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105. 아그립바 왕 앞에 선 바울1 (행 25:13-27)

우인택 목사
2026-07-26
조회수 126

13.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14.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이르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15.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16.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17. 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18.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19.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20. 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21.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22.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23.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24.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25.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
26. 그에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자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세웠나이다
27. 그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


  지금 우리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마지막 사건인 ‘바울이 로마에 가게 된 경위’에 대하여 상고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복음이 어떻게 하여 전 세계로 전해지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사실감 있는 증언으로 기록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를 거쳐 소아시아와 유럽까지 어떻게 해서 복음이 전해졌는지 상세하게 기록했고, 마지막 부분에 당시 세계의 중심지였던 로마에 복음이 전해지기까지 일어났던 일들을 긴 지면을 이용하여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우리는 지난 주일에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며 불의한 타협을 시도했던 신임 총독 베스도와 그의 타협안을 단호하게 거절하며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외쳤던 사도 바울의 신앙적 결단에 대하여 상고했습니다. 로마시민인 바울이 로마 황제에게 상소함에 따라, 베스도는 바울의 상소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이로써 바울을 로마로 보내시겠다던 예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기를 기다리던 중에 일어난 또 하나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 분봉 왕이었던 아그립바가 신임 총독 베스도의 부임을 축하하기 위해 가이사랴를 방문했고, 이에 베스도는 바울의 문제를 아그립바 왕에게 상의했습니다. 그러자 아그립바 왕은 바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직접 듣고 싶다고 요청했습니다. 오늘 본문부터 26장까지 이어지는 아그립바와 바울과의 대화를 ‘아그립바 왕 앞에 선 바울’이라는 제목으로 세 번에 나누어 상고하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입니다. 이 일은 바울이 로마에 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1. 먼저, 13절 함께 읽습니다.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본문의 아그립바 왕은 아그립바 2세로, 사도행전 12장에서 사도 야고보를 처형한 헤롯 아그립바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와 동행한 버니게는 그의 여동생이자, 전임 총독 벨릭스의 아내 드루실라의 언니였습니다. 유다의 마지막 왕이었던 아그립바는 부도덕한 인물로 악명 높았으나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유대교의 문제를 의논할 수 있는 유력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베스도가 그에게 바울 문제를 상의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듯이, 로마제국의 법에는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이 지방 재판에서 불복할 경우 황제에게 직접 재판을 청구할 수 있는 ‘황제 상소권’이 있었습니다. 특히, 형사 재판에서 지방 총독의 판결에 불복하는 경우 황제의 재판을 청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상소가 이루어지면 어떤 경우에도 상소를 중단할 수 없도록 법으로 엄격하게 정해져 있었습니다. 상소한 사람은 반드시 로마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베스도는 ‘정의’와 ‘자신의 이익’ 사이에서 이리저리 저울질하다가 로마시민인 바울이 ‘황제 상소권’을 요청함으로써, 그는 더이상 유대인들을 달랠 기회를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바울을 로마에 보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깊은 걱정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총독이 황제에게 상소하는 죄수를 보낼 때는 그 사건의 전모와 그의 죄목을 기록한 조서를 함께 보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혐의가 없었습니다. 분명한 죄목도 없는 사람을 로마 황제 앞에 세우는 것은 로마의 법 정신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황제에게 무능하다고 문책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베스도는 26~27절에 기록된 것처럼, 전임 총독들이 유대인의 풍습과 신앙을 잘 알고 있었던 유대의 유력자들과 상의하여 황제에게 올릴 조서를 작성한 관례에 따라, 자신도 아그립바 왕과 상의하여 조서를 작성하려고 했습니다. 사건의 전말이 종교에 관한 사건이니까 아그립바 왕에게 재판을 받게 하면 민심도 추스르고 법도 바르게 세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가 가진 ‘공의의 한계’를 드러낸 판단이었습니다. 죄가 없으면 석방해야 하는데, 좋은 법이 있음에도 법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과 다르다고 하여 악의적으로 바울을 죽이려 하는 유대인들의 여론을 계산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오늘 본문의 베스도는 ‘진리를 모르는 정의’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론과 법, 양심과 체면, 자신의 이익 등 이런 것들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머뭇거린 전형적인 ‘진리를 모르는 법의 한계’를 나타내는 것이 바로 베스도, 곧 세상의 법정입니다. 

  그러하기에 여러분, 억울한 일에 대한 바른 판단이 필요할 때 그 일을 법에 맡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법은 결코 공의롭지 않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있듯이, 법은 언제나 힘 있는 사람의 편으로 기웁니다. 아주 가끔은 공의의 편에 서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를 만나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든 판단을 하나님의 법에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공의에 여러분의 삶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시면 바울을 선한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도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2. 이어지는 18~19절 함께 읽습니다.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오늘 본문의 내용은 앞에서 다 살펴본 것입니다. 그럼에도 생각해 볼 것이 있다면, “바울이 주장한 것의 핵심이 무엇이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19절에 기록된 것처럼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셨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바울이 유대교와 충돌을 일으키게 된 것은 다른 데 있지 않았습니다. 단 한 가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모세의 율법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들의 예언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행 24:14).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제외하면 유대교의 주장과 바울의 주장 사이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가 있고 없음에 따라서 기독교에는 구원이 있는 반면, 유대교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전도하다가 받는 가장 많은 질문은 ‘왜 기독교만을 믿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하느냐?’고 묻습니다. ‘종교는 다 같은 것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와 기독교가 다른 점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어떤 종교든 정성으로 믿으면 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우리는 이에 대한 답, 곧 왜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는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기독교도 인간의 관점에서 본다면 여타 종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어떤 종교든지 나름대로의 예배의식이 있습니다. 제물을 바치는 것이나 어떤 의식을 행하는 것은 모든 종교의 공통적인 요소입니다. 또, 대부분의 종교는 구원을 가르치고 선한 행위를 가르칩니다. 

  이렇게만 본다면 기독교도 다른 종교와 다를 것이 없는 여러 종교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산 정상에 올라가는 길은 여러 개가 있듯이,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로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 주장은 참으로 솔깃한 주장입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더이상 종교 간의 갈등이 나타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서로 공존하며 연합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독교와 다른 종교 간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는 이유입니다. 성경은 전도서 3:11에서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본능적으로 영원히 사는 것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그런데 인류의 조상 아담 이후로 세상에 죄가 들어와서 사람들은 죄에 빠져 영원한 삶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영원한 삶의 회복을 꿈꾸며 각각의 지혜와 상상을 따라 죄에서 구원받아 영원한 삶을 누릴 여러 가지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구원의 방법도 제시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 힘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존재입니다. 늪에 빠진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듯이, 죄에 빠진 사람도 자기 힘으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늪에 빠진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늪 밖에 있는 누군가’가 도와줘야 하듯이, 죄에 빠진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가 없는 다른 존재’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죄에 빠지지 않은 누군가가 구원의 줄을 던져줘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구원의 줄이 바로 기독교가 구원의 방법으로 제시하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런데 죄인을 구하기 위해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들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신 사실을 입증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그 뜻대로 사는 자들을 구원하는 새로운 법을 세우시고 그것을 교회에 위임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여러분, 왜 꼭 기독교만 믿어야 합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기독교에만 구원의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왜 기독교만이 참 종교인지 묻는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대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23절 함께 읽습니다.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성경은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접견 장소에 들어오는 모습을 가리켜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크게 위엄을 갖추었다’라는 것은 화려한 왕의 예복과 값비싼 보석으로 온몸을 치장하고,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등장했음을 뜻합니다. 그들 곁에는 로마 군대의 핵심 지휘관들인 천부장들과 최고위층 권력자들이 둘러서서 위세를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이 자리는 세상의 권세와 화려함이 정점에 달한 자리였습니다. 

  반면, 베스도의 명령에 따라 그들 앞에 한 사람이 걸어 들어옵니다. 죄수의 쇠사슬에 묶여, 2년 동안의 감옥에 갇혀있음으로 인해 행색이 초라하기 그지없는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화려한 왕의 옷을 입은 아그립바와 쇠사슬에 묶인 죄수 바울의 외적인 대조는 참으로 극명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눈에 보이는 겉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영적인 실상은 어떠합니까?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는 도덕적인 타락과 근친상간의 죄악으로 얼룩진 불의한 인생들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적인 공허함과 내면의 불안함을 감추기 위해 화려한 옷과 권력과 외적인 위엄으로 포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바울로부터 직접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반면, 겉보기엔 초라한 죄수였던 바울의 내면에는 온 천하를 주관하시는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부활의 소망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진정한 위엄은 아그립바 왕이 아니라, 쇠사슬에 묶였으나 당당한 사명자 바울에게 있었습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물질과 권력의 크기로 성도들을 압도하고 주눅 들게 만들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 살아계신 예수님의 복음이 있다면, 바울처럼 세상 어떤 왕 앞에서도 비굴해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허탄한 위엄 앞에 당당하게 믿음의 정체성을 지켜내시기 바랍니다. 초라하게 쇠사슬에 묶여 있었으나, 온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의 특사로서 왕들 앞에 당당히 섰던 바울처럼, 여러분들도 세상의 외적인 위엄에 주눅 들지 말고 복음의 능력으로 당당하게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삶의 가로막힌 모든 ‘모순의 자리’를 도리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최고의 ‘사명의 자리’로 바꾸어 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세상 사람들이 화려한 옷을 입고 크게 위엄을 갖추어 성도를 압도하려 할지라도, 그 내면은 복음을 알지 못해 공허하며, 자신들의 모순 속에 갇혀있는 어리석은 실체임을 보게 하시니 감사하옵나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권세 앞에 우리의 겉모습은 쇠사슬에 묶인 바울처럼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우리 안에 온 세상을 살리는 예수님의 생명이 있음을 기억하며 당당하게 서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위대한 절대 주권을 신뢰하며 주신 사명의 자리를 묵묵히 지켜내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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