문제는 예수입니다. 그에게 예수가 있는가, 없는가가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기초가 된 사람만이 모두를 위하는 선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곱 귀신에 들려 정신적, 육체적으로 심각한 고통 속에서 살아가던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를 만난 후에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을 행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라의 반역자라고 손가락질을 받던 세리 마태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는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교회와 성도들 박해하던 율법주의자 사울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위대한 복음의 사도가 되었고, 갈릴리의 시골의 어부 시몬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한 번의 설교로 삼천 명의 사람을 변화시키는 교회의 반석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무장할 때, 그의 삶은 복의 통로가 되고, 사회와 국가에도 선한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제라도 세상의 지식을 배우기 전에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깊이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를 여러분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자녀들에게도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에게 세상의 학문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을 가르치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은혜, 사랑, 영광이 그들의 삶에서도 증거되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더욱 예수님을 알기에 힘쓰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를 통해 사람을 살리고 여러분의 가정과 이웃에게 화평을 선물하는 복음의 일꾼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마지막으로 9~12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회심하기 전에 지은 죄에 대하여 고백합니다.
이것은 22장에 이은 두 번째 고백입니다. 9장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건기록까지 합하면 똑같은 고백을 세 번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실 되도록 숨기고 싶을 자신의 과거 범죄 사실을 바울은 왜 이렇게 반복하여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있습니까? 또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왜 굳이 이것을 세 차례나 거듭하여 기록하고 있습니까?
이는 자기 죄에 대한 솔직한 고백은 고백하는 그 사람의 영혼을 소생하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죄를 짓고 은밀히 숨기면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까? 죄를 숨겼기 때문에 그 마음에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올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죄를 숨기면 보이지 않는 가운데 그 영혼이 병들어갑니다. 작은 죄라도 누구를 속이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괴롭게 됩니다. 그 죄를 숨기기 위해 계속해서 거짓말을 해야 하므로 더 많은 죄를 짓게 되고 더욱 괴로워집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오히려 죄가 밝혀졌을 때 “속이 시원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어보면 매우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죄는 숨길수록 편한 것이 아니라, 자백하고 공개할수록 마음이 편하고, 그 영혼이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도 시편 32:3-4에서 자신이 죄를 고백하지 않고 숨겼을 때, ‘뼈가 마르는 고통’ 속에서 지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다윗의 이 마음이 이해되십니까? 천하에 없는 사람이라도 일단 죄를 범하고 깊이 숨기려 하면 그 마음의 고통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그 죄책을 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이들도 생겨납니다.
하지만 반대로 큰 죄를 지었을지라도 그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게 되면 어떻습니까? 때로는 큰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괴롭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창피합니다. 하지만 괴롭고 부끄럽고 창피한 것을 넘어서서 세상에 그렇게 마음 편하고 행복한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이어지는 시편 32:5절에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라며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자기 죄에 대한 고백은 죄를 숨김으로써 오는 모든 마음의 고통과 괴로움을 치유하는 신기한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야고보서 5:16에서 “서로 죄를 고백하라”라고 가르칩니다. 이는 성경뿐만 아니라 현대 정신의학에서도 마음에 숨긴 죄나 억압된 감정을 숨김없이 말하는 데서 마음의 병이 치유될 수 있다고 합니다. 단 한 번이 아닌 여러 번 반복할수록 영혼은 더 건강하게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까? 또, 사람들에게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받으려고 합니까? 그런데 혹시,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용서받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더 많은 죄를 짓고 있지는 않습니까? 더 많은 오해와 담을 쌓음으로써 여러분의 영혼이 병들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부터, 하나님 앞이든 사람 앞이든 자기의 죄를 솔직히 고백함으로써 죄를 용서받음은 물론, 몸과 마음의 건강까지 회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교회와 성도들을 박해하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는 어찌하든지 한사람이라도 더 사랑하고 살리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희도 예수님을 가슴 깊이 영접함으로 사람을 살리되, 자신을 박해하고 멸시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예수님의 구원을 전하는 복음의 일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