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2.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3.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4.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5.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6.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7.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8.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9.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10.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오늘은 ‘삼위일체주일’입니다. ‘삼위’란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세 위격’으로 존재하심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성부 하나님’,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성자 예수님’, 오순절에 이 땅에 강림하셔서 우리의 구원을 지켜주시는 ‘성령 하나님’, 이 세분을 ‘삼위’라고 합니다. 근본은 ‘한 분 하나님’이시지만, 성도의 삶에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세 분의 모습으로 역사하시기에 정통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신앙고백합니다.
그리고 삼위일체주일은 교회력을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지난 주일인 성령강림주일로 교회력의 전반기를 마치고, 오늘 삼위일체주일을 기점으로 새롭게 후반기를 시작함으로써, 남은 반년을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 아래에서 성도다운 삶을 살기를 결단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 ‘참된 성도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깊이 돌아보고, 하반기에는 더욱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먼저, 1절 함께 읽습니다.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여기에서의 ‘공회’는 ‘산헤드린 공회’를 가리킵니다. 당시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 사회의 정치, 법률, 종교를 모두 관장했던 최고 의결기관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대법원, 국회, 그리고 종교의 총회 역할을 하나로 합쳐놓은 막강한 권력 집단이었습니다.
산헤드린이 공회는 의장인 대제사장을 제외하고 70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구성원은 사두개파, 바리새파, 백성의 장로들, 이렇게 세 부류였습니다. 이 중에서 사두개파는 대제사장들과 제사장 가문으로 당시 성전 권력을 쥐고 있던 현실주의적이고 정치적인 귀족층이었고, 바리새파는 율법 학자, 서기관들로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종교 및 율법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백성의 장로들은 유대 사회의 명망 있는 원로와 가문의 수장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평소, 서로 교리도 다르고 정치적 입장도 달라 자주 대립했지만 자신들의 기득권을 흔드는 존재가 나타나면 이상하리만큼 하나로 뭉쳤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초대교회를 박해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집단이 산헤드린 공회였습니다.
1) 본문을 보시면, 바울은 변론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2절 함께 읽습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바울은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반발에 부딪혀 변론의 시작부터 감정적인 대립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3~4절에 바울은 아나니아가 대제사장인줄 모르고 비난했다가 공회원들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이에 5절에 바울은 자신의 실수를 솔직히 인정하고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라는 출애굽기 22:28의 말씀을 인용하여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습니다. 주의 종은 주님께서 친히 다스리시기 때문에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을 자신에게 적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바울뿐만 아니라 구약성경 ‘사무엘하’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진정으로 믿고 지켰던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다윗입니다. 다윗은 악한 사울 왕이 부당하게 자신을 박해하고 죽이려 했을 때, 사울 왕을 죽일 결정적인 기회가 두 번이나 주어졌었지만, 그 기회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운 왕을 헤칠 수가 없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인정한 다윗을 향해 ‘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큰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이 땅의 많은 성도들이 종교적인 교만에 빠져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을 자기 마음대로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종이 어떤 실수나 잘못을 하게 되면 그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정죄하고 치리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세상 법정에까지 고소 고발을 합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분란과 다툼에 빠져 요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을 그 어떤 경우에도 용서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 하나님께서 공의의 심판자로 악한 종을 친히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1절에서 바울은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라고 고백하는데, 여기에서 ‘하나님을 섬겼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예배드리고, 기도드리고, 교회를 섬기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마땅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잘못된 신앙관에 빠져 사는 유대인들에게 그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바울의 일생을 보면, 그의 고백이 조금의 과장됨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것과 동시에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했기에 그는 성도들을 향해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라고 까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고전 11:1). 여러분, 신구약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진정한 신앙은 예배와 기도는 물론, 성도로서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임을 꼭 기억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믿음은 삶 그 자체입니다.
2) 그러나 바울과는 달리 아나니아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종이었음에도 잔인함과 탐욕과 부패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는 3절에 바울의 비난대로 ‘회칠한 담’, 곧 위선자라는 비난을 받아 마땅한 자였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이자 산헤드린의 의장이자 재판장으로서 바울을 율법대로 재판한다고 하면서도 죄가 밝혀질 때까지 피고의 권리를 보호해 주고 죄인 취급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아나니아를 향해 ‘회칠한 담’이라고 한 것은 외적으로 경건을 가장하여 자신의 악의를 주도면밀하게 감추는 그의 겉과 속이 다른 면을 지적한 것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부정축재와 폭력과 암살을 일삼는 악한 자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 10년간 대제사장직을 맡으면서 난폭하고 거만했으며, 친 로마 정책을 폈는데, 그 결과 AD 70년 유대 독립전쟁 때 군중들에게 붙잡혀 비참하게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본문에 기록된 바울과 아나니아의 대조되는 모습은 종교적인 지위가 올바른 삶을 살도록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진실한 신앙을 가진 자만이 온전한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음을 교훈합니다. 아무리 권력과 지식으로 치장해도 그 인격은 연단되지 않으면 그저 회칠한 무덤처럼, 그것은 살아있는 듯하나 결국 시체가 누워있는 무덤과 같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아나니아의 교훈을 통해 구원은 오직 진실한 믿음으로만 받게 됨을 기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말씀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부활 논쟁입니다.
6절 함께 읽습니다.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바울이 공회원들 앞에서 대제사장을 비난한 것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사과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공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이상 복음을 전하기 힘듦을 깨닫고 공회원들간의 신학적인 대립을 이용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과 부활을 믿는 바리새인들 간에 신학적 논쟁을 유발시켜 공회를 해산시키게 만든 것입니다.
1)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율법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부했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에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소홀한 그들에게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라고 하시며 질책하셨습니다(마 23:28). 오늘날 성도 중에서 성경도 알고, 기도도 하고, 믿음이 있다 하면서도 봉사나, 전도나 희생이나 헌신이 없는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이라고 다 외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늘 마음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그가 바리새인일지라도 하나님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니고데모, 아리마대 요셉, 바울도 바리새인 입니다.
2) 또 한 부류인 사두개인에 대하여 알아보면, 당시 유대인들은 대부분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권력과 부를 가진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두개인이라고 불리는 그들은 제사장직을 독점하고 산헤드린을 장악한 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영혼도, 천사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철두철미한 세속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성도 중에서 기도나 말씀에는 별 관심이 없고, 합리적인 것을 따지고, 교회 중직자가 되어 군림하기를 좋아하고, 명함에 장로라는 직함을 찍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바로 사두개인과 같은 사람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특히, 사두개인은 예수님이 장차 큰 분란을 일으켜 로마인들의 감정을 자극하면 자신들이 누리는 제사장직과 부귀가 모두 사라질지 모른다고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데 주동자를 자처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주후 70년 로마인들이 성전을 파괴하고 제사장직을 없애자 그 자취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믿음이란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는 수단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3) 여러분, 이 둘을 비교해 보면, 바리새인은 믿음보다는 지식과 명예를 따르고, 사두개인은 부와 권력을 따른 종교인들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과 교리라는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바울이 ‘부활’을 이야기하자마자 본질을 잃어버리고 서로 자기만 옳다며 멱살을 잡고 싸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오늘날 수많은 성도들이 바리새인들처럼 정통 교리는 잘 알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부활의 산 소망을 가진 성도다운 사랑도, 생명력도 전혀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사두개인들처럼 입으로는 “주여 주여”하면서도, 실제로는 부활도 하나님의 나라도 없는 것처럼 오직 이 땅의 아파트 평수, 통장 잔고, 세상 성공에만 매달려 살아갑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이들과 같은 양극단의 치우침을 넘어선 ‘부활의 실제’를 붙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고, 우리 또한 영원한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을 확신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 신앙이 내 심장에 살아있을 때,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형식에 갇히지 않고, 사두개인처럼 이 땅의 것에 목매지 않으며, 세상의 어떤 고난 앞에서도 당당하게 승리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참된 부활 신앙이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3. 마지막으로 11절 함께 읽습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고난과 어려움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많은 예언의 말씀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가 너무 심하자 긴장하고 당혹한 상태에 있었을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 홀로 감옥에 갇히게 되자 인간적인 외로움과 두려움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이러할 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위로하시며 로마 선교에 대한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주님이 친히 지키시기에 아무도 해칠 수 없다는 말씀이 됩니다. 바울이 처한 환경이 비록 차가운 감옥일지라도,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로마를 향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했기에 이 말씀은 로마 선교의 비전을 품은 바울에게 매우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도 이러한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 음성을 사무엘이 들었고, 이사야가 들었고, 오늘 본문의 바울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인생의 지치고 어두운 밤을 지날 때마다, 나를 향한 사명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 땅을 통치하고 계심을 증거해야 합니다.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처럼 신앙을 왜곡하지 않고, 바울처럼 어떠한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는 담대한 신앙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삼위일체주일을 맞아, 새롭게 시작하는 하반기에는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처럼 눈앞의 현실만 바라보지 말고, 바울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로마의 비전’을 품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를 위해, 말씀과 기도와 선한 삶을 살기 위해 더욱 힘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사도 바울이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겼다” 고백한 것처럼, 저희도 선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종교적 형식주의와 세속주의에 빠져 서로 자기만 옳다고 싸우는 세상 속에서, 오직 부활의 산 소망을 품고 묵묵히 참된 신앙의 길을 걷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어두운 밤 중에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남은 하반기에도 복음의 일꾼으로서의 사명을 온전히 이루며 살아가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2.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3.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4.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5.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6.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7.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8.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9.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10.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오늘은 ‘삼위일체주일’입니다. ‘삼위’란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세 위격’으로 존재하심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성부 하나님’,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성자 예수님’, 오순절에 이 땅에 강림하셔서 우리의 구원을 지켜주시는 ‘성령 하나님’, 이 세분을 ‘삼위’라고 합니다. 근본은 ‘한 분 하나님’이시지만, 성도의 삶에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세 분의 모습으로 역사하시기에 정통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신앙고백합니다.
그리고 삼위일체주일은 교회력을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지난 주일인 성령강림주일로 교회력의 전반기를 마치고, 오늘 삼위일체주일을 기점으로 새롭게 후반기를 시작함으로써, 남은 반년을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 아래에서 성도다운 삶을 살기를 결단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 ‘참된 성도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깊이 돌아보고, 하반기에는 더욱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먼저, 1절 함께 읽습니다.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여기에서의 ‘공회’는 ‘산헤드린 공회’를 가리킵니다. 당시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 사회의 정치, 법률, 종교를 모두 관장했던 최고 의결기관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대법원, 국회, 그리고 종교의 총회 역할을 하나로 합쳐놓은 막강한 권력 집단이었습니다.
산헤드린이 공회는 의장인 대제사장을 제외하고 70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구성원은 사두개파, 바리새파, 백성의 장로들, 이렇게 세 부류였습니다. 이 중에서 사두개파는 대제사장들과 제사장 가문으로 당시 성전 권력을 쥐고 있던 현실주의적이고 정치적인 귀족층이었고, 바리새파는 율법 학자, 서기관들로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종교 및 율법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백성의 장로들은 유대 사회의 명망 있는 원로와 가문의 수장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평소, 서로 교리도 다르고 정치적 입장도 달라 자주 대립했지만 자신들의 기득권을 흔드는 존재가 나타나면 이상하리만큼 하나로 뭉쳤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초대교회를 박해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집단이 산헤드린 공회였습니다.
1) 본문을 보시면, 바울은 변론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2절 함께 읽습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바울은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반발에 부딪혀 변론의 시작부터 감정적인 대립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3~4절에 바울은 아나니아가 대제사장인줄 모르고 비난했다가 공회원들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이에 5절에 바울은 자신의 실수를 솔직히 인정하고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라는 출애굽기 22:28의 말씀을 인용하여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습니다. 주의 종은 주님께서 친히 다스리시기 때문에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을 자신에게 적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바울뿐만 아니라 구약성경 ‘사무엘하’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진정으로 믿고 지켰던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다윗입니다. 다윗은 악한 사울 왕이 부당하게 자신을 박해하고 죽이려 했을 때, 사울 왕을 죽일 결정적인 기회가 두 번이나 주어졌었지만, 그 기회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운 왕을 헤칠 수가 없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인정한 다윗을 향해 ‘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큰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이 땅의 많은 성도들이 종교적인 교만에 빠져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을 자기 마음대로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종이 어떤 실수나 잘못을 하게 되면 그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정죄하고 치리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세상 법정에까지 고소 고발을 합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분란과 다툼에 빠져 요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을 그 어떤 경우에도 용서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 하나님께서 공의의 심판자로 악한 종을 친히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1절에서 바울은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라고 고백하는데, 여기에서 ‘하나님을 섬겼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예배드리고, 기도드리고, 교회를 섬기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마땅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잘못된 신앙관에 빠져 사는 유대인들에게 그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바울의 일생을 보면, 그의 고백이 조금의 과장됨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것과 동시에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했기에 그는 성도들을 향해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라고 까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고전 11:1). 여러분, 신구약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진정한 신앙은 예배와 기도는 물론, 성도로서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임을 꼭 기억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믿음은 삶 그 자체입니다.
2) 그러나 바울과는 달리 아나니아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종이었음에도 잔인함과 탐욕과 부패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는 3절에 바울의 비난대로 ‘회칠한 담’, 곧 위선자라는 비난을 받아 마땅한 자였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이자 산헤드린의 의장이자 재판장으로서 바울을 율법대로 재판한다고 하면서도 죄가 밝혀질 때까지 피고의 권리를 보호해 주고 죄인 취급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아나니아를 향해 ‘회칠한 담’이라고 한 것은 외적으로 경건을 가장하여 자신의 악의를 주도면밀하게 감추는 그의 겉과 속이 다른 면을 지적한 것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부정축재와 폭력과 암살을 일삼는 악한 자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 10년간 대제사장직을 맡으면서 난폭하고 거만했으며, 친 로마 정책을 폈는데, 그 결과 AD 70년 유대 독립전쟁 때 군중들에게 붙잡혀 비참하게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본문에 기록된 바울과 아나니아의 대조되는 모습은 종교적인 지위가 올바른 삶을 살도록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진실한 신앙을 가진 자만이 온전한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음을 교훈합니다. 아무리 권력과 지식으로 치장해도 그 인격은 연단되지 않으면 그저 회칠한 무덤처럼, 그것은 살아있는 듯하나 결국 시체가 누워있는 무덤과 같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아나니아의 교훈을 통해 구원은 오직 진실한 믿음으로만 받게 됨을 기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말씀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부활 논쟁입니다.
6절 함께 읽습니다.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바울이 공회원들 앞에서 대제사장을 비난한 것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사과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공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이상 복음을 전하기 힘듦을 깨닫고 공회원들간의 신학적인 대립을 이용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과 부활을 믿는 바리새인들 간에 신학적 논쟁을 유발시켜 공회를 해산시키게 만든 것입니다.
1)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율법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부했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에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소홀한 그들에게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라고 하시며 질책하셨습니다(마 23:28). 오늘날 성도 중에서 성경도 알고, 기도도 하고, 믿음이 있다 하면서도 봉사나, 전도나 희생이나 헌신이 없는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이라고 다 외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늘 마음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그가 바리새인일지라도 하나님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니고데모, 아리마대 요셉, 바울도 바리새인 입니다.
2) 또 한 부류인 사두개인에 대하여 알아보면, 당시 유대인들은 대부분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권력과 부를 가진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두개인이라고 불리는 그들은 제사장직을 독점하고 산헤드린을 장악한 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영혼도, 천사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철두철미한 세속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성도 중에서 기도나 말씀에는 별 관심이 없고, 합리적인 것을 따지고, 교회 중직자가 되어 군림하기를 좋아하고, 명함에 장로라는 직함을 찍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바로 사두개인과 같은 사람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특히, 사두개인은 예수님이 장차 큰 분란을 일으켜 로마인들의 감정을 자극하면 자신들이 누리는 제사장직과 부귀가 모두 사라질지 모른다고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데 주동자를 자처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주후 70년 로마인들이 성전을 파괴하고 제사장직을 없애자 그 자취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믿음이란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는 수단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3) 여러분, 이 둘을 비교해 보면, 바리새인은 믿음보다는 지식과 명예를 따르고, 사두개인은 부와 권력을 따른 종교인들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과 교리라는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바울이 ‘부활’을 이야기하자마자 본질을 잃어버리고 서로 자기만 옳다며 멱살을 잡고 싸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오늘날 수많은 성도들이 바리새인들처럼 정통 교리는 잘 알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부활의 산 소망을 가진 성도다운 사랑도, 생명력도 전혀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사두개인들처럼 입으로는 “주여 주여”하면서도, 실제로는 부활도 하나님의 나라도 없는 것처럼 오직 이 땅의 아파트 평수, 통장 잔고, 세상 성공에만 매달려 살아갑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이들과 같은 양극단의 치우침을 넘어선 ‘부활의 실제’를 붙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고, 우리 또한 영원한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을 확신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 신앙이 내 심장에 살아있을 때,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형식에 갇히지 않고, 사두개인처럼 이 땅의 것에 목매지 않으며, 세상의 어떤 고난 앞에서도 당당하게 승리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참된 부활 신앙이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3. 마지막으로 11절 함께 읽습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고난과 어려움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많은 예언의 말씀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가 너무 심하자 긴장하고 당혹한 상태에 있었을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 홀로 감옥에 갇히게 되자 인간적인 외로움과 두려움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이러할 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위로하시며 로마 선교에 대한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주님이 친히 지키시기에 아무도 해칠 수 없다는 말씀이 됩니다. 바울이 처한 환경이 비록 차가운 감옥일지라도,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로마를 향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했기에 이 말씀은 로마 선교의 비전을 품은 바울에게 매우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도 이러한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 음성을 사무엘이 들었고, 이사야가 들었고, 오늘 본문의 바울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인생의 지치고 어두운 밤을 지날 때마다, 나를 향한 사명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 땅을 통치하고 계심을 증거해야 합니다.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처럼 신앙을 왜곡하지 않고, 바울처럼 어떠한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는 담대한 신앙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삼위일체주일을 맞아, 새롭게 시작하는 하반기에는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처럼 눈앞의 현실만 바라보지 말고, 바울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로마의 비전’을 품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를 위해, 말씀과 기도와 선한 삶을 살기 위해 더욱 힘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사도 바울이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겼다” 고백한 것처럼, 저희도 선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종교적 형식주의와 세속주의에 빠져 서로 자기만 옳다고 싸우는 세상 속에서, 오직 부활의 산 소망을 품고 묵묵히 참된 신앙의 길을 걷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어두운 밤 중에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남은 하반기에도 복음의 일꾼으로서의 사명을 온전히 이루며 살아가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