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지금 우리는 사도행전 1장부터 계속해서 복음 확산의 여정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여정 중에서 가장 극적인 전환점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전도의 문을 여시는 분이시지만, 종종 전도의 문을 닫으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 닫으심은 구원의 포기하심이 아니라, 또다른 인도하심입니다. 하나님은 때에 따라 구원의 순서를 변경하시기는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영혼 구원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은 이에 대한 말씀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이 우리 성도들의 절대적인 사명이지만,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지금 있는 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실 수도 있다고 말씀합니다.
1. 먼저, 6절 함께 읽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목숨을 걸고 전도 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전도 길이 막혔습니다. 더군다나 전도를 막는 이는 복음을 박해하는 로마제국이나 유대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성령께서 전도를 막으셨습니다. 이때 바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여러분이라면 이러할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보다” 하고 포기하시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브루기아와 갈라디아를 거쳐 7절에,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수의 영이 가로막았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포기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향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복음을 전하는 일은 그 어떤 경우에도 멈출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혔을 때도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많은 서신을 써서 성도들에게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쓴 에베소서 6:19에는 성도들에게 자신이 감옥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을 열어 복음을 담대히 증거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간절히 요청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항상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복음 전하는 데 온 힘을 다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일은 어떠한 경우라도 포기해서는 안 되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왜, 오늘날에는 복음 전도가 제대로 되지 않습니까? 제가 청년 때까지만 해도 복음 전도에 대한 열정이 살아 있었습니다. 전도부흥집회가 계절마다 있었고, 부흥사경회 때는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엔가 이러한 것들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복음은 전해도 그만, 전하지 않아도 그만인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전하다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포기하는 것이 일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생명처럼 세웠던 철칙들이 오늘 우리 대에서 무너져 버렸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 시대 교회의 가장 급선무는 복음의 열정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에서, 우리의 의식에서 다시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사도행전의 복음행진이 우리를 통해 다시 계속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성령 충만 은혜 충만 받아 복음 전도의 열정을 다시 회복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7~8절 함께 읽습니다.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을 느낀 바울이,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장소를 옮겨가며 복음을 전하려고 한 이유는 지금 자신이 헹하고자 하는 제2차 전도여행은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기도하며 준비한 사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전도할 수 없도록 막으셨습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어떤 방식으로 전도할 수 없는 상황이 되도록 하셨는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에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이 추측하기를, 어떤 신학자들은 성령의 환상을 보았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유대인들의 거센 박해로 인해 전도할 수 없었다고 추측합니다. 또, 어떤 신학자들은 바울이 ‘사탄의 가시’라고 부르는 중병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추측합니다. 그 근거로 10절에 ‘의사 누가’가 ‘우리’라고 표현하며 등장하는 것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추측일 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전도는 바울에게 있어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명이었습니다. 그러했기에 그는 제1차 전도여행 때 유대인들의 박해로 돌에 맞아 죽을 뻔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 성에 들어가 전도에 최선을 다했고, 그를 통해 많은 구원의 열매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성령의 방해로 인해 도무지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전도나 봉사나 구제 같은 일을 아무 때나 우리 마음이 내키면 언제든지 할 수 있을 줄로 여깁니다. 하나님의 일이니까 우리가 희생하는 마음만 가지면 될 줄로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어도 성령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전도도 성령님의 인도와 도우심이 있어야 가능하고, 교회에 대한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 또한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구제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은 성령을 따라 행하고 그 도우심을 힘입어 사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와 도우시는 은혜가 있어야만 예배도, 전도도, 봉사도, 기도도, 구제도 기쁨으로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바울의 경우처럼 종종 성도들의 길을 막으실 때가 있습니다. 온몸과 마음을 다 바쳐 열심히 선교하고, 봉사하는데도 열매 맺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왠지, 하나님께서 막으시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일을 하는데 너무 많은 장애가 연달아 생길 때가 있습니다. 또, 일을 하면서 마음의 평안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또, 여러 믿음의 사람이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냐고 충고할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를 만나면 무리하게 일을 추진할 것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하여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기도로 무릎 꿇고, 만일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그 일에 대한 계획이 너무도 분명하고 또 계획을 추진할 강력한 의지가 있다고 해도 중단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나님께서 막으실 때는 멈추는 것이 최선이요, 순종하는 것이 지혜로운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 막으시는데도 억지로 그 길로 가려 하는 것만큼 미련한 행동은 없습니다. 믿음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중에는 어떤 일이든지 믿음으로 밀어붙이면 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생각이나 행동은 겉으로만 보면 매우 믿음이 좋은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은 마가복음 9:23에서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서의 ‘믿음’이란 자기만의 일방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자기 확신이 아닙니다.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지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믿음은, 정상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신념은 될 수 있어도, 믿음은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우리가 믿는다고, 모든 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믿습니다’하고 물 위를 걸으면 빠지고 맙니다. ‘믿습니다’ 하고 독을 마시면 죽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언제나 만능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막으시는데도 억지로 그 길을 가려 하는 것은 미련한 일이요, 만용입니다. 우리가 계획하고 일을 추진하면서 언제든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믿음을 도깨비 방망이와 같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내 계획이 아무리 훌륭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그 일을 중단하고 계획을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야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 이러한 순종의 믿음을 지니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9절 함께 읽습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은 환상 중에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호소하는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이 호소는 영혼 구원의 호소입니다. 자기들에게 와서 구원의 복음을 전해 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바울과 같이 이렇게 구원을 간절히 소망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구원을 부르짖는 영혼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들의 음성을 듣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10절 함께 읽습니다.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6절의 ‘성령’으로부터 7절의 ‘예수의 영’을 거쳐 10절의 ‘하나님’으로 호칭이 변화해 가고 있는 것은 단순한 표현 방식의 변화라기보다는 삼위일체 신앙이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뿐만 아니라 성자 하나님 성부 하나님께서 함께 인도하십니다.
이처럼 꿈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바울은 마게도냐로 건너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하고 즉시 마게도냐로 떠났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순종의 모범입니다. 순종은 언제나 즉각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머뭇거린다면 그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지체된 순종은 엄밀하게 말하면 불순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될 때 즉각 순종할 수 있는 참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 바울처럼 하나님의 동역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의 일을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실 때가 있음을 오늘 본문에서 보았습니다. 저희도 복음에 열정을 갖되 바울처럼, 자신의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열정을 갖게 하여 주옵소서. 성령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복음의 일꾼으로서의 걸음을 내딛는 참된 증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지금 우리는 사도행전 1장부터 계속해서 복음 확산의 여정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여정 중에서 가장 극적인 전환점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전도의 문을 여시는 분이시지만, 종종 전도의 문을 닫으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 닫으심은 구원의 포기하심이 아니라, 또다른 인도하심입니다. 하나님은 때에 따라 구원의 순서를 변경하시기는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영혼 구원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은 이에 대한 말씀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이 우리 성도들의 절대적인 사명이지만,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지금 있는 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실 수도 있다고 말씀합니다.
1. 먼저, 6절 함께 읽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목숨을 걸고 전도 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전도 길이 막혔습니다. 더군다나 전도를 막는 이는 복음을 박해하는 로마제국이나 유대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성령께서 전도를 막으셨습니다. 이때 바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여러분이라면 이러할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보다” 하고 포기하시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브루기아와 갈라디아를 거쳐 7절에,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수의 영이 가로막았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포기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향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복음을 전하는 일은 그 어떤 경우에도 멈출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혔을 때도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많은 서신을 써서 성도들에게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쓴 에베소서 6:19에는 성도들에게 자신이 감옥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을 열어 복음을 담대히 증거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간절히 요청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항상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복음 전하는 데 온 힘을 다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일은 어떠한 경우라도 포기해서는 안 되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왜, 오늘날에는 복음 전도가 제대로 되지 않습니까? 제가 청년 때까지만 해도 복음 전도에 대한 열정이 살아 있었습니다. 전도부흥집회가 계절마다 있었고, 부흥사경회 때는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엔가 이러한 것들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복음은 전해도 그만, 전하지 않아도 그만인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전하다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포기하는 것이 일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생명처럼 세웠던 철칙들이 오늘 우리 대에서 무너져 버렸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 시대 교회의 가장 급선무는 복음의 열정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에서, 우리의 의식에서 다시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사도행전의 복음행진이 우리를 통해 다시 계속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성령 충만 은혜 충만 받아 복음 전도의 열정을 다시 회복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7~8절 함께 읽습니다.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을 느낀 바울이,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장소를 옮겨가며 복음을 전하려고 한 이유는 지금 자신이 헹하고자 하는 제2차 전도여행은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기도하며 준비한 사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전도할 수 없도록 막으셨습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어떤 방식으로 전도할 수 없는 상황이 되도록 하셨는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에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이 추측하기를, 어떤 신학자들은 성령의 환상을 보았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유대인들의 거센 박해로 인해 전도할 수 없었다고 추측합니다. 또, 어떤 신학자들은 바울이 ‘사탄의 가시’라고 부르는 중병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추측합니다. 그 근거로 10절에 ‘의사 누가’가 ‘우리’라고 표현하며 등장하는 것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추측일 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전도는 바울에게 있어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명이었습니다. 그러했기에 그는 제1차 전도여행 때 유대인들의 박해로 돌에 맞아 죽을 뻔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 성에 들어가 전도에 최선을 다했고, 그를 통해 많은 구원의 열매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성령의 방해로 인해 도무지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전도나 봉사나 구제 같은 일을 아무 때나 우리 마음이 내키면 언제든지 할 수 있을 줄로 여깁니다. 하나님의 일이니까 우리가 희생하는 마음만 가지면 될 줄로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어도 성령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전도도 성령님의 인도와 도우심이 있어야 가능하고, 교회에 대한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 또한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구제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은 성령을 따라 행하고 그 도우심을 힘입어 사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와 도우시는 은혜가 있어야만 예배도, 전도도, 봉사도, 기도도, 구제도 기쁨으로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바울의 경우처럼 종종 성도들의 길을 막으실 때가 있습니다. 온몸과 마음을 다 바쳐 열심히 선교하고, 봉사하는데도 열매 맺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왠지, 하나님께서 막으시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일을 하는데 너무 많은 장애가 연달아 생길 때가 있습니다. 또, 일을 하면서 마음의 평안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또, 여러 믿음의 사람이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냐고 충고할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를 만나면 무리하게 일을 추진할 것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하여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기도로 무릎 꿇고, 만일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그 일에 대한 계획이 너무도 분명하고 또 계획을 추진할 강력한 의지가 있다고 해도 중단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나님께서 막으실 때는 멈추는 것이 최선이요, 순종하는 것이 지혜로운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 막으시는데도 억지로 그 길로 가려 하는 것만큼 미련한 행동은 없습니다. 믿음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중에는 어떤 일이든지 믿음으로 밀어붙이면 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생각이나 행동은 겉으로만 보면 매우 믿음이 좋은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은 마가복음 9:23에서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서의 ‘믿음’이란 자기만의 일방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자기 확신이 아닙니다.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지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믿음은, 정상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신념은 될 수 있어도, 믿음은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우리가 믿는다고, 모든 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믿습니다’하고 물 위를 걸으면 빠지고 맙니다. ‘믿습니다’ 하고 독을 마시면 죽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언제나 만능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막으시는데도 억지로 그 길을 가려 하는 것은 미련한 일이요, 만용입니다. 우리가 계획하고 일을 추진하면서 언제든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믿음을 도깨비 방망이와 같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내 계획이 아무리 훌륭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그 일을 중단하고 계획을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야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 이러한 순종의 믿음을 지니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9절 함께 읽습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은 환상 중에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호소하는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이 호소는 영혼 구원의 호소입니다. 자기들에게 와서 구원의 복음을 전해 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바울과 같이 이렇게 구원을 간절히 소망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구원을 부르짖는 영혼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들의 음성을 듣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10절 함께 읽습니다.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6절의 ‘성령’으로부터 7절의 ‘예수의 영’을 거쳐 10절의 ‘하나님’으로 호칭이 변화해 가고 있는 것은 단순한 표현 방식의 변화라기보다는 삼위일체 신앙이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뿐만 아니라 성자 하나님 성부 하나님께서 함께 인도하십니다.
이처럼 꿈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바울은 마게도냐로 건너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하고 즉시 마게도냐로 떠났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순종의 모범입니다. 순종은 언제나 즉각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머뭇거린다면 그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지체된 순종은 엄밀하게 말하면 불순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될 때 즉각 순종할 수 있는 참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 바울처럼 하나님의 동역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의 일을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실 때가 있음을 오늘 본문에서 보았습니다. 저희도 복음에 열정을 갖되 바울처럼, 자신의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열정을 갖게 하여 주옵소서. 성령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복음의 일꾼으로서의 걸음을 내딛는 참된 증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